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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노동 투쟁은 국민의 납득이 전제되어야

나의 노사활동 돌아보기(210921)

by 금삿갓

때는 1986년, 광화문에는 학생들보다 넥타이 부대가 점점 더 많이 모이던 시절이다. 전두환 군부정권의 막바지에 학생들의 시위에 젊은 직장인들이 가세하여 민주화를 요구하는 열기가 전국적으로 전 국민에게 요원의 불길처럼 퍼져나가는 시기였다. 이듬해 정치적으로는 국민의 열화 같은 요구에 밀려 마침내 민정당 노태우 대표가 6·29 선언을 함으로써 국민들에게 항복하고, 직선제 개헌을 통한 대통령 선거를 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혁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한국노총만 노동단체로 존재하고 있었고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노동조합의 조직률은 형편없었다. 언론사에도 노조는 없었다.

<서기원 사장 선임 기사>
<사장 출근 저지를 위해 사장실 입구 복도를 막고 연좌 농성>

그 시기에 정치·사회적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언론사에서도 노조의 설립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언론사 직원들의 결사체는 기자협회만이 유일하게 존재했다. 신문사는 종사자의 숫자도 적고, 취재기자, 사진기자, 교열기자 등 기자직종의 구성 비중이 높아서 기자협회를 구심점으로 하여 노조의 설립이 용이하였다. 그러나 방송사는 신문이나 잡지사와 달리 20여 개에 달하는 다양한 직종의 종사자들이 있고, 직원 수도 KBS의 경우 7,000명 정도의 규모였다. 따라서 기자협회 구성원이 전체의 10%에도 미치지 못해서 기자협회를 구심점으로 노조를 설립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각 직종별로 자연 발생적으로 협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PD협회를 필두로 기술인협회, 아나운서협회, 카메라맨협회, 경영인협회, 미술인협회 등등 협회가 우후준순처럼 창립되었다.

<본관 앞 차량 출입구 봉쇄 장면>

노조가 없어도 근로자 대표와 사용자 대표 간의 노사협의회가 당연히 있어야 하는데, 노사 누구도 법률상 그런 제도가 있어야 하는지 조차 몰랐다. 1986년에 PD·기자·기술·경영 등 다수의 구성원을 가진 협회를 중심으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측과 협회 대표자들로 구성된 KBS발전협의회를 구성 운영하여 그동안 고질병적인 정치성 특채자에 대한 문제를 다루었다. 3~5 공화국 이후 KBS에는 청와대, 안기부, 보안사, 군, 정당 등의 기관 출신들이 젊은 나이에 고위직급으로 낙하산을 타고 내려와 주요한 보직을 차지하고 회사를 좌지우지하곤 했다. KBS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만들기 위한 기초는 이들에 대한 처단이 최우선이라는데 각 협회가 공감하여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법적 지위도 없는 사내직능협회와 사측의 대표로 구성된 발전협의회는 사안에 대한 합의를 이루기도 어려웠지만, 합의가 되더라도 법률적 효과를 보장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합법적인 노동단체인 노동조합의 설립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장 출근 저지 투쟁 몸싸움>

당시 86 아시안게임을 치르고, 곧이어 88 올림픽을 앞두고 있어서, 회사는 노사를 떠나 한국 방송 역사에 최초의 올림픽 주관방송사로서 엄청난 업무와 변혁을 겪던 시기였다. 그래서 노조의 설립이 시급하고 중대한 과제임을 깨닫고 협회장들이 구수회의를 통해 구성원의 수를 막론하고 각 협회별로 2명의 대의원을 뽑아 간선제로 노조위원장을 선출하고 규약을 만들어 설립 신고하기로 했다. 그래서 1987년 말경에 PD출신 고희일씨를 초대 위원장으로 하는 KBS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신문·출판 쪽은 노조 결성이 빨라서 신문사 주도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을 창립하고 서울신문 위원장인 권영길씨를 초대 위원장으로 뽑았다. 초대 노조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는 꼴이었다. 노사가 노동법에 정통하지 못하다 보니 억지 주장이 지속되고 모든 회의는 밤을 지새우기 십상이었다. 처음으로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단체교섭을 진행하면서 서로가 미숙하여 고성이 오가고 책상을 치는 행태가 비일비재하였다. 당시 위원장이 강단 있게 밀어붙이고, 올림픽을 코앞에 두고 총파업이라는 배수진을 쳤다. 올림픽 중계방송 보이콧을 외치면서 협상한 결과 첫 단체협약으로는 엄청난 수준의 협약을 올림픽 시작 바로 전에 체결할 수 있었다.

<본관 민주 광장의 집회>

필자는 초대 집행부 임기가 끝나고 제2대 노조 집행부가 구성될 때, 본사 노조의결기구인 중앙위원으로 노조 활동에 참여했다. 중앙위원으로서 인사제도특위와 임금 및 법정수당 개선특위의 위원을 맡았고, 노사협의회 위원 및 각종 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조합 규약은 조합원의 근무 부서별 대의원이나 중앙위원을 선출하지 않고, 직종별로 인원비례로 대의원을 선출하고, 중앙위원은 직종 인원의 규모를 불문하고 직종별 2명으로 미국의 상원의원 숫자처럼 선출했다. 필자도 대의원 간선제로 중앙위원에 당선되어 1989.1.1.부터 1990.12.31. 까지 노조활동을 하였다.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끝내고 KBS도 이젠 NHK에 버금가는 방송품질과 기술발전을 이룩했다는 자부심이 전 직원들에게 자긍심으로 각인되었던 시기이다. 올림픽방송 종료 후에 전두환 정권에서 임명한 정구호 사장이 자진 사퇴하자, 노태우 정권이 후임 사장으로 사회운동가인 서영훈 사장을 임명했다. 그 당시 KBS는 한국방송공사법 규정에 따라 이사회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사장을 임명하게 되어 있었다. 임명 당시에 서영훈 사장은 사회적 명망가이고 원로라서 노사가 모두 수긍하거나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민주 광장 사원 비상 총회>

해가 바뀌어 1989년에 제2대 노조 집행부가 들어서자, 신임 집행부는 보다 선명성을 올리고 단결력을 모으기 위해 사사건건 노사 문제를 제기했다. 단체협약을 초대 노조에서 엄청난 수준에서 체결했지만 노사문제에 정통하지 못한 상태에서 급속히 체결하느라 노조의 입장에서는 미비점이 많았다. 법에서 정한 분기별 1회 연간 4회의 정기노사협의회 이외에 임시노사협의회를 수십 차례 요구하여 다양한 분야의 노사합의를 일구어냈다. 방송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노사 간 공정방송위원회가 수시로 열리고, 각 분야별 최고의 간부인 본부장의 임명 시 노조의 3 배수 추천권도 있었다. 말하자면 회사의 인사권과 편성권을 옥죄는 대단한 합의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 외에도 인사와 임금, 복지에 관하여 노조의 역할과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각종 규정과 제도를 합의하였다.

<연일 사원 비상 총회>

특히 사측의 인사권을 제한하는 특채의 금지, 본부장 추천제, 정기적인 순환근무제, 차장급까지 자동승진제, 노조 전임자의 평균승진제 등이 실시되었고, 이제까지는 철야근무를 해도 식비만 지급하던 것을 근기법의 수준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시간 외 초과근로 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했다. 무노조 시기와 비교했을 때 획기적인 근로조건의 개선이고 인사권 편성권의 침해 사례일 수도 있었다. 이러한 것들이 외부의 감독기관(청와대, 문화공보부, 경제기획원, 감사원 등)들의 눈 밖에 나는 처사였다. 대규모 조직에 대한 관리 경험이 없고 사회적 명망에만 신경을 쓰는 서영훈 사장이 노조 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각종 정보기관(안기부, 기무사, 경찰 등)의 보고가 권력기관의 요로로 올라갔다. 하지만 여소야대로 집권 2년 차에 들어간 노태우 정권의 입장에선 특별한 칼을 댈 수 없는 처지였다.

<빗 속에서 연행되는 직원들>
<당시 300여명 이상이 연행됨>
<연행되는 여직원 모습>

노사는 5공 비리 및 특채자 처리에 대한 위원회를 구성하여 400여 명에 달하는 특채자의 처리를 합의했다. 3명의 핵심 특채자를 면직시키고, 38명의 책임보직자들은 보직을 박탈하고, 모든 특채자들의 학력과 경력을 재사정하여 부당하게 과다한 직급과 호봉을 받은 대상자 전원을 승진 및 승호 보류시켰다. 대부분 청와대, 안기부, 보안사, 군간부, 정당 출신이었다. 이들은 이제까지 사내에서 실세로 행세하였지만 추풍낙엽처럼 떨어졌다. 근기법을 뛰어넘는 혁명적인 인사 조치를 한 것이다. 이제까지 권력기관에서 전화 한 통 이력서 한 장으로 KBS에 직원을 심을 수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특채가 금지되고, 신입사원 공채시험에서도 외부의 입김이 작용할 수 없는 공정성이 보장되었다.

<긴급 비상 총회 모습>

또한 노사 간에 연장근로와 휴일근로에 대한 임금 지급 문제를 가지고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방송은 1년 365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고, 하루도 24시간 1초도 쉬지 않고 전파를 발사해야 하는 특수한 산업이다. 당시 24시간 종일 방송 체제는 아니었지만 정규방송이 새벽 6시에 시작되어 밤 2시경에 종료되므로 20시간 정도 정규 방송이 온에어(On Air)되지만 이를 위한 준비와 마무리 작업이 있기 때문에 24시간 근무체제이다. 특히 방송 전파의 발사는 24시간 쉬지 않고 발사한다. 북한의 선전방송을 교란하기 위한 전파방송을 24시간 송출하여야 하며, 라디오방송은 24시간 체제라서 그야말로 방송사의 근로조건은 매우 열악했다. 이렇듯 노조의 입장에서는 시간외수당의 법적 수준 보장을 외치고, 사측은 근기법 수준으로 시간외 수당을 주면 회사가 파산한다고 맞섰다.

<긴급 사원 비상 총회>

당시 정부투자기관의 임금은 경제기획원의 가이드라인에 따라야 했고, 상여금도 경영평가에 의해 기관별 차등지급이었다. 감사원이 그 결과를 감사를 통해 실현되도록 조치하는 구조였다. KBS도 공기업이라서 이 지침을 따를 수밖에 없는데, 임금 수준이 MBC와 격차가 나날이 벌어지고 있어서 직원들의 불만이 많았다. 따라서 노조는 정규 임금 인상이 어려우면 근기법상 법정수당이라도 법대로 지급하라고 요구하여 그전에 없었던 시간외수당 제도를 합의했다. 노조 대표들이 기업회계에 문외한들이고 경영자료가 전반적으로 공개되지 않던 시절이어서 시간외수당의 기준금액과 허용시간이 낮게 합의되었다. 또한 사측 간부의 엄격한 통제로 시간외근무 수당 청구 대상 근무시간이 실제보다 많이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89년 12월 초에 시간외수당 집행예상액을 추계하니 회의 시 사측이 제시한 연간 소요액의 60% 정도 수준이었다. 노측은 사측이 기만했다고 질타하면서 남은 예산을 연말까지 전 직원에게 특근을 시켜서라도 모두 집행하라고 요구했다. 사회적 명망가인 서영훈 사장의 도덕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연말까지 일률적으로 특근을 시켜 집행하겠다는 합의를 했다. 당시 교섭위원이었던 필자는 이런 제도는 비합법적이어서 나중에 경영상 위험성을 가진 합의로 문제가 되니 그냥 격려금 조로 전 직원에게 지급하자고 주장했으나 먹히지 않았다. 합의 즉시 특근 명령이 하달되고 모든 부서는 연말까지 특근을 하도록 했다. 물론 성탄절과 연말연시 특집방송이 봇물을 이루므로 매년 근무 강도가 가장 높은 때이다. 그러나 근무 명령대로 근무를 하지 않는 직원이나 부서가 있기 마련이다.

<노동조합 비상대책위원회 회의 모습>

이것이 KBS 노조 역사에 가장 크고 전무후무한 노사갈등이 아닌 노정(勞政) 투쟁의 도화선이 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1990년 1월 말경에 동아일보가 특종을 터뜨렸다. KBS가 노사합의로 연장근무를 하지 않았으면서도 허위로 근무일지를 만들어 시간외수당을 편법으로 집행했다고 대서특필한 것이다.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정부의 대책은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기사가 나간 다음날 감사원에서 과장 1명과 사무관 2명이 예비감사차 들어와서 자료를 수집해 간 후 대규모 감사반이 파견되었다. 국세청도 사무관 1명에 주사 2명을 보내서 근로소득의 원천징수가 제대로 되었는지 세무조사에 들어갔다. 정부의 행동은 신속했다. 감사원은 2월 초에 감사결과를 피감사기관인 KBS에 통보도 하지 않고 KBS가 노사 합의로 법정수당 34억 원을 변태지출 했다고 언론에 흘렸다. 언론에 KBS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미리 입히고 나중에 KBS 사장의 경영책임, 관련자의 문책을 요구하는 감사 결과를 통보했다.

<프레스센터 앞에서 시위 모습>

사실 노태우 정부는 국회의 여소야대로 힘이 없던 시절이어서 늘 거수기였던 KBS 이사회가 서영훈 사장을 제청하여 대통령이 임명한 최초의 민선 사장 격이었다. 그러나 사장은 취임 후 방송이나 언론 전문가도 아니고 거대조직을 이끈 경험도 없어서 늘 노조에 휘둘리고 무리한 노사합의를 많이 해서 정권의 눈밖에 나있었다. 1990년 1월에 3당 합당이 이루어져 김영삼, 김종필이 여당이 되자 노정권이 힘을 받아서 강경 노선으로 돌아선 것이다. 주무관청인 최병렬 문공부 장관의 주도로 경영책임을 물어 서영훈 사장과 윤혁기 부사장을 퇴임시키고, 4월 3일 낙하산 사장인 서기원씨를 이사회에서 임명제청토록 하였다. 서기원 사장은 청와대 대변인 출신이고 낙하산 사장이라고 노조를 포함한 전 직원이 임명 반대의 목소리를 내었다.

<프레스센터 앞의 시위 모습>

그럼에도 청와대는 꿈적도 않고 그를 임명 재가하여 4월 11일에 KBS로 내려 보냈다. 노조 집행부와 중앙위원, 지역 지부장 전원으로 <관제사장 저지투쟁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서기원 사장이 취임 출근을 못하도록 청사 출입구를 봉쇄하고 막았다. 되돌아간 서사장이 작전을 비밀리에 세워 기획조정실장 등을 통해서 12일 노조의 출근저지를 뚫으라고 지시했다. 본사 간부 200여 명과 청원경찰을 동원하여 몸싸움을 벌이면서 복도에 들어 누운 노조원들을 밟고 입성하여 회의실에서 기습 취임식을 거행했다. 그 과정에 경찰과 시위진압 특수대원인 백골단을 투입해서 곤봉을 휘두르며 노조원, 직원 할 것 없이 무자비하게 117명을 강제 연행했다. 이들을 서울시내 경찰서에 분할 수감해서 조사를 진행했다. 조합 측에서는 연행자 숫자나 명단도 확보하지도 못한 채 공권력에 일방적으로 당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 이후 군홧발이 언론사를 유린한 최초의 만행으로 여긴 전 직원이 들고일어났다. 노조원이든 아니든 모두가 공분한 것이다. 노조는 <관제사장 저지투쟁 비상대책위원회>를 <관제사장 퇴진 비상대책위원회>로 확대 개편하고 각 직종별 협회장과 전임 노조 집행부 요원을 비상대책위원으로 참여시켜 투쟁을 시작했다.

<본관 앞 시위 모습>

그날 부로 모든 방송제작자는 시급한 최소한의 방송을 제외하고 모두 자율적 방송제작을 거부하고 투쟁에 동참을 하였다. 노조의 쟁의행위인 파업 결의 같은 절차도 없이 현장에서 스스로 방송 제작을 거부하고 투쟁에 동참한 것이다. 본관 2층 중앙홀에 1,200여 명의 직원들이 신문지를 깔고 앉아 농성 투쟁에 들어갔다. 간판 뉴스였던 9시 뉴스가 10여분으로 축소 방송되고 대부분의 방송이 파행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비대위는 13일 전국비상사원총회를 긴급 소집하고 무기한 제작거부를 선포하였다. 비상총회를 개최하면 본사와 지역의 25개 방송국에서 전세버스로 모인 인원이 대략 3,000여 명에 이르렀다.

<사장 취임 거부 현수막>

12일부터 제작거부에 들어가 방송을 파행시키면서 투쟁을 거듭했지만 서기원 사장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사이 노조의 대표와 최병렬 문공부 장관과 물밑 대화를 몇 번 가지기도 했고, 야당인 평민당 국회의원들이 격려나 지원이 있었으며, 5공 실세라던 김용갑의원이 타결방안을 가진 밀사를 자처하며 비대위원장을 면담하기도 했지만 바라는 답은 없었다. 3주 가까이 되는 투쟁과 집합 생활의 피로도 생기고 끝 모를 투쟁을 계속할 조직력을 추스르기도 겨워지자 단계적 방송 정상화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비대위를 중심으로 단계적 방송 정상화를 하면서 현장에서 사장퇴진을 이어가자는 방안이 논의되었다. 조직 투쟁력의 피로도와 투쟁에 필요한 자금의 고갈도 온건노선에 한몫을 한 것이다. 1,000여 명의 구성원이 모인 본관 중앙홀의 현장은 강경 투쟁 일변도였다. 4월 30일에 사원총투표를 통해서 행동 방향을 결정하기로 하고 투표에 들어갔다. 역시나 현장의 열기는 집행부의 생각과 반대였다. 퇴진까지 가열한 투쟁 노선으로 결정되었다.

<출근 저지 투쟁>

정부에서도 계속 투쟁으로 결정될 걸 짐작하고 모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부는 관계기관(안기부, 문공부, 검찰, 경찰) 대책회의를 통해서 비대위원 50명 전원을 체포하기로 정했다고 했다. 밤 11시 45분 경이되자 전투경찰 몇 천명으로 KBS 본관을 물 샐 틈 없이 포위하고, 체포조인 백골단 수백 명이 무장을 한 채 청사에 난입하여 제일 먼저 노조 사무실을 급습하고 비대위원회가 열리던 6층 제1회의실과 각 층을 샅샅이 뒤져서 연행해 갔다. 닭장차가 부족해서 그런지 그날 330여 명 정도 강제 연행되었다. 비대위원이 아니라도 언론사 난입을 규탄하면 남녀 구분 없이 닭장차에 끌어넣었다. 비대위원인 필자는 요행히 그들의 손을 벗어나 탈출에 성공했다. 검찰과 경찰은 연행자를 서울시내 각 경찰서에 분리 수감하여 조사를 통해 비대위원만 색출해서 구속시키고 나머지 사원들은 이튿날 심문이 끝나는 대로 훈방 조치하였다. 그 당일 날 비대위원 9명이 구속되었다. 나머지 비대위원에 대해서 수배령이 내렸다. 우리는 사전에 KBS에 공권력이 투입되면 MBC 사옥으로 망명 투쟁 집행부를 만들기로 밀약을 하고 MBC노조와도 연대를 해 둔 상태였다. KBS 본관은 전투경찰들이 울타리처럼 포위하여 24시간 출입자를 검색하므로 비대위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수배 초창기에 필자는 원주방송국 출신 사무처장과 천주교 원주교구에 가서 지학순 주교를 면담하고 원주 본당의 주임 신부 관사에 머물기도 했었다.

<민주 광장 모습>

일반 사원들의 본관 출입은 허용되었고, 그날 이후 공권력의 청사 난입은 없었지만 청사 외곽은 봉쇄하고 있는 상태라서 본관 중앙홀 현장 투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위원장의 구속과 부위원장의 뇌출혈 입원 등 지도부의 와해로 현장투쟁을 이끌 임시 위원장을 현장에서 뽑았다. 조합의 자금줄인 총무국장이 수배를 피해 잠적하면서 필자에게 조합비 통장을 맡기고 MBC 망명 집행부에서 현장 투쟁의 외각 지원을 부탁하기에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MBC 노조 사무실로 들어갔다. 매일 회의와 대외 언론 홍보 투쟁, 현장 투쟁 지원 등등 많은 활동을 하면서 밤마다 의자나 책상 위에서 새우잠을 자니까 모든 비대위원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5월로 접어들어 투쟁이 장기화 대고, 정부도 더욱 강경대응을 시도했다. 들리는 소문에 MBC에도 공권력이 투입된다고 하고, D-Day, H-Hour까지 흘러 들어왔다. MBC에 남은 비대위원들은 체포조가 올 때까지 버티느냐 탈출하느냐를 두고 격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반 사원 중에 투쟁성이 있던 사람들에게 임무를 배정하고 체포조 투입 전에 탈출하기로 했다. 그러나 H-Hour를 잘못 알았다. MBC를 난입한 백골단들은 한 손에 사진을, 한 손에 곤봉을 들고 있었다. 이들도 난감한 게 잘못 분간하여 MBC 직원을 강제 연행할 수는 없기에 퇴로를 막고 얼굴을 대조하면서 연행했다. 이때에 조직국장 등 4명이 연행되었다. 필자는 다행히 담배를 피우러 MBC 청사 현관 앞 화단에 걸터앉아 있었는데, 백골단에 들이닥치기에 화단을 넘어 길 건너 쌍마빌딩 지하에 있는 쌍마 사우나로 급히 도망쳤다. 거기서 몇 날 며칠을 지새웠는지 너무 갑갑하고 미칠 지경이라서 옷을 입고 계단을 올라오니까 햇빛에 눈이 부셔서 휘청하고 쓰러졌다. 다행히 MBC 청사 주변에 전투경찰이 보이지 않았다.

연행하는 백골단과의 몸싸움>

공중전화로 집에 연락을 하니까 마누라와 아이들이 난리가 났다. 연락도 두절되고 연일 시위와 구속자가 늘어가는 뉴스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집 앞에도 사복 경찰관 두 명이 매일 기다리고 있다고 집으로 들어오지 말라고 했다. 수배자의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동지들에게 연락하니 지역의 술집에서 불심 건문에 잡혔다는 사람도 있고, 교통위반으로 면허증을 제시하다가 체포되었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서로 만날 수도 연락할 수도 없는 적막감도 들었다. 5월의 중순이 되었다. 모텔을 전전하면서 투쟁을 지원하기도 힘들고 하여 사측과 대화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공중전화로 서기원사장 집행부의 노무업무 총괄 책임자인 경영본부장에게 전화를 했다. 남부지검과 협의하여 수배령을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그 당시에만 20여 명이 구속되어 있던 상태였다. 사측, 검찰, 노조 모두 대량의 구속자 발생은 사후 처리의 무거운 짐이 될 터이니 잘 설득해 보라고 했다. 당시 기획조정실장과 남부지청장이 협상을 하여 수배령을 푸는데 핵심 몇 명은 끝까지 풀 수 없다고 통보가 왔다. 필자는 집행부가 아닌 비상임 중앙위원이라서 수배가 풀려서 한 달 이상 떠나 있던 사무실로 돌아왔다. 현장 투쟁도 지치고 투쟁력도 떨어져서 5월 17일에 제작거부를 중단하고 방송에 복귀하기로 결정되었다. KBS 방송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겉으로는 끝나는 모양새였다.

<제일 먼저 교양국과 기획제작국의 제작거부(파업) 결의>

하지만 투쟁의 끝은 엄청난 상흔을 노사 모두에게 남겼다. 투쟁의 상대는 정권이었지만 뒤처리는 노사의 문제로 남았다. 검찰에서 아직 수배를 풀지 않은 몇몇 핵심간부들에 대한 검거가 계속되고 있었다. 수배가 풀렸다고 모든 게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남부지검에서 소환장이 왔다. 필자를 포함해서 아나운서 협회장 등 4명이 같은 날 검찰에 출두해서 조사를 받았다. 현장에서 포승줄에 묶여 다른 검사실에서 조사를 받던 동지들을 보니 마음이 아팠다. 최종적으로 혐의가 무겁지 않은 사람들은 불기소 처분되고, 총 11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이들에게 최단 6개월에서 최장 3년의 징역형이 선고되어서 모두 영어의 몸이 되었다. 회사에서도 당연 퇴직에 해당되어 면직 처리된 것이다. 그때부터 모든 노사 관계에는 구속자 문제 처리가 제1순위이고, 노조비의 집행도 그들의 옥바라지와 생계비 지원이 큰 과제였다.

<사원 비상총회 : 노동조합 차원이 아닌 전 사원 대상>
<사원 비상 총회>

세월이 흘러 필자도 승진하여 중간간부가 되어 노사업무를 만 4년간 담당하게 되었다. 그 시기에 노조의 파업을 몇 차례 겪었다. 첫 파업은 김영삼 정권이 1996. 12. 26에 노동법을 기습적으로 날치기 통과시켜서 이에 대한 노정(勞政) 투쟁이었다. 1997년 신년 벽두에 파업찬반 투표를 결행한 노조가 1월 7일부터 전면총파업에 돌입했다. 이건 그야말로 임금·근로조건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대정부 투쟁이고, 투쟁의 목표나 목적물을 회사가 관리 처분할 수 없는 입법 투쟁이라서 파업관리에 엄청 힘들었던 기억이다. 정부 관계기관에서는 연일 대책회의에 상황을 보고해 달라고 하고, 무노무임과 불법행위에 대한 엄정히 대처하라는 압력 또한 심했다. 무노무임이야 그렇다 쳐도 노조원이 구속되는 경우는 90년 KBS사태의 교훈에서 알다시피 노사 간에 엄청난 짐을 안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규모 집단행동을 하다 보면 그중에서 반드시 이탈행위나 과격행동을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이들이 무분별하게 저지른 행위가 노사 문제의 큰 불씨를 만들기 일쑤이다. 그래서 노정투쟁에서는 이런 사건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투쟁을 이끄는 노조 집행부와 사측의 관리 직원들에게 주의시키고 잘 관리하는 게 핵심이다.

<사원 비상 총회>

2년 후인 1999.9. 13에 방송법 파업이 언론노조연맹(위원장 최문순)의 주도로 일어났다. 이 또한 통합방송법 제정을 촉구하는 대 정권 및 입법투쟁으로, 한여름 더위에 장장 15일간 파업을 한 것이다. 당시는 민주적 정권 교체가 일어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때이고, KBS도 언론계의 원로 박권상 사장이 재직하고 있었다. 사장의 입장에선 입법 사항에 대하여 방송을 볼모로 파업을 하는 노조의 행태가 어불성설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사장은 방송의 편성권을 가지고 정상적인 방송을 해야 하는 책무가 있음에도 아무런 처분권이 없는 방송법 제정 투쟁에 엄청난 노여움이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노조 집행부 중 투쟁과정에서 불법행위를 자행한 위원장을 포함한 4명을 급기야 남부지검에 고발하게 되었다. 이들은 구속되어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모두 면직되었다. 중간간부 시기에 임금과 단체협약 체결을 위한 파업도 두 차례 더 겪었지만 구속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는데, 유독 정권을 향한 입법 투쟁에서만 발생되었다. 노사 모두가 사후 처리에 매우 민감하고 힘든 문제였다.

<민주 광장 시위>

그 후 임원의 위치에 올라 노사 협의 사측 대표도 하고 지금은 은퇴하였다. 지난 시절 경험한 업무를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겠다. 노측에서의 활동, 노사 중간자 역할이 가미된 노사관리업무, 사측을 대표하는 업무이다. 시대가 바뀌고 경제활동의 양상이 변해가도 변하지 않는 게 노사 간 입장일 것이다. 노사가 지향하는 목표나 목적은 언제나 분명하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상호 대립과 협조가 현명하게 조화를 이루어가는 노사 관계가 최고가 아닐까 생각한다. 투쟁 일변도도 문제고 너무 협조적이어서 어용 시비가 있어도 안 될 것이다. 적절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알을 낳는 닭의 모가지를 트는 우(愚)는 없어야 한다. 대 정부 투쟁은 소규모 투쟁으로는 절대 불가하며, 대규모 연대 없이 성급한 결행은 막아야 한다. 그리고 국민이 납득할 만한 명분이 전제되어야 성공할 수 있다. 단순 밥그릇 싸움으로는 공감을 얻을 수 없다. 밥그릇 싸움일지라도 공감을 줄 수 있는 스토리텔링이 있는 이슈가 주도해야 한다. 투쟁 과정에서 절대 불법적 폭력적 일탈 행위는 지도부에서 막아야 한다. 노사 간의 투쟁에서는 상대의 실책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전략적, 기술적 투쟁 방법을 찾아야 단기간에 승리할 수 있다. 투쟁의 장기화는 모두가 피로하고 상처뿐이 영광이 될 수 있다. 진퇴를 슬기롭게 결정할 수 있는 지도력과 단결력을 장악한 지도부에 의한 투쟁이 최고로 바람직하다. 투쟁의 전리품이 회사의 현재의 부담 능력에는 감당이 되어도 미래에 영속적으로 감당이 가능한지도 살펴야 한다. 그것이 도리어 고용불안의 독이 될 수도 있다. 지상파 방송이 사양산업화 되는 지금에서 KBS 등 방송사 노조의 각종 협약들이 무용지물처럼 되고 고용조정의 요구가 정치권이나 일반 국민 사이에서 터져 나오는 것이 가장 좋은 사례일 것이다. 단순히 선명성을 위한 투쟁은 상처를 많이 만들게 된다. 모든 투쟁이나 조직에는 분열과 노선이 있다. 이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필수적이다. 노사관계에 낭만적인 요소도 감안하면 좋을 것 같다. 투쟁이 끝난 후 서로 웃으면서 만나고 소주잔을 같이 기울일 수 있는 관계 말이다. 노사 관계는 늘 현재의 문제이고 생존의 문제이다.

<보도본부의 9시 뉴스 파행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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