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문선 노무사 Jan 23. 2022

할머니와의 이별이 내겐 남긴 것

나의 아저씨를 역주행하며 보다가

이지안이 카트에 할머니를 태우고 가는 장면이 나와

생각이 났다. 우리 할머니 생각.

우리 할머니는 101세에 돌아가셨다.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6남매를 키워내신 위대한 우리 할머니.


그 세월을 겪어내며 버텨내느라고

할머니는 얼마나 악착같이 사셨을까.


그래도 되는데

평생을 늘 손에서 뭔가를 놓지 않고

걸레 한짝도 버리지 못하는

생활력이 강하다는 말로는 부족하고

알뜰하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되는 분이다.


그런 우리 할머니는 밭을 일구셨다.

할머니는 노는 땅을 그냥 두고 보지 못하셨다.


그래도 연세가 여든이 넘는데다가 

작고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는 마른 체구에

무리가 될 것이 뻔하니

가족들 모두하지말라고 하지말라고 

가진 수를 써서 말려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초등학생, 중학생으로 고만고만했던 우리 4남매는 학교끝나고 할머니를 찾으러 밭에 가는게 일과였다.


밭에 나가셨다가 걸을 기운이 없어

집에 못 오고 계실 것이 분명했으니까. 


아직 어렸던 우리 손주들의 등에는 업히지 않으려고 하셔서

경비아저씨한테 리어커를 빌려서 모셔오기도 하고

바퀴달린 책상의자에 태워서 모셔오기도 했다.


도시생활에서 보통의 풍경은 아니었기에

우리 가족들은 동네에서 좀 알려져 있었다.


이지안이 카트에 할머니를 싣고 갈때,

콘크리트 바닥에 카트를 끌고 가는 소리가

꼭 그 시절 바퀴달린 의자에 할머니를 앉히고

끌고 가던 그 소리같았다.


그 소리가 어린 나에게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동네사람들이 나랑 할머니만 쳐다볼 것만 같아

괜히 부끄러웠었다.


다신 안하고 싶어도

작은 우리 할머니가 힘들까봐,

힘들게 키운 자식이랑 손주가 나 몰라라 한다고 슬퍼할까봐 

그게 더 마음이 쓰였었다.


그렇게 할머니는 내가 첫 회사를 다닐 때까지

우리와 함께 지내셨다.


할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냐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서 할머니한테 잘해드려야지 다짐하며 지낸 것이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이별의 순간이 오니 심장이 뜯겨나가는 것 같이 아파서

두 발로 서기가 어려웠다.


할머니한테 맛있는 걸 사드리고 싶어도 할 수가 없고,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고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그 말을 들었으면 하는 사람이

더이상 이 세상에 없다.

잘한 것보다는 못한 것만 생각나고

바쁘다고 미루고 짜증냈던 못된 마음만 생각이 나서

한참 동안 자책이 되었고 아팠다.


그래서 다짐했다.


앞으로는...

지금, 여기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많이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해야지,

많이 웃어야지.

함께 있음에 감사해야지...


할머니는 마지막까지도 내게 유산을 물려주셨다.

아낌없이 다 주고도 끝까지...


오늘도 다시금 되새겨 본다.

지안 덕분에.


나의 아저씨, 나의 아저씨

보라고, 보라고 했는지 알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내 아이의 부자수업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