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사(凍死)

by 소로


서울역 13번 출구 앞엔 늘 노숙인들이 서로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잠에 든 모습을 볼 수 있다. 도처에는 먹다 남은 음식 봉투, 담배 꽁초, 신문지 따위들이 널브러져 있어 해가 밝은 아침나절에도 으슥한 기운이 감돈다. 오늘은 캐리어를 든 외국인 관광객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한 노숙인과 큰 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영어와 한국어를 서툴게 섞어 쓰고 여러가지 표정이나 몸짓을 보이며 매우 즐거워하고 있었다. 거리는 떠들썩했다. 오랜만에 반가운 손님을 맞이한듯 노숙인의 목소리와 몸짓에 활기가 가득했다. 그러는 그의 얼굴은 보통 사람같았다. 눈동자에 점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순간 나는 그 광경이 매우 낯설게 느껴지면서 그가 과연 노숙인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재차 그의 얼굴과 옷 차림새를 살펴보았다.

길 한 구석에 어느 노숙인이 담요를 뒤집어 쓰고 잠들어 있었는데 먼지가 가득 쌓인 큰 배낭과 보따리들이 마치 안락한 울타리처럼 그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는 언제부터 저 자리에 있던 것일까?

또 다른 이는 나무에 몸을 기대어 앉아있었다. 그는 허공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뒤로는 수많은 차들이 도로 위를 쌩쌩 달리고 있었다. 그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잊어버린 것 같다. 아니면 그의 자아는 동사(凍死)해버린 걸까. 어쩐지 그의 표정은 도리어 평온해 보이기까지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까만 누더기 천을 걸친 한 사람이 나를 향해 마주 걸어오고 있다. 그는 어깨에 낡고 오래된 검정색 가방을 메고 양 손엔 비닐 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와 몇 걸음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가 갑자기 횡설수설하며 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 심장이 그만 철렁하고 말았다.

나는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 노숙인은 나이도 많고 걸음걸이도 불편한 것을 보아 어차피 나를 쫓아오지 못할 것이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십 여년 전, 그날도 나는 그렇게 달리고 있었다. 인왕산 근처 내리막길에 다다르자 나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천천히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마을버스가 오르내리는 것과 벽돌로 된 집들이 쭉 이어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은 온통 고요했다. 뉴스에서는 연일 강추위를 예고하던 칼바람이 온몸을 파고 드는 한겨울의 날씨였다. 사람들이 따뜻한 실내에서 얼어붙은 몸을 녹일 때 나는 허전하게 입은 채 세 시간 째 길거리를 떠돌고 있었다. 그러는 편이 더 좋았다. 몸이 고통스러운 것 쯤이야 마음이 고통스러운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까.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던 날, 감정이 이미 동사(凍死)해버렸던 날, 한겨울의 추위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었다.

10월의 비가 내리고 있다.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이제 제법 쌀쌀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이제는 가물가물해져 추억처럼 흔적만이 남은 오래전의 그 날들. 뒤를 돌아보니 아까 전 그 노숙인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거리에는 젖은 은행잎들이 열매와 함께 지저분하게 뒤엉켜 사람들의 발걸음에 힘없이 채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