키워진 죄의식

사회화 비용

by 갈휘연

월말 김어준을 들었다.

죄책감을 가지고 살고있지 않다는 김어준의 말에

”씨발, 부럽네“가 육성으로 나왔다.


죄의식은 “사회화”를 뜻하는 다른말이기도 하다.

기독교에서는 “원죄”라 했고

사회에서는 “사회규범, 도덕, 윤리”라고도 한다.


나에게 부여되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의 책임에 대해 늘 나는 ”왜?!“를 달고 살았다.

그리고 거부할 수 있는 것은 온 힘을 다해 거부하며 살았다.

그렇게 내 네이쳐는 길들어지기를 거부하는 강한 드라이브를 언제나 가지고 있었다.


나도 늦은 밤 아무도 없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지 않는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지켜야 하는 것의 본질은 “사고가 나지 않게 하기 위한 약속“인데

차도, 사람도 없는 늦은 밤에 신호를 기다리는 게 너무 멍청해 보이기 때문.


하지만 김어준처럼 차가 많이 밀리니 명절에 부모를 찾지 않는 건 못한다.

아직도 비난이 두려워서다.


타고남은 대동소이한데 결과물이 다르다니.

네이쳐는 같은데 받쳐주는 힘이 부족했던 걸까.

원인이 불분명한 내 죄의식과 비난에 대한 두려움에 대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난 네이쳐는 김어준이랑 같은데

하다못해 명절이나 기념일챙기기 싫은 마음에도

왜 죄의식이 느껴질까?”

라는 내 질문에 유니콘이 답했다.


“모든 건 nature vs. nurture인데
네이쳐가 김어준이랑 비슷한데도 그런 죄의식이 느껴진다면
키워지길 달리 키워졌다는 증거겠지.”


아,

부럽다.

김어준.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