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 속 사랑에 관한 단상
2023년 5월 11일, 대통령은 코로나19 심각 경보를 해제하고 ‘엔데믹(endemic)’을 선언했다. 첫 코로나19 확진자 발생 이후 3년 4개월 만의 일이다. 대통령은 국민들이 일상을 찾게 돼 기쁘다고 밝혔다. 코로나19로 단절되었던 사람 간의 만남은 다시 회복되었고 바뀌었던 많은 일상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았다. 그러나 엔데믹 선언은 코로나19의 종식을 의미하지 않는다. 엔데믹은 ‘일상적 유행’ 즉, 변이가 주기적으로 나타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감염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야말로 위험사회의 도래라고 볼 수 있다. 엔데믹 시기, 우리는 어떻게 사랑하고 있을까? 또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울리히 벡은 그의 저서 <위험사회>에서 산업화·근대화가 현대인들에게 물질적 안정을 가져다주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성격의 위험을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 위험은 특정 지역이나 집단에 한정되지 않으며, 전 지구적 경향을 보인다. 그의 주장처럼 위험은 우리 삶 속에 상주하게 된다. 위험사회의 개념은 코로나19의 팬데믹-엔데믹 선언을 관통한다. 현대 사회의 모든 것은 빠르게 퍼져 나간다. 개인들은 불안해했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일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만남은 필수적이고, 전염병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은 일상이 된다. 수많은 개인의 불안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코로나로 인한 우울증 ‘코로나 블루’로, 감염자의 신상 털기로, 혹은 그 외 다양한 방식으로. 수 세기 전부터 전염병은 다른 양상과 흔적을 보이며 계속해서 사회에 필연적으로 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코로나19라는 강력하고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는 상시적으로 발생 가능한 재난의 불안을 다시금 사람들에게 상기시켰다.
누군가는 나서서 이를 해결해야 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 신, 심지어는 과학까지 그 어떤 것도 개인의 불안을 완벽하게 해소하지 못했다. 처음 보는 유형의 바이러스에 정부는 손쓸 새도 없이 수많은 감염자를 맞이해야 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감염자 수치는 결국 바이러스와 함께 살아가겠다는 엔데믹 선언으로 이어진다. 정부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종교 역시 개인의 불안을 해소하지 못했다. 생존하기 위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집단에 속하고 싶어한다. 종교적 신념 역시 역시 인간의 생존 본능에서 비롯된 믿음이다. 종교의 안정감과 공동체의식은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모여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행위로 인해 형성된다. 그러나 코로나 바이러스의 감염 위험으로 일정 인원 이상 모이지 못했다. 더구나 종교 모임이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의 주 원인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더 이상 종교에 기대기는 어려워졌다. 개인들은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을까?
국가와 사회, 종교에 대한 기대를 철회한 개인들은 ‘사랑’을 통해 불안을 해소하고자 했다. 울리히 벡은 위험 사회가 가속화되면 사랑이 새로운 종교가 된다고 이야기한다. 답답한 정부와 만날 수 없는 신을 떠나 개인들은 사랑으로 발길을 돌렸다. 종교가 된 사랑은 이념이 되고 결국 이데올로기가 된다. 팬데믹 시대 종교가 된 사랑은 어떤 양상을 가지고 있는가?
사랑을 종교라고 한다면 사랑을 다룬 콘텐츠들은 경전이 될 것이다. 특히 2020년 코로나19의 도래 이후 수많은 연애 예능이 등장했다. ‘나는 솔로(SOLO)’, ‘돌싱글즈’, ‘환승연애’, ‘솔로지옥’은 커다란 인기를 얻었고 사람들 화제의 중심에는 항상 연애프로그램이 있었다. 모든 사회적 접촉이 차단당한 상태에서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사랑을 향유했다. 사랑의 주체가 되어 직접 사랑을 수행하는 것과 만들어진 사랑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다르다. 미디어의 사랑은 항상 ‘정상성’을 추구한다. 미디어의 정상성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점에서 굉장히 기만적이다. 연애 프로그램만 해도 그렇다. 뛰어난 외모와 좋은 스펙을 가진 출연자가 등장한다. 남녀의 비율은 항상 1:1이다. 출연자들은 자신의 긍정적인 점을 어필하고, 서로의 어필이 마음에 든다면 몇 번의 데이트를 걸쳐 최종 선택을 한다. 준비된 이성-어필-선택의 단계는 모든 연애 프로그램에 적용되며 놀라울 만큼 순탄하다. 출연자의 ‘비정상적’ 행위는 패널에 의해 평가받는다. 출연자들의 행동을 시시각각 모니터링 하고 이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패널은 연애프로그램에서 출연자만큼 중요한 요소다. 현실에서 개인의 특성정도로 여겨졌을 법한 행동들은 미디어라는 엄격한 심판대 아래에서 커다란 죄로 부풀려진다. 시청자들은 패널에 이입해 미디어가 구현하는 정상성을 강화한다. 이처럼 패널 구조는 정상적인 연애를 끊임없이 강화하고 재생산한다.
완벽한 콘텐츠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현실에서의 사랑에 만족하지 못한다. 따라서 연애프로그램, 사랑을 다룬 영화와 드라마의 소비는 실제 사랑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21년 인구포럼 통계에 따르면 코로나19 이후 연인을 만나지 못했다는 청년은 78.1%에 달한다. 결혼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 결혼정보 회사에 의하면 과거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않아진 사람들은 10.2% 증가했다. 코로나19로 잠시 잊고 있던 현실 연애는 ‘하트 시그널’처럼 달달하지도, ‘환승 연애’처럼 절절하지도 않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비대면 문화의 발달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졌다는 사실과 언제 같은 사회적 재난이 반복될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역시 한몫 한다. 현실에서의 연애는 감정 소모가 큰 반면, 미디어에서 그린 사랑은 소위 ‘떠먹여주는 사랑’, 사랑의 긍정적 측면뿐이다.
위험사회 속 계속되는 불안 속에서 우리는 나름의 해소 방식을 찾아야 한다. 엔데믹 시대,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우리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사랑을 소비하는 것에서 멀어져야 한다. 사랑은 슈퍼마켓에 진열된 기성품이 아니다. 광고 속 이미지와 다르게 자그마한 하자가 있을 수도, 색이 조금 더 진할 수도 있다. 벡의 말처럼, 우리는 사랑을 현실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각자의 사랑법을 제조해야 한다. 사랑은 기성품이 아니라 수제품이다. 미디어가 만든 완벽한 사랑의 틀에서 벗어나 보자. 한 개인을 구성하는 요소는 굉장히 다양하다. 외모, 배경, 성별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관, 삶의 원리, 직업적인 사명감까지. 어쩌면 말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사랑을 온전히 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사랑의 다양한 모습을 수용하도록 연습해야 한다. 현실에서의 사랑은 연애 프로그램이 아니다. 개인의 배경은 번듯하지 않을 수도, 어필이 상대방에게 전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카메라가 아닌 현실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이기에, ‘off the record’의 모습을 항상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위험사회에서 재난의 불안을 항상 안고 있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