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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요부와 열녀의 동명이인 – 루크레치아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250303)

by 금삿갓

로마와 이탈리아의 역사(歷史)에는 "루크레치아"라는 유명한 동명이인(同名異人)의 여인 두 명이 등장한다. 한 명은 기원전 500년 무렵에 살았던 여인이다. 정숙(貞淑)하기로 유명해서 도리어 그것으로 인하여 자신의 목숨을 잃는 열부(烈婦)가 되어 로마 역사의 물줄기를 틀어 놓게 한다. 또 다른 한 명은 그로부터 2,000년 후에 태어나서 음란(淫亂)하기로 유명하다. 우선 정숙한 루크레치아부터 소개한다. 고대 로마의 귀족(貴族)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의 딸이자, 장군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의 아내인 루크레치아는 내로라하는 미모(美貌)와 부덕(婦德)을 겸비한 여인으로 로마 여인의 본보기였다. 기원전 509년, 로마의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는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아르데아와 전쟁 중이었다. 왕의 아들인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도 전투에 참여 중이었는데, 저녁에 귀족, 장군들과 연회를 벌였다. 술자리는 늘상 여자 얘기인지라, 이들도 서로 자신의 부인이 가장 정숙하다고 자랑했다. 그중 왕의 사촌 동생이었던 콜라티누스는 자신의 부인이 가장 정숙하다고 자신하자, 마침내 왕자와 내기를 벌어졌다. 두 사람은 곧 왕의 허락을 받아 로마로 돌아가 서로 상대방의 아내를 면담했다. 남편이 전쟁에 나가고 남은 대부분의 여자들은 유흥을 즐기고 있던 반면 루크레티아만이 홀로 시녀들과 자수(刺繡)를 놓고 있었다. 여기서 루크레티아의 덕망과 미모에 반한 섹스투스는 그녀에 대해 추잡한 욕망을 품게 된다.

아르데아와 공방전을 벌이던 중, 타르퀴니우스 왕은 아들 섹스투스를 로마로 심부름 보냈다. 이름부터 이상한 놈인 섹스투스는 기회는 이때라고 생각하고 콜라티누스의 저택에 방문해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이윽고 밤이 되자 섹스투스는 다른 사람 몰래 안주인인 루크레티아의 침실로 들어가 그녀를 겁탈하려 했다. 루크레티아가 강력하게 저항하자 섹스투스는 그녀를 공갈(恐喝), 협박(脅迫)을 하며 회유한다. “순순히 말을 안 들으면 겁탈한 뒤에 남자 노예를 데려와서 둘 다 죽이겠다.”라고 한 것이다. 이는 미천한 노예와 통정(通情)하는 장면을 자기가 보고, 분개(憤慨)하여 상간(相姦) 한 두 년 놈을 한꺼번에 죽인 거라고 까발리겠다는 엄포였다. 몸도 버리고 미천한 노예와 붙어먹는 더러운 여자로 만들어 극도로 명예를 실추시키겠다는 협박이 먹힌 것이다. 할 수 없이 루크레티아는 자신과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 왕자에게 굴복하고 몸을 허락했다. 섹스투스가 전쟁으로 도망간 후, 루크레티아는 아버지 스푸리우스 루크레티우스와 남편에게 비밀리에 당장 집에 와달라는 전갈을 보냈다.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남편의 친구인 브루투스가 함께 오자, 그녀는 왕자인 섹스투스에게 더럽혀졌다고 고백했다. 루크레티아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지고 자결하겠으니, 복수를 맹세하라고 하면서 단검을 뽑아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아버지 스푸리우스와 남편 콜라티누스가 슬픔에 못 이겨 울부짖고 있을 때, 친구 브루투스가 은장도(銀粧刀)를 루크레티아의 가슴에서 뽑은 뒤 들어 올리며 맹세했다고 한다. 말하자면 2,500년 전에 일어난 ‘미투(Me Too)’이다.

“가증(可憎)한 왕의 아들로부터 겁탈당하기 전에는 순결했던 여인의 이 피를 보시오! 나는 내 힘이 닿는 모든 수단을 다해 오만한 타르퀴니우스와 그의 모든 종족을 징벌할 것이며, 어떤 왕도 로마에서 다시는 군림하지 못하게 할 것이오!” 이렇게 브루투스는 로마에서 무장봉기를 일으켜 도시를 순식간에 장악한 뒤 민회(民會)를 소집해 왕권 폐지와 왕가의 추방을 결의하게 했다. 그리고 콜라티누스와 공동 집정관을 맡은 후 전쟁하고 있던 군대 막사로 떠났다. 한편, 왕인 타르퀴니우스는 반란 소식을 전해 듣고 소수의 추종자를 거느린 채 로마로 돌아왔다. 그러나 시민들은 성문을 걸어 잠그고 입성을 거부했다. 이에 군대로 돌아가려 했으나, 브루투스가 이미 군영을 장악한 뒤 모든 병사들을 포섭해 놓았다는 걸 알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에트루리아의 도시인 가비이로 피신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로마인들은 로마 왕정을 전복(顚覆)시키고 로마 공화정을 세우게 된 것이다. 또한 범죄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분노한 로마 시민들에게 맞아 죽었다. 왕정이 폐지시켜 버리는 바람에 섹스투스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행위로 아버지의 왕위까지 잃게 만들었다. 이 이야기는 셰익스피어도 장편 서사시 <루크레치아의 능욕(凌辱)>에서 그녀의 비장한 죽음을 칭송해 마지않았고, 고전 미술의 주요한 소재 중 하나로 다루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미술가들은 고결한 장면보다는 나체의 루크레티아가 겁탈하려는 선정적인 장면이 더 많다.

서론은 이쯤 하고 이번의 본론인 음란한 루크레치아 보르자(Lucrezia Borgia)를 소개한다. 그녀는 1480년 로마 근처의 수비아코에서 스페인계의 유명한 가문인 보르자가(家)에서 태어난다. 이 가문은 교황을 두 명이나 배출한 돈 많고 힘이 센 가문인데, 온갖 못된 짓은 빠짐없이 했던 가문으로 아주 악명이 높다. 대문호(大文豪) 빅톨 위고는 보르자가(家)를 일컬어 “이 집이야말로 파기해야 할 집안, 음란의 집, 배반의 집, 모살(謀殺)의 집, 간통의 집, 불륜의 집, 열거할 수 없는 모든 죄악의 집”이라고 평할 정도였다. 이 가문의 대표 선수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루크레치아의 아버지인 로드리고 데 보르자(Rodrigo de Borja) 추기경인데, 이 친구는 나중에 교황 알렉산더 6세가 된다. 일설에 교황의 자리를 돈으로 샀고, 성직(聖職)의 매관매직(賣官賣職), 독살(毒殺), 음행(淫行), 권모술수(權謀術數) 등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사용했던 사람이다. 심지어 딸인 루크레치아조차 교황권 강화를 위한 정략결혼(政略結婚)의 제물로 삼았다. 요즘 생각으로 추기경이나 교황이 어떻게 딸을 낳았을까? 루크레치아는 아버지의 정식 부인이 아닌 정부(情婦) 중의 한 명인 반노자 데이 카타네이(Vannozza dei Cattanei)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녀의 어린 시절 교육은 아버지의 가까운 측근인 아드리아나 오르시니 드 밀란에게 맡겨졌다. 그녀의 교육은 당대(當代) 대부분의 교육받은 여성들과 달리, 궁정이나 가까운 친척 중의 지식인들로부터 이루어졌다. 교육 내용은 인문학의 탄탄한 기반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녀는 스페인어, 카탈로니아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에 능통한 완전히 숙달된 공주였다. 루크레치아는 얼굴도 엄청 아름다웠다고 전해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의 모델이 바로 그녀다. 뭇 남성을 매혹시켰던 그녀의 긴 금발은 얼마나 유명했던지 당시 교황궁의 전속 요리사가 그녀의 금발에 영감을 얻어 파스타 중에 얇고 가는 면발을 자랑하는 탈리아텔레(Tagliatelle)를 개발했다는 설(說)이 있다. 이러한 교육은 그녀를 유럽의 군주나 왕자와 유리하게 결혼시킬 수 있도록 준비시켰던 것이다. 그녀는 또한 현악기, 시, 웅변에도 능숙했다. 당시 유럽 최고의 미녀에다 지적 능력도 뛰어나고 집안도 빵빵하니 온갖 왕가와 귀족 집안에서 청혼을 해 왔으리라. 그러니까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르네상스의 여인들>이란 작품에서 그녀를 포함하여 이사벨라 데스테, 카테리나 스포르자, 카테리나 코르나로 등 네 명의 여자를 주인공으로 썼다. 그럼 지금부터 그녀의 복잡하고 화려한 결혼 과정과 남성 편력을 살펴보자.

첫 번째 정략결혼은 13살의 앳된 나이로 밀라노 공국(公國) 공작 가문의 조반니 스포르차와 결혼한다. 남편 조반니 스포르차는 고자(鼓子) 즉 성불능자(性不能者)로 빌빌거렸던 모양이다. 이 친구는 신부를 만족시키지 못하자 자신의 부하인 자코미노를 시켜 대리 남편역을 맡겼다. 그러나 방중술(房中術)이 별로였던지 그녀는 자코미노에게 만족을 못한다. 그러다가 루크레치아는 다시 친오빠들과의 근친상간(近親相姦)에 빠지게 된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루크레치아는 어릴 때부터 오빠들과 관계를 가졌던 모양이다. 루크레치아 집안에는 오빠가 체사레와 후안 둘이고, 남동생 호프레가 있었다. 그중 맏아들인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는 성질이 무척 괴팍한 놈으로서 자기의 여동생인 루크레치아를 다른 놈이 사랑하는 꼴을 못 보는 놈이다. 여동생의 남편이고 뭐고 눈에 걸리적거리면 죄다 죽이려 드는 개차반이다. 당시 스포르차는 로마에서 루크레치아와 같이 살았기 때문에 체사레의 이런 암살 음모를 눈치채고 고향으로 도망간다. 달아난 조반니 스포르차는 당시 “로마 타임스”에 “교황 집안의 X파일”이라는 폭로문을 기고해 로마를 발칵 뒤집어 놓는다. 삼성 X파일은 아무것도 아니고, 미국의 워터게이트 사건 같은 것이 로마에 터진 것이다.

폭로된 내용은 그야말로 쇼킹한 것이었다. 그 내용을 대충 훑어보면 이렀다. “성직자인지 장사꾼인지 헷갈리는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집안은 콩가루 집안도 아니고 똥개 집안보다 더하다. 아비와 애새끼들이 서로 뒤엉켜 붙어먹고, 서로 죽이고 하는 막장드라마 보다 더한 끝판왕이다.” 그러면서 아비인 교황은 자기의 딸인 루크레치아와 통정했다. 맏아들 체사레와 둘째 후안도 지들 여동생 루크레치아와 몸을 섞었다. 이들은 또한 자기들의 막냇동생인 호프레의 부인과도 불륜을 저질렀다. 성질이 독사 같은 체사레는 루크레치아를 독차지하려고 나를 암살하려고 했고, 자기 남동생 후안을 살해했다. 나는 겨우 도망쳐 나와서 목숨을 건졌다. 암고양이 요부인 루크레치아는 교황인 아버지의 시종인 페드로 칼데론(일설에는 페로토)과 관계했는데, 이를 눈치챈 체사레가 그를 죽였다. 바티칸궁에서는 그 소문을 진화하느라 난리 브루스를 치고, 급기야 루크레치아는 베키오에 있는 성 식스토 수도원으로 피신했다.

사실 루크레치아는 11살 때 이미 발렌시아 왕국의 발 다요라 군주인 돈 케루비노 조안 데 센텔레스(1522년 사망) 사이에 혼인 계약이 체결되었다. 이 계약은 2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취소되었고, 루크레치아는 또 프로치다 백작 돈 가스파레 아베르사(1476-1534)와 새로운 결혼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아비인 교황 알렉산더 6세가 정치적 계산으로 모두 취소했다. 그는 더 강력한 군주 가문과 결혼 동맹을 맺고자 했다. 그래서 스포르차와 결혼을 시켰는데, 더 이상 혼인 관계가 필요 없자 교황 측에서 사위가 고자라고 떠벌이고, 스포르차의 가족들을 위협하여 이혼에 동의하도록 협박했다. 결국 조반니 스포르차는 마침내 증인들 앞에서 발기 부전 자백서와 혼인 취소 문서에 서명했다. 루크레치아는 수도원에 있을 때 아기를 출산했다. 이 아이가 남편 스포르차의 아이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시종인 페드로인지, 아버지인 교황인지, 아니면 오빠인 체사레의 아이인지 그녀도 잘 모르는 것일까? 아무튼 출산할 쯤에 불륜 관계였던 시종 페드로와 그녀의 하녀 판타실리아의 시신이 티베르강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두 번째의 정략결혼은 나폴리 왕 알폰소 2세의 서자(庶子)로 미남으로 유명한 비셸리에 공작 아라곤의 알폰소와 한다. 알폰소의 누나 산차는 루크레치아의 남동생 호프레 보르자와 결혼하면서 남매가 나란히 겹사돈을 맺었다. 루크레치아보다 2살 연하였고 잘생기고 매너 있던 이 친구와는 제법 행복하게 지냈다. 결혼한 지 채 2년도 못돼 오빠인 체사레에게 습격당해 치명상을 입었다. 그녀는 부상당한 남편을 정성을 다해 치료할 뿐 아니라 오빠의 또 다른 기습에 대비해 방 입구에는 경호원을 두기까지 한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가 교황 방에 잠깐 다녀온 사이 체사레의 심복(心腹)이 몰래 잠입해 남편을 목 졸라 죽여 버리고 만다. 표면적인 암살 동기는 나폴리 왕국과의 우호 관계를 맺고 있을 이유가 없어져 알폰소의 정치적 효용이 끝났기 때문이었다. 내면은 체사레와 루크레치아의 근친상간 사실로 보아 체사레가 알폰소를 질투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루크레치아는 자신의 운명이 너무 한심했던지 또 산속으로 도망치듯 숨어버린다. 여동생에게 성적으로 광적인 집착을 보이는 오빠 체자레 나를 가만히 용인하는 교황이 참 골 때리는 집안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체사레는 대담한 용기와 지략, 권모술수 등을 갖추고 16세기 이탈리아 정치판을 좌지우지했던 대단한 정치가로서, 아마 아버지인 교황도 그의 영향력이 꼭 필요했으므로 그의 그런 행동을 방관했을 것이다. 더욱이 마키아벨리는 그의 명저 <군주론>을 쓰면서 체사레를 모델로 삼았을 정도의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도 이 무렵 체사레의 군사토목기사로서 종군하였다. 그래서 항간(巷間)에는 루크레치아는 저승에서 온 여인이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다. 혼자가 된 루크레치아는 밤이면 즐길 남자를 찾아서 로마시내를 휘젓고 다니는데, 그녀 뒤에는 칼날을 번득이며 체자레의 시종들이 거품 물고 따라다녔을 거다. 바티칸궁전에서 일했던 하인, 노예들 중에서 루크레치아와 관계를 맺었던 놈들은 예외 없이 죽임을 당해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되기 일쑤였다.

외로운 밤을 혼자 보내는 루크레치아에게 세 번째 정략결혼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페라라 공작 알폰소 1세 데스테였다. 루크레치아는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그에게 시집갔다. 두 번째 남편과 이름이 비슷하지만 다른 사람이다. 비록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루크레치아는 이 결혼에서 비로소 마음의 안정을 찾는다. 그녀가 시집간 페라라지역은 당시 가장 세련된 문화중심지중의 하나인 데다 남편은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 궁전에는 늘 예술의 향기가 풍겼단다. 그녀는 아름다운 궁전에 살면서 아리오스토나 벰보 등의 저명한 시인들, 그리고 티치아노 등의 유명한 화가들을 궁전으로 불러들여 그들과 함께 예술을 논했다. 그리고 자신도 직접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시는 어릴 적부터 그녀가 관심과 재능을 보였던 분야이다. 역시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서 남편을 잘 만나야 되는가 보다. 그러나 행복도 잠깐 먹구름이 몰려왔다. 1503년 아빠인 교황 사망, 1507년 오빠인 체자레 사망 등으로 그녀의 정치적 배경이 와장창 끊어지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냉정하게 대하게 된다. 이제까지는 그녀가 보르자가(家) 집안이라는 위세에 눌려 아니꼬워도 그녀에게 고분고분했던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그녀에게 틱틱거리며 눈치를 주는 거다. 그러나 오직 남편만은 그녀를 지켜줬으며 남들이 감히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게 막았다고 한다. 그녀는 이 결혼 생활 동안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몸이 불덩이 같던 루크레치아는 시매부(媤妹夫)인 프란체스코 2세 곤자가, 만토바 후작 등과 오랜 연애를 즐겼다. 그래서 시누이인 프란체스코의 아내는 알폰소의 자매이자 교양 있는 지식인인 이사벨라 데스테였는데 둘 사이는 매우 소원했다고 한다. 프란체스코와 루크레치아 사이의 관계는 열정적이었고, 감상적인 것보다는 성적으로 더 강했다고 한다. 이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쓴 열광적인 연애편지에서 입증할 수 있다. 그녀는 세 번째 결혼 생활 동안 시인 피에트로 벰보와도 연애를 했다. 훗날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 경은 1816년 10월 15일 밀라노의 암브로시아 도서관에서 그들의 연애편지를 보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애편지”라고 불렀다. 그는 그 편지에서 루크레치아의 머리카락 몇 올을 훔쳤다고 자백했다. 루크레치아는 페라라의 프랑스 동맹 수비대를 공동 지휘하고 있을 때 유명한 프랑스 군인인 슈발리에 바야르도 만났다. 루크레치아는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매우 약해졌고, 1519년 6월 12일 10번째 출산 후에 중병에 걸렸다. 회복되는 듯 보였지만 다시 악화되어 같은 해 6월 24일에 39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면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루크레치아의 일생은 예술작품의 주요 소재가 됐는데 소설, 희곡, 미술, 연극, 영화, 음악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오페라에도 자주 등장한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호세 카레라스의 데뷔곡이 바로 도니제티가 작곡한 오페라 <루크레치아 보르자>이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1833년에 <루크레스 보르자>라는 희곡을 썼는데, 이것이 작곡가 도니제티의 오페라 대본으로 수정되어서,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그 외에도 무수한 작가들이 그녀를 소재로 소설을 썼다. 영화와 텔레비전 방송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1955년에 크리스티앙 자크 감독의 프랑스 영화 〈보르지아 가의 독약〉이 만들어져 이 독약이 일약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돼지의 내장에 비소계의 아비산을 넣고 그것을 말려서 가루로 만든 것이 유명한 보르지아 가의 독약인 칸타렐라이다. 이것은 조금씩 장기간에 걸쳐 사용해서 상대를 죽일 수도 있고, 한 순간에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 이 독약을 마시면 갑자기 피부가 쭈그러지고 몸의 힘이 쭉 빠진다. 머리는 백색이 되며 이빨은 빠지고, 숨쉬기가 답답해진다. 한기가 나는 등 미친 듯이 괴로워하다가 죽는다고 한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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