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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Apr 03. 2023

(20) 성형의사가 싫어한 – 클레오파트라

★ 19禁 역사 읽기 ★ (230401)

클레오파트라(Cleopatra)를 왜 성형의사(成形醫師)가 싫어할까? 블레즈 파스칼(B. Pascal)은 <팡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만약 좀 더 낮았더라면 지상의 모든 표면은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했다. 모든 성형의사는 여인의 코를 높이기만 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코를 낮추거나 높이지 않아도 되니 싫어할 수밖에 없다. 필자(筆者)의 어쭙잖은 궤변(詭辯)이다. 많은 사람들이 클레오파트라가 이집트의 여왕이니까 이집트인이라고 오해(誤解)를 한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순수 이집트 토박이 혈통이 아니다. 마케도니아 사람이다. 마케도니아가 어디냐 하면 그리스 북쪽 유럽의 화약고(火藥庫)라고 불리는 발칸반도의 중간에 있다. 즉 그리스 위쪽, 알바니아와 불가리아 사이에 이 나라가 아직도 있다. 이 나라에 BC336년에 불세출(不世出)의 대왕이 출현한다. 이름하여 알렉산더(Alexandros) 대왕이다. 이 친구는 어머니가 벼락이 배에 떨어지는 태몽(胎夢)을 꾸고 태어났다고 플루타르코스가 <영웅전>에서 설(說)을 까놓았다. 그래서 그런지 문무를 겸전(兼全)하였고, 복부인(福婦人)도 아닌데 땅 욕심이 무지하게 많아 일생을 정복하느라 허비한 친구이다. 학문도 좋아해서 당시의 그리스 석학(碩學) 아리스토텔레스를 초빙하여 CEO-MBA 과정도 듣고, 윤리학·철학·문학·정치학·자연과학·의학 등에 관심이 높았단다. 다른 나라를 원정 다닐 때도 호메로스의 시를 애송(愛誦)하며, 한 시도 책을 놓지 않고 학자를 대동하고 다녔다니 대단한 영웅임에 틀림없다. 마치 조선의 세종(世宗)처럼 학문을 숭상했는데, 세종은 너무 땅 욕심과 정복욕이 없었다. 세계 역사상 땅 재벌에는 동양의 칭기즈칸, 서양의 알렉산더가 양대 산맥이다. 칭기즈칸보다 1,500년 전에 그가 따먹은 땅이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 이집트를 아우르는 어마어마한 영토였다. 이집트 지중해 연안에 그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라는 고대 도시를 건설하였다. 알렉산더가 인도의 갠지스강까지 정복하고 세계의 대왕으로 설치다가 병에 걸려 죽게 되자 거대한 땅덩어리가 분할되어 지역 사령관 네 명이 나눠 통치하게 된다.

이 당시 이집트 총독사령부 총독(總督)이 프톨레마이오스장군이다. 마케도니아 귀족 출신인 프톨레마이오스는 알렉산더가 사망하자 제일 노른자인 이집트를 건식으로 접수하고 왕으로 등극(登極)한다. 이게 바로 프톨레마이오스왕조(BC323~BC30)의 시작이고, 클레오파트라는 바로 그 왕조의 마지막 여왕이 되는 것이다. 그들은 엄밀한 의미에서 마케도니아 정복자들이다. 그러므로 프톨레마이오스 후손들은 약 3세기에 걸쳐 이집트의 파라오로서 이집트어를 전혀 쓰지 않고, 그리스말 밖에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프톨레마이오스 파라오들은 이집트의 지배자로 군림(君臨)하는 데만 신경을 썼지 이집트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어에 능했고, 이집트의 태양신을 숭배하는 등 이집트인들의 마음에 쏙 드는 행동을 하여 단연 인기 짱이었다. 또한 클레오파트라가 유명세를 갖게 된 것은 이집트의 여성 파라오라는 것이다. 이집트에는 약 3천 년 동안 200여 명 이상의 파라오가 있었는데, 그중 여성 파라오는 4명밖에 안 된다. 그중 니토크리스와 네푸르소베크 두 여왕은 존재감이 없어서 제치면, 클레오파트라보다 약 1,400여 년 전의 하트셉수트(Hatshepsut, 1507-1458 BC) 여왕과 ‘아름다운 여인이 오셨다’라는 이름의 네페르티티(Nefertiti, 1370 – 1330 BC) 여왕이다. 사실 미인으로 치자면 네페르티티가 클레오파트라 보다 한 수 위일 것이다.

사실 클레오파트라란 이름의 뜻은 ‘그리스 왕의 왕비’를 의미하므로, 클레오파트라는 보통명사라고도 볼 수 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에서는 남자 통치자들은 전부 프톨레마이오스란 이름을 썼고, 여자 통치자들은 클레오파트라를 많이 썼기 때문에 이름 뒤에 붙는 별칭(別稱)이나 몇 세(世) 등으로 구분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클레오파트라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마지막 여왕인 클레오파트라 7세를 의미한다. 그녀는 역대 마케도니아 출신 파라오들과는 달리 이집트어는 물론 그리스어를 비롯한 7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고 한다. 절대 권력의 이집트 파라오가 7개 언어를 말할 수 있다니 놀랍지 않을 수 없다. 파라오라면 자신이 직접 외국어를 배울 필요 없이 통역하는 사람을 시키면 되는데, 클레오파트라는 특별히 외국어에 능통하여 이집트인들이 클레오파트라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인기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와서 다양한 분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우리들은 현재 실생활에서 수없이 많은 분야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만난다. 보드게임, 슬롯머신, 밸리댄서, 향수는 물론 담배 심지어는 지중해 오염 프로젝트에도 그녀의 이름이 붙어 있고, 태양 중심의 궤도를 도는 소행성에 216 클레오파트라도 있다. 더불어 1540년부터 1900년대 초까지 그녀를 주제로 한 발레 5편, 오페라 45편, 연극이 77편이나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양인의 관념상 인류 최고의 미인으로 클레오파트라를 간주하기에, 그동안 수많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영화들에 등장한 배우도 최고의 미인이었다. 클로데트 콜베르, 비비안리, 소피아 로렌,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물론 안젤리나 졸리, 모니카 베루치 등 최고의 미인들이 클레오파트라로 등장한다. 한마디로 클레오파트라로 출연할 정도가 되어야 세계적 미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클레오파트라(BC69~30)는 그야말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 아버지 프톨레마이오스 12세 아울레테스의 딸로 태어나서 18살이 되던 BC51년에 부왕(父王)이 세상을 떠나면서, 클레오파트라와 11살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하여 이집트를 공동 통치하라는 유언(遺言)을 남겼다. 따라서 여자로서 왕권을 장악하기 위한 암투나 궁중 권력 다툼 없이 자동적으로 왕권을 획득했다. 하지만 어린 동생과 최고의 권력을 나누어 가지려니 배포 큰 그녀로서는 성에 차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아마 이렇게 된 연유로 그녀가 남성 편력(遍歷)에 집착하지 않았나 보인다. 그녀가 선천적으로 색을 밝혀서 남성 편력이 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수 있으나, 필자의 생각으로는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고, 정치적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서 자기의 미모와 농염(濃艶)한 몸매를 잘 활용한 것이 아닐까 한다. 지금부터 그녀의 남성 편력만을 중심으로 설(說)을 까볼까 한다.

1. 첫 남편과 두 번째 남편 어린 남동생

BC62년에 태어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당시 11살로 이제 겨우 초등학교 4학년 정도의 소년이었다. 누나가 고3 정도의 숙성한 처녀였는데, 겨우 젖 떨어진 꼬마신랑을 남편으로 모시고 사는 것도 열불이 나는데, 국정을 공동으로 운영하자니 더 천불이 날 것이다. 당시는 권력의 독점을 위해서 근친결혼은 이집트 왕가의 일반적인 풍습이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클레오파트라의 총명함은 대단했다고 한다. 역사·문학·철학·음악 등 두루 박식함은 물론 특히 7개국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驅使)해서 이집트 교육방송의 일타 강사도 울고 갈 정도였단다. 그러나 그녀의 가장 큰 매력은 매혹적인 목소리와 화술(話術) 즉 현란하고 상대를 끌어들이는 언변(言辯)이었다. 우리는 보통 그녀를 서양최고의 미인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진실로 미인이었는지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 알 수 없고, 후세의 호사가(好事家)들과 화가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겠는가. 그녀가 남자를 유혹하는 비법은 미모에 있지 않고, 남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의 기술과 고도의 심리적 전략에 있었다는 게 정설이다. 

여왕인 그녀가 가장 주력한 정책은 로마와의 친선외교였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막강한 로마제국은 중근동 지방을 죄다 싹쓸이해서 이 지역에 남아있는 유일한 독립국은 이집트 하나뿐인 거다. 그녀는 로마 실력자인 폼페이우스을 활용 하여 이집트의 권력을 독점하고자 하는 욕심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놈의 환심을 사려고 병사와 물자를 보내는 등 갖은 아양을 다했다. 일설에는 폼페이우스를 자기 침실로 불러들인 최초의 로마인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녀의 뜻대로 되지 않고 남동생에게 작전 계획만 탄로 나서 유폐(幽閉)되는 어려운 처지가 되기도 한다.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밀려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오자 그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던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폼페이우스를 살해해 버린다. 그러자 카이사르가 군대를 일으켜 프톨레마이오스 13세를 처단해 버린다. 비록 자기에게 모반을 일으킨 정적이지만 그래도 한때 로마의 원로 정치인을 죽인 이집트 왕을 그냥 둘 수 없다는 것이 명분인데, 속으로는 클레오파트라의 야망을 이루어 준 것이다. 클레오파트라는 바로 밑의 남동생이 처단되자 곧바로 10살 난 막내 남동생 프폴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을 하고 명목상의 공동 집정을 하지만 사실상 권력을 독점하게 된 것이다.

2. 로마제국의 쿠데타와 카이사르

모든 권력은 쟁탈전이 있게 마련이다. 이즈음 로마에서도 대권을 놓고 서로 피 터지게 치고받는 싸움이 전개된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맞짱이 바로 그거다. 우리가 세계사에서 배우던 로마의 삼두(參頭) 정치는 바로 군인대표 카이사르, 귀족대표 폼페이우스, 재벌대표 크라수스가 서로 뭉쳐서 합의한 것이다. 이 세 명이 권력을 나누어 가지면서, 서로 견제하며 로마를 이끌어가자고 합의한 거다. 합의서를 쓰고 도장 찍어서 인원수 대로 만들어서 각각 보관한다고 해도 이런 것이 잘 지켜지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밀실 합의는 힘 있는 놈이 깨라고 있는 거지 그대로 준수된다고 믿는 놈만 호구다. 우리나라도 과거 3당 합당이니 DJP 연합이니, 노무현·정몽준 단일화니, 별별 정치 공작을 해 봤지만 마지막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싸움질에 전 국민이 피곤한 게 어디 한 두 번인가.

군인 대표로 대군을 이끌고 대외정벌에 나선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을 비롯한 온 유럽을 함락하고, 전리품을 챙겨 병사들에게 나눠주며, 휘파람 불며 인기를 구가하고 있을 때, 재벌대표 크라수스가 파르티아 전쟁에서 죽자 삼두정치의 균형이 깨지게 된다. 로마에 있던 폼페이우스도 카이사르의 딸인 자기 아내가 죽자, 때는 이때다 싶어 원로원과 결탁해서 라이벌이자 이젠 장인도 아닌 카이사르를 타도하고자 하는 정풍운동(整風運動)을 꾸민다. 멀리 전방에서 고생하는데 이 소식을 듣자, 뚜껑이 열린 카이사르는 “부대 동작 그만! 고향 로마 앞으로 갓”을 외친다. 돈 벌어서 귀향한다고 사기가 충천(衝天)한 군대를 이끌고 단숨에 루비콘 강까지 달려와 잠시 멈칫한다. 루비콘강은 로마와 속국(屬國)의 경계선인 요즘으로 말하면 휴전선 즉 ‘공동경비구역(JSA)’인데, 군대가 원로원의 승인 없이 이 강을 건너면 곧 반역으로 간주되었다. 로마 내정을 염탐한 카이사르는 자신만만하게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라는 유명한 말을 뇌까렸다. 무슨 시골 5일장 야바위도 아니고 웬 주사위씩이나 내던지냐고. 사실은 시골 야바위꾼의 대사(臺詞)가 아니고 카이사르가 즐겨 읽은 그리스 희극작가 메난드 로스의 유명한 대사다. 던져진 주사위가 6이 나왔는지 1이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카이사르는 로마로 맹진격하여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계엄군처럼 로마시내를 탱크와 군홧발로 휩쓸어 입만 나불대는 귀족·부호·야당 정치인들을 반혁명분자, 삼청교육대 입교, 빨갱이 등으로 진압해 버린다. 카이사르는 포로 로마노 광장의 단상에 높이 서서 마이크를 잡고, “다시는 나같이 불행한 군인이 없기를 바란다.”, “이 로마를 위하여 황강에서 북악까지 외길만 걸었다.”는 등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애드리브를 입에 침도 안 바르고 마구 내질렀다. 하나회를 비롯한 정치군인들과 관변단체의 환호를 받으며 백악관에 입성하여 대제국의 최고 실권자가 된다.

사실 폼페이우스도 원래 장군이었는데, 군화 끈 풀어놓고 로마 1번지에서 전쟁이 아닌 정쟁이나 하면서 밤에는 홍등가(紅燈街)나 터키탕을 전전하다 보니 전투력이 급 하강해서 카이사르의 적수가 도저히 못 된다. 그래서 지레 겁을 집어먹고 줄행랑을 쳐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피신해 와서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다. 약소 속국 이집트는 이 사건을 두고 연일 갑론을박한다. 못 이기는 체 제3국으로 빼돌리느냐, 아니면 새 권력자 카이사르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예 폼페이우스의 목을 갖다 바치느냐이다. 이 와중에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전에 누나가 자기를 견제하기 위해 폼페이우스에게 꼬리를 친 배반 행위에 앙심(怏心)을 품고 그의 목을 따버린다. 한편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까지 진군한 카이사르는 이집트까지 건식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집트 왕가는 누나와 남동생이 부부이지만 패가 갈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으르렁대고 있었다. 서로 자기가 이집트의 실권자라고 아등바등 싸울 때였다. 이집트 총독 격인 카이사르는 둘 사이를 중재하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집트의 정권이 안정되는 것이 로마로서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느긋하게 영빈관에서 미녀들의 시중을 받으면 목욕하고 베란다에 걸터앉아 지중해를 바라보며 시원하게 와인 한잔을 땡기고 있었다. 한편 클레오파트라와 프톨레마이오스 13세는 궁의 각자 방에서 내심 카이사르의 다음 결정을 암중모색(暗中摸索)하면서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카이사르의 중재를 받아들여 봤자 결국 옛날과 같이 남동생과 공동 통치 뿐이다. 저놈을 내 육체의 포로로 만들어 이집트를 내 맘대로 요리할 방안을 찾아야 해” 이렇게 짱구를 굴린 그녀는 온갖 꼼수와 묘수를 생각하다가 드디어 신의 한 수를 발견한다.

그날 밤 카이사르는 영빈관의 널찍한 베란다에서 석양에 물든 지중해를 배경 삼아 우아하게 와인으로 목을 축였는데, 갑자기 생각지도 않았던 퀵 서비스 배달이 도착했다. 택배 기사 서너 명이 낑낑거리면서 둘둘 말린 양탄자를 메고 들어 온 것이다. 아니 지금 여기도 아주 좋은 품질의 양탄자가 잘 깔려 있는데, 무슨 놈의 양탄자를 또 보내온 걸까? 택배 팀장 같아 보이는 친구가 말하기를 “여왕님의 선물입니다. 저희들이 방을 나가면 혼자 계실 때 끌러보세요. 그럼 저희는 이만....” 별 희한한 선물을 다 보냈다고 생각하며, 카이사르는 아무 생각 없이 양탄자를 발로 스르르 굴려서 풀었다. 헐, 거기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의 쭉쭉빵빵 미녀가 다소곳이 요염(妖艶)하게 누워 있는 게 아닌가? 바로 클레오파트라가 그 안에 있었던 거다. 보기만 해도 뇌쇄적(惱殺的)인 여인이 등장하는 방법도 기상천외(奇想天外)하게 접근하니 천하의 카이사르라도 안 넘어갈 방법이 있겠는가. 전장에서 수년을 굶은 그는 그날 밤 직빵으로 그녀의 포로가 돼 버린다. 총독인 카이사르를 한 방에 밤새워 녹여버린 그녀에게 이집트의 모든 권력이 쏠릴 수밖에 없다. 마누라이자 누나인 그녀에게 졸지에 당하여 새가 돼버린 남동생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누나의 반대파 떨거지 추종세력을 규합(糾合)해서 카이사르에게 맞짱 뜨자고 대들다가 로마의 원군이 대거 와서 오히려 궤멸(潰滅) 당하고 만다. 이때가 BC47년이니 마침내 그녀의 몸 정치와 권력 정치에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그녀는 막내 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4세와 재혼하면서도 카이사르의 아기를 잉태(孕胎)하여 그의 입을 찢어지게 만든다. 53살의 노병이 20대의 영계에게서 아들을 생산하였으니 좋아할 만도 하다. 카이사르는 엄청난 수의 유부녀들과 염문을 뿌렸다. 원로원 의원 등 유력층 인사들의 아내는 물론,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등 자신의 정치적 파트너의 아내와도 태연하게 바람을 피웠다고 한다. 정적인 소 카토의 이복누이인 세르빌리아 카이피오니스가 카이사르에게 뜨거운 사랑을 고백하는 연애편지를 보냈는데, 이를 원로회의 석상에서 보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소 카토가 비밀서류를 공개하라고 대들다가 자기 집안 망신만 톡톡히 한 사례도 있다. 당시 이집트에서 머물던 카이사르는 소아시아, 아프리카 등을 정벌하였는데, 이 원정에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Veni, vidi, vici)”는 명언을 남긴다.

삼두정치를 파기한 카이사르는 유신헌법을 만들어 10년 임기의 독재관이 된 뒤, 그동안 그저 밤의 정부(情婦) 정도로 치부하던 클레오파트라를 로마에 초대해서 왕궁에 모신다. 그녀는 이제 로마제국의 여왕이 되는 꿈을 꾸며 낮에는 퍼스트레이디 연습을 하고, 밤에는 만찬을 주도해 로마 정치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기에 여념 없다.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은 역사의 진리이다. 카이사르의 독재가 점점 지나쳐 급기야 황제자리까지 넘보게 되자 부루투스를 포함한 반 카이사르파 행동대원들이 궁정동의 ‘10.26 거사’를 단행하여 원로원에 출근하는 카이사르를 살해해 버린다. “브루투스, 너마저(Et tu, Brute)?”라는 유언이 마지막이다. 청천벽력(靑天霹靂) 같이 기둥서방이 살해당했으니 그녀가 로마에 있어봤자 개밥의 도토리다. 오히려 까딱하다간 자기와 아들의 목숨도 부지 못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부랴부랴 남행 밤 열차를 집어타고 이집트로 돼돌아와서, 또 어린 남편을 죽이고 아들 카이사리온과 결혼한 후 공동 왕위를 구성한다. 이거 완전 콩가루 집안인지 밀가루 집안인지 엽기적(獵奇的)이다. 이는 아마 클레오파트라가 정권의 힘을 얻기 위해 카이사르의 인기를 이용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 카이사르는 로마제국과 속국에서 대단한 정치적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고, 클레오파트라와의 사이에 낳은 카이사리온이 유일한 계승자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도록 홍보한 것으로 보인다.

3. 마지막 남자 안토니우스

카이사르가 죽은 후 로마의 정세는 부루투스와 카시우스을 제거하기 위한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레피두스 세 사람의 연합에 의한 제2차 삼두정치 체제였다가, 그들이 제거되자 연합이 깨진다. 레피두스는 도태(淘汰)되고, 안토니우스는 동방, 옥타비아누스는 서방을 차지하여 대결을 벌인다. 마치 ‘80년 서울의 봄’처럼 정국은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에서 ‘양김(兩金)’아니 ‘양스’의 대결로 압축된다. 이들은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땅따먹기 시합을 벌인다. 초반전은 옥타비아누스보다 안토니우스가 앞서 나간다. 그는 지금의 튀르키예까지 쾌속 진출한다. 그런데 사실 그는 염불보다는 잿밥에 맘이 있었다. 땅따먹기는 핑계고, 속셈은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라를 만나고 싶었던 거다. 그는 그녀가 로마에 있었을 때 밤무대에서 몇 번 보고 이미 홀딱 반해 있었고, 그녀를 어떻게든 낚아보려고 이집트 가까이 있는 튀르키예까지 쳐내려 온 거다. 그는 원래 카이사르 계열로 카이사르가 살해된 뒤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봐주고 있었다. 터키 해변에 진을 친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러브콜을 때린다. 그러나 그의 껄떡거림을 눈치챈 그녀는 일부러 계속 뻰치 놓으며 애간장을 태우자 몸이 단 그는 체면이고 뭐고 그녀에게 칭얼칭얼 매달리게 된다. 당시 그가 진을 치고 있었던 곳은 지금의 튀르키예 아나톨리아 지방의 알라니아(Alanya)에 있는 ‘클레오파트라 해변(Kleopatra Beach)’이다. 그녀가 그의 러브콜을 받고 와서 배에서 내리지 않고 머물렀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 땅에만 발을 내디뎠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가 하선(下船) 하지 않고 배에 머물자,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서 갖고 온 엄청난 양의 모래를 해변에 뿌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 해변을 그녀에게 선물로 주었다.

안토니우스가 BTS K-Pop 최대의 히트곡 <Boy with Luv>의 “네 전부를 함께하고 싶어”라고 목청껏 불러 제치며 카톡·텔리그램·인스타그램·페이스북·틱톡 등이나 이메일·스팸메일·팝업메일  등 갖은 SNS를 총 동원해서 구애(求愛) 메시지를 보내자, 클레오파트라는 그제야 못 이기는 척 그놈을 만나 준다. BC41년에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28살의 무르익을 대로 익은 농염한 그녀는 42살의 그를 육체의 포로로 만들었고, 사랑의 노예가 된 그는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로마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채 지낸다. 플루타르크는 그들의 사랑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아냈고, 그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눈을 팔지 못하도록 하였다” 글로만 읽어도 대단하지 않은가? 잠시도 한 눈 팔지 못하게 하는 여인이 있어보지 못한 남자는 말을 하지 말아야지. 원래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있을 때, 파디아와 결혼했다가 또 소 안토니아 하이브리다와 결혼한 후 클로디우스의 아내 풀비아를 만나게 되자 이혼하고 풀비아와 결혼했다. 풀비아는 성격이 괄괄하고 정치적 야망이 있던 여자로, 그가 동방으로 원정을 떠나자 홀몸의 여자가 옥타비아누스와 정치적 대결을 하다가 패하자 자살한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좀 더 전략적 동맹을 맺고 싶어서 그의 마누라 풀비아가 죽자 얼른 자기 여동생 옥타비아를 정략결혼시켰다. 하지만 이놈이 클레오파트라에게 코가 빠져서 이집트와 연합을 해서 자기와 대적하게 되니 뚜껑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한편 클레오파트라는 카이사르에게 많이 당해 보아서 남자에게 또 당하지 않는다. 영웅의 정부(情婦)라는 자리는 아무것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클레오파트라 7세는 정당한 결혼을 통해 안토니우스와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의 후계권도 보장받았다. 안토니우스는 로마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을 버리고 기꺼이 클레오파트라 7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 둘은 사랑놀음에만 빠져할 일을 안 한 게 아니었다. 그들은 짝짜꿍 힘을 합쳐 인근 국가들을 야금야금 먹어 치운다. 시리아, 키프로스,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리비아, 페니키아, 실리시아 등을 점령해 나간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사랑도 얻고 땅도 넓히고. 옛 이집트의 화려한 영광을 재현한 그녀의 행복도 잠시 잠깐, 그녀의 영향력이 급성장함에 위협을 느낀 로마의 칼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내면으로 로마와 이집트를 거머쥔 안토니우스의 독주(獨走)에 더 열을 받은 거다. 안토니우스가 휴가차 로마에 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반대파들이 청문회 개최를 요구하며 몰아붙인다. 로마 원로원의 청문회 속기록을 보면 그와 정적 옥타비아누스의 설전(舌戰)이 요즘 여의도 그쪽 보다 더 대단하다.

옥 : 안, 당신은 너무 행동이 방탕(放蕩)하다. 동방의 이방인 요부(妖婦)와 놀아나면서 로마의 수호신(守護神)을 거부하냐?

안 : 요부라니, 명색이 마케도니아 핏줄이고, 아주 현명하고 아름다운 정치가며, 내 아내와 다름없다. 못 먹을 감 찔러나 본다고 그런 쓸데없이 질투 부리지 마라.

옥 : 그래도 너는 동방 정벌의 개선식(凱旋式)을 로마에서 않고,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최한 걸 보니 모든 영광을 이집트 신에게 바친 거다. 로마 시민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

안 : 아 그건 나 혼자 힘이 아니고 클레오파트라의 힘과 연합으로 했으니까 그쪽의 얼굴도 있고 하니까 그냥 넘어가자. 어쨌든 로마 땅이 넓어진 거잖아.

옥 : (꼭지가 완전 돌라서) 야 인마, 너는 내가 잘 지내자고 예쁜 내 여동생을 주었는데, 걔를 팽개치고 딴 여자랑 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떡을 치고 그러냐?

안 : 어이 처남, 허리하학(下學) 즉 벨트 아래 문제를 정치 쟁점화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잖아, 프랑스에서는 노터치야. 그러고 처남 너는 깨끗하냐? 룸살롱, 터키탕, 안마방에 잘도 돌아다니더구먼.

옥 : 야, 너는 저번에 거기 개선식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너 사이에서 낳은 아이에게 동방을, 카이사리온에게 이탈리아와 서방의 통치권을 물려주겠다고 선언했는데, 이건 완전 매국노(賣國奴) 행위잖아. 

옥타비아누스의 폭로로 로마 시민들이 등을 돌리자, 뿔다구가 하늘 끝까지 오른 안토니우스 아예 내친김에 원로원에 최후의 승부수를 던져 버린다. 자기를 ‘동방제국의 왕’으로 인정해 달라고 생떼를 쓴 것이다. 말하자면 로마의 반쪽과 이집트의 왕 자리를 요구한 거다. 가뜩이나 그를 눈꼴사나워한 반대파들이 찬성을 하겠는가? 이에 반대파 진영은 그의 결정적 약점을 찾는데 혈안이 됐고, 드디어 확실한 물증인 그의 유언장을 입수해 로마방송에 특종으로 전격 공개하자 사건은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어 간다. “내가 죽거든 로마가 아니라 이집트의 항구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묻어 달라.” 이런 유언장의 내용을 시청한 로마시민들은 더욱 경악(驚愕), 분개했고 안토니우스의 인기 순위는 급강하하기 시작한다. 이 찬스를 놓칠 리 없는 옥타비아누스는 잘 됐다 싶어 그를 상대로 전쟁을 선언한다. 안토니우스도 이집트의 곡물과 병력 등이 자기에게 큰 도움이 되니까 그 정도의 연맹관계와 사후 보장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BC 31년, 드디어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에게 전쟁을 선포한다. 겉으로야 이집트에게 선전포고 한 것이고 내심으로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제거하는 게 주목적이다.

세계사 교과서에 뻔질나게 등장하고 세계 4대 해전이라 불리는 악티움 해전이 이 두 놈들 사이에서 벌어진다. 누가 분류했는지는 모르지만 참고적으로 4대 해전은 살라미스해전(아테네 : 페르시아), 악티움해전(로마 : 이집트), 레판토해전(신성동맹 : 오스만제국), 트라팔가해전(영국 : 프랑스, 스페인)을 말하는데, 사람에 따라 칼레해전을 꼽는 경우도 있다. 전함의 숫자 등 외관상으로 보기에는 전력이 비등(比等)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집트 전함은 덩치가 크고 충각(衝角 : Ram)을 붙여서 상대 배를 충돌시켜 박살 내는 전략이었고, 로마 전함은 작은 갤리선으로 날쌘돌이 스타일이었다. 더구나 이집트 진영의 노 젓는 사공들이 말라리아로 많이 죽어서 큰 배를 기동성 있게 충돌을 할 수 없었고, 로마 전함의 화살 공격에 그대로 노출되어 불리했다. 전투 전에 주요한 심복(心腹) 지휘관이 배반하여 적에게 이쪽의 작전 계획도 알려주게 되었다. 물론 그의 휘하(麾下) 장수와 군졸은 로마 시민인데, 이집트여왕을 위해 고국의 동료였던 로마군과 싸우는 갈등도 있었겠다. 또 클레오파트라와 연합 공격의 작전 수행도 싸인이 안 맞아 그녀는 먼저 도망치고, 지리멸렬(支離滅裂)하게 패배하고 만다. 만약 클레오파트라 함대가 퇴각하지 않고 같이 엉겨 붙었으면 세계사의 물줄기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 검술보다 말발, 전술보다는 화장발을 믿고 설치던 여자인지라 실전의 바다 위 전장 터는 그녀에게 꼬랑지 내리고 도망하는 36계가 최상수라고 생각하도록 한 거다.

한때 로마와 이집트의 실력자에서 패전 장수로 몰락한 안토니우스는 울분과 충격을 가눌 길 없어 독방에서 은둔생활을 한다. 고위층에서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면 맨탈붕괴가 오는 건 당연하다. 과거 정권 때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을 휘두르다가 감방에 들어가서 한쪽 눈이 실명되어 개눈알을 박았다는 박모(朴謀)씨 경우도 있으니까. 그러나 곤경에 처하면 남자보다 강해지는 게 여자이고 특히 어머니이다. 클레오파트라도 두 아들의 어머니였으니까 그에게 용기와 생기를 넣어주려 갖은 방법으로 안간힘을 썼다고 기록돼 있다. 인생의 좌절을 맛본 입장에서 서로의 깊은 사랑을 확인한 둘은 잠시 행복에 젖는다. 그 많던 식민지 다 뺏기고 이집트만 달랑 남았지만 이거라도 잘 지키면 그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마치 99칸 대궐에 살다가 갑자기 쪽방이나 지하 단칸방으로 갔지만 마음만 편하고 사랑만 있으면 행복한 거 아닌가 하고 위안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나 행복도 잠깐이다. 뚜껑이 열린 옥타비아누스와 로마 시민들이 이 둘의 단란한 꼴을 보고 가만히 있겠는가? 알렉산드리아를 포위 봉쇄하고 지속적으로 공격을 멈추지 않는 거다. 역시 뻔할 뻔자로 맞붙으면 번번이 이집트 군대가 작살나게 깨진다. 그래도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안토니우스는 결사적 항전하며 선봉으로 나선다. 그런데 연합 전선을 형성했던 그녀의 전사(戰死) 소식이 진영에 확 퍼지게 되었다. 로마군이 퍼트린 심리전(心理戰)이었을 수 있다. 아무튼 이 오보(誤報)를 접한 그는 급격히 전의를 상실한다. 사랑하는 그녀가 없는 세상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그는 자결을 시도하는데 금방 죽지 않고 빈사(瀕死) 상태가 된다. 그런데 이건 웬 일? 아니면 이집트 판 로미오와 주리엣 시추에이션인지, 여왕이 아직 살아있단다. 아직 목숨이 실낱같이 붙어있는 안토니우스는 부하에게 명해서 자기를 여왕 있는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한다. 여왕은 여왕대로 힘에 부치지만 로마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싸늘히 죽어가고 있는 그를 맞이하며 클레오파트라는 눈물과 가슴으로 오열한다. 그 장면을 플루타르크는 이렇게 묘사했다.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누인 뒤 자기 옷을 덮어주고, 내 사랑, 나의 남편, 전하(殿下)라고 울음 섞인 목소리로 부르며, 전투로 엉망이 된 그녀의 비참한 처지도 잊은 채 멍이 들도록 그녀 가슴을 치고, 얼굴로 비벼 피를 닦아주었다.” 안토니우스는 그녀에게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는 나를 생각지 말고 뭐든 하라”고 말한 뒤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 팔에 안겨 숨을 거두고 만다. 얼마 뒤 그녀는 로마군에게 체포되는 포로 신세가 된다. 이집트가 로마의 완전 속국이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4. 클레오파트라를 싫어한 한 남자 : 옥타비아누스

완벽하게 패배한 그녀는 옥타비아누스의 승낙을 받아내서 남편 안토니우스의 장례식을 치르고 죽기를 작정하고 그날로부터 단식(斷食)에 들어간다. 옥타비아누스의 속셈은 그녀를 산채로 로마로 압송해서, 개선 행사를 한 후 홀라당 벗겨서 로마시내를 질질 끌고 다녀야 자신의 승리가 더욱 돋보일 거라고 계산했던 거다. 그래서 옥타비아누스는 그녀를 위협하여 단식을 그만두지 않으면 자식들을 죽이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다시 음식을 입에 댔으나, 비참하게 사느니 깨끗이 죽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일설(一說)에는 그녀가 옥타비아누스를 몸으로 유혹해서 목숨을 구차(苟且)하게 부지하려 했다는 설(說)도 있으나,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창백하고 야윈 몰골로 유혹은 어림없다”라고 일축했다. 이윽고 그녀가 로마에 끌려가기 3일 전, 그녀는 몸을 정결히 하고 의관을 정제하여 안토니우스 묘를 참배한 뒤 자기 방으로 돌아와서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편지를 쓴다. “나를 안토니우스 곁에 묻어주오” 편지를 받고 놀란 옥타비아누스가 부랴부랴 사람을 보냈으나 그녀는 이미 코브라에게 물려 자결한 뒤였다. 39살의 클레오파트라는 이렇게 그 화려한 생을 마감한다. 누구는 동시대에 전 유럽과 근동을 호령하던 여걸(女傑)의 손목 한번 못 잡아보고 보내서 속으로 무척 아쉬웠을 거다.

세계사의 큰 획을 그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한 후세의 평가를 몇 개 살펴보자. 그녀를 흔히 남편을 배반한 요부, 악녀, 색골 등으로 묘사하고, 로마의 영웅들 사이를 오간 창부(娼婦) 같은 여왕이라 알려졌다. 나라야 어찌 됐던 남자만 밝힌 여자인 것처럼 전해지지만, 실제는 약소국인 조국 이집트의 생존을 위해 그녀가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아부었던 여왕임이 분명하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은 보면, “그녀는 금으로 장식된 이동 닫집 아래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누워 있었는데, 그러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림 속의 비너스와 같았다.”, “그녀는 여인의 아름다움이 꽃을 피우고 지성이 힘을 발휘하는 나이에 안토니우스를 향해 갔다.”, “그녀는 언제나 관능적인 쾌락을 새롭게 찾아냈고, 그것으로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안토니우스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으며 잠시도 그가 한눈을 팔지 못하게 했다. 함께 주사위를 하고, 술을 마시고, 사냥을 했다. 안토니우스가 훈련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는 늘 함께 했다.” 로마의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평가는 “클레오파트라의 연인은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 단 두 사람뿐이다. 그 관계도 몰래한 사랑이 아닌 공식적인 떳떳한 사랑이다. 당시 로마 여인들의 난잡(亂雜)한 성생활에 비하면 더없이 정숙한 여인이다.” 또 다른 로마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 “야심에 찬 탐욕스러운 여왕은 자신의 혈육을 남김없이 잔인하게 살해한 뒤 그 분노를 외국인에게 돌렸다. 그는 안토니우스의 품에 안긴 채 가장 훌륭한 이들을 모략하고 죽이도록 해서 그들의 유품을 횡령했다.” 역사가 마르탱은 “옥타비아누스는 비겁한 역사 검열자이다. 그는 클레오파트라, 시이저, 안토니우스 사이의 모든 공식 문서, 편지, 각종 사료를 깡그리 없애 버렸다. 그녀에 대한 억측(臆測)이 구구(區區)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가 마르몽텔은 “로마 역사가들의 가장 큰 사명은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갖은 비방과 비난을 써 대는 것이었다. 사실 그녀만큼 무고(無辜)한 여인도 없다.” 부세 르클레르의 혹평은 “아름답지만 탐욕스럽고 뻔뻔한 여왕에게 이집트 왕조의 모든 악덕을 발견하는 것은 놀라울 바가 없다. 해로운 나뭇가지 끝에 독을 품은 꽃이 피듯 그는 라지드 왕가의 마지막 영예이자 오점인 것이다.” 이렇게 평가가 다양하다. 후세의 평가가 어떠하 든 그녀는 두 명의 남동생과 결혼하고, 자신의 아들과도 결혼하고, 두 명의 로마 지도자를 애인으로 두었다. 근친결혼은 이집트 왕가의 관례가 남자는 왕이 될 수 있지만, 여성은 단독으로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결혼하여 남편과 같이 집권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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