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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r 16. 2023

(18) 사랑을 마법으로 - 몽테스팡

★ 18禁 역사 읽기 ★ (230315)

프랑스의 루이 14세. "짐은 곧 국가다."라고 볼테르가 허풍(虛風) 쳤던 것이 명언(名言)이 되어버린 태양왕이다. 그가 1715년 9월 1일 77세의 당시로서는 긴 여생을 마감할 때 했다는 진짜 마지막 말은 “짐(朕)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였다. 그런데 볼테르가 왕창 줄여서 창작(創作) 한 것이란다. 루이 14세 당시의 프랑스는 역사상 가장 끗발 날렸던 황금기요, 루이 14세는 세계사를 통틀어 가장 유명한 군주(君主) 중의 하나다. 그러나 그의 시작은 매우 미약(微弱)하고, 위태로웠다. 그는 루이 13세와 안 도트리슈(Anne d’Autriche) 왕비의 아들로 1638년에 태어났다. 무려 23년이나 후사(後嗣)를 보지 못하다가 얻은 왕자였기에, 그는 태어나자마자 ‘신의 선물’이라는 칭호(稱號)를 받는다. 루이 13세가 1643년에 세상을 떠나고 그는 겨우 다섯 살의 나이에 프랑스의 왕이 된다. 따라서 모후(母后) 안 도트리슈가 섭정(攝政)을 맡았지만, 정치를 몰라서 이탈리아 출신의 재상(宰相) 마자랭(Jules Mazarin)에게 전적으로 의존했다.

섭정 기간 동안 30년 종교전쟁과 프롱드(Fronde)의 난(亂)이 평정되고, 실권자인 재상 마자랭이 1661년에 사망하자 그는 23세의 청년으로 자라서 친정(親政)을 하면서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실천한 것이다. 그는 프랑스 왕의 옥좌를 만인이 경외하고 찬탄할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자신을 알렉산드로스나 헤라클레스에 비겼다. 한편으로 극작가(劇作家) 장 라신, 토마스 코르네유, 장 바티스트 몰리에르, 샤를 페로, 화가 샤를 르 브룅 등을 후원하여 프랑스를 예술의 중심으로 꽃피었다. 그들은 그 대가(代價)로 루이 14세를 칭송하는 작품을 양산(量産)해냈다. 그는 무용에도 큰 관심을 보는 정도를 넘어, 궁정에서 열리는 발레 무대에 아폴로나 마르스 신(神)으로 분장해서 직접 출연하여 수준 높은 춤 솜씨를 선보여 수많은 관중을 사로잡기도 했다. 그리고 1662년부터 태양왕으로서의 자신을 빛내 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무대인 베르사유 궁을 지었다. 궁정에서는 복잡하고 세밀한 에티켓인 ‘세련된 궁정 예법’을 도입했다. 만찬(晩餐)의 진행 순서, 좌석 배치와 각자 입을 옷, 취할 행동 등이 하나하나 정해졌다. 뿐만 아니라 왕의 옷을 입히는 일과 세수(洗手)를 시키는 일, 심지어 코를 풀게 하는 일 등도 다 격식대로 정해져서 그 담당자도 제각기 따로 있었다. 모든 게 격식대로였다. 베르사유의 일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각본(脚本)에 따라 움직이는 연극과 같았다.

베르사유 궁전의 탄생에 얽힌 비화(祕話) 한 토막을 들어보자. 루이 14세가 집권하여 어느 날 재무장관인 니콜라 푸케의 집들이 초대를 받고 방문했다. 그의 집은 믈룅 근처에 새로 지은 보 르 비콩뜨(Vaux le Vicomte)였는데 어마어마했는가 보다. 집들이에 왕을 포함해서 유명인사 6,000명을 초대했다니 말 다했지. 루이 14세가 집에 가보니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끝내주는 성(城)이었다. 자기 왕궁은 여기에 비하면 화장실 축에도 못 끼일 정도였다. 이때껏 보지 못했던 중앙축을 기준으로 대칭형(對稱形) 배치의 아름다움과 평면 기하학식 정원을 최초로 도입한 건축물이었다. 성내의 살롱, 벽장식 양탄자, 천장화 그리고 당시 최고의 정원과 분수대가 눈을 휘둥그레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최고의 건축가 루이스 르 보(Louis Le Vau), 정원조경사 르 노트르(Andre Le Notre), 화가 르 브룅(Charles Le Brun)을 동원해 만든 거다. 화가 머리끝까지 오른 왕이 재무장관이 제공한 침실을 물리치고 늦은 밤에 퐁텐블로(Fontainebleau) 왕궁으로 돌아간다. 당장 국무장관 콜베르에게 명하여 푸케의 비행(非行)을 조사하게 한다. 위험을 느낀 푸케는 도망가지만 왕명을 받들고 따라온 달타냥(Charles d’Artagnan)에게 체포된다. 3년에 걸친 재판에서 법원은 국외 추방령(追放令)을 내리지만 왕이 직접 개입하여 종신징역으로 바꾸어놓는다. 세기(世紀)의 사치와 호사(豪奢)를 누렸던 푸케는 왕을 초대한 집들이 한 번으로 평생을 피네롤로 감옥에서 보내다가 1680년 옥사(獄死)한다.

열받은 루이 14세는 재무장관을 처리하고, 그의 성(城) 건축에 참여했던 3인방을 불러들여 베르사유에 더 쌈빡하고 더 웅장하게 지으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들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연구해도 더 멋있게 짓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린다. 그래서 그 성을 기본으로 하여 크기만 확대하는 뻥튀기 기법으로 가닥을 잡은 거다. 이리하여 50여 년의 대역사(大役事) 끝에 만들어진 게 바로 오늘날의 베르사유 궁전이다. 호사가(好事家)들의 야설(野說)에,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어 귀족들이 궁전 정원의 아무 데서나 똥을 쌌기 때문에 엄청 더러웠다는 것이다. 이 야설(野說)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당시 실제로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라 부를 만한 공간이 있긴 했으나 그 수가 규모에 비해 적었고, 흔히 아는 수세식 화장실도 아니었다. 방에 약 350개의 요강이나 의자형 변기(Chaise Percee) 등을 놓고 용변을 처리했다고 하나 궁을 이용하는 사람 수에 비하면 너무 적은 숫자였다. 내용물은 하인을 시켜서 정원에 갖다 버리게 했다. 문제는 정원에 분뇨(糞尿)만 적절히 처리하는 공간이 없어서 하인들이 요강의 내용물을 정원 아무 데나 갖다 버렸다는 것. 당연히 정원 전체가 악취(惡臭)로 가득할 때도 많았다. 그러다가 루이 15세 치하인 1738년경에 와서야 '영국식 공간(Lieu a l'Anglaise)'이란 명칭으로 말하자면 영국에서 들여온 수세식 화장실을 궁전 실내에 설치했고, 그제야 악취 문제도 조금 해결할 수 있었다. 아무튼 베르사유 궁전은 정원까지 합치면 그 면적만 8백만㎡(약 2백42만 평)이고, 궁전만 보면 63,000㎡(19,000평)이 넘는 규모이고, 방은 무려 2,300여 개가 있다니 화장실이 부족한 건 사실에 가깝겠다.

다섯 살에 왕좌에 오른 루이 14세. 모후(母后)와 마자랭의 섭정 아래 어린 그가 누리던 낙(樂)이라곤 발레와 음악뿐이다. 루이 14세는 절대 권력을 장악하며 태양왕(太陽王)이라 불리었는데 이는 곧 발레 덕분이다. 15세기 이탈리아에서 ‘귀족들의 춤’으로 시작된 발레는 앙리 2세의 왕비였던 카트린 메디시스의 적극적인 도입으로 프랑스 왕실에 전파되었다. 루이 14세는 11세 때 발레를 처음 접하게 되고 완전히 빠지게 된다. 그는 일주일에 몇 차례나 발레리노로 신하나 국민들 앞에서 공연을 펼쳤다. 그는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스타 발레리노'였다. 15살에 <밤의 발레(Ballet de la Nuit)>의 주인공 '태양신 아폴로'역을 맡은 데서 ‘태양왕’이란 별명이 유래했다. 그는 온통 황금색으로 치장한 복장과 궁정 안의 각종 장식을 황금빛으로 했다. 무용가(舞踊家) 보샹에게 20년이 넘도록 춤 교습을 받았다. 절대적인 권력자였던 그는 발레의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고, 왕립무용아카데미와 오페라아카데미를 설립하는 등 프랑스가 발레의 중심이 되고, 오늘날까지 내려오는 파리오페라발레학교(Ecole de danse de l'Opera national de Paris)는 300년이 넘는 전통을 자랑한다. 그러니까 자연히 궁정 작곡가 장 바티스트 륄리의 음악은 희극작가 몰리에르의 희극과 함께 루이 14세의 권력에 복속(服屬)했다.

이런 베르사유궁에 국왕 전용 침대만 413개를 갖췄다는 말이 있는데, 도대체 매일 숨바꼭질하면서 얼마나 여색(女色)을 탐한 호색한(好色漢)인가! 그러니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그 앞에서 꼬리를 흔들며 아양을 떨었을까. 원래 루이 14세의 첫사랑은 재상 마자랭의 조카 마리 만치니였는데, 이탈리아 출신으로 신분이 낮다고 마자랭과 모후가 반대해서 결혼을 못하고 그녀는 이태리로 추방당하고 말았다. 오늘의 주인공 ‘프랑스의 장희빈’ "몽테스팡(Marquise de Montespan)"이라는 여자도 그런 여자들 중의 하나였다. 몽테스팡은 1640년에 푸아투 지방의 뤼삭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660년 왕비 마리 테레즈의 결혼식 때, 들러리로 처음 궁정에 들어왔고, 1663년에 몽테스팡 후작(侯爵)과 혼인을 했다. 몽테스팡(Montespan)이란 ‘스페인의 산(Mont d'Espagne)’이란 뜻인데, 피레네 산맥지방 가문의 사람들이란 뜻이다. 한 미모를 해서, 풍성한 갈색머리, 쫀득쫀득한 피부, 탱글탱글하고 빵빵한 몸매, 그뿐이 아니라 재능, 기지, 재치, 유머를 골고루 갖춘, 한마디로 끝내주는 여자였단다. 사교계의 경쟁자이며 유명한 서간문(書簡文)의 저자였던 세비네 후작부인의 표현에 따르면 ‘비할 데 없이 아름다운 부인’, ‘의기양양한 미모’라고 했다. 하지만 파리 궁정에는 그 정도의 여자는 수두룩 빽빽했다. 그런 까닭에 몽테스팡은 궁정에 출입한 지 5년 다 돼가도록 루이 14세의 눈길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그녀가 왕비의 시녀가 돼서야 비로소 루이 14세는 그녀의 존재를 깨닫는다. 그러나 14세는 이미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라는 야리야리한 애첩(愛妾)에게 푹 빠져 있을 때였다.

그래서 "몽테스팡" 인지 "몸빼빤스" 인지 별 관심도 없고, 그저 소 닭 보듯 한다. 모든 귀부인들이 가슴골을 풀어헤치고 왕에게 대드는데, 오로지 몽테스팡만이 애써 조신하게 거절의 눈빛을 내려 까니까 왕으로서도 흥미가 당겼던 거다. 그런 개 무시 전략이 도리어 사나이의 가슴에 불을 댕기는 효과가 있었다. 그녀는 매우 정중(鄭重)하고 예절 바른 태도로 이를 사양했다. 그러니 국왕은 그녀를 더욱 단념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 마음이 아무래도 왕에게 흔들릴 것 같아요.” 그러자 몽테스팡 후작은 “그럼, 흔들리시오. 그럼 나는 돈과 권력을 챙기겠소.”라고 매우 자신만만하게 응수했다. 결국 그녀가 국왕의 유혹에 저항을 포기했을 때, 그녀의 남편이 했다는 언동(言動)은 놀랍기 그지없다. “그대에게 태양신(太陽神)이 세(貰)를 들었으니, 이제 우리 집에 돈이 굴러들어 오겠군!” 그러나 그는 곧 마누라의 불륜에 진노(震怒)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그녀는 국왕에게 몸과 마음이 모두 가 버렸고, 그 후 15여 년 동안이나 국왕의 총희(寵姬)로 곁에 머무르게 된다. 그는 자기 마차를 검은색으로 도색(塗色)하고, 조선시대에 ‘오쟁이 진 신세’를 프랑스풍으로 자조(自嘲)하는 뜻으로 거대한 사슴뿔을 달거나 검을 부러뜨리는 등, 당대의 귀족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 반항의 제스처를 두려움 없이 행한다. 그는 파리의 창녀들을 섭렵(涉獵)하면서 아내를 통해 왕에게 에이즈나 성병(性病)이 옮겨지도록 시도했다. 또 빈 관(棺)을 땅에 묻음으로써 아내의 장례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세상의 온갖 조롱과 우스개의 대상이 됐으므로 불구하고, 조금도 굴하지 않고 이렇듯 기괴(奇怪)한 행동들을 감행했던 몽테스팡 후작이다. 몽테스팡 후작이 뒤늦게 거세게 반발하자, 국왕은 그를 바스티유감옥에 처넣기도 했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프랑스 소설가 장 퇼레가 쓴 <몽테스팡 수난기>에서 마누라를 빼앗긴 남자 즉 오쟁이를 진, 힘없는 사나이의 복합적인 심리를 파악할 수 있다.

국왕의 공식적인 애첩이 된 그녀는 7명이나 되는 사생아를 낳았다. 왕의 첫 번째 애첩인 루이즈 여공작과의 사랑이 가슴으로 느끼는 부드러운 애정이었다면, 이 몽테스팡의 경우는 육체적 쾌락(快樂)의 추구에서 오는 감각적·정열적인 에로틱 애정을 의미했다. 원래 루이 14세는 자기의 제수(弟嫂)인 오를레앙 공작의 부인 앙리에트 안과 근친(近親) 불륜 관계였는데, 이 여자가 근친 관계를 들키지 않으려고 자기 시녀인 루이즈와 쓰리섬(Three Sum)을 타다가 도리어 팽(烹) 당하여 왕의 애인 자리를 넘겨주게 된 것이다. 몽테스팡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인이었고,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진주알처럼 희고 치열(齒列)이 고른 완벽한 치아를 자랑했다. 양치질이 일상화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는 대개 서른이 되면, 치아가 거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구취(口臭)도 심했다. 사실상 국왕 자신도 치아가 하나도 없었다. 왜냐하면 외과의사가 몽땅 치아를 뽑아 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의사 다칸은 인간의 몸 가운데 치아처럼 위험한 질병의 원인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왕의 이가 아직 건강할 때, 모조리 남김없이 뽑아 버려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루이 14세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러나 “폐하(陛下)의 건강은 곧 폐하의 영광이고 국가의 안위”란 말에 현혹되어, 결국 “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용의가 있다. 죽어도 좋으니 시행하라”며 승낙했다. 루이 14세는 마취(痲醉)도 없이 멀쩡한 이를 다 뽑아내고도 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설(一說)에 따르면, 송곳니를 뽑다가 턱까지 금이 가게 하고, 윗니와 함께 입천장의 대부분을 제거해 버렸다. 아래턱은 곧 아물었지만, 제거된 입천장은 보충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식사 때마다 왕이 포도주를 마시는 경우, 반 잔 정도가 곧바로 코를 통해 흐르는 묘기(妙技)를 보게 되었단다. 그래서 국왕이 잠자리에서 여인의 젖꼭지를 입으로 잘근잘근 깨물면서 애무해 줄 때 아프지 않고 쾌감이 극치에 올랐을 수도 있다.

몽테스팡은 거의 15여 년 동안 궁정의 실질적인 안주인으로서 왕비역할을 수행했다. 공식적인 왕비인 마리 테레즈는 스페인 국왕의 딸이지만, 성격이 워낙 소심하고 약간 모자란 데가 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조용한 여인이었다. 몽테스팡 부인은 그 유명한 극작가 코르네유와 몰리에르, 우화작가 라퐁텐, 음악가 륄리 등 당대의 기라성(綺羅星) 같은 문인과 예술가를 재정적으로 후원했다. 루이 14세는 파리에 오는 각국 대사들에게 애첩의 미모와 재치를 정치적으로 매우 효과적으로 잘 이용했다. 그러나 몽테스팡 부인은 극도로 투기(妬忌)가 심한 여인이었다. 그녀는 국왕이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는 것조차도 참지 못할 정도로 질투심이 강했다. 그러나 밤의 야수(野獸) 루이 14세가 미녀를 싫어할 수 없지 않은가. 왕은 몽테스팡과의 사이에 낳은 사생아(私生兒)들의 가정교사인 맹트농(Maintenon) 부인과 그녀 몰래 스리 살짝 즐기고 있었는데, 싱싱한 영계 퀸카 퐁탕주(Fontanges)가 등장한 것이다. 퐁탕주는 드 스코라이 백작의 딸이었는데, 몽테스팡보다 20년 젊었으니 게임의 상대가 될 수 없음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 그녀에 대한 찬사(讚辭)가 ‘지상의 천사’였다니 안 봐도 비디오였다. 베르사유 궁의 비밀의 방으로 그녀의 짐을 옮기도록 했다. 궁정의 모든 분위기가 바뀌었다. 축제와 음악회, 사냥 같은 궁정의 모든 행사들이 국왕의 새 애인을 위해 열렸다. 그녀는 ‘퐁탕주 스타일’이라는 유명한 헤어스타일을 후세에 남기기도 했다. 날씨가 화창한 어느 날 퐁탕주는 말을 타고 왕과 같이 사냥을 나가서 퐁텐블로 숲을 질주하다가 그만 공들여 치장한 머리가 나뭇가지에 걸려 엉클어졌다. 그러자 국왕 앞에 나타나기 전에, 그녀는 안장(鞍裝) 위에서 얼른 머리를 모두 위로 틀어 올려 손수건으로 묶고, 리본으로 장식한 것이다. 국왕은 그것을 몹시 매력적이라고 칭찬했고, 그 헤어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할 것을 명했다. 그다음 날 궁정의 모든 여성이 그 헤어스타일을 모방했다. 이 퐁탕주 헤어스타일은 그렇게 발생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퐁탕주는 어릴 때 자기의 일생에 대한 꿈을 꾸었고, 카푸친 수도회 신부에게 고해성사(告解聖事)를 하고 조언을 들었으나 따르지 않고 꿈의 내용대로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자기 딴에는 열라 예쁘다고 콧대 세우며 루이 14세를 밤마다 못 살게 굴고, 그의 눈길이 스쳐가는 모든 여인에게 독사(毒蛇)의 눈으로 레이저를 쏘던 몽테스팡은 이를 박박 갈면서 왕의 마음을 다시 사로잡기 위한 계략을 꾸민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미약(媚藥)과 흑미사"로 유명한 마법사 라 부아쟁이다. 라 부아쟁은 미용용품 판매부터 낙태, 점술, 저주, 주술 등을 해줬는데, 당시에 매우 유명해서 귀부인들의 마차가 줄을 섰다고 할 정도다. 악마를 찬양하는 흑미사는 성당에서 쫓겨난 신부들이 맡았는데, 기독교미사를 모독(冒瀆)하는 이단의 사교(邪敎)다. 제단의 십자가를 거꾸로 세우고, 사제는 검은 망토를 입고, 기도문을 역으로 읽는다. 제단에 몽테스팡을 나체로 눕히고, 채집해 온 왕의 땀을 바르고, 그녀의 사타구니에 성배를 끼운다. 사제는 그녀의 배 위에서 갓난아기의 목을 베어 그 피를 조금 마시고, 뿌리면서 소원을 비는 비밀의식이다. 그리고 영아(嬰兒)의 시체를 태우고, 내장만 빼내서 사랑의 묘약(妙藥)을 만드는데 내장, 벌레, 온갖 오물이 들어간 사실상 독약 수준이다. 몽테스팡은 그 미약(媚藥)을 국왕의 음식에 몰래 타 넣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적(戀敵)의 인형을 만들어 칼로 찌르며 저주(咀呪) 의식도 했고, 얼굴이 우둘투둘해지는 약을 몰래 음식에 타서 먹이기도 했다. 하지만 주술(呪術)과 흑미사, 사랑의 미약도 약발이 통하지 않는 게 젊음인 걸 그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계 퐁탕주의 청초, 섹시, 아담, 요염(妖艶)한 모습은 너무너무 눈부셔서 몽테스팡이 성형외과에 가서 아무리 견적을 내어도 애당초 게임이 안 되었다. 또한 가정교사 맹트농 부인의 교양과 학문, 마음씨 등에서 한 수 밑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클로드 드 빈 등 무수한 새로운 여자들을 모두 상대해서 싸우기도 지치게 되었다.

할 수 없이 몽테스팡은 파리은행 발행 프랑화(貨) 신권(新券)을 싸들고 또 마법사를 찾아간다. 새로운 골 때리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차라리 왕을 죽이고 내가 실권 잡으면 안 될까? 국왕 사이에서 낳은 자식만 7명이니까 그중 한 명을 왕에 앉히고, 나는 그저 영계 호스트들하고 탱자 가라사대 하는 게 좋잖겠어?" 그녀는 마법사 라 부아쟁에게 독약(毒藥) 바른 편지를 제조토록 명령한다. 그 편지를 왕이 침을 발라가며 읽다가 침을 삼켜서 꼴까닥 하는 방법을 쓴 거다. 그렇지만 이 암살 음모는 도중에 뻐그러져 버린다. 겁이 많은 새가슴 마법사가 독약 편지를 불태워 버린 거다. 그러던 어느 날, 파리에서 1670년 이후 일어난 연쇄 독약 사건을 검경합동 수사반이 수사하기 시작해서 이 마법사 저택을 덮친다. 수사관들이 저택을 수색하면서 찾아낸 증거물들은 프랑스를 경악에 빠뜨릴만한 엽기적인 것들이다. 낙태약 제조실, 흑미사에 사용하는 도구, 영아(嬰兒) 시체를 태우는 소각기, 더구나 마당을 파헤치자 2,500여 구의 갓난아기 유골이 나왔던 거다. 당시 유럽사회에 암암리에 퍼져있던 "악마에게 바치는 흑미사"가 이곳에서 진행됐다는 확고한 증거물인 것이다. 국왕은 대로(大怒)하여 철저한 규명을 명령했고, 상상을 초월하는 고문을 통해 흑미사에 참여했던 사람 중 104명이 유죄판결을 받아 36명을 사형시키고 나머지는 모두 갤리선의 노예로 만들어 버렸다. 필자가 쓴 <악의 화신 – 블랑빌리에> 후작부인도 독약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당했다. 라 부아쟁은 사형을 언도받았고, 파리의 그레브 광장에서 산 채로 화형(火刑)을 당했다. 다행히 초창기 증거물에서 몽테스팡은 피해 갔으나, 마법사 딸이 밀고(密告)를 해서 애첩이었던 몽테스팡도 관련된 게 드러나고 말았다. 그녀가 미약을 지어 간 것과 흑미사를 올렸다는 게 밝혀진 거다. 이 보고를 받은 14세는 어쩐지 마담 몽테스팡과 식사를 하고 나면 항상 원인 모를 두통에 시달렸는데, 이때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자칫 이 사건이 반대파에게 빌미를 주어 왕권이 위협받게 되는 것을 우려해 서둘러 수사종결을 지시한다. 몽테스팡은 운 좋게 처벌당하지 않았으나 살아있어도 죽은 목숨보다 못한 처지였다고 한다. 10여 년간 궁에 머물게 했지만, 왕은 대외적 체면상 공식 석상에 그녀를 참석시켜 주었을 뿐 끝끝내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버러지 취급했던 거다.

사랑에 대한 지나친 독점욕으로 화려함의 극치에서 수모(受侮)의 나락으로 떨어진 몽테스팡은 말년에 수도원에 들어가 67살로 사망했다고 한다. 몽테스팡은 호주가(好酒家)였다. 귀부인으로 태어났지만 궁정 창부(娼婦) 같은 일생을 살았다. 샴페인을 목욕하듯 주야로 마셨고, 베르사유 접견실에서도 술을 퍼마시는 그녀는 어느 때는 속옷까지 벗어버리고 맨살로 술병만 안고 있는 때도 있었다. 왕도 정나미가 뚝 떨어져 고개를 흔들었다고 한다. 수녀원에서 몽테스팡 부인은 루이즈 라 발리에르에게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었고, 루이즈는 이를 받아들여줬다고 한다. 이후 자선활동을 비롯한 선행을 하며 살던 몽테스팡 부인은 1707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몽테스팡 부인이 낳은 루이 14세의 아이들 가운데 4명이 생존해 있었지만, 왕은 자녀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사랑에 대한 지나친 독점욕으로 화려함의 극치에서 수모(受侮)의 나락으로 떨어진 몽테스팡은 말년에 수도원에 들어가 67살로 사망했다고 한다. 몽테스팡은 호주가(好酒家)였다. 귀부인으로 태어났지만 궁정 창부(娼婦) 같은 일생을 살았다. 샴페인을 목욕하듯 주야로 마셨고, 베르사유 접견실에서도 술을 퍼마시는 그녀는 어느 때는 속옷까지 벗어버리고 맨살로 술병만 안고 있는 때도 있었다. 왕도 정나미가 뚝 떨어져 고개를 흔들었다고 한다. 수녀원에서 몽테스팡 부인은 루이즈 라 발리에르에게 지난날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빌었고, 루이즈는 이를 받아들여줬다고 한다. 이후 자선활동을 비롯한 선행을 하며 살던 몽테스팡 부인은 1707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녀가 죽었을 때 몽테스팡 부인이 낳은 루이 14세의 아이들 가운데 4명이 생존해 있었지만, 왕은 자녀들이 어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것을 금지했다고 한다.

루이 14세는 장자(長子) 그랑 도팽 루이를 왕세자로 세웠는데, 1711년에 그가 갑자기 숨지고, 그다음 왕위 계승권자인 부르고뉴 공작 부자(父子)까지 이듬해에 사망한다.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맹트농 부인의 소행이라는 뒷말도 무성했다. 루이 14세는 마지막 몇 년을 지병(持病)의 고통뿐 아니라 암살의 공포까지 느끼며 보내야만 했다. 77세를 살면서 왕위에 72년 4개월간 통치했으니 전 세계 역사상 두 번째로 오래 집권한 왕이었다. 최장기 집권자는 고트왕국의 에르마나리크 1세로 무려 80년을 재위했다고 한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가까웠을 때, 그는 4살짜리 증손자인 미래의 루이 15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를 닮지 말거라. 전쟁을 좋아하지도 말고 이웃나라와 화친하도록 해라. 늘 신을 경건히 섬기고, 백성들이 신을 편안히 섬길 수 있게 도와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군주가 되어야 하는데,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단다.” 그는 왕궁의 공연뿐만 아니라 사생활도 세밀하게 공개한 왕이었다. 일요일의 만찬은 누구나 볼 수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루이 14세의 삶은 계란 까먹는 모습이 우아하다고 소문이 자자(藉藉)하여 구경꾼들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왕은 그런 국민들의 기대에 답하기 위해 한 번에 5개씩 까먹기도 했다. 루이 14세의 식탐은 대단했다고 알려졌는데 연회가 열릴 때면 4종류의 수프, 꿩 2마리, 큰 샐러드 한 접시, 두꺼운 햄 2조각, 마늘소스로 양념된 양고기 한 접시, 페이스트리 한 접시, 마지막으로 과일과 삶은 계란을 먹었다. 평민이라 해도 정장(正裝)을 제대로 갖추면 궁에 마음대로 들어올 수 있어서, 궁 앞에는 당시 정장에 필수요소인 검(劍)의 대여점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왕비의 옷 입는 법, 화장법, 심지어 출산 장면까지도 공개되었다고 하는데, 특히나 출산 때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산모(産母)인 왕비가 기절해 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출산 장면을 공개하는 것은 사산(死産) 여부나 태아(胎兒) 바꿔치기를 감시하기 위한 제도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의 이름은 패션과 술에서 살아남아 이 시대에도 찬사(讚辭)의 대상이다. ‘루이까또즈’는 폴 바랏(Paul Barrate)이 루이 14세를 나타내는 불어(佛語)로 패션 브랜드명을 쓴 것이다. 또 브랜디 종류인 코냑에 루이 14세를 사용하고 있다. 제일 비싼 코냑인 루이 13세 보단 아래이지만 그런대로 잘 나가는 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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