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의 중국 역사에서 치마 입은 여자로서 황제의 권위를 누렸던 사람은 여럿 있었겠지만 그중에서도 세 명이 가장 유명하다. 바로 한(漢) 나라 유방의 마누라 여태후(吕太后), 황제 둘 부자를 모셨던 후궁 신분에서 일약 여황제로 등극했던 당(唐) 나라 고종의 마누라 측천무후(則天武后), 마지막 한 명이 바로 이번의 주인공 청나라의 서태후(西太后)다. 후궁 출신의 약점을 딛고 끝없는 음모와 암살로 권력을 쟁취한 그녀의 일생을 소개한다. 서태후(西太后)라고 불러서 성(姓)이 서씨(西氏)가 아니다. 만주족으로 성(姓)이 예허나라(엽혁나랍 葉赫那拉)씨다. 거처하던 곳이 자금성의 서쪽이어서 그렇게 불렸다. 주로 자희태후(慈禧太后)로 불린다. 본명은 행정(杏貞) 혹은 행아(杏兒)라고 전해지나 확실하지 않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등져서 어릴 적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 게 없으며 풍요로운 생활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숙부의 도움으로 교육을 받아서 학문을 익혀둔 것이 있어서 그것이 훗날 권력을 잡을 수 있는 큰 밑천이 된다.
1852년 문종(文宗 : 함풍황제) 2년에 황제가 직접 선발하는 오디션을 통과하여 후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배경도 없고 고집이 센 성격 탓에 다른 궁녀들로부터 왕따를 당해 늘 외톨이였다. 그래서 그녀는 자금성 뒤뜰에서 고향 생각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곤 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문종이 고궁(故宮)의 뒤뜰에 나와 거닐다가 어디선가 바람 타고 가늘게 들려오는 여인의 노래에 혼이 나가버린다. 문종의 내시들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데려와 보니 자기가 손수 뽑아 놓은 후궁인데, 손도 한번 잡아보지 않았던 숫처녀였다. 그래서 한 순간 뿅 하고 맛이 간 황제가 그녀와 합궁을 처음으로 하게 되는 것이다. 얌전히 순서 기다리다가 어느 천년에 황제를 만나겠는가? 만났다면 한방에 홍콩으로 보내줘야 정신을 모 차리고 계속 찾아오는 것이다. 이런 권력관계에 빠삭한 그녀가 온갖 기술을 동원하여 황제를 녹이는 데 성공한 것이다. 황제는 그녀에게 ‘난(蘭)’이란 이름을 내려주었다. 사실 문종의 정실부인 효정황후(동태후 東太后)는 부덕을 두루 갖춘 어진 여인인데 비해, 난아는 매사 적극적이며 자유분방하게 팡팡 튀는 스타일이다. 문종은 그런 난아에게 신선한 매력을 느껴 흐물흐물 빠져버린다.
그녀는 함풍제(咸豐帝)의 총애를 받아 빈(嬪)으로 품계가 올랐다. 얼마 후 함풍제의 유일한 아들인 훗날 황제 동치제가 될 재순(載淳)을 낳으면서 비(妃)에 봉해진다. 다시 1년도 채 되지 않아 의귀비(懿貴妃)가 됐다. 엄청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정실황후와 버금가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눈에 뵈는 게 없는 난아(蘭兒)는 기고만장(氣高萬丈)과 안하무인(眼下無人)의 대명사가 된다. 그도 그럴 것이 정실부인 효정황후는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 이제 확고한 차기 대권 주자가 자기 아들이 유력했기 때문이다. 당시 함풍제는 체력이 약하고 병이 많았는데, 의귀비는 서예에 능숙하여 함풍제가 자주 구술하고 교지(敎旨)를 대필하도록 하였으며, 의귀비가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때부터 그녀는 조정의 정사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차 아편전쟁 이후 함풍제가 붕어(崩御)하자 자신의 아들인 동치제가 6세의 나이로 즉위하면서, 함풍제의 정실 황후인 동태후와 더불어 황태후 자리에 오른다. 문종의 정실부인 효정황후는 동궁(東宮)에 살고 있어서 동태후라 불렀고, 그녀는 서궁(西宮)에 살고 있어서 서태후라고 불려진다. 당시 함풍제는 죽기 전 아들 동치제의 섭정을 두 태후가 아닌 8명의 보정대신들에게 맡기고, 대신 아들과 동태후에게 대신들의 명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도장을 주는 식으로 권력안배를 해놓았다. 그러나 권력욕이 컸던 서태후는 이에 불만을 품고 동태후와 함풍제의 동생 공친왕과 연합하여 보정대신들을 몰아내고 자신과 동태후, 공친왕 3인의 섭정 체제를 확립하는 데 성공한다. 그 후 궁궐 내 권력의 중심은 동태후에서 서태후 쪽으로 급속히 기울기 시작한다. 철새 정치인의 추잡한 생리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왜냐하면 정실이었던 동태후는 처녀 시절 여자는 밥 잘 짓고, 애 잘 낳으면 된다는 가풍아래 공부를 안 가르친 반면, 서태후는 없는 집이었지만 통신강의로 검정고시를 합격했고, 요즘으로 치면 사이버교육까지 익혀서 서궁에 앉아서 인터넷 결재까지 턱턱 해댄다. 한마디로 말해 문맹인 동태후는 낫 놓고 기역자는 물론 골뱅이 까먹으면서 @자도 모르는 여자다. 따라서 신하들이 올리는 결재문서나 상소문 등은 서태후가 모두 읽어줘야만 비로소 동태후가 결재를 하는 거다. 서태후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부터 국정에 꼽사리 끼었기 때문에 돌아가는 판세를 잘 읽었다. 처음 얼마동안은 국정 사안을 동태후와 의논해서 결정하더니 슬슬 동태후를 깔아뭉개고, 공친왕도 견제하여 권력을 송두리째 손아귀에 넣었다.
서태후의 아들 동치제는 평소 엄격했던 친모보다 다정했던 양모(養母) 동태호를 더 좋아하고 따랐다. 동치제가 16살이 되어 결혼을 할 때 친모가 추천한 원외랑 봉수(员外郎 凤秀)의 딸보다 동태후가 추천한 호부상서 숭기의 딸을 황후로 간택하면서 모자간의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된다. 더구나 며느리는 대단한 가문의 출신이라서 비천한 궁녀출신 서태후는 며느리에게 콤플렉스를 느낀 나머지 매사 깐죽거렸다. 신하 앞에서 망신 주는 것도 모자라 지나친 부부 금슬은 황제의 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상한 논리로 부부를 별거시킨다. 시름에 빠진 동치제가 환관들의 꾐에 넘어가 바람도 쐴 겸 기분 풀자고 놀러 간 곳이 후통거리 기생집이었나 보다. 그곳에서 방탕하게 질퍼덕거리다가 성병인 매독(梅毒)에 걸리고 마는데, 당시 광동병이라 불리던 이 성병에 대해 궁중의사들은 아직 치료법을 몰랐다. 그 병으로 인해 동치제는 19살의 한창나이로 어이없이 죽게 된다. 그러자 며느리 효철의황후도 서태후의 강압에 못 이겨 자살당하고 만다. 또 허수아비 동태후에게 독약이 든 전병을 보내 그녀조차 죽여 버린다. 이제 천하는 완전히 그녀 손에 들어온 거다.
동치제가 죽자, 서태후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재빨리 자신의 여동생과 순친왕 혁현(자기의 시동생)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즉 동치제의 친사촌 겸 이종사촌동생이자 자신의 조카인 4살 재첨(載湉)을 양자로 맞아 즉위시키는데 이가 바로 광서제다. 후에 광서황제가 19살이 되자 서태후와 정치상 충돌이 있었고 서태후는 보수파의 대표로서 실권을 장악하였다. 광서제는 유심파인 강유희, 양계초, 담사동 등의 지지하에 유심파에 의해 군정 실권을 잡으려 하였고 개혁을 하려 하였다, 이리하여 1898년에 유심변법을 실시하였는데 이를 무술정변이라고 하였다. 하나 103일 만에 변법은 위안스카이의 배신으로 서태후에 의해 진압되었고 담사동 등 개혁파는 살해되었고 강유희, 양계초 등은 외국으로 망명하였으며 광서황제는 5공 초기 김영삼처럼 가택연금으로 생활했다. 광서제가 갇혀 있던 곳은 여름에는 이화원의 옥판당이었고, 겨울에는 중남해의 영대였다. 광서황제는 10년간 갇혀 있었으며, 1908년 서태후가 죽기 하루 전에 서태후에 의해 38세의 나이에 살해되었다. 그리고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과 자신의 심복 영록의 딸 사이에서 낳은 불과 3살밖에 안 된 아들을 다음 황제로 지목하는데 그가 바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였다.
동태후의 독살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양(兩) 태후는 궁중 사람들을 거느리고 함풍황제의 릉에 제사 지내러 갔다. 제사 지낼 때 동태후는 서태후더러 한 발자국 뒤에 서라고 하였다. 그 이유는 자신이 중궁태후(제1황후)고 서태후는 황비였기 때문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수모를 당했다고 생각한 서태후는 동태후를 죽이려고 결심하였다. 황궁에 돌아온 서태후는 아무리 생각해도 분이 사라지지 않았지만, 반면에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함풍황제가 죽기 전에 동태후에게 준 밀서였다. 서태후의 됨됨이를 알고 있던 함풍제는 서태후가 나중에 현숙한 동태후를 무시하면 이 밀서의 내용대로 서태후를 죽여 버리라는 것이었다. 이 일로 어쩌지도 못하고 골머리를 앓고 있는데, 마침 동태후가 감기로 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서태후는 한 가지 꾀가 생각났다. 동태후의 병이 나은 후 서태후는 동태후를 보러 갔다. 동태후는 서태후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고 도대체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서태후는 나오지 않는 눈물을 흘리면서 연기를 했다. “형님이 몸져눕자 너무 안타까워 점을 쳤더니 그 점쟁이가 하는 말이 탕약에 사람 피를 타서 먹으면 곧 나아질 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내피를 탕약에 넣어 형님한테 드렸더니 과연 병이 나아졌군요. 다행입니다.” 원래부터 마음이 고운 동태후는 이 말에 감동되었다. 괜히 아랫동서를 경계했다면서 함풍제가 준 밀서를 꺼내어 불에 태워 버렸다. 그 후부터 서태후의 태도는 180도로 달라졌는데 동태후는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한 번은 서태후가 몸져누운 것처럼 쇼를 하는데, 동태후가 서태후를 보러 오니 서태후가 눈물을 흘리면 감동한 척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서태후가 감사 인사로 동태후한테 전병을 보내왔는데, 동태후는 그 전병을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던 것이다.
권력을 손아귀에 넣은 서태후의 화려하고 타락적인 생활을 들여다보자. 일설에 의하면 서태후의 생활은 타락과 사치의 극을 달린다. 중국의 환관은 우리나라와 달리 완전 거세(去勢) 하지 않아도 음경 단소증인 사람도 내시생활을 할 수 있었다. 사실인지 모르지만 그녀는 환관인 이연영(李蓮英), 만금쟁(萬金錚), 안득해(安得海) 등을 서양의사가 하는 정형외과에 보내 물건을 울트라 빅사이즈로 복원시켜 엄청 난잡하게 놀아 재낀다. 식사는 두 테이블을 준비하여 한 식탁은 먹는 것이고, 한 테이블은 상상만 하는 것이었다. 한 끼 식사에 주식(主食) 60가지, 반찬 128가지, 시중 450명이 동원되는데, 이 비용은 100만 냥으로 농민 일만 명을 먹일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사천(四川)에서만 나는 원숭이 머리처럼 생긴 버섯을 후두고(猴頭菇)라 일컫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노루궁둥이 버섯이다. 그녀는 이 버섯만을 먹여 기른 양고기 요리를 즐겼다. 이화단 사건으로 서양열강들에게 패하여 서안(西安)으로 도망할 때 열차여행에도 주방차량을 4칸씩이나 연결시키는 호사를 부렸다. 의복상자만 3천 박스에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바꿔 입었으며,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던 내시들이 머리카락 한 올만 떨어뜨려도 목을 뎅강 한다. 그래서 내시 이연영은 머리를 빗을 때면 서태후가 좋아하는 거리의 온갖 음담패설(淫談悖說)을 흥미진진하게 들려줘서 머리카락에 신경을 쓰지 못하도록 했다. 자신은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빗었는데, 서태후의 빠진 머리카락을 모두 소매 안으로 몰래 집어넣기 때문에 서태후는 빠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태후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다른 환관들은 엄벌이 무서워서 이연영에게 뇌물을 줘가면서 까지 대신 들여보냈다. 이연영은 시내에서 기생들이 머리를 단골로 하는 미장원에 가서 머리 손질법 30여 가지를 마스터하고, 화장법도 마스터해서 서태후의 온몸을 황홀하게 해 주었다. 서태후는 자기의 존엄을 위하여 줄곧 이화원에 전화 설치하는 것을 동의하지 않았다. 서태후의 말에 의하면 전화하는 사람이 무릎 꿇고 전화하는지 앉아서 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태후는 늙어서도 겁나게 아름다운 살결을 가진 걸로 유명한데, 그 비결은 천연 모유와 호두죽에 있다. 서태후는 매일 첫 출산을 한 지 이틀이 지나지 않은 젊은 애기 엄마의 젖을 빨아먹었다고 한다. 매일 저녁 두 애기 엄마는 목욕을 한 후 몸에 붉은 천을 감는데 젖만 내놓고 다 감싸고 서태후가 침대에 눕고 젖먹이는 애기엄마는 무릎을 꿇고 젖을 먹도록 했다. 자기 앞에서 실수를 한 늙은 태감 환관에게 자기 대변을 먹게 해서 결국 그 환관을 죽게 한 서태후 다운 사치이다. 음료로는 가미삼선음(加味三仙飮)을 마시고, 음식으로는 호두죽을 즐겼다. 술은 여의장생주(如意長生酒)를 장복하였다. 호두죽은 호두 10개 정도를 열탕하여 속껍질을 벗긴다. 백미 한 컵을 물에 4시간 담근 뒤 호두와 함께 잘게 간다. 간 것에 꿀을 넣고 물을 적당히 붓고 약한 불에 30분 끓인다. 마지막으로 붉은 대추의 삶은 물을 첨가해서 조려서 매일 먹는다. 일반인을 따라 하지 마시길. 또한 보석에 대한 애착이 강하여 언제나 비취와 진주로 머리를 장식하고, 팔찌 반지만 아니라 손발톱까지 장식했다. 비취로 만든 식탁과 식기, 악기까지 비취였단다. 그녀는 비취의 전문가여서 만져만 보아도 감촉으로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구별해 냈다고 한다. 한 번 먹은 요리는 두 번 다시 먹지 않았지만 오리껍질 요리는 자주 먹었다. 유황오리와 동파육은 즐겼다. 서구열강들과 일본이 계속 중국을 찝쩍대면서 야금야금 먹어 들어와도 나라야 어찌 되건 말건 서태후의 사치와 방탕은 마냥이다. 심지어 해군의 군함 건조비용을 유용해서 북경 제일의 공원인 이화원(頤和園)을 재건하여 전당, 누각, 정자가 도합 3천 칸이나 되는 거대한 정원으로 만든다. 본래 청의원(淸漪園)이었고, 평지였던 곳을 인공으로 파서 곤명호(294㎡)를 만들고, 그 파낸 흙으로 만수산을 쌓았다.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왕의 별장 정원이다.
서태후의 정사(情史)는 줄곧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으며, 그 상대는 황제의 동생인 공친왕(恭親王), 대신부터 내시까지 부지기수(不知其數)이다. 서태후는 궁에 입궁하기 전에 공친왕과 한 번 연애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아들 동치제는 그들이 함풍제 몰래 낳은 사생아라는 의문도 제기되었다. 무술정변에 큰 공을 세운 영록(榮祿)이야말로 서태후의 진정한 애인이라는 설도 있다. 영록은 매사에 서태후의 궁에서 그녀와 접촉하면서 일을 진척했다. 청나라의 300년 역사의 1/6의 기간이 서태후의 통치기간이었다. 그런 기간 동안 마음만 먹으면 무엇을 못 하겠는가. 더욱 눈길을 끄는 것은, 서태후가 50대 연하의 영국 남성 에드먼드 백하우스(Edmund Backhouse)와 국제 연애를 벌였다는 점이다. 에드먼드는 청나라의 궁궐에서 남색(男色)을 즐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중영국의 외교관이며,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의 교수였다. 1944년 중국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뒤에는 세상을 놀라게 할 영어 회고록 원고가 남아 있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의 저술 <A hidden Life : The Enigma of Sir Edmund Backhouse> 또는 <The Hermit of Peking : The Hidden Life of Sir Edmund Backhouse>에 따르면 에드먼드는 궁궐에서 환관들과 수천번의 동성애 섹스를 즐겼고, 서태후와는 최대 200회 정도에 불과했다고 쓰였다. 회고록에는 그는 1989년 중국에 와서 1902년 궁정에 들어간 후 서태후 및 내시와의 성생활을 기록했다고 했다. 그가 가장 자주 섹스를 즐겼던 내시는 이연영이었고, 그와 섹스를 하다가 서태후에게 걸려서 그녀도 합류하게 되어서 쓰리썸(Three Sum)을 하거나, 다자간 그룹 섹스를 하기도 했다고 적었다. 트레버-로퍼의 저서 영문판 312쪽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서태후는 모두 무릎을 꿇으라고 했고, 자신은 풍령(風鈴)의 탈을 쓰고 황포를 입은 채 백하우스 및 내시들과 쓰리썸 또는 그룹 섹스를 하도록 하거나 가학적(加虐的) 및 피학적(被虐的) 성행위 게임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책에서는 또한 서태후가 성도구(性道具)와 춘약(春藥)으로 성애의 강도를 높이라고 말했다. 때때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백하우스와 영국 빅토리아 여왕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단다. 그의 글에는 숙친왕(淑親王)의 차남, 대학사 영경(榮慶), 장군 장훈(張勳), 강계제(姜桂題) 등이 모두 동성애자들이었고, 서태후는 심지어 그들이 자주 가는 욕실을 몰래 방문하여 그들의 음란한 모습을 직접 보기도 했다고 한다. 백하우스의 회고록 <태후와 나(太后與我)> 글에 따르면, 서태후는 성욕이 왕성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두 사람이 막 만나자마자 서태후는 “서리가 겹치고 이불을 차게 하니, 동 틀 때까지 외로움을 풀기 바란다.”라고 했다. 그의 묘사는 세심해서 한 단락을 베껴서 그 분위기를 느껴보자. “그녀의 존귀한 몸이 내 앞에 나타나자, 마치 마셀리나처럼 생기가 넘치고 청춘이 영원히 남아 있어 나를 놀라게 한다. 그녀는 내가 그녀의 새신부 같은 가슴을 움켜쥐는 것을 허락했고, 그녀의 피부는 이전에 언급했던 바이올렛 향기를 풍겼다. 그녀의 몸 전체는 '생명의 즐거움'으로 인해 향기로운 몸이었고, 그녀의 엉덩이는 크고 둥글었으며, 진주처럼 마음에 들었다. 그녀처럼 나에게 진정한 정욕을 느끼게 하는 여자는 없었다. 그녀는 전무후무했다.…” 이어서 백하우스와 서태후는 글로 설명할 수 없는 즐겁고 황홀한 일을 시작했다. 백하우스(巴克思)는 대량의 필묵(필묵)으로 두 사람의 물과 물고기 같은 즐거움을 서술하였다. 그는 자희가 매력적이고 그를 매우 사랑한다고 말하며, 《어초이십영(漁樵十二咏)》 서예 작품을 선물로 주었다. 환관 이연영은 서태후가 죽은 후에 궁궐을 나가서 조카가 거주하는 산동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의문의 살해를 다하여 머리만 수습되어 북경의 해정구(海淀區 옥연담향(玉淵潭鄕)에 매장되었다. 1966년에 발굴하니까 루비와 사파이어 등 보석이 사만 냥 정도 같이 매장되었고, 몸은 업고 두개골만 있었단다.
서른여섯 살에 과부가 된 서태후는 그 후 외로움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이를 적절히 해소해야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서태후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중년에는 남편을 여의고, 말년에는 아들을 먼저 잃었다. 여인의 일생치고는 너무나 파란만장한 인생이었다. 당시 청나라는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청나라 황권을 거의 50년 동안 장악한 이 황태후는 시대의 여장부로서 1908년 설사병으로 골골 앓다가 조카인 광서제가 죽은 다음날 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서태후의 유언은 다시는 나처럼 여인이 정사에 나서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청나라 조정이 120만 냥의 거금과 수천 명의 사람들을 동원하여 장례식을 성대하게 치렀다. 서태후의 장례식 행렬에는 진시황릉처럼 종이로 만든 신하들 모양의 인형은 물론 신식 군복을 입은 종이 병사들, 종이 시계, 종이 자동차, 종이 유럽식 이륜마차 등이 있었다. 시신을 매장할 때 6,500개의 진주로 장식했으며, 진주의 가치만 22.8만 냥 상당이었단다. 그녀의 사치와 정치적 무능은 서방열강의 침략을 자초했고, 끝내는 청일전쟁에서 대패하는 수모를 겪는 원인을 제공하게 된다. 또한 청나라의 멸망의 단초가 된 것이다. 그녀가 죽은 4년 후인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며 쑨원을 중심으로 한 국민 정부가 세워졌다. 하지만 중국 대륙은 군벌들과 외세의 득세로 혼란이 가중되었고, 군벌들은 군자금 확보를 위해 왕릉을 도굴했다. 도굴작전을 주도한 군벌 순전영(孫殿英)은 서태후의 무덤인 정동릉(定東陵)과 건륭제 무덤 유릉(裕陵)을 털었다. 당시 무덤에는 늙은 묘지기 1명만 지키고 있어서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무덤을 파던 도중 입구가 돌로 막혀 있자 폭약으로 폭파해 버리고 들어갔다. 부장품을 챙길 때 서태후의 시신은 옷이 벗겨짐은 물론 도굴하던 군인들이 입에 넣어진 야명주를 꺼내기 위해 시신을 입에서부터 목구멍까지 세로로 갈라버린 후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고 한다. 사후 시신 훼손이며 부관참시(剖棺斬屍)나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보면 과거 자신이 해온 만행을 되돌려 받은 응보였을 수도 있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