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란 어떤 대상을 다른 것과 구별(區別) 하기 위하여 사람, 사물, 현상, 생각 등에 붙여 한두 단어로 나타낸 말이다. 이름이란 단어는 국립국어원(國立國語院) 자료를 보면 일홈·일훔> 일음> 이름으로 변천하였다. 순수 우리말이며 <일훔>은 <이름 짓다>의 의미를 갖는 동사 <잃->에 명사형 어미 <-움>의 결합으로 이루어졌다. 이름은 자기의 것이지만 남들이 훨씬 많이 쓰고, 죽고 나서도 남는 것으로 귀하게 여긴다. 바로 존재의 가치(價値)나 의의(意義)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공자도 이름에 대하여 깊은 통찰을 밝혔다. 모난 술잔이 모나지 않으면 모난 술잔인가?(고불고, 고재 : 觚不觚, 觚哉)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조롭지 못하고, 말이 순조롭지 못하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명부정 즉언불순 : 名不正 則言不順, 언불순 즉사불성 : 言不順 卽事不成) 그 이름(名)에 부합하는 실제(實)가 있어야 그 이름이 제대로 성립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름값을 하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고래(古來)로 사람의 실명(實名) 또는 관명(冠名)은 귀하게 여겨 대신 부를 아명(兒名), 자(字), 호(號)를 만들어 사용했다. 서양도 탈무드에 사람은 세 가지 이름을 갖는다 했다. 양친이 지은 이름, 친구들이 부르는 이름, 생애 끝에 남는 명성이다. 성경 전도서 7장 1절에 “좋은 이름이 좋은 기름보다 낫다”라고 했다. 예전부터 아명(兒名)은 태어나면 붙여주는 이름으로 남성은 관례(冠禮 : 20세의 성인식 일종) 때까지 주로 사용하고, 여성은 혼례 때까지 사용했다. 여성은 혼례를 치르면 시집에서는 이름 대신 친정의 마을 이름을 붙인 택호(宅號)를 쓰고, 친정에서는 남편의 성을 붙인 O실(室)이라 칭한다. 새 생명이 태어나서 건강하게 잘 자라라는 의미를 담은 기복신앙(祈福信仰)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 남성의 실명 또는 관명은 주로 집안의 항렬에 따라 돌림자를 활용하여 짓는다. 항렬자는 주로 음양오행설을 바탕으로 하거나 한자의 부수나 획수의 순서에 따라 짓기도 한다. 오행의 순환 순서 즉 금생수(金生水), 수생목(水生木), 목생화(木生火), 화생토(火生土), 토생금(土生金) 순으로 돌림자를 정해서 자손이 번창하라는 의미이다. 따지고 보면 3글자의 성명을 주로 사용하는 한국인들은 성과 돌림자를 빼고 나면 한 글자만이 오로지 자기의 정체성(正體性)을 나타내는 이름일 수밖에 없다. 이것마저 귀히 여겨 임금, 부모, 스승 등을 제외한 아무나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게 예의였다.
임금과 돌아가신 조상, 공자·맹자 등 성현의 이름은 휘(諱)라고 하여 부르지도 쓰지도 못하고 피하도록 했다. 이를 기휘(忌諱) 또는 피휘(避諱)라 한다. 피휘(避諱)는 해당 글자를 바꿔 쓰는 대자(代字), 고쳐 쓰는 개자(開字), 빼고 쓰는 결자(缺字), 획을 빼고 쓰는 결획(缺劃) 등의 방법으로 했다. 심지어 임금의 휘를 공무서나 과거 답안지에 잘못 쓸 경우에 엄벌을 받았다. 북송의 학자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의 실명은 돈실(敦實)이었는데, 북송의 4대 황제 인종(仁宗)의 휘가 종실(宗實)이라서 실(實)을 이(頤)로 개명했다. 선조 35년(1602) 10월 9일에 무과 복시에 응시한 유덕흥(兪德興)이 피휘(避諱)를 하지 않은 것을 입격 시킨 감독자들을 파면하라는 논의도 있었다.
이렇듯 실명 사용을 꺼리는 것은 중국으로부터 흘러온 실명경피풍속(實名敬避風俗)과 복명풍속(複名風俗)의 영향으로 본다. 그래서 관례(20세)가 되면 자(字)를 짓고, 필요에 따라 호(號)를 사용했다. 자는 실명을 대신해서 일상적인 사회생활에 두루 사용했다. 호는 별호라고도 하며 예로부터 신분이나 직업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활용되어왔다. 임금은 살아서는 실명인 휘(諱)와 자(字)를 사용하고, 죽으면 묘호(廟號)와 시호(諡號), 능호(陵號)를 추존(追尊)한다. 묘호(廟號)란 임금이 죽은 뒤 종묘(宗廟)에 그 신위를 모실 때 사용하는 존호(尊號)이다. 조(祖)와 종(宗)의 두 가지를 사용하는데, 대체로 조(祖)는 나라를 건국한 왕이나 정통성을 복원한 왕에게 사용하고 나머지는 종(宗)을 사용했다. 중국에서는 황제만 조종(祖宗)의 묘호를 쓰고 제후국은 왕으로 쓰도록 했다. 그러나 고려는 개국 이래 조종(祖宗)을 쓰다가 25대 충렬왕 때 원나라의 지배를 받고부터 왕으로 격하되었다. 조선도 명나라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았으나 자체적으로 조종(祖宗)을 사용했다. 조종법(祖宗法)은 원래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고 창업의 공이 있는 왕은 조(祖), 덕이 있는 왕은 종(宗)을 썼으나 선조를 극진히 모시려는 후손 왕들의 억지로 제도가 어지러워졌다. 조종(祖宗)으로 추존되지 못한 실덕(失德)한 왕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군(君)으로 봉해져서 종묘에 신위를 못 두고 실록(實錄)도 일기(日記)로 칭하게 되었다.
시호(諡號)는 왕, 왕비를 비롯한 종친, 공신, 정 2품 이상의 문무관에게 생존 시의 행실이나 업적 등을 참작하여 봉상시(奉常寺)에서 주도하여 3개의 안을 올려 임금의 낙점(落點)을 받았다. 그 후 시호를 주는 대상을 넓혀 일반 관료나 사림의 학자 등에게도 주었고, 후손들이 선조나 스승을 기리고자 경쟁적으로 추천을 하는 경향이 짙어졌다. 시호에 사용하는 글자는 194자를 쓰다가 세종 때 301자로 늘였으나 문(文), 정(貞), 공(恭), 충(忠) 등의 글자가 선호되었다. 참고로 세종은 묘호(廟號)이고, 실명은 이도(李祹), 자는 원정(元正), 명나라로부터 받은 시호는 장헌(莊憲), 존시(尊諡)는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英文䜭武仁聖明孝大王), 능호(陵號)는 영릉(英陵)이며 즉위하기 전 봉호(封號) 또는 작호(爵號)는 충녕군(忠寧君)이었다. 봉호 또는 작호는 왕실의 종친이나 인척, 공신에게 내리는 군(君)이라는 칭호이다.
호 또는 별호는 사대부의 경우 간혹 없는 사람도 있지만 실명이나 자(字) 대신 부르기 위해 대부분 가졌다. 특히 서화나 문필을 많이 남긴 사람들은 집의 호인 당호(堂號)나 아취(雅趣)를 나타내는 아호(雅號)를 다양하게 사용하기도 했다. 고려 때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李奎報)는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에서 호를 짓는 방법과 자기의 호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사는 곳을 호로 삼기도 하고(所居而號), 가진 물건을 호로 삼기도 하며(所蓄而號), 포부를 가지고 호로 삼은 이도 있다(所得之實而號)......나는 백운(白雲)을 사모하여 이것을 배우는 것으로 호를 정했다(白雲吾所慕而學之)” 공주대 신용호(申用浩) 교수가 이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다. ①소처이호(所處以號) 즉 처소를 호로 한다. <주로 촌리(村里)·산수(山水)·실려(室廬) 등의 명칭 사용.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②소지이호(所志以號) 즉 이루고자 하는 뜻을 호로 한다. <회암(晦庵) 주희(朱熹)를 본받기 위해 회헌(晦軒) 안향(安珦),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인 태임(太任)을 본받는다는 뜻의 사임당(師任堂)신씨>, ③소우이호(所遇以號) 즉 처한 환경이나 여건을 호로 한다. <대체로 은(隱), 옹(翁), 수(叟), 노(老) 등의 글자를 쓴다. 나라와 학문과 도를 걱정한 삼우거사(三憂居士) 문익점(文益漸)>, ④소축이호(所蓄以號) 즉 특히 좋아하는 것을 호로한다. <주로 송(松), 죽(竹), 백(栢), 매(梅) 등을 사용한다. 시·거문고·술 세 가지를 좋아한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이규보(李奎報)>
호는 자신이 짓거나 타인이 지어 주기도 했다. 이름과 호를 지으면 그 이름과 호의 뜻이나 지향하는 바를 명기·호기(名記·號記) 또는 명변·호변(名辨·號辨)을 지어서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이규보의 백운거사어록이다. 스승이나 윗사람이 호를 지어서 줄 경우에는 건당례(建幢禮)를 거행하기도 했다. 특히 불교에서 법호(法號)나 법통(法統)을 이어 줄 경우에는 입실(入室) 건당례(建幢禮)를 성대하게 시행했다. 호는 일반적으로 두 글자를 많이 썼지만 한 글자에서 심지어 10 여자를 쓴 경우도 있다. 우리나라에서 호에 관해서는 단연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이다. 서예가 청남(菁南) 오제봉(吳濟峰)의 저서 <추사선생 아호집을 내면서>에 보면, 김정희는 503개의 호를 가졌으며, 가장 긴 호는 향각자다처로향각노인(香閣煮茶處鱸香閣老人)이다. 근대에 들어와서 한힘샘 주시경(周時經), 가람 이병기(李秉岐), 외솔 최현배(崔鉉培) 등은 우리말로 호를 지었고, 시조시인 김상옥도 칠수삼과처용지거주인(七須三瓜處容之居主人)이란 긴 호를 사용했다. 옛 부터 호를 정리해 놓은 책자로 여러 종류의 호보(號譜), 대동명현호보(大東名賢號譜), 동국호보(東國號譜), 조선세가호보(朝鮮世家號譜) 등이 있다. 또한 현대에 와서는 작가나 예술가들이 실명 이외에 필명(筆名)이나 예명(藝名)을 사용하고 일반인도 SNS나 사이버 상에서 별명을 많이 사용하기도 한다. 종교적으로 봐도 불교의 승려들은 법명(法名)을 갖고, 기독교나 가톨릭도 세례명을 갖는다.
이름이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와서 국가의 원수(元帥)인 대통령의 이름을 함부로 비하(卑下)해서 부르는 일이 SNS·사이버상을 막론(莫論)하고 일상에서 다반사(茶飯事)이다. 왕조 같으면 임금의 바른 이름일지라고 함부로 부르면 엄벌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문재인(文在寅)을 어떻게 비하(卑下)해 부르는가? 집안으로 재앙을 끌어들인다고 문재인(門災引), 역사의 죄인이라고 문죄인(文罪人), 국가의 재앙이 된다고 문재앙(文災殃), 되는 건 없고 문제만 일으킨다고 문제인(問題人), 죄인과 재앙을 묶어서 문죄앙(文罪殃), 말한 약속을 안 지킨다고 문구라, 입만 벌리면 구라를 친다고 문벌구, 정치 대신 쇼(Show)만 한다고 문쇼(Show), 쩝쩝거린다고 문쩝쩝, 치매 의혹을 제기하며 문치매(文癡呆), A4용지 읽는다고 문A4, 히틀러처럼 독재자라면서 문틀러, 문두환, 문가놈, 뭉가, 등등으로 비하하여 불린다. 물론 친문계에서는 이니, 부엉이, 달님, 문바마 등으로 불리지만 늘 읍소하고 비위를 맞추는 북한 당국자로부터도 <삶은 소대가리>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비하적(卑下的) 별명이 훨씬 많다.
대통령만 비하되는 게 아니라 그의 막료들도 함께 비하되고 있다. 비서실장이었던 임종석(任鍾晳)은 죽음의 자리인 임종석(臨終席)으로, 법무부 장관이었던 조국(曺國)은 나라가 죽었다고 조국(弔國), 내로남불이 아닌 조로남불, 조국의 적(敵)은 조국이라고 조적조(曺敵曺), 과거 발언으로 미래가 실현되는 조스트라다무스, 거짓말이 일상이라는 조국스럽다 등으로 불린다. 추미애(秋美愛)는 이름을 뒤집어서 애미추, 얄미운 짓을 도맡아 한다고 추녀(醜女)·추매(醜妹), 열심히 애국하는 잔다르크 같은데 결국은 자기편(김경수, 문재인)을 곤란스럽게 하고 상대만 이득을 본다고 추다르크라고 불린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에는 국무총리 정세균(丁世均)은 정세균(丁細菌)으로 비하한다. SNS에 “문재앙(文災殃)이 정권을 잡아 조로남불 짓거리를 일삼으니 나라가 죽어 조국弔國)이 되고, 추매(醜妹)가 칼춤을 추고 온 나라에 정세균(丁細菌)을 퍼뜨리니 곧 임종석(臨終席)이 될 것이다.”라는 해괴한 글귀들이 떠돌고 있다.
이런 현상이 현 여권의 반대 세력이 주도적으로 만들고 퍼뜨린 때문인가? 근원을 따져보면 이 원류는 친노, 친문 즉 진보좌파 세력들이 먼저 만들어 낸 결과의 반작용(反作用)이다. 김대중(金大中) 정부까지는 그래도 정치지도자는 이름 대신 영문 이니셜(Initial)을 많이 활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두 번의 보수 정권시절 대통령이었던 이명박(李明博), 박근혜(朴槿惠)에 대하여 이보다 더한 비속어(卑俗語)와 비하를 온갖 팟캐스트(Pod Cast)나 SNS를 통해 유포하였다. 이명박은 2MB, 명바기, 쥐박이, 이쥐박으로, 박근혜는 닭그네, 귀태(鬼胎), 길라임, 수첩공주 등으로 불렀다. 나체 그림에 여성 대통령 사진을 합성하여 성적 모욕의 수준으로 비하했다. 이런 게 반작용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모르는 비이성적인 집단들의 광기(狂氣)이다.
공자(孔子)의 가르침처럼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답고 아비가 아비답고 자식이 자식다운(君君 臣臣 父父 子子) 바른 이름(正名)을 세우는 정치가 필요하다. 비하와 조롱(嘲弄)이 아니라 대화와 타협, 편 가르기가 아니라 통합, 불신(不信)은 버리고 신뢰를 쌓고, 과거에 집착 말고 미래를 위하여 진정 국가와 국민을 향한 바른 정치를 하는 것이 본인의 이름을 제대로 지키는 길이다. 정치인들은 제발 이름값 좀 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