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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Apr 06. 2023

(21) 울던 애도 그치는 - 카테리나

★ 18禁 역사 읽기 ★ (230404)

카테리나 스포르차(Caterina Sforza)는 우리나라 사치스러운 여자들이 좋아하는 패션의 도시 밀라노 공국의 공작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의 딸로 1463년에 태어났다. 우리나라에서는 울던 아이를 달랠 때 할머니들이 “에비, 호랑이가 잡아간다. 뚝!”하다가, 그래도 안 들으면 “곶감 줄게”라고 하면 그친다. 그런데 야설(野說)에 따르면 이탈리아에서는 이렇게 말한단다. “에비,  카테리나 백작부인이 온다. 뚝!” 울던 아이의 울음까지도 그치게 만드는 무서운 여인 카테리나 스포르차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엄청난 양면성을 가진 여자였다. 흔히들 백작부인이라고 하면 우아함과 교양의 대명사로 알고 있는데 왜 그녀는 이탈리아 역사를 통틀어 제일의 여걸, 최고의 여자라 불린다. 아름다운 미모와 엄청나게 당돌한 성격의 그녀는 조상부터 좀 남다른 저돌성이 있었던 것 같아 보인다. 가문의 시조(始祖)인 무치오 아텐돌로는 일개 농민이었는데, 산적(山賊)에게 습격을 받아 산채(山寨)로 잡혀갔다. 그런데 거기서 납치범인 산적들을 역으로 휘어잡아 자기가 산적 두목이 되었고, 그들을 이용해서 용병대(傭兵隊)를 만든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프란체스코 스포르차가 밀라노의 주인이었던 비스콘티 공작(公爵) 가문을 공격해 공작(公爵) 자리를 뺏어 귀족 가문이 된 것이다.

15~16세기의 이탈리아는 교황(敎皇)을 중심으로 권력 다툼이 소용돌이치는 시대로, 한숨 자고 나면 대권이 바뀌어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반복되는 그런 때였다. 교황을 자기편으로 삼는 쪽이 투전판을 싹쓸이하는 시절이었으니, 자연 교황의 끗발은 하느님과 동창이고, 국왕(國王) 정도는 장기판의 졸(卒)도 아니라 발바닥의 때만큼 여겼다. 그러다 보니 세속(世俗)의 단맛, 새콤한 맛, 황홀한 맛 등 입맛과 몸 맛에 길들여진 개차반 교황들이 줄줄이 등장하기도 한다. 사실인지 진실인지는 검증이 덜 되었으나 야설(野說)에 따르면 별 휘황한 교황들이 줄줄이 나타난다. 묘령(妙齡)의 미소녀를 탐닉(耽溺)한 이노센트 1세나 수녀(修女)들에게 휩싸여 정력을 낭비한 식스투스 3세는 그나마 양반 축에 속한다. 알렉산데르 6세는 워낙 간통을 많이 하여 사생아가 7~10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 12세는 아예 베드로 성당에 홍등가(紅燈街) 588을 신장(新裝) 개업했는가 하면 간통과 근친상간(近親相姦)을 밥 먹듯이 하다가 상간녀(相姦女)의 남편에게 살해당했다. 동성연애자인 바오로 2세와 요한 2세는 남창(娼男)과 섹스하다 급사(急死)했고, 식스토 4세와 레오 10세도 공개적으로 남색을 하고, 율리오 2세도 남색(男色)으로 퇴위(退位) 요구를 받았다. 이노센트 8세는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8명의 딸을 건드렸으며, 율리우스3세는 두 아들과 관계를 맺었을 정도로 난잡(亂雜)했었다. 

신분 세탁으로 명문귀족이 된 카테리나 집안도 끗발은 대단했었는지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인 지롤라모 리아리오 백작(伯爵)에게 14살에 시집을 가서 포를리와 이몰라의 통치를 맡는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북부도시로 교황청의 직영이었는데, 이몰라는 자동차 경주 F1 경기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교황의 조카라고 하지만 아들일 것이다. 남색(男色)도 좋아한 식스토 4세의 하는 행위로 봐서 말이다. 당시 대주교(大主敎)들이나 추기경(樞機卿) 직위는 말단 신부로 시작한 사람들보다 귀족 집안에서 장자 아닌 다른 아들들이 젊은 나이에 그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빈번했다. 대주교나 추기경이면 일단 영지(領地)만 없다 뿐이지 어지간한 작위급(爵位級)의 수입과 권력, 영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정식 결혼은 불가능했지만 정부(情婦)를 두고 혈육을 낳아 표면적으로는 사생아(私生兒), 서자(庶子) 혹은 가까운 친척의 조카로 위장하는 등으로 자손을 이어가는 게 다반사(茶飯事)였다. 게다가 귀족 집안에서도 종교계에 나중에 줄을 대는 것보다도 혈족을 고위직으로 빨대 박는 게 훨씬 유리하기도 했다. 하늘을 찌르는 권세의 교황 가문에 시집을 갔으니 얼마나 빵빵했겠는가.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머리도 좋았던 카테리나는 교황 옆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도맡아 하며 모든 모임에 참석도 하는 등 꿈같이 화려한 날을 보낸다. 그녀가 짱구를 잘 굴려 로마 산탄젤로 성을 점령하고, 콘클라베를 무력으로 압박하여 이몰라와 포를리의 항구적 지배권을 얻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나 할까, 얼마 후 교황이 급사한다. 백작 부부의 수탈 정치로 포를리 출신의 루도비코와 케코 형제가 백작의 빚 독촉을 견디지 못하여 백작을 살해할 음모를 꾸민다. 결국 남편은 반란군에게 살해당하고 카테리나는 아이들과 함께 체포를 당하게 돼 버린다. 그러나 백작 가문의 요새(要塞)인 성(城)만 함락하지 못하고 남아있었다. 머리 좋기로 소문이 짜한 카테리나는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천부적 잔머리를 굴려 반란군들을 구워삶기 시작한다. “빈 몸인 나와 아이들만 잡아봤자 아무짝에도 쓸 모 없다.  요새 안에는 보물과 식량이 무지하게 많다. 그걸 가져야지 그걸 못 가지면 로마에서 원군이 오면 너네들은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죽는다. 성안의 나의 심복들은 내 허락 없이는 절대 성문을 안 열거니까 나를 성으로 들여보내라.” 카테리나의 구랏발은 줄기차게 계속된다. “내가 성안에 들어가서 보물을 가져 나오면 우리들 목숨을 살려주시는 걸로 쇼당을 치자. 나를 못 믿겠다면 내 아이들을 인질로 맡겨놓고 갈 게”

이렇게 해서 성안으로 들어간 카테리나는 똥 누러 갈 때와 똥 누고 나올 때 다르다는 말 그대로 실천했다. 밖에는 신경도 안 쓰고 맘껏 먹고 마시고는 침실로 가서 태평스레 뻗어 버렸다. 성 밖에서 그녀가 돌아오기를 오매불망(寤寐不忘) 기다리던 반란군들은 그제 서야 속았다는 걸 깨닫고 일제 공격을 가했지만, 요새가 워낙 튼튼하고 성안 군사들의 방어가 너무 뛰어나 별 효과를 거두질 못한다. 그러자 뚜껑이 제대로 열린 반란군들이 인질로 잡아둔 카테리나의 아이들을 무릎 꿇리고는 목에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며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아이들의 울부짖는 비명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소리를 듣고 성곽(城廓) 위로 올라온 카테리나는 싸늘한 눈으로 아이들과 반란군들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큰 소리로 일갈(一喝)한다. “야! 이 거지발싸개 같은 놈들아. 내가 그딴 협박에 겁먹을 줄 알았냐? 이것만 있으면 아이쯤은 앞으로 얼마든지 더 낳을 수 있다. 이놈들아!” 이렇게 소리치고 스커트 자락을 휘익 젖혀 은밀한 속살을 보여줬단다. 백작부인의 라이브 스트립쇼에 정신이 팔린 반란군들이 어물어물하는 사이에 성채에서 대포를 비오 듯 퍼붓자 반란군들은 후퇴를 했고, 뒤이어 그녀의 삼촌인 밀라노 공작 루도비코 스포르차의 구원을 받아 반역을 토벌하고 지배권을 되찾는다. 이때 그녀의 나이는 불과 25세였다. 이런 사건 덕분에 울던 아이도 뚝 그치는가 보다. 중국 초(楚) 나라의 항우(項羽)가 한(漢) 나라 유방(劉邦)의 마누라와 아이들을 잡아놓고 삶아 죽이겠다고 위협하자 유방이 태연하게 “그래? 그러면 국물 한 그릇만 보내주게”라고 했고, 백제의 계백장군이 황산벌 전투를 앞두고 처자식 목을 벤 것은 남자들의 이야기로 치더라도 결단하기 쉽지 않은 일인데, 여자이면서 엄마로서 이런 정도의 배포와 밀당 흥정은 보기 드문 경우다. 이 한 건으로 이탈리아는 물론 다른 나라 특히 프랑스에까지 ‘이탈리아 제일의 여자(프리마 돈나 이탈리아)’라는 별명을 얻어 칭송과 열광을 한 몸에 받았다.

매력적인 미녀지만 강압적이고 오만한 통치를 하는 과부 카테리나는 연인이 많다. 그녀는 잔혹하고 오만한 자코모 페오와 25살에 몰래 결혼한다. 그는 그의 잔혹성 때문에 가신들에게 1945년 암살된다. 그녀가 무시무시함의 대명사로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자기 애인의 복수극 덕분이다. 남편이 죽은 뒤 그녀는 꽃미남 소년인 자코모를 애인으로 아꼈었는데, 이 자코모가 음모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그녀가 직접 복수를 한다. 음모자 중 한 사람은 발코니에 알몸으로 매달아 죽였으며, 나머지 일곱 명은 말에 묶어 끌고 다니며 죽였고, 음모자의 아내와 아이들은 우물에 산채로 던져지는 등 음모자 가족 전원을 몰살하라는 그녀의 독기 서린 명령에 따라 40여 명이 처형되고, 50명이 감옥에 갇혔다고 한다. 그 후 그녀는 피렌체 공화국의 대사로 부임한 조반니 데 메디치 일 포폴라노와 1497년에 비밀 결혼을 하였다. 조반니는 1498년에 죽었지만, 카테리나는 루도비코 일 모로와 피렌체 사람들의 도움 덕분에 베네치아 사람들의 공격에서 벗어나 자신의 주권을 지켜냈다. 하지만, 그녀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딸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그녀의 아들 오타비아노 사이의 결합을 승낙하지 않자 교황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교황령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로마냐 지방을 정복 중이던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가 그녀의 영토에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래서 1499년 3월 9일 리아리오 가문에게 빼앗긴 이몰라와 포를리의 지배권을 체사레 보르자에게 양도한다는 교황 교서가 반포되었다. 

체사레 보르자가 카테리나의 영토를 차지하고자, 루이 12세로부터 빌린 프랑스군을 더해 강화된 군사력으로 그녀를 공격하였다. 카테리나는 자신의 아이들을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켜 놓고 분투적인 방어전을 구상하였다. 일설(一說)에는 “대포를 살살 쏘는 게 어때요? 너네들 불알이 터지지 않도록”이라는 말을 대포알에 적어 쏘기도 했단다. 하지만 교황과 프랑스 연합군을 상대해서 일개 여성주가 견디긴 힘들었다. 이런 영리하고 독한 그녀도 체사레에게는 끝내 패배해 그의 포로가 된다. 그때 체사레 보르자가 펄펄 끓는 25살, 그녀는 손대면 톡 터지는 37살이었다. 호색한(好色漢)인 체사레 보르자는 포로로 잡힌 카테리나를 보자마자 뻑 가서 그날로부터 무려 3일 밤낮 동안을 침실에 박혀 나오질 않고 그녀의 농익은 육체를 마음껏 탐닉했다고 한다. 카테리나는 겁탈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어차피 네가 영계고, 예쁘장해서 한번 따먹으려고 했었다” 이렇게 그에게 외쳤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다.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로마로 끌려가서도 목숨만은 구제받아 석방되었고, 다시 포를리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힘썼지만 좌절되자 피렌체의 산 로렌초 성당에 피신해 나머지 여생은 신에게 모든 걸 맡기는 경건한 자세로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위선적인 품위를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여장부 성격이었고, 때문에 당대의 사나이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특히 기사도를 중시하던 프랑스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카테리나에게 자신의 기사도를 바친다는 기사들도 여럿 있었단다. 좀 일찍 와서 바쳤으면 좋았을 것을. 패배하여 씁쓸한 말년을 보냈지만, 그 성격과 일화는 지금까지도 이탈리아 여장부의 대표적인 인물로 불리고 있다.

체사레 보르자(1475-1507)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애인 반노차 카타네이 사이에서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원래 아버지를 따라 젊은 나이에 팜플로나 주교가 되고, 추기경에 임명되어 장래 교황을 꿈꾸었으나, 동생인 교황청 사령관이 암살당하자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체사레는 교황청의 권위 회복과 교황청에 굴복하지 않는 이탈리아의 군소 도시들을 정복하는 임무를 띠고 활동했다. 따라서 16세기말 이탈리아의 정치 판도를 뒤흔들었던 대단한 인물로 대담한 용기와 지략을 갖추었던 교황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강력한 교황권과 군대를 양성하여 그것을 기반으로 이탈리아 중부 로마냐 지방에 자신의 나라인 로마냐 공국(公國)을 세움에 따라 나폴리 왕국, 피렌체 공화국,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사레의 공적과 전략을 다수 인용하였고 그를 본받을 것을 권고하는 등 그를 이상적인 모델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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