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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최초의 여왕 골퍼 – 메리 스튜어트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 (250218)

by 금삿갓

스코틀랜드의 메리 스튜어트(Mary Stuart : 1542~1587) 여왕은 45년간 매우 격동적인 삶을 단두대의 이슬로 마감한 비운의 여왕이다. 그러나 골프를 즐기는 필자 금삿갓의 입장에서 보면 500여 년 전에 여성의 신분으로 골프를 즐겼다는 것은 역사적인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녀는 일찍 골프를 배웠고, 프랑스 왕실로 시집을 가서 어린 시절부터 골프를 즐겼다. 프랑스 왕실의 일원으로서 군의 사관생도(Cadet)들이 그녀의 골프 클럽을 들고 다녔단다. 메리는 아마도 이 관행을 스코틀랜드로 가져왔을 것이고, 그런 연유에서 ‘캐디(Caddie)’라는 용어로 진화했을 것으로 본다. 영국의 전통적이고 유명한 세인트앤드류스 링크스 골프장은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지어졌으며, 그녀의 주문에 의하여 건설한 것으로 추정된다. 골프에 대한 여왕의 사랑이 그녀의 몰락에 기여한 많은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1567년에 그녀의 남편 Darnley 경이 살해당했고, 불과 몇 달 후 그녀는 핵심 용의자였던 Bothwell 백작과 결혼함으로써 당시 여왕이 암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추측이 많았다. 더구나 Mary 여왕이 살인 사건 후 며칠 만에 골프를 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는 소문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다.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소문이 부풀려져서 여왕이 남편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고 골프를 쳤다고 했다. 그러나 구교도 지지자인 여왕이 배우자가 죽은 지 며칠 만에 적절한 애도를 표하기보다는 골프를 치는 것을 선택했다는 사실에 가톨릭 교계가 경악하고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게 되었다.

금삿갓의 <18금 여성사>는 이번에는 세계 역사상 최연소 왕에 등극한 당시 유럽 왕실에서 엄청 주목을 받았던 메리 스튜어트 여왕을 살펴본다. 역사상 영국(England))과 스코틀랜드(Scotland)에는 3명의 메리 여왕이 있었다.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 영국 및 아일랜드 튜더 왕조의 4대 여왕인 메리 1세(Mary Tudor, 1516~1558)가 있고, 그다음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스코틀랜드 여왕인 스튜어트(1542~1587), 마지막이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여왕이 된 스튜어트의 고손녀(高孫女)인 메리 2세(Mary Stuart, 1662~1701)이다. 고조모와 고손녀가 이름이 똑같아서 헷갈리니까 고조모는 왕의 격에 맞지 않지만 이름과 성을 모두 붙여서 메리 스튜어트라 부르고, 고손녀는 메리 2세라 한다. 우리의 주인공인 너무 난잡하게 살다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져서 그런 대접을 받는 모양이다.

그녀는 아버지인 스코틀랜드 국왕 제임스 5세와 어머니인 프랑스 왕실 가문 출신의 마리 드 기즈 사이에서 2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난다. 아들인 제임스(1540)와 로버트(1541)는 태어난 지 두 돌도 되기 전에 모두 죽어버리자, 국왕의 책무 중 가장 중요한 임무인 후계자 생산을 위해 제임스 5세는 열일을 물리치고 오로지 야간 정무(政務)에 몰두한다. 매일 밤 쌍코피 터져가면서 침대 위의 정무를 본 끝에 일 년 만에 태어난 것이 메리이다. 너무 무리하게 혹사를 한 모양인지 메리가 태어난 지 6일 만에 제임스 5세가 세상을 떠나버린다. 그래서 그녀는 생후 1주일도 안 되어 최연소 스코틀랜드 여왕의 자리에 올랐다. 사람이나 말이나 핏줄을 잘 타고나야 된다. 그녀의 핏줄은 완전 왕족 혈통이다. 영국왕 헨리 7세의 딸인 그녀의 친할머니(Margaret Tudor)를 통해 영국 왕위의 계승권이 있으며, 6살 되던 해 프랑스의 황태자(프랑수아 2세)와 약혼함으로써 프랑스 왕비의 자격이 있었다. 사실 그 전인 2살 때 이미 영국왕 헨리 8세의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와 약혼 협정인 그리니치 조약을 체결하였기 때문에 영국 왕자비의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프랑스 출신 구교도이고, 영국은 신교도 또는 성공회가 주축이라서 섭정을 하던 엄마 마리 드 기즈에 의해서 영국과 파혼하고 프랑스와 약혼한 것이다.

그래서 마리는 여섯 살인 딸 메리를 자신의 고국인 프랑스로 보내 발루아-앙굴렘 왕실에서 양육하게 했다. 프랑스에 당도한 메리는 외할머니 앙투아네트 드 부르봉에게 의지하여 프랑스의 발루아-앙굴렘 궁정에서 양질의 교육을 받았다. 섬나라와 다른 우아한 궁정교육으로 그녀는 지적이고 예술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우아한 매력을 지닌 그녀를 왕세자인 약혼자 프랑수아 2세뿐만 아니라 프랑스 왕족 대부분과 궁정에 출입하는 예술가들 모두 사랑하여 찬미했다고 한다. 메리는 16세 때 프랑수아와 정식 결혼식을 올리고 왕세자비가 되었다. 시아버지인 앙리 2세가 1559년에 마창경기(馬槍競技)의 사고로 죽자, 남편 프랑수아 2세가 즉위하여 마침내 프랑스의 왕비가 되었다. 결혼 당시 남편은 그녀보다 2년 연하이고, 약골에 병치레를 자주 했다. 당시 그녀는 16살로 성장하였고, 키가 180cm로 요즘으로 쳐도 여자로서 매우 장신이었다. 미모도 당시 유럽 왕실에서 가장 돋보이는 미모였다고 전해진다. 이런 커플이 백년해로 하는 꼴을 잘 못 본다. 그녀는 왕비가 되자 노골적으로 고부 갈등을 연출했다. 시어머니는 카드린 드 메디시스로 이태리의 매디치가에서 시집와서 원래 왕족은 아니었다. 자기는 왕족이라서 시어머니를 “피렌체의 장사꾼” 정도로 비아냥 됐다.

여자는 남자보다 훨씬 더 조숙한데, 여자가 연상이니 프랑스 왕비가 되었지만 뭔가 일이 잘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왕이라는 남편은 병약하여 시들시들, 골골한 반면에 메리는 늘씬하게 쭉쭉빵빵, 우아함은 물론 시·음악·무용·사냥·골프 등등 다재다능(多才多能)하여 "프랑스 궁정의 꽃"으로 불리었다. 그러니 남성적 능력이 시시껄렁한 왕한테 별반 재미도 못 느꼈던 메리여왕은 왕과의 사이에 아무런 후사를 생산하지 못했다. 즉위한 지 1년 5개월 만에 남편이 그만 죽게 된다. 아들이라도 하나 생산했으면 세계 역사가 달라졌을 터인데, 하늘은 모든 걸 주지 않는 모양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아들이 있었다면 오늘날 영국과 프랑스는 한 나라일 것이다. 왜냐하면 메리는 영국의 왕위계승권이 있고, 스코틀랜드 현직 왕이다. 아들이 프랑스 왕이니까 아들이 스코틀랜드와 프랑스의 자동 왕이 되고,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후사가 없어서 본인의 왕위계승권이 아들에게 상속되므로 그가 또 영국 왕이 되기 때문이다. 그랬으면 모두 하나의 나라가 될 수도 있었다.

아무튼 남편이 죽고 아들·딸도 하나 없는 미망인이 프랑스 왕실에 남아 있을 명분이 없다. 더구나 시어머니를 박대했으니 소박맞을 게 뻔했다. 그녀는 고국인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여왕으로 등극(登極)한다. 18살에 청상과부(靑孀寡婦)가 된 거다. 우리나라 옛말에 청상과부는 수절(守節)한다는 말이 있지만, 서양에서 그건 말이 안 된다. 연하의 비실비실한 남편과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를 어떻게, 얼마나 읊었을지 아무도 모르지만, 이런 것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결혼 기간으로 봐서 남자의 맛을 알랑 말랑 하는 순간에 과부가 된 거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파리의 잘 나가는 시인·음악가·화가·철학자 등과 어울리며 사교계를 휘어잡았고, 사관생도들을 캐디로 데리고 다니면서 필드를 누비던 그녀가 아닌가. 늘씬한 키에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에게 당시 파리 사교계의 남자들은 모두 찬양의 노래를 부르면서 껄떡거리는 상황이었다. 고부간의 갈등으로 눈 밖에 난 며느리의 처사를 곱게 봐줄 시어머니는 없다. 남편 프랑스와 2세가 후사(後嗣) 없이 죽자, 왕위는 10살의 어린 시동생 샤를 9세에게 넘어갔다. 시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남편(앙리 2세)의 정부(情婦)였던 푸아티에로부터 권한을 빼앗아 섭정을 하게 되자 죽은 아들의 눈 밖에 난 며느리 메리 스튜어트를 스코틀랜드로 쫓아버린다. 그녀는 12척의 함대를 타고 돌아갔다. 한 척은 메리와 그녀의 시녀들을 태웠고, 두 번째는 그녀의 요리사, 하녀, 하인을 태웠다. 나머지 10척의 배에는 여왕의 소유물, 가구, 옷장, 보석, 애완동물, 45개의 침대를 포함한 가구가 실려 있었다.

마침 고국 스코틀랜드는 메리를 대신해 섭정하던 어머니 마리 드 기즈도 1560년에 숨졌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의 모든 신료들은 메리의 귀환을 요청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메리는 이제 스코틀랜드를 독자적으로 통치하여야 했다. 하지만 당시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종교적으로 매우 혼란한 상태였다. 가톨릭과 종교개혁파들의 대립이 격화되고, 개신교의 힘이 우위를 점하였다. 잉글랜드도 엘리자베스 1세 통치 하에 개신교로 전환된 후였다. 메리는 어머니 쪽 가문이 독실한 가톨릭이라서 파란만장한 정치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실질적인 개신교 국가에서 가톨릭 군주로 즉위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고립된 처지였다. 더군다나 메리는 6세 때부터 13년 동안이나 프랑스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스코틀랜드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실상 프랑스인이었다. 그런 탓에 프랑스어와 라틴어는 구사했으나 정작 모국어였던 스코트어와 게일어는 아예 못했다. 그리고 풍요롭고 우아한 르네상스식 고급문화가 발달했던 프랑스 발루아-앙굴렘 왕실에서 자랐던 메리는 척박하고 음침한 날씨에 문화적으로도 엄숙주의가 대세였던 스코틀랜드의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특히 이 시절의 스코틀랜드는 금욕적인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회화·조각·거대 건축물 등 눈에 보이는 형상을 아예 우상이라며 배척하던 분위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이질감이 심했다.

종교 간의 갈등과 귀족 집단의 압박 등으로 마음 둘 곳 없던 메리는 파리에서의 생활이 그리웠다, 그래서 되도록 시인이나 화가 등 예술가들을 자신의 주위로 불러 모았다. 귀족이나 성직자들에 비하면, 시인이나 화가들이 훨씬 세련된 인간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한편 돌아온 싱글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당시의 정치 상황이 있었다. 여기저기서 결혼 압박을 받게 된다. 특히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로버트 더들리 경을 상대자로 추천했다. 과거에 영국 왕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와 약혼협정까지 맺었는데, 이를 파기하고 프랑스로 결혼한 것 빌미로 더 압박했다. 이러 상황에서 그녀가 택한 길은 자유연애였다. 메리가 선택한 사람은 단리 경 헨리 스튜어트(Henry Stuart, Lord Darnley)였다. 단리 경은 헨리 7세의 증손자라 엘리자베스 1세 이후 유력한 왕위 계승자였으며, 메리 스튜어트와는 같은 할머니를 둔 사촌 관계였다. 단리는 메리보다 4살 어린 미소년이었다. 메리는 팔자에 연하남이 많았나 보다. 첫 남편도 연하이고 두 번째 만난 남자도 사촌 남동생이다. 이 단리라는 자는 겉만 멀쩡했지 경박스럽게 촐싹대는 친구였다. 단리는 스코틀랜드 왕가인 스튜어트 가문의 후손인 데다가 잉글랜드 왕위 계승권까지 가졌기 때문에, 메리 여왕과 결혼하면서 스코틀랜드의 King consort 칭호를 받게 된다. 여왕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로서 육체의 기쁨을 알았다"라고 고백할 만큼 단리에게 쏙 빠진다. 그러한 기쁨에 눈을 뜨게 되자 메리여왕의 욕정은 봇물 터지듯 폭발했고, 밤을 기다리지 못하고 대낮에도 단리를 침실로 불러 된다.

급기야 왕궁 안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여왕이 남자에게 미쳐가고 있다는 소문이었다. 그 소문은 신교파 사람들뿐만 아니라 그녀의 지지세력인 구교파인 귀족들이나 목사들 사이에서조차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다. 소문이 점점 커지자 둘은 1565년에 급히 결혼을 한다. 그런데 단리는 결혼 후 점점 오만방자(傲慢放恣)하고 무례해져 갔다. “여왕은 처녀였어!”라며, 단리는 귀족들에게 무용담처럼 자랑스레 떠들고 다녔다. 메리는 그가 자신과의 정사에 대해서까지 떠벌리고 다니는 것에 서서히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한 걸을 더 나아가서, 그는 국정에까지 간섭하려고 하면서 스코틀랜드의 공동 통치자로 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런 단리의 경솔함에 메리여왕은 발끈해서 호되게 질책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랏일에 간섭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어요.” 그러자 그는 이렇게 일갈(一喝) 했다.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여왕의 자리가 아니라 바로 나 같은 남자 아닌가? 내가 그대를 진정한 여자로 만들어주었으니, 나를 남편으로 고른 것이 아니요? 어쩌면 당신이 정말로 원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이 소중이 아닐까?” 단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시녀들이 있건 말건 상관치 않고 자신의 물건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메리여왕은 경박한 단리에게 싫증을 느껴 그를 멀리하게 된다. 단리 또한 열이 받쳐 매일 술독에 빠져 지내면서 여왕의 시녀들에게 손을 대는 망나니짓을 한다. 그러자 더욱 환멸을 느낀 메리여왕은 맞바람을 결행하게 된다. 그녀가 프랑스에서 귀국할 때 그녀를 수행한 시인 샤트랄이 있었다. 메리는 단리에 의해 눈뜨게 된 육체에의 갈증을 샤트랄을 통해 달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오래가지 않아 여왕의 침실에 숨어들었다는 죄목으로 참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물론 그것은 단리의 눈에 걸려 그의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갑자기 장난감이 없어진 여왕은 밤이 무서웠다. 그래서 이번에는 음악가로 구했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화국 출신의 음악가이자, 단리 경의 옛 친구였던 다비드 리치오였다. 그와의 밀회도 소문이 나가자, 남편 단리가 알게 되고 그의 분노를 사게 된다. 그는 메리 여왕과 리치오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과 짜고서 리치오를 죽여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함께 결탁한 귀족들이 어느 날 메리 여왕과 리치오가 저녁 식사 중인데 난입했다. 그리고 “리치오를 내보내라”라고 요구했다. 메리 여왕은 무장한 그들을 보고 리치오의 목숨이 위태로운 걸 눈치채고, 리치오를 내보내길 거부했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귀족들은 메리 여왕을 억지로 막아서고, 곁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다비드 리치오를 끌어내 여왕의 면전에서 칼로 무려 57차례나 찔러 죽이고 말았다.

어찌 됐든 이 리치오 살인 사건으로 인해 메리 여왕과 단리의 관계는 완전히 파탄이 나고 말았다. 이후 1566년 6월 19일에 메리 여왕은 마침내 단리와의 사이에서 아들 제임스를 낳았다. 그녀가 그 아들이 단리의 아들임을 선언했으니 사생아는 아닌 것으로 왕위계승권을 갖게되었고, 그가 나중에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 한편 단리는 방탕한 생활로 매독이 걸려 병에 시달리고 있었고, 산후(産後) 메리의 공허함을 채워줄 사나이가 필요했다. 그때 나타난 사나이가 바로 장군인 보스웰 백작 제임스 헵번이다. 그는 천하의 제비족이며 방탕아(放蕩兒)로 소문난 날라리인 만큼 애인이 셀 수 없이 많다. 전방 철책선에서 근무나 제대로 잘할 것이지, 시간만 났다 하면 휴가 외출 나와서 시내의 여자들을 죄다 건드렸다. 야전에서 PT체조와 유격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매에다 다년간의 경험에서 얻어진 성애(性愛) 테크닉으로 무장한 변강쇠였다. 어느 날 메리여왕은 현란하고 강건한 그의 방중술(房中術)에 온 삭신이 녹자지근하게 녹아내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세상에 이런 천국이 있었나?”, “지금까지 맛본 것은 맛 축에도 못 들어.”라고 했다.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넘나들고, 홍콩을 무비자로 들락거리면서 숨넘어갈 듯한 멀티 오르가슴을 느낀 것이다. 얄상한 미남자보다는 야성적이고 저돌적인 사내가 밤무대는 훨씬 좋았던 것이다.

그런데 역시 제비족답게 보스웰에게는 연애의 원칙이 있었다. “한번 맛본 여자와는 두 번 다시 않는다.” 원래 이런 원칙이 껄떡녀들에게 더 잘 먹힌다. 자주 만나다가 임신 등 사고 치거나 남편에게 들키는 위험이 있으니 철저하게 몸보신하는 원칙이다. 그러니 열받고 애간장 타는 쪽은 메리여왕이었다. 금단의 지극한 맛은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먹는 사람은 없기 마련이다. 체면이고 여왕이고 나발이고 다 소용없다. 눈을 뜨면 보스웰의 얼굴이 보이고, 눈을 감으면 그 감미로움이 스멀거린다. 모든 걸 포기할 정도로 그에게 미친다. 태어나서 최고로 남자의 매력을 느낀 여왕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다. 그녀의 애정 구걸은 보는 이, 듣는 이가 역겨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여왕은 보스웰의 환심을 사고, 언제나 함께 있고 싶어서 별의별 궁리를 다 하다가 급기야 결혼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그런데 둘 다 남편과 아내가 있는 유부남, 유부녀여서 중혼을 할 수 없으니 어쩔까? 각자 서로의 배우자가 없어져야 한다. 보스웰은 아내를 협박해서 강제로 이혼했는데, 메리여왕은 이혼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남편인 단리를 암살하기에 이른다.

1567년 1월 22일, 메리는 남편 단리를 보기 위해 글래스고를 방문했다. 그는 요양을 위해 거기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여왕 메리는 그때 시골 아낙의 복장을 하고 갔다. 그녀는 남편에게 종교 갈등으로 신교파의 귀족들이 구교파인 그를 살해할 음모를 꾸미고 있어서 목숨이 위험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들이 오기 전에 어서 몸을 피하라고 한다. “마차를 대기시켜 놓았으니, 이 농부의 옷으로 갈아입고 어서 몸을 피하세요. 마부는 믿을만한 사람입니다.” 남편이 못 미더운 눈치를 보이자 그녀는 믿고 말고는 당신 자유이니 알아서 결정하란다. 그리고 그녀는 궁을 오래 비울 수 없어 돌아갈 테니 그리 알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메리가 그렇게 돌아가고 난 뒤, 단리도 급히 길 떠날 채비를 하고 마차에 올랐다. 그들이 탄 마차가 에든버러 성곽 근처에 당도했을 때 이미 날이 저물고 있었다. 마부가 말했다. “해가 저물어서 성 안으로 들어가면 의심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쪽에 오두막이 보이는데, 오늘 밤은 그곳에서 쉬고 내일 아침에 들어가십시오.” 그리고 그들은 오두막에 들어갔다. 그날 밤, 오두막은 무서운 폭발음을 내며 불타 버렸다. 처음에는 그 시체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야 성 밖 오두막에 버려진 시체가 단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이 사건의 배후가 메리여왕과 보스웰이라고 모두들 추측했고, 심지어 잉글랜드 등 다른 나라까지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메리여왕은 보스웰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보스웰은 여론의 화살을 돌리고, 잠잠해 지기를 기다린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형식적으로 메리여왕과 그의 아들을 납치하여 홀리루드 성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거기에서 보스웰과 보란 듯이 결혼식을 거행한 것이다. 남편을 살인한 살인범(내막은 자신도 교사범이지만)과 급히 결혼을 서둔 것은 이미 보스웰의 아이를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리는 자신의 납치범이자 남편 살해 용의자인 보스웰 백작을 처벌하긴커녕 도리어 그와의 결혼을 하자 세간의 경악을 사고 말았다. 가뜩이나 단리 경의 살인을 공모했다고 의심받고 있던 차에 남편을 살해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와 결혼까지 한 메리 여왕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여론은 크게 악화되었다. 결국 메리는 자신의 지지자인 가톨릭교도들에게까지 버림받았고, 반란을 일으킨 신하들에게 붙잡혀 감금된 후 아들 제임스에게 강제로 양위한 뒤 폐위되었다. 이로 인해 당시 생후 13개월 밖에 안 된 단리와의 외아들 제임스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로 왕위를 물려받았다. 그녀는 잡혀서 호수 속에 있는 로크리븐 성에 감금되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보스웰의 아기를 유산하고 말았다. 한편 보스웰은 무사히 적들의 포위망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런 다음 몇 차례에 걸쳐 군사를 모아 반격을 시도했으나 끝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오크니 군도로 건너가 해적 두목이 되었으나, 광풍을 만나 노르웨이 해안에서 표류하다 덴마크 군함에 붙잡히게 되었다. 사슬에 묶인 채 수인의 신세로 전락한 그는 어두운 감옥 안에서 미쳐 죽고 말았다.

보스웰의 아기를 유산하고, 슬픔과 절망의 나날을 보내고 있던 메리는 로치레벤 성주의 일족인 어느 청년의 도움을 얻어 쪽배를 타고 탈주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한때는 수천 명의 병사를 모아 반격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배하여 벽촌의 승원에 유폐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는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게 눈물 어린 편지를 보낸 뒤 가까스로 잉글랜드로 건너왔다. 그때 그녀의 나이 26살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보호해 준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답은커녕 도리어 왕권을 탐하는 음모를 꾸며대고 있었으니 어느 누군들 이쁘게 보겠는가? 메리의 음모가 거듭 드러나게 되자 영국 하원은 즉시 처형을 요구했으나 친척간이던 엘리자베스는 인정에 이끌려 번번이 주저하다가 결국 메리를 처형시키는데 동의하게 된다. 하긴 메리도 영국 왕위 계승권이 있었으니 그녀가 무리하게 욕심을 부여 본 것이었다. 이 사건은 왕위를 둘러싼 반역의 음모도 있지만 신교와 구교 간의 종교적 갈등이 그 밑바닥에 깔려있었던 것이다. 메리는 구교도로서 헨리 7세의 증손녀이기 때문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영국의 구교도 귀족들의 손을 잡고 신교도인 엘리자베스 1세를 폐위시킨 뒤 그녀를 옹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1586년의 ‘배빙턴 음모사건’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사전에 발각당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출생하면서부터 유럽 모든 왕실의 부러운 주목을 받았고, 6일 만에 아버지를 잃고 왕위에 올랐으나, 6살에 고국을 떠났던 빼어난 미모의 다재다능한 여인. 세 번의 결혼마다 지지리도 못난 남자들만 골라 결국 불행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에 진정으로 여자로서의 행복을 느낀 순간들은 있었을 것이고, 그 순간의 행복을 너무 탐하다가 그런 결과가 오지 않았을까? 스코틀랜드의 왕, 프랑스의 왕비, 영국의 왕위계승권을 가진 45년의 생애 중 19년을 감옥에서 유폐 생활을 하고 단두대에서 참수를 당하여 삶을 마감했다. 포자링게 성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메리의 발걸음은 정연했으며, 얼굴빛 또한 평온했다고 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패션에 신경을 써서 붉은색 드레스를 입고 그 위를 검은색 망토로 덮었다고 한다. 그녀는 단두대를 양팔로 껴안고는 조금도 반항하는 빛을 보이지 않은 채 망나니의 도끼날 아래 선선히 목을 내밀었다고 한다. 첫 번째 일격은 뒤통수에 빗맞아 두개골을 반쯤 부수어 놓았으며, 이때 메리는 고통스럽게 신음했다고 한다. 두 번째 일격으로 인해 과다출혈로 숨을 거뒀으며, 세 번째 일격에 목이 완전히 잘려 나갔다. 처형집행인이 메리의 잘린 머리를 집어 들고 “신이시여. 여왕을 구하소서.”라고 말하는데, 가발을 잡는 바람에 메리의 잘린 머리가 굴러 떨어져서 공개 처형을 지켜보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놀랐다고 한다. 메리의 드레스 속에 있었던 작은 반려견은 메리가 사망하자 그 속에서 나와 메리의 핏물 위에 누워 애통해했고, 거기서 끌려 나온 뒤에도 계속 먹이를 거부하더니 이내 죽었다고 한다. 훗날 잉글랜드 국왕으로 즉위한 제임스 1세는 피터버러 성당에 매장된 자신의 모친인 메리의 시신을 엘리자베스 1세가 안장되어 있었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이장했다. 이로써 평생 직접 만난 적이 없이 대립했던 사촌 간의 두 여왕이 드디어 사후에 나란히 누워 있게 되었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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