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금운사 Mar 06. 2023

(17) 검은 왕비 - 카트린 메디시스

★ 18禁 역사 읽기 ★ (230306)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9분, 도쿄를 중심으로 한 일본 관동(關東) 지역에 진도(震度) 7.9급의 초강력 지진(地震)이 발생하였다. 당시 모든 가정에서 점심 식사 준비를 위해 거의 불을 피우고 있던 시간대라서 지진의 여파(餘波)는 곧바로 대화재로 이어졌다. 그때 도쿄, 요코하마 지역을 비롯한 관동 지역 일대가 궤멸(潰滅)되다시피 한 피해가 발생하였다. 사망자, 행방불명자가 14만 명, 이재민(罹災民) 340만 명에 달하는 엄청난 재난이었다. 이때 지역사회에 퍼진 유언비어(流言蜚語)에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 '조선인이 방화하였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등의 근거도 없는 낭설(浪說)이 경찰 조직의 비상 연락망을 통해 확대되면서 자경단(自警團)이나 경찰관에 의해서 조선인과 조선인으로 의심받았던 중국인이나 일본인까지도 학살당하는 엄청난 비극이 발생하였다. 살해된 수는 정확하지 않지만 3000명~6000명이라고 알려졌다. 일본군은 1937년에 중국의 난징(南京)에서 2~30만 명의 중국인을 잔인하게 학살하였고, 강간당한 여성도 2~8만 명, 건축물 약 23.8%가 불에 타고, 88.5%가 파괴된 어마 무시한 만행(蠻行)을 저질렀다. 상해·항주·소주·무석 등 주변 도시를 더하면 훨씬 큰 피해이다. 인간으로서 차마 못할 짓을 한 것이다. 독일 히틀러가 홀로코스트(The Holocaust)로 유대인과 포로들을 가스실, 총살, 강제 노동, 계획된 영양실조, 생체실험 등의 방법으로 600만 명을 학살(虐殺)한 사건은 더욱 유명하다. 1세기가 지나가고 있지만 진상 및 책임규명이나 피해보상은 아직 없다.

이러한 사건은 서로 다른 민족이나 국가 간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프랑스에서는 자국민끼리 종교 차이로 엄청난 유혈(流血) 사태가 생겼다. 서로 원수처럼 여기던 두 종교집단의 리더급인 가톨릭 공주(公主)와 위그노(Huguenot·프랑스의 칼뱅파 신교도) 방계(傍系) 왕자 간의 정략적인 혼인이 이루어진 것이다. 혼인에 불만을 품은 양측 귀족도 많았지만 국혼(國婚)과 성 바르톨로메오(Saint Bartholomew) 축일(祝日)까지 다가오면서 파리는 겹경사 분위기였다. 그러나 파리에는 거대한 먹구름이 깔리고 있었다. 1572년 8월 24일 새벽 4시, 교회의 종소리를 신호로 가톨릭 군대가 닥치는 대로 위그노 귀족을 죽였다. 결혼식과 축제(祝祭)에 참석하러 대거 파리를 방문한 위그노 귀족들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살해당했다. 다음날 국왕 샤를 9세가 내린 중지 명령도 소용없었다. 일주일 동안 학살(虐殺)이 이어지며 위그노 관련자 3,0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파리의 위그노 소탕은 지방으로 퍼져 10월 초순까지 프랑스 전역에서 7만 명가량 죽었다. 이 학살의 도화선(導火線)이 된 결혼식은 오늘의 주인공 왕태후 카트린 드 메디치가 그 배후(背後)라고 모든 사람은 지목한다. 그녀의 딸 마르그리트는 프랑스의 실권자인 기즈공작 앙리(23세)와 연인 관계였는데, 엄마의 정략(政略) 결혼 강요로 나바르 공국의 왕자인 앙리(훗날 프랑스 왕 앙리 4세)와 맺어진 것이다. 이는 국왕 샤를 9세와 어머니인 카트린의 치밀한 정략적 계산의 결과이다. 겉으로는 신구교의 화해(和解) 무드 조성이고, 이면(裏面)에는 넓은 영지와 막강한 재력으로 대를 이어 국왕 이상의 권력을 뽐내는 기즈 가문을 견제(牽制)하려는 것이었다. 학살 6일 전 세기(世紀)의 결혼식이 가톨릭의 혼배성사(婚配聖事) 형식으로 진행되는데, 신랑이 참가하지 않아 반쪽 예식이 될 때 암울한 조짐이 보였다. 공주의 오빠인 앙주 공작(훗날 앙리 3세)이 신랑 대역을 맡았으니, 격앙한 하례객(賀禮客) 가톨릭 강경파 귀족들은 결국 22일 위그노 측의 군사적 지도자인 콜리니 제독을 저격(狙擊)한다. 콜로니의 저격으로 위그노들은 분노하며 4천여 명의 군대를 파리 근교에 주둔시키자 위협을 느낀 구교 진영에서 선제공격으로 대규모 학살을 자행(恣行) 한 것이다. 콜리니 제독은 총상과 사지 절단, 사체 훼손 등을 당하여 창문으로 내던져졌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었는지 센 강(江)이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위그노 학살 소식을 접한 로마와 교황청에서는 신의 은총을 경배(敬拜)하는 축포(祝砲)가 터지고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학살을 기리는 성화(聖畵)를 그리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그레고리력 보급 교황)는 기념 메달까지 만들었다. 중세의 교회들이 이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무튼 역사의 도도(滔滔)한 흐름에서 영향력 있는 인간들이 그들의 굴절된 심리로 인하여 물줄기가 바뀌기도 하고, 바로 흐르기도 하는 거다. 대학살의 물꼬를 틀어쥐었던 당찬 여자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녀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명문가 메디치가(家)에서 우르비노 공작 로렌초(2세) 데 메디치의 딸로 1519년에 태어났다. 이탈리아의 정식 이름은 ‘카테리나 마리아 로물라 디 로렌초 데 메디치(Caterina Maria Romula di Lorenzo de Medici)’라고 읽기도 숨차지만, 프랑스에서는 줄여서 카트린 메디시스라고 불렀다. 금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났지만 돌도 되기 전에 부모의 사망으로 고아(孤兒)가 되어 작은할아버지인 교황 레오 10세에 의해 양육된다. 보호자인 그가 죽자 그녀는 완전 낙동강 오리알 신세다. 후임 교황은 그녀의 모든 상속권을 몰수(沒收)해 버린 거다. 개털이 되어 수녀원에서 생활하던 중 집안의 먼 친척인 클레멘스 7세 교황이 자기의 정략적 수단으로 그녀를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의 아들이며 동갑인 오를레앙(나중에 왕인 앙리 2세)에게 시집을 보내버린 것이다. 피렌체의 명문 집안의 딸내미로서 많은 상속권을 몰수당해도 온달(溫達)에게 시집간 평강공주(平岡公主) 정도의 재력을 있었다. 문제는 본인이 별 미인도 아니고, 퉁퉁했으며, 큰 코에 얇은 입술의 어정쩡한 남성미까지 가졌다. 성격 또한 내성적이나 다행히 질투나 굴욕의 감정을 잘 참고 견디는 편이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폭발하면 전혀 예측 불허의 행동을 하고 마는 여자다. 사춘기를 수녀원에서 보냈으니 연애 감정도 몰랐고, 결혼도 국가 간의 정략결혼(1533년)이라는 장기판의 말처럼 한방에 덜컥 운명을 내 맡겼으니 조짐이 좀 찜찜했다. 남편인 앙리 2세라는 놈은 파리의 사교계(社交界)에서 닳고 닳은 뺀질이 스타일이었는지 못 생긴 카트린에게는 평소에 눈길 한번 안 주었다. 이놈은 결혼하기 전에 퐁텐블로궁의 클럽에서 파리의 잘 나가는 귀족 딸들이나 유부녀들을 숱하게 안고 겪어봤으니까 보는 눈이 있는 거다. 더군다나 아비인 프랑수와 1세가 자기의 후궁(後宮) 비스름한 디안 드 포와티에(Diane de Poitier)를 인생의 모든 기술을 가르치는 개인교사로 붙여주었다. 사춘기 어린 시기에 농염(濃艶)한 연상(年上)의 개인교사와 한 방에서 인생 공부를 했으니 답은 뻔한 것 아니겠는가. 이 여자는 언제 중국에 유학 와서 소녀경(素女經)이나 현녀경(玄女經) 등 동양의 방중술(房中術)을 연마했는지 아버지와 아들을 동시에 섹스로 사로잡았을까. 아무튼 자기보다 19살이나 연하(年下)의 남자를 밤낮으로 뿅 가게 만드는 재주가 정말로 궁금하다. 한 순간의 절정(絶頂)으로 천년을 느낀다는 그런 건지 몰라도 디안 드 포와티에는 늙을수록 더욱 싱싱해진다는 전설을 가진 신비한 여자였다. 예순 살 넘어서까지도 처녀 못지않은 탄력과 관능(官能)과 나긋나긋한 테크닉을 가졌단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매일 승마와 수영을 즐겼고, 그리스어·라틴어·수사학(修辭學)·건축학·에티켓·금융법률 등 다방면의 학문에 밝았다니 문무(文武)를 겸비한 최고의 엔터테이너였나 보다. 그래서 그녀에게 최고로 아름다운 슈농소성(城)을 하사했다. 자고(自古)로 모든 수컷들은 미녀를 원하는데 정말 미녀의 기준이 무엇인지는 시대, 지역, 인종 등에 따라 다양하다. 중앙일보의 몇 년 전 보도가 참고가 될 진 모르지만 대충 보면 이렇다. 브라질(큰 엉덩이), 아프리카 대부분(통통한 몸매), 북미와 영국(가는 허리, 긴 다리), 프랑스(작은 가슴), 이탈리아(작은 엉덩이), 중국(가는 다리), 일본(덧니), 이란(반창고), 태국(긴 목), 한국(흰 피부) 등이라는데 수긍(首肯) 하기 어렵다. 필자(筆者) 본인이 강력히 주장하는 미녀 기준은 좀 까다롭다. 그래서 이 기준에 맞는 여자가 있을지 모르지만 디안 드 포와티에가 다음 중 몇 가지에 속했을까?

3백(三白 : 흰 얼굴, 피부, 치아), 3흑(三黑 : 검은 눈동자, 눈썹, 머릿결), 3홍(三紅 : 붉은 입술, 뺨, 손톱), 3장(三長 : 긴 속눈썹, 목, 손가락), 3단(三短 : 짧은 귀, 치아, 턱), 3세(三細 : 가는 허리, 손목, 발목), 3박(三薄 : 얇은 콧날, 혀, 손바닥), 3후(三厚 : 도톰한 입술, 유방, 엉덩이), 3소(三小 : 작은 콧구멍, 젖꼭지, 배꼽), 3탄(三彈 : 탄력적 입술, 유방, 엉덩이), 3유(三柔 : 부드러운 살결, 손결, 숨결)

얼굴도 얼굴이지만 여자는 침대 매너가 제일이다. 포와티에와 왕의 밤무대를 잠깐 들여다보자. 앙리 2세는 매일 밤 천국으로 보내주는 그녀에게 슈농소 성을 하사했다. 슈농소 성은 르와르 강에 둘러싸인 아름답고 고풍스러운 성이다. 앙리 2세도 거기서 마누라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사랑을 하려는 속셈도 깔려 있었다. 그녀는 사냥과 수영을 즐겨 산과 강을 몹시 사랑하였다. 그런데 슈농소 성 건물 자체가 물 위에 지어져 있고, 옆에는 해자(垓字)같이 루와르 강이 흘렀다. 봄, 여름, 가을엔 뱃놀이를 할 수 있고 겨울에는 눈 축제를 즐길 수 있어 최고였다. 주말이면 슈농소 성은 그녀의 천하다. 왕은 하인같이 그녀를 위해 몸소 고기를 굽고 포도주를 따랐다. 그들은 빛과 그림자 같이 한 달을 하루같이 일 년을 한 달처럼 세월을 아름답게 엮어갔다. “폐하 오늘은 너무 멋져요. 소첩이 안마를 해 드릴게요.” 밖에선 여름 장맛비가 세차게 쏟아졌다. 천둥 번개까지 요란하게 쳤다. 그들은 사랑을 할 때는 촛불을 껐다. 그러나 오늘은 천둥번개가 치는 바람에 그들의 나신(裸身)이 신비하게 드러났다. “시원하게 씻겨 드릴게요!” 그녀는 의 등을 떠밀어 샤워실로 갔다. 젊고 탄탄한 근육질의 몸이다. 그녀는 뒤에서 아기를 안듯이 그를 품고 욕조에 들어갔다. 그는 언제나처럼 느긋하게 몸을 완전히 맡겼다. 국왕의 가슴엔 부드러운 가을 잔디 같은 털이 그녀의 욕정을 부채질했다. “전하 소첩을 오래오래 사랑해 주세세요! 소첩이 나이 들어도 언제나 전하의 제일 좋은 노리갯감이 될게요.” “그런 걱정 말고 어서 등을 밀고 물을 끼얹어라. 오늘따라 더 힘이 솟는구나!” 사내는 빨리 침대로 가서 육체의 허기를 채우고 천상의 향연을 벌이고 싶은 것이다. “너무 서두르지 마세요.” 그녀의 손이 어느새 앙리 2세의 거대하게 성난 물건에 가 있다. 한 손은 귀두(龜頭)를 간질이고 한 손은 더 밑으로 들어가 항문 주위를 더듬었다. 입술로는 그의 널찍한 가슴팍의 앙증맞은 젖꼭지를 잘근잘근 씹는다. 왕이 제일 좋아하는 전희(前戲)다. 그녀는 언제나 남자에게 솜사탕처럼 보드랍고 달콤하게, 햇살같이 따뜻하게 마사지를 해주었다. 그녀는 처음 만난 날부터 그렇게 앙리 2세를 리드해서 길을 들여놓았다. 물을 끼얹는 둥 마는 둥 하고 그들은 침대로 들어가 한 덩어리가 되었다. “대답 안 할 거예요?” 귀두와 고환(睾丸)을 번갈아 입으로 애무(愛撫)하다가 다시 다그쳤다. “뭐든지 다해줄게 더 감미롭게 해 줘!” 국왕은 분위기 깨지 말고 어서 하던 짓이나 더 잘하라는 듯 그녀의 머리를 다시 자기 사타구니로 밀어 넣었다.

이 정도 수준의 완숙(婉淑)한 여자가 남편 곁에 밤낮으로 붙어 있으니 이태리 촌닭 출신 카트린은 감히 명함도 못 내밀고 퇴짜를 맞은 거다. 그렇다고 친정에서 싸 온 패물(佩物)을 챙겨서 몽마르트르 성형외과에 찾아갈 수도, 방중술(房中術) 비방(祕方) 전속 개인교사를 부를 수도 없어서 만고강산(萬古江山) 독수공방(獨守空房) 신세를 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포와티에가 양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나이 많은 언니로서 동정심이 생겼는지 은혜를 조금 베풀어 줬다. 기나긴 밤을 은장도(銀粧刀)로 허벅지 찔러대며 자위(自慰)만 하는 신세인 왕비에게 앙리 2세의 엉덩이를 걷어차서 간혹 넣어주었다. 그러고는 이 여자가 관음증(觀淫症)이 있는지 왕이 카트린과 관계하는 것을 커튼 뒤에서 몰래 훔쳐보면서 즐겼단다. 가뭄에 콩 나듯, 미운 놈 떡 하나 주듯 어쩌다 포와티에가 던져주는 서방(書房)을 받아 안아보니 맛이 달랐다. 십년대한(十年大旱)에 소나기 같은 맛이고, 3일 굶은 거지가 뷔페 초대받은 것 같이 온몸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왕과의 사이에 아이를 10명이나 생산한 걸 보면 임신(妊娠)에는 귀재였다. 소문에 카트린은 미신(迷信)을 무척 좋아했던 여자다. 그녀 주위에는 늘 점성가(占星家)나 요술사 등이 모여들었는데, 그들은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기도하거나 비방(祕方)을 쓰는 임무도 했다. 술사(術士) 중에 제일 유명한 친구가 노스트라다무스인데, 그는 앙리 2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예언(豫言) 한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하긴 요즘도 믿는 사람이 있으니까.

다행히 많은 아이를 낳았으나 그녀는 아이들을 손수 키우지 못하고 대부분 왕의 정부(情婦) 포와티에에게 양육권(養育權)을 빼앗겼다. 모두 왕(王)과의 사이에 생긴 건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말이다. 앙리 2세도 그녀에게 섹스의 맛이나 기교보다는 정실 왕비로서 오로지 후사(後嗣)를 얻기 위한 씨받이용으로 쓸 생각이었다. 그놈은 일이 끝나고 나면 카트린에게 최신형 정조대(貞操帶)를 채웠다는 거다. 한창 젊은 나이에 거시기 맛을 알아서 매일 밤 몸은 활활 타오르고, 머리에는 열불이 나는 카트린은 묘수(妙手)를 찾기 시작한다. 가짜늬우스의 취재에 따르면, 시녀를 시켜 고향 피렌체에서 유능한 열쇠전문가를 불러 왕 몰래 정조대(貞操帶)를 끌렀단다. 그리고 창문을 넘어 냅다 시내 호스트바에 가서 물건 성능 좋은 호빠들과 뻑적지근하게 몸을 풀었단다. 간혹 호스트바 특별단속이 있는 날에는 반반한 시녀들을 골라 침실에서 동성애에 탐닉(耽溺)했단다. 역사가에 의하면 프랑스에서 여성 동성애 레즈비언을 처음 도입한 게 그녀라고 한다. 이 여자 처음으로 도입한 거 무지 많다. 궁중에서 포와티에 한테 남편을 빼앗기고, 숨 죽여 살아온 그녀에게 드디어 우연한 기회가 찾아온다. 하숙생(下宿生) 같은 남편이 딸 엘리자베트의 결혼 축하 연회의 마상(馬上) 창시합(槍試合)에 나가서 상대의 창(槍)에 눈이 찔려서 그만 사망하게 된 것이다. 남편이 죽자 어린 아들 푸랑수아 2세를 섭정(攝政)하면서 서슬 퍼런 본심을 드러내며 정권을 장악한다. 그동안 그녀 속을 갈기갈기 찢어 놨던 눈에 가시 걸(Girl) 디안 포와티에를 죽이지는 않고, 그녀가 소유했던 아름다운 슈농소성(城)과 각종 보석을 반환받고 파리에서 추방한다. 그 후 아들 셋을 차례로 왕위에 올려 30년간의 섭정을 하며 프랑스를 요리하기 시작한다. 자기와 정치적으로 갈등 관계에 있는 대상이라면 아들일지라도 가차(假借) 없이 요절(夭折)을 내는 단호한 철녀(鐵女)였다. 첫째 프랑수아 2세와 둘째 샤를 9세 왕들도 자기 눈에 벗어나는 행동으로 서서히 독살(毒殺)시켜 죽였다는 의혹이 있다. 가장 큰 정적(政敵)이었던 기즈공작 가문도 은밀히 제거했다는 전언이다.

일설(一說)에 나오는 재미있는 사실은 그녀가 만든 미녀 친위부대에 관한 기록이다. 실제 군대 같은 친위대가 아니고, 발레문화가 일찍부터 발달했던 이태리식 발레단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피렌체의 예술가들을 불러 훈련을 시켰다. 카트린이 직접 디자인한 제복(制服)을 입은 미녀 대원들의 옷차림은 성인나이트클럽 댄서들 수준으로 화끈하다. 꽉 들어맞는 상의에, 가슴팍은 깊게 팠고, 유방(乳房)은 그대로 노출시켰으며, 유두(乳頭)는 엷게 화장을 한다. 그런 풍속이 프랑스 궁중(宮中)에 하나의 문화로 남아 무도회(舞蹈會)에 참여하는 귀부인들은 가슴이 반쯤 보이는 의상이 제격이었다. 치마는 양옆을 히프까지 가르고, 속에는 팬티를 입히지 않아 대원들이 걸을 때면 뽀얀 속살이 다 보여 요염(妖艶) 그 자체였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파리 물랑루주 클럽의 캉캉 무용수 격이다. 사실 발레는 원래 이탈리아 왕궁에서 시작되어 프랑스 왕궁으로 넘어와서 궁정(宮廷) 발레가 된 것이다. 발레(Ballet)의 어원(語源)은 이탈리아어로 춤을 춘다는 뜻의 발라레(Ballare)이다. 13세기 이태리 왕족과 귀족들이 즐기는 사교춤으로 시작되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사람들의 관심이 신에게서 인간으로 되돌아오면서 예술로 승화(昇華)된 것이다. 그리고 16세기 경 프랑스에서 무대예술로 발전하고 이때 발레(Ballet)라는 용어가 정립된 것이다. 당시 프랑스의 발레는 가면(假面) 즉 마스크를 쓰고 춤을 추었기에 발레를 ‘마스크(Masque)’라고도 불렀다. 카트린은 200여 명의 쭉쭉 빵빵 대원들에게 아주 특별한 비밀(秘密) 임무를 부여했다. 이들은 카트린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그녀의 정적(政敵)들을 육체(肉體)의 포로로 만들어 매수(買收)하거나 역공작(逆工作)을 펴서 모반(謀叛)의 싹수를 사전에 제거했다. 심지어는 그녀의 사위(앙리 4세)와 아들(앙리 3세)이 가깝게 지내자 혹시 이놈들이 합세해서 역모(逆謀)라도 꾸밀까 해서 가장 화끈 쌔끈한 섹시 걸을 비밀 투입해 이간(離間) 질을 했다. 이 초특급 선수는 두 남자 사이에 양다리를 걸쳤는지, 양다리를 벌렸는지 투입 한 달도 못 가서 원수지간으로 만들어 버린다. 왕권(王權)도 강화하고 문화예술의 품위도 올리고 일석이조(一石二鳥)의 전략이었다.


카트린은 이것 말고도 프랑스 음식 문화에 아주 특별한 존재로 기록되는 여자다. 요즘은 세계 3대 요리하면 프랑스 요리를 우선 으뜸의 자리에 올리지만 그녀 이전의 당시 프랑스 음식은 수도원 구내식당 수준이었다. 포크를 농기구(農器具)인 쇠스랑으로, 스푼을 삽으로 인식할 정도였다. 대부분 수저 없이 손으로 집어 먹고, 식단(食單) 자체도 빵조각, 야채, 구운 고기 정도였다. 카트린 자신이 좋아했던 음식은 수탉의 벼슬과 신장(腎臟), 아티초크 등이었단다. 닭 벼슬은 정력(精力)에 좋다는 속설이 있는데, 젤리처럼 쫀득한 질감에 콜라겐이 많아 서양의 미식가들이 좋아한다. 스튜 스타일로 향미 야채를 넣고 포도주로 푹 삶아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탈리아 피에몬테 지방에는 역사가 200년 이상 된 ‘라 피난지에라’라는 요리가 있는데, 주로 닭의 벼슬, 똥집, 간 등 부산물(副産物)을 포도주로 삶아 스튜나 튀김으로 낸다. 소(牛)의 부산물을 이용하기도 하는 아주 서민적인 음식이다. 아티초크(Artichoke)는 엉겅퀴 비슷한 식물의 꽃봉오리인데, 유럽에서 불로초(不老草)로 인식되며 삶거나 구워 잎을 한 장씩 떼어 소스와 같이 먹는다.

카트린가 시집을 온 후에 프랑스 음식의 르네상스가 시작된다. 당시 선진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 그녀는 요리 기법과 신기한 재료들을 프랑스에 가져왔다. 그리고 이 시기에 파리에는 요리학교가 생기며 많은 요리사가 양성되고, 포크를 사용하며 식당과 주방이 분리되었다. 환경이 바뀌는 이국(異國) 땅에서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도록 하녀, 요리사, 제과사와 각종 요리 도구까지 가져온 것이다. 그 후에 프랑스에 없던 과자 종류들인 소르베(Sorbet), 마카롱(Macaron), 프랑지판(Frangipane), 프티 푸르(Petit fours), 비스퀴 아 라 퀴이예르(Biscuit a la Cuiller) 등이 문화적으로 앞서고 맛도 뛰어난 레시피로 프랑스의 식단을 화려하게 장식(粧飾)하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패션 쪽으로 엉덩이를 크게 보이기 위해 부풀린 스커트를 입었는데, 이게 전국에 크게 유행이 되었다. 나중에는 치마폭이 점점 크게 부풀러 져 바람난 귀부인들의 임신 사실을 감추기 위한 용도로 널리 사랑받았다. 만삭(滿朔)이 됐어도 눈치 못 챌 정도로 치마폭이 넓어서 때론 급하면 눈 맞은 사내를 치마폭에 감추고 몰래 바람을 피워도 되었다. 당시 프랑스의 문화 수준이 화장실도 잘 없고, 하수도 시설도 없고, 그러니 목욕도 잘 안 하고 지냈다. 그러니까 냄새나는 프랑스 사람들에게 향수(香水)도 처음 소개해서 날라리 귀부인들을 하늘로 날아가게 만든 것도 그녀의 혁혁(赫赫)한 공로가 아닐 수 없다. 그녀는 넓은 치마에 어울리게 허리는 꽉 조이는 스타일을 선호했다. 그래서 궁정을 드나드는 여인은 허리둘레를 33cm 이하로 낮추도록 지시했다. 그래서 귀부인들이 코르셋으로 허리를 꽉 조이고, 가슴을 빵빵하게 받쳐 올려 아주 섹시한 실루엣을 만드는데 일조(一助)했다. 이 시대의 코르셋은 강철이나 고래 뼈, 상아(象牙) 등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착용에 대단한 고통이 따랐고, 하인의 조력(助力)이 없이는 착용할 수 없었다. 참고로 코르셋 끈이 앞에 있는 것이 서민용(庶民用)이고, 뒤에 있는 것이 귀족용이다. 그래서 코르셋은 아름다움과 고통의 상반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착용 후 일정 시간 간격으로 풀어서 쉬지 않을 경우 갈비뼈 골절, 척추 손상, 임신부 유산, 폐나 장기 손상 등의 부작용도 많았단다.

팬티의 역사에 대한 얼떨떨한 학설(學說)이지만, 당시 남자들만이 입었던 팬티를 처음으로 입었던 여인도 그녀였단다. 당시 여인들은 말을 탈 때 내숭 떨면서 조신하게 다소곳이 두 다리를 모아 옆으로 걸터앉았는데, 카트린은 과감 화끈하게 양다리를 벌리고 탔다는 거다. 그러면 외부에 나가 다닐 때 바람이 스치면서 치마 속의 은밀(隱密)한 속살이 보이게 되자 팬티를 입게 됐고 그게 또 대 유행이 된 거란다. 프랑스에서 여자의 치마 속을 훔쳐보는 흥미 쏠쏠한 재미를 잃은 남자들이 그녀를 미워했겠다. 그래서 궁정에서는 팬티 착용에 관한 시비가 1개월 동안 진지(眞摯)하게 논의 됐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실제 인류는 속옷으로 팬티를 입은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동양에서도 모두 노 팬티 관습이었고, 특히 일본 여인은 기모노 속에 아무것도 안 입고, 등에 베개까지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가. 언제 어디든 기모노 벗어서 돗자리처럼 깔고 거사를 치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성진국(性進國) 일본 여인들이 팬티를 입게 된 동기는 1932년 12월 16일 동경의 니혼바시(日本橋)에 있던 시라키야(白木屋) 백화점에서 큰 화재가 났을 때 백화점 여점원(女店員) 14명이 사망한 사고 때문이다. 당시 구조용 밧줄을 늘어뜨려 놓았는데 기모노(着物)를 입고 노팬티인 여점원들이 밑에서 자기 치마 속 은밀한 그곳을 쳐다볼까 봐 밧줄을 타고 내려가지 않고 장렬(壯烈) 히 죽음을 택했단다. 이 사건을 계기(契機)로 기모노 안에도 팬티 입기를 국가에서 권장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본의 속옷 메이커 와코루가 탄생하게 되었단다. 역사적으로 잔인무도(殘忍無道)하면서도 문화적, 미적(美的) 감각을 함께 지녔던 카트린. 프랑스 역사는 그런 여인을 통해 문화 예술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사실 그녀는 남편 앙리 2세가 서거(逝去)하자 상복(喪服)을 입는다는 의미로 평생 검은 색 옷을 입었다고 하는데, '검은 왕비' 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16) 예쁜 게 죄인가요 - 몬탈바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