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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r 30. 2023

(19) 중국을 요리한 고려 여인 - 기황후

★ 18禁 역사 읽기 ★ (230329)

유구(悠久)한 역사의 중국에 황제의 마누라 중 유일(唯一)하게 공녀(貢女)로 끌려온 외국 여인이 정비(正妃)가 된 사례가 있다. 그것도 역사상 가장 영토가 넓어서 로마에 필적(匹敵)할 대제국 황제의 황후(皇后)가 이방인(異邦人)인 고려 여인이라는 사실이 이채(異彩)롭지 않은가? 그리고 그 여인으로 인해 그 거대했던 왕조(王朝)가 멸망했다는 사실도 역사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그 여인이 바로 원(元) 나라 순제(顺帝)의 황후였던 기황후(奇皇后)이다. 칭기즈칸(成吉思汗)이 세운 원(元) 나라는 역사상 가장 넓은 대륙을 정복(征服)했던 나라다. 고려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 동남아, 러시아, 중동, 유럽 인근까지 초토화(焦土化)시킨 대단한 나라다. 당시 세계적인 초강대국 원(元) 나라에 바쳐진 고려국의 연약한 공녀(貢女)가 어떤 능력과 미모(美貌)와 궁내(宮內)의 권모술수(權謀術數)로 황제의 본처 자리에 올랐을까? 또 어떻게 해서 원(元) 나라를 말아먹었을까? 이에 대하여 국내 모(謀) 방송국에서 드라마로 제작하여 방송했지만, 좀 더 간략하고 야설(野說) 답게 되짚어 보고자 한다.

때는 고려 말 충숙왕(忠肅王 : 1294~1339) 무렵 고려는 원(元) 나라의 속국(屬國)처럼 꼼짝 못 하고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해야 했다. 원(元) 나라는 고려 왕자들을 볼모로 잡아다가 별 볼일 없는 후궁의 딸들을 정략적으로 붙여서 고려 내정(內政)을 좌지우지하였다. 그리고 고려에서 얼굴 반반하고 깔삼한 처녀들을 차출하여 자기네 귀족들의 첩(妾)이나 시종(侍從)으로 삼았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정신대(挺身隊)는 여기에 비하면 한참 아래 수준이다. 능력 없는 군주가 통치하는 약소국에 태어난 죄로 그 시절 이 땅의 꽃다운 처녀와 얼굴 곱상한 유부녀들이 무더기로 개고생 한 거다. 고려 원종(元宗) 당시 ‘결혼도감(結婚都監)’이나 ‘과부처녀추고별감(寡婦處女推考別監)’이라는 벼슬까지 두고 1년에 140명의 공녀(貢女)를 차출(差出)하였다. 이들은 원나라의 군사들에게도 강제로 시집을 가게 되었다. 즉 차출할 때 여자의 신분 계급에 따라, 황족과 귀족의 후궁, 궁녀, 시첩(侍妾), 시비(侍婢)에 충당을 하고, 천한 계급은 항복한 군인들의 마누라로 준 것이다.

이러한 공녀 차출은 조선 건국 후 세종(世宗) 때에 와서야 폐지되게 되었다. 이 기간이 170여 년간 공식적인 기록으로만 2,000명의 여자들이 끌려갔고, 비공식적으로 데려간 인원까지 합하면 몇 천 명은 족히 될 것이다. 심지어 어떤 해는 1년에 500명을 차출하기도 했다. 한반도의 여성 인구 감축기(減縮期)인 셈이다. 딸을 낳으면 숨기거나 남장(男裝)을 하고 키워야 했다. 대부분의 여인들은 돌아오지 못하고 먼 이국땅에서 평생 고생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일부 미모가 출중한 경우 기황후처럼 출세를 한 경우도 있다. 원(元) 나라 세조(世祖)의 후궁 이씨(李氏), 인종(仁宗)의 후궁(後宮) 영비(英妃), 소종(昭宗)의 권황후와 김황후는 딸의 아비들이 본인의 출세를 위해 혼인하는 모양세로 바친 경우이다. 명나라 영락제(영락제)의 후궁인 여비한씨(麗妃韓氏), 선덕제의 후궁인 공신부인(恭愼夫人) 한씨(韓氏) 등이 출세했는데, 이 두 여인은 조선의 공신 한확(韓確)의 누이동생들로 강제 공녀(貢女)인지 자진 봉헌(奉獻)인지 아리송하다. 여비한씨는 영락제가 죽자 무덤에 같이 순장(殉葬)되었다. 여동생이 또한 언니가 당한 황제의 손자에게 후궁으로 가게 되자 오빠를 원망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고려 행주(幸州)에 잔머리 잘 굴리는 공무원이 있었으니 바로 기자오(奇子敖)라는 놈이다. 이놈은 5남 2녀를 두었는데, 그중 1315년에 태어난 기승랑(奇承娘)이 기가 막히게 예쁜 막내딸이었다. 우리나라 사서(史書)에는 본명이 나타나지 않는데, 중국의 대부분 싸이트에는 본명이 기승랑(奇承娘)으로 불린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이 친구는 자기 딸의 미모를 이용해 팔자 고치려는 약아빠진 놈이다. 원나라에서 사신(使臣)이 오자 그를 매수해서 자기 딸을 귀족 집이 아닌 원나라 황실의 시녀(侍女)로 써 달라고 청탁을 했다. 이리하여 기승랑(奇承娘)은 아비의 푸른 꿈을 이루어 주려고, 팔자를 고치러 원나라로 팔려 간다. 당시 대부분의 공녀(貢女)들은 원나라 귀족들의 첩실이 되려고 노력했으나 그녀만은 아예 그쪽으로 눈도 껌뻑 안 했다. 아버지의 신신당부와 관계 요로(要路)에 대한 청탁도 있었거니와 한 미모 하는 자신의 쭉쭉 빵빵한 몸매를 믿고 오로지 황제의 눈에 띄기만을 줄곧 기다렸던 거다.

그러나 구중궁궐(九重宮闕)에 중국과 속국(屬國)에서 뽑아 올린 쭉쭉 빵빵한 궁녀가 얼마나 많겠는가. 동사무소나 은행에서처럼 순번 뽑아 기다리면 흰머리 나기 전에 그녀에게 차례가 오겠는가? 그래서 얼굴도 예쁘지만 잔머리도 팽팽 돌아가는 그녀가 아비를 닮아 짱구를 마구 굴렸단다. 원 황실에 포진한 고려 출신 환관(宦官)들을 적극 활용하는 거다. 마침 거기에  고용보(高龍普)라는 야심 많은 환관이 있었다. 그녀와 고용보는 서로의 목표가 같은 면에서 의기투합하여 작전을 짜서 실행하게 되었다. 고용보로서도 그녀라면 황제인 순제(1320~1370)를 떡 주무르듯이 주무를 수 있으리라고 판단한 거다. 그래서 은근슬쩍 그녀를 황제의 다과(茶果)를 시봉 하는 궁녀로 만들었다. 어느 날 황제의 다과 당번 궁녀가 생리휴가(生理休暇)를 급히 쓰는 바람에 그 기회를 타서 용케 대타로 나서게 된 거다. 고용보로부터 준비하라는 연락을 받은 그녀는 신바람이 나고 콧바람이 들었다. 장미수(薔薇水)에 목욕을 하고, 고려 스타일의 자연 화장법에, 은밀하고 중요한 곳에 향수(香水)도 칙칙 뿌리고, 뽀글뽀글 가글 하고, 향기 나는 질 세정제로 비데도 했다. 향기 좋은 최고급 커피 블루마운틴을 따끈하게 데워서 보온병에 넣고 비단 보자기에 소중하게 싸서 부여안고 황제의 집무실로 고고싱 했다. 티켓은 따로 끊지 않고 외상으로 줄 생각이었다. 연말에 정산하고 많이 이용만 해 주십사는 마음이었지.

어라, 황제 집무실에 도달하니 무슨 황제가 업무는 보이콧하고 씨에스타(Siesta)를 즐기고 있었네. 정말 고려왕이나 대국(大國)의 황제나 밤에 뭔 짓거리를 줄 창 하다가 티켓 다방 퀸카가 왔는데도 모르고 곤히 낮잠을 자고 있는 게 아닌가? 잠자는 호랑이나 사자의 콧 털을 건드려 깨우는 것보다 조용히 피하거나 기다리는 게 최선인 걸 그녀는 객지 궁궐 밥 1년도 안 되어서 체득(體得)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아한 커피포트를 저고리 앞섶을 열고 가슴속에 깊숙이 품어 적절히 보온시키려고 했다. 커피와 우유(?)가 같이 따스하게 보온을 하게 된 것이다. 하늘의 도움인지, 기도발이 받았는지 그 순간 황제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넌 누군데 감히 내 방에 와서 도자기 차병(茶甁)을 훔치려고 하느냐?”한다. 깜짝 놀란 그녀지만 역시 머리가 슈퍼 컴퓨터처럼 돌아서 “커피를 가슴에 넣어 보온하는 거지, 감히 훔치다니요. 도자기는 중국제 보다 고려청자가 한 수 위기 때문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맹랑하게 대답하자, 황제가 급격히 흥미(興味)가 당긴다. “고려청자가 그리 좋은가? 니 몸매보다?”라고 묻자. 그녀가 “고려청자는 세상에서 가장 미려하고 수려하지만 온기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황제께서 좋아하실 3가지의 기(氣)가 있습니다. 따스한 온기와 황홀한 향기와 감미로운 물기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이 한마디에 뻑 간 황제가 업무고 뭐고 팽개치고 그녀의 손을 잡고 바로 침실로 직행한 거다.

황제는 그녀의 사려 깊은 행동과 빼어난 미모, 사람의 가슴을 녹이는 화술, 그리고 총명함에 감명을 받은 것이다. 남자로 치면 문무(文武)를 겸비한 것이고, 여자로 치면 미스코리아가 서울대 수석인 것이다. 그러니 다짜고짜 그녀를 침실로 데려가지 않을 멍청한 황제가 있겠는가. “너는 참으로 보기보다 속이 좁구나. 난 속 좁은 여자가 최고다. 고려여인은 다 그러하냐?” 그녀의 환상(幻像)의 서비스와 테크닉에 홍콩까지 몇 번을 왕복한 황제가 헬헬 거리면서 내뱉은 첫 코멘트였다. 그 시간 이후로 황제 눈에는 다른 궁녀들은 들어오지 않고 오로지 기소저만을 끼고 살게 된다. 아주 고구마 삶는 가마솥에 푹 빠진 거다. 이 황제가 바로 원나라의 머저리 순제(順帝)다. 명종(明宗)의 장자로서 이름이 토곤 테무르이고, 황태자였던 1330년 7월 동생 영종(寧宗) 등과의 황실내부 싸움에 패배해 고려의 황해에 있는 대청도에 잠시 유배된 적이 있었다. 1년 5개월을 대청도에서 보낸 그는 원나라로 돌아가 2년 후에 황제(순제)에 즉위한다. 대제국의 후계자 시절에 고려의 작은 섬에 유배되었던 기억은 어려운 시절에 대한 향수와 어우러져 고려 여인 기씨(奇氏)에 대한 호감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원래 육정(肉情)이라는 것이 금방 생기는 게 아니고 자주 또 오래 해야 진하게 묻어나는 거다. 육정(肉情)이 들면 사랑보다 더 진한 것이 그것이다. 순제와 기씨의 밤낮 침대 미팅이 잦다 보니 덜커덕 아들을 낳게 된다. 그때까지 후사(後嗣)가 없던 순제는 입이 귀에 걸리도록 좋아한다. 여염집 아낙들도 아들 낳으면 목에 깁스하고 다니는데, 후사(後嗣)가 없는 황실에 아들 낳아 주었으니 게임 끝난 거다. 기씨는 졸지에 궁녀에서 귀인(貴人)으로 신분이 수직 상승한다. 순제를 밤낮으로 흐물흐물 녹여서 손아귀에 넣은 기씨는 다른 궁중 여인들을 깔아뭉개고 순제 옆에 얼씬 못하게 한다. 심지어 정비(正妃)인 황후까지도. 또한 조정 중신들을 주물럭 등심처럼 가지고 놀며 본 마누라를 제치고 황후로 등극하고자 출세 로드맵을 만들어 간다. 고려인 출신 환관(宦官)들과 결탁해서 1340년 기씨가 후궁에서 제2황후로 승진하자, 최초로 기씨를 등용해서 황제에게 진상(進上)한 환관 고용보의 출셋길이 활짝 열렸다. 고용보(高龍普)는 본래 탄광에서 일하던 광부였다. 기황후는 그녀를 위해 설치된 자정원(資政院)의 원사(院使)로 고용보를 임명했다. 자정원(資政院)은 내명부(內命婦)의 재정 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원래 태황태후(太皇太后) 부다리시가 관리하던 휘정원(徽政院)이었는데, 순제가 부다리시를 폐위(廢位)하고 이를 기황후에게 맡겼다. 그 후 차츰 궁중의 사람과 물자, 사물을 관장하는 기관으로 변모(變貌)했다. 하지만 이는 곧 기황후의 재정을 담당하는 기구로 된 것이다. 결단력이 강하고 정치적 감각이 뛰어난 기황후는 곧 황제에 버금가는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자 그녀를 보좌하는 고용보의 권세도 점점 커져갔다. 원나라 황실 가족인 친왕(親王)과 최고 신하인 승상(丞相)조차 그의 눈치를 살필 정도가 되었다. 고용보의 뒤를 이어 자정원사(資政院使)가 된 인물은 박불화(朴不花)다. 박불화는 기황후와 같은 고향 출신이란 인연이 있었다. 고용보는 박불화를 추천하였고, 두 사람은 협력하여 기황후의 수족(手足)이 되었다. 이들은 원(元)의 국정에 간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 조정을 발바닥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고 마음대로 좌지우지(左之右之)했다.

이때 위기감을 느낀 몽골족 출신 황후가 기씨(奇氏)에게 심한 질투를 하여, 매질은 기본이고 채찍으로 때려 온몸에 검고 푸른 멍이 들었으며, 심하면 불 인두로 다림질까지 했다. 드라마 <더 글로리>의 박연진이 문동은에게 고데기로 고문하던 건 애들 장난 수준이었다. 인두와 고데기는 하늘과 땅 차이다. 원래 황후는 황제의 반대파 출신의 딸이었기 대문에 황제는 결혼 초창기부터 황후를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냉대받던 황후가 결정적 악수(惡手)를 두게 된다. 오빠를 충동질해서 역모(逆謀)를 꾀하려다가 발각(發覺)이 되는 바람에 오빠는 처형되고, 황후는 폐위(廢位) 돼 버린다. 원래 황후 타나시리는 순제의 아버지를 죽인 삼촌인 문종(文宗)의 측근 신하 당채시의 딸이었기 때문에 순제가 황후에게 애정이 없었다. 황후가 살아있는 한 두고두고 화근이 될 걸 염려한 기씨는 고려인 출신 밀사(密使)를 보내서 황후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린다. 원나라 조정(朝廷)에서 ‘의문사 진상규명 위원회’를 만들어 조사 결과 기씨에게 혐의를 두었으나, 그녀의 위세가 워낙 서슬이 퍼래서 문정권(文正權)의 검찰처럼 은근슬쩍, 흐지부지 묻어버리고 만다. 여기서 기황후는 살아있는 권력으로서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제 걸리적거릴 게 없다고 생각한 기씨가 남편에게 황후 시켜 달라고 떼를 써서 승낙을 얻어냈으나 원(元)의 실권자였던 바얀과 귀족세력들이 떼거리로 들고일어나 반대한다. 정상적인 혼인 관계에 의한 것 말고는 다른 나라 여자가 황후가 된 전례가 없다는 게 그 이유였다. 약삭빠른 기씨는 일단 한 발 뒤로 물러나고, 몽골족 바얀 후투그를 새로운 제1황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당근 기황후는 몽골 귀족세력을 매우 눈에 가시로 생각하게 된다. 이때 박불화(朴不花)가 모든 궁정 일의 총감독으로서 기황후의 최측근이 된다. 박불화는 고려 행주(幸州) 출신으로 기황후와 같은 마을에서 환관이 된 사내인데, 기황후 덕에 벼락 출세해서 내시 두목자리인 태감(太監)에 오른 놈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해외에 나가면 동포들끼리 자연스럽게 뭉치게 되어 있듯이 기황후와 박불화는 권력을 요리할 음모를 꾸민다. 기황후는 자정원을 통하여 엄청난 부를 쌓았으니, 이를 활용하여 거사금으로 박불화를 통하여 홍보 작전과 굳히기 작전을 추진한다. 막대한 돈을 영세민(零細民)에게 마구 뿌리면서 기황후 찬양 작업에 돌입하고, 몽골 출신 귀족세력들의 탈세와 비리 사실을 언론에 슬슬 공개하는 양면작전을 구사한다. 순진한 백성들 사이에 귀족들을 증오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윽고 박불화는 기황후 추종세력을 끌어 모아서 귀족세력들에게 탈세와 반역의 굴레를 씌워 모조리 주살(誅殺)한다. 눈에 가시 같았던 귀족들 반대세력이 없어지자 기황후는 확고한 제2황후 자리에 대못을 박는다. 그리고 순제(혜종)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즉 나중에 북원(北元)의 소종(昭宗)에 오를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冊封)을 받도록 한다. 확실한 궁궐의 안주인이 되었고, 몽골 출신 제1황후는 허수아비일 뿐 모든 실권은 제2황후인 기황후에게 쏠린다. 이때부터는 황제인 순제의 끗발도 기황후 앞에서 맥을 못 춘다. 당근 환관 박불화를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임명해 군사권도 장악했으며, 나중에는 재상(宰相)에 버금가는 정2품 영록대부(榮祿大夫)에도 임명했다.

기황후는 고향 생각이 났는지 고려 옷을 즐겨 입었으며, 황실에 고려 음식을 널리 소개하기도 했단다. 황실의 패션쇼는 당근 고려풍 일색이었다고 한다. 또한 내로라하는 원(元)의 벼슬아치들이 고려 여인을 몹시 흠모하자, 이들의 환심을 사두려고, 기황후는 조국 고려에서 여인들을 공수해서 배급하기에 바빴다. 자기와 같은 기구한 여인들을 거리낌 없이 무수히 만든 거다. 요즘 중국 당국이 아무리 막아도 불법 유통 즉 어둠의 통로를 이용한 한류(韓流) 열풍을 막을 수 없다. 이런 열렬한 한류 열풍은 따지고 보면 그 뿌리와 원조(元祖)는 바로 고려 출신 기황후다. 그러나 기황후의 욕망은 끝이 있을 수 없듯이, 소원은 오로지 오매불망(寤寐不忘) 제1황후의 자리다. 제2황후의 자리로 만족할 그녀가 아니다. Vice 즉 제2인자 자리는 힘없고 늘 불안하기만 하다는 건 역사 이래 진행형이다. 그래서 지금도 정치권에서 윤심(尹心)과 이심(李心)을 따지고, 친윤(親尹), 친명(親明), 윤핵관(尹核關)을 따지는 것이다.

그녀는 제1황후 자리를 위해 집요(執拗)하고도 잔인한 짓을 계속한다. 자신의 제1황후 승진을 반대하는 좌승상을 암살하고, 자신을 따르는 관리를 국무총리에 앉히며 황후 승진작업에 박차를 가한다. 순순히 말을 듣지 않자 남편이며 황제인 혜종 즉 순제를 압박하여 아들인 황태자에게 양위하라고 했다. 그러나 순제가 듣지 않고 버티자 기황후는 자정원을 숭정원(崇政院)이라 개명하고 전(前) 황후 바얀 후투그가 생전에 관리했던 중정원(中政院)을 숭정원에 편입시키는 등 더욱 세력을 키워 혜종을 공공연히 압박했다. 그러다가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인지는 몰라도 1365년 9월  제1황후인 바얀 후투그가 병으로 죽었다. 기황후는 자동빵으로 제1황후가 될 수 있는데도 빙정이 상한 황제가 그녀를 제1황후로 책봉을 하지 않았다. 기황후에게 매수된 많은 신하들이 기황후의 제1황후 책봉을 건의해도 그냥 깔고 뭉개었다. 하지만 결국 혜종 즉 순제는 기황후의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1365년 12월 그녀를 마침내 제1황후로 책봉했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정식 혼인(婚姻)에 의하지 않고 외국 여자가 수억 명의 국모(國母)인 황후가 되는 순간이다. 그것도 당시 흔하게 행해지던 국가 간 정략결혼이 아니라 공녀(貢女) 신분으로 자수성가(自手成家)해서 얻어낸 중국사 전무후무의 사례다. 원의 황후는 몽골족의 2대 유력가문 출신만 오를 수 있는 자리였지만 줄도 백도 없이 혈혈단신(孑孑單身)으로 궁궐에 들어와 커피 배달하던 아가씨가 최고의 대권을 거머쥔 것이다. 황제가 기황후에게 내린 제1황후 책봉(冊封) 교지(敎旨)를 보면 다음과 같은데, 당시 순제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그대로 담겨 있다. “너 설렁거(肅良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 와서 짐을 받들어 섬겼다. 너는 항상 조심하고 삼가면서, 낮밤으로 언제나 신망이 두텁고 성실했다. 너는 긴 세월을 생활은 검소하고 사람들에게는 공손하게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중궁(中宮)의 지위가 마땅히 현명한 처(妻)인 너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황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이 모두 너를 황후에 봉하라고 간청하고 있다. 액정(掖庭)의 궁녀들도 모두 너를 존경하여 따르고 있다. 그런데 너 기씨는 여러 차례 겸손하게 이를 사양하니, 너 뜻이 더욱 가상하다. 아! 너는 궁정의 일들을 신중하게 다스려, 충심으로 짐을 더욱더 잘 보좌할 수 있도록 힘써라. 너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을 더욱 환하게 밝히고 계속 이어나가서, 함께 우리 조정의 홍복(洪福)을 보존하도록 하라.”

고려 출신 황후 탄생의 순간을 눈 빠지게 기다리다가 드디어 두 손 높이 쳐들고 만세를 부른 게 누구겠는가? 김연아처럼 국위(國威)를 선양했다고 개성방송국에서 하루 종일 특별 중계방송을 하고, 특집 쇼를 했겠는가? 온 백성이 태극기를 들과 나와서 거리 응원을 했겠는가? 아니다. 만세 삼창(三唱)을 부른 그들은 고려에 있는 기황후의 아버지와 오빠들이다. 아버지 기자오(奇子敖), 오빠 기철(奇轍) 등등의 기씨들이다. 이들은 고려에서 죄다 한 자리씩 차지하고 거들먹대기 시작한다. 이들이 설치는 통에 고려 백성과 왕실은 물론 대신들도 모조리 전전긍긍(戰戰兢兢)하였다. 이들의 죄상을 따로 자세히 밝혀두어야 한다.

당시 중국과 한국의 국제 정세는 꽤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상태였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만약 기황후가 애국자이고, 눈을 크게 뜨고 대국의 정세를 잘 살펴서 바둑판을 잘 굴렸다면 동아시아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인 머저리 순제는 기황후에게 쪽도 못 쓰고, 원(元) 나라 궁궐 대신들은 고려인 환관 박불화가 꽉 쥐고 있었다. 말하자면 중국의 모든 권력을 고려인들이 틀어쥐고 있었다. 또한 고려에는 패기만만한 개혁정치가 공민왕이 있었다. 이런 호조건(好條件)이 역사에 또 어디 있는가? 기황후가 대승적(大乘的)으로 통박을 굴려 M&A 작전을 제대로 했으면 중국 땅덩어리와 고려가 통합을 하여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거대 제국을 이룰 수도 있었다. 몽골족은 우리보다 훨씬 적은 인구로 1억의 거대한 중국을 100년간 통치하였는데, 우리 고려인이라고 못할 것도 없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우리가 더 잘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정말 아쉬운 기회를 발로 차버린 것이다. 그런데 기황후는 오로지 자기 배 불리고, 놀고, 탕진(蕩盡)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제 밥그릇 제가 걷어차는 푼수 짓을 연출하게 된다. 국민들을 돌보지 않고 정쟁에만 몰두해 온 나머지 착취(搾取)와 핍박(逼迫)에 시달린 중국 백성들 사이에서는 ‘고려여인이 중국을 망친다.’라는 원성의 소리가 높았고, 원나라의 기강(紀綱)과 재정(財政)은 회생불능의 상태로 접어들게 된다. 그러니 자연 민중(民衆)의 봉기(蜂起)는 불 보듯 뻔했다.

원(元) 나라의 실질적 지배세력은 몽골족이다. 그런데 이들은 중국의 한족(漢族)을 철저히 능멸하는 정책을 펴왔다. 지배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한족(漢族) 문화를 깡그리 무시하는 몽골족에게 한족들을 중심으로 반란의 기운이 팽배(澎湃)하게 된다. 도처에서 도적들이 창궐(猖獗)하고, 홍건적(紅巾賊)이 이때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 기황후가 제1황후가 된 지 3년 만인 1368년에 비렁뱅이 중 출신 장군인 주원장(朱元璋)이 한족(漢族) 부활의 기치(旗幟)를 내세우니 몽골족 지배에 신물이 난 한족들이 앞 다퉈 휘하(麾下)에 몰려들었다. 이들이 드라마틱하게 원나라를 깨부수고 다시 한족이 주인이 되는 명(明) 나라를 세우면서 드라마틱한 기황후의 일생도 허망하게 끝나고 만다. 일부 중국 역사서에서 불세출(不世出)의 여걸(女傑)로 기록된 기황후다. 그녀에 대한 사가(史家)들의 평가는 이렇게 돼 있다. “기황후는 빼어난 미모를 지녔으나, 덕이 없고, 욕심 지나치고, 사치스러웠으며, 지독한 이기주의였다. 원(元)을 망치고, 명(明)을 일어서게 한 사악(邪惡)한 여인이다.” 또 다른 역사서에 기씨는 황후에 오른 뒤 바로 정치에 뜻을 두었다. “시간이 나면 여효경과 사서를 보았으며, 역대 황후들의 덕행에 대해 공부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오는 진상품 중에서 진귀한 식품들은 먼저 태묘에 보내 제사를 올리게 한 뒤에야 비로소 먹었다. 1358년 연경에 심한 기근이 들자 기황후는 관원에게 명령을 내려 굶주리는 백성들에게 죽을 만들어 나누어 주게 했다”고 《원사》 <후비 열전>에는 기록되어 있다. 혜종 등 황제들이 최악이라 황후는 상대적으로 덜 까인 것일 뿐, 기황후도 과도한 권력욕에 매관매직(賣官賣職)을 일삼고 정쟁(政爭)을 이끌어 원나라의 상층부를 썩어 문드러지게 했다는 것은 정사에도 기재된 분명한 사실이다. 한편 고려에서는 행주기씨 집안이 기황후를 든든한 뒷배로 삼아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채우기에만 열중했다. 기황후의 원 황실 내 권력과 위상이 커져가면서 기씨 일족의 횡포(橫暴)와 전횡 역시 날로 심각해졌고, 결국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마자 원나라와 충돌할 엄청난 각오까지 해가며 고려 내에 있었던 기씨 집안을 싸그리 쓸어버렸다. 그 후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자 기황후는 공민왕을 쫓아내고, 덕흥군을 고려의 새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군대를 보냈지만 공민왕이 파견한 최영(崔瑩), 이성계(李成桂) 장군의 군대에 의해 패배하면서 무산되고 말았다. 고려의 입장에서도 기황후는 무척 아픈 흑역사(黑歷史)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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