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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18. 2023

(25) 실패한 미인계 – 양아(楊娥)

★ 18禁 역사 읽기 ★ (230515)

명나라 말기인 1644년 숭정(崇禎) 17년, 농민 출신 이자성(李自成)은 시안(西安)에서 국호(國號) ‘대순(大順)’을 건국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베이징(北京)을 목표로 하여 북벌(北伐)을 시작하였다. 4월에 이르러 북영(北京)이 위협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진연(陳演)과 광시정(光時亨) 등이 난징(南京)으로 천도(遷都)할 것을 권했지만 숭정제는 이에 반대했다. 그리고 오삼계(吳三桂)를 평서백(平西伯)으로 삼아 북경(北京)의 방위를 맡겼다. 하지만 신료(臣僚)들은 속속 반란군에 투항하였고, 4월 21일에는 북경(北京)이 포위되었다. 결국 1644년 4월 25일(음력 3월 19일) 마침내 북경(北京)이 함락되자, 숭정제는 처첩(妻妾)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자금성(紫禁城) 뒤쪽에 있는 경산(景山)에서 자살하였다. 숭정제의 체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십만 반란군이 '틈왕기(闖王旗)'를 높이 들고 보무(步武)도 당당하게 북경성 선무문(宣武門)을 통해 입성하였다. 각양각색의 제등이 내걸리고 수만의 인파가 북과 꽹과리를 두들기며 모여들었다. 이윽고 이자성(李自成)은 털모자에 푸른 옷을 입고 말을 탄 채 장령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당당한 모습으로 입성식장에 나타났다. 길 양쪽에는 '영창원년', '대순왕 만세'라고 쓰인 황색 깃발들이 나부끼고 있었다. 이자성은 이 광경을 보고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이자성은 군중들의 박수를  받으며 장안문을 통과하여 천안문(天安門)으로 해서 자금성에 들어갔다. 자금성에 들어선 이자성은 말 탄 채로 황극전(皇極殿)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자금성 하늘에는 이자성을 상징하는 '틈왕기'가 펄럭였다. 대순왕(大順王) 이자성은 숭정제와 주황후를 황제·황후의 예로써 장사 지냈다. 그리고 일련의 정령(政令)을 공포하는 한편 수백 명의 관리를 각지에 파견하여 지방 정권의 귀순(歸順)에 힘을 기울였다. 이자성은 천하통일이 실현된 것으로 믿고 만면(滿面)에 미소를 띠며 새로운 황제국에 대한 미래의 청사진(靑寫眞)을 그리고 있었다.

한편 숭정제의 명을 받아 산해관(山海關) 총병(摠兵)으로 있던 오삼계는 이자성의 반란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북경으로 향하다가, 이미 북경이 점령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산해관으로 돌아와 사태의 추이(推移)를 관망하고 있던 중이었다. 이자성이 북경을 점령하고 자금성 하늘에 틈왕기가 펄럭인다는 소식을 청나라에도 전해졌다. 이때 청나라는 태종이 죽고 8세 난 어린 아들 푸린이 즉위해 숙부인 예친왕(睿親王 : 도르곤)이 섭정을 담당하고 있었다. 중국 통일의 야망에 불타던 예친왕은 이 기회에 꿈을 실현하고자 친히 대군을 이끌고 심양을 떠나 산해관 쪽으로 향했다. 산해관을 지키던 명나라 장군 오삼계는 가중되는 청군의 압력과 이자성 군의 동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이때 그의 아버지 오양(吳襄)으로부터 본인은 이자성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했으니 아들도 합류하라는 편지 한 장이 도착했다. 아버지의 편지를 받은 오삼계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고, 이때 이자성으로부터 군용 자금조로 백은(白銀) 4만 냥도 보내왔다. 그러자 오삼계의 마음은 이자성에게 귀순하는 쪽으로 점점 기울어졌다. 그런데 오삼계의 심경을 뒤바꾸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이자성이 북경에 있는 오삼계의 집을 덮쳐 아버지를 연행해 갔다는 소식이었다. 순간 오삼계는 자신을 잡아들이기 위해 자신의 아버지를 잡아다가 이자성이 거짓으로 아버지 편지를 보낸 것으로 판단하고 자신이 아끼는 애첩 진원원(陳圓圓)에 대해 물었다. 진원원은 원래 성은 형(邢)이고 이름은 원(沅)인데, 부모가 일찍 세상을 뜨자 이모부의 성인 진(陳)으로 고쳐 진원원(陳圓圓)이라 했다. 원래 소주 태생의 명기였는데, 그 후 북경으로 올라와 우연한 기회에 연회석상에서 오삼계의 눈에 들어 매료시켰다. 그 후부터 오삼계는 진원원을 총애(寵愛)하여 보물처럼 아꼈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진원원을 포악하기로 유명한 유종민이 빼앗아갔다는 소식을 듣자 오삼계는 질투와 분노로 머리털이 곤두섰고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러한 연유로 오삼계의 태도는 돌변하여 즉시 청나라에 투항할 것을 결심하고 서신을 보냈다. 지금까지 대치하던 적인 청나라의 힘을 빌려 이자성을 쳐 없앨 작정이었다. 명의 멸망과 이자성 건국, 청나라의 중원 진출 가능성 여부가 여기서 결정이 나는 순간이었다.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질투가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순간이었다. 오삼계의 순간적인 판단은 결국 이자성의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물거품으로 만들게 되었으며, 오삼계 스스로도 청나라의 중원 평정에 이용만 되다가 결국에는 자신도 비극의 종말을 가져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로 인해 청나라는 어부지리(漁父之利)로 중원을 점령하게 되는 천운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예친왕은 청나라에 구원을 요청하는 오삼계의 특사에게 지원 의사를 흔쾌히 밝히고 답서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산해관을 향해 서서히 진군해 나갔다. 한편 산해관의 동정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이자성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는 오삼계의 움직임에 크게 분노하여 친히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오삼계 토벌(討伐)에 나섰다. 이때 이자성의 진중에는 포로가 된 숭정제의 황태자와 오삼계의 아버지 오양, 그리고 오삼계의 애첩 진원원도 함께 대동하였다. 이자성의 선봉군은 산해관 가까이 있는 일편석에 당도하여 오삼계와 대치했다. 청의 예친왕은 항복한 명군의 안내로 산해관으로 무혈입성하여 오삼계를 만나 크게 치하하며 투항을 환영했다. 그리고 예친왕은 이자성 군과 분간(分揀)을 위해 오삼계에게 군사들로 하여금 변발(辮髮)과 갑옷에 흰 천을 두르도록 하였다. 예친왕은 자신의 계획대로 오삼계로 하여금 이자성 주력부대를 돌격하여 격파하도록 종용했다. 이자성 군은 산해관 북쪽 산으로부터 해안에 걸쳐 20만 대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오삼계가 분노에 찬 얼굴로 성문을 열고 출격하자 이자성 군은 장사진(長蛇陣)의 양 날개를 급히 꺾어 오삼계 군을 포위할 태세를 보였다. 마침내 양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져 수십 번의 충돌이 되풀이되면서 혈전이 계속되었다. 오후가 되면서 갑자기 거센 바람이 일며 모래와 자갈이 어지럽게 날리고 우뢰소리와 같은 굉음이 양 진영을 맹타하였다. 청군의 포격과 오삼계 군의 맹공으로 이자성 군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수십 차례 충돌로 기진맥진한 이자성 앞에 갑자기 청의 철기군이 나타나자 진영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철기군이 종횡무진으로 이자성 군을 무너뜨리고 본진까지 위험해지자 대패를 직감한 이자성은 말을 타고 앞장서서 도망쳤다. 이자성은 영평까지 도망쳐 그곳에서 숨을 돌리고 왕칙요, 장약기 두 사람을 오삼계에게 보내어 강화를 제의하였다. 이자성은 오삼계의 아버지를 인질로 잡고 있었기에 강화를 낙관하였으나 오삼계는 강화를 받아들일 능력마저 없었다. 강화 제의를 일축하고 추격을 계속하자 이자성은 인질로 잡고 있던 오삼계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도망쳤다.

그 길로 이자성은 북경까지 단숨에 도망쳐 돌아갔다. 이자성 신하들이 황제 즉위식을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던 시간에 이자성이 북경성에 당도하였다. 이자성은 서둘러 오삼계의 가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38명을 모두 살해하였다. 이자성은 자금성의 무령전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황제를 칭하였다. 즉위식을 올리면서도 이자성의 마음은 초조하기만 하였다. 즉위식을 올린 이자성은 도망칠 준비를 하였는데, 자금성 안에 있던 엄청난 금을 녹여 소 금괴로 만들어 일단 서쪽으로 도망친 다음 재기할 때 군자금으로 사용할 작정이었다. 이날 밤 도망칠 준비를 끝낸 이자성은 궁전과 성루에 불을 지르고 다음날 나머지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이자성이 북경을 떠나자, 예친왕이 거느리는 청군이 북경에 입성했다. 명나라 문무백관들은 성 밖까지 나와 새 권력자의 입성을 환영했다. 얼마 전 이자성을 환영하였던 그 자리에서 이번에는 이민족인 청군을 맞아들여야 하는 북경 백성들의 심정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오삼계의 마음을 움직여 역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던 진원원은 이자성이 죽이려 하였으나 오삼계의 추격을 늦추도록 하겠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살려주고 떠났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진원원은 오삼계 곁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몇 년 후 오삼계가 남명(南明) 정권 황제를 추격하여 운남까지 갔을 때 그곳 운남에서 병사하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생긴 이야기가 실패한 미인계의 주인공 양아(楊娥)이다. 오삼계는 산해관을 열어준 공로로 청나라 황제로부터 귀주성과 운남성의 왕인 평서왕(平西王)으로 봉해진다. 이는 아직 남쪽에 잔존한 남명(南明)을 확실하게 끝장내기 위해서였고, 결국 남명은 이들 손에서 사실상 끝장난다. 오삼계는 왕으로 봉해지자마자 이자성 잡기에 돌입했고 결국 이자성을 완전히 처단했다. 이후 남중국 토벌을 명 받고 사천지역을 차지했던 대서군의 우두머리인 장헌충을 죽여 사천도 완전히 토벌했다. 오삼계는 평서왕으로서 운남을 통치하게 되었고, 대권을 장악한 그는 운남의 문무관원들의 인사는 물론, 군사 및 민간 사무들을 모두 관장하게 되었다. 그는 제멋대로 전횡을 일삼으며 각지에 관리를 파견하여 수많은 농민들의 토지를 강탈했고 가렴주구(苛斂誅求)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냈다. 그의 부하들도 그의 앞잡이가 되어 살인과 노략질을 일삼으면서도 두려워하는 것이 없었다. 오삼계는 특히 여색을 좋아했다. 그는 소주(蘇州)와  양주(揚州) 지역에서 수많은 무희(舞姬)와 가희(歌姬)들을 사들였고 넘치는 정욕을 만족시키기에 여념이 없었다.

1662년 오삼계는 청조(淸朝)로부터 오늘날 미얀마로 도망친 남명의 영력제의 일행을 잡아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곧 군대를 이끌고 미얀마로 가서 영력제와 검국공(黔國公) 목천파(沐天波)를 붙잡아 운남으로 압송했다. 그 속에 장용(張鏞)과 양아(楊娥) 부부도 함께 붙잡혔다. 양아의 오빠인 양아두(楊鵝頭)는 원래 검국공의 관저에서 일하던 무술교관이었다. 그는 뛰어난 무예로 목천파(沐天波)를 위해 충성을 다 바쳤는데, 그보다 더 뛰어난 무술실력을 가진 자가 바로 여동생 양아였다. 양아는 뛰어난 무예와 아름다운 자태, 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점들은 장용에게 깊은 인상을 주어, 그와 양아는 서로 연모해 온 지 오래된 사이였다. 둘은 결혼하였고, 항상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함께 행동했고, 서로를 끔찍이 아껴주면서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었다. 그러던 중 청나라 군대가 오삼계를 앞세워 운남을 공격하였고, 영력제와 더불어 그들은 미얀마로 도망가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 오삼계는 미얀마까지 쳐들어오게 되었고, 1662년 그들은 모두 압송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장용도 죽고, 이와 더불어 오삼계가 영력제 부자의 목을 졸라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 양아는 오삼계에게 남편과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칼날을 갈았다. 결국 오삼계는 자기 손으로 조국(祖國)인 명(明) 나라를 완전히 뿌리 뽑은 셈이다. 양아는 항상 몸에 칼을 지니고 다니며 직접 오삼계를 죽일 기회를 노렸지만 그는 좀처럼 왕부(王府)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외출을 할 때에는 수많은 시위(侍衛)를 거느리고 다녔기 때문에 도저히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방법이 없었다. 양아는 여러 가지 방법을 생각하다 미색으로 그를 유혹하여 그에게 접근한 다음 기회를 노리기로 하였다. 며칠 후 서문시장에 자그마한 술집이 생겼다. 가게 주인은 뛰어난 미모를 갖춘 젊은 여인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했고 용모가 아름다운 데다 옷차림마저 화려하고 눈부신 덕분에 그녀의 가게에는 사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 가게의 주인이 바로 양아였다. 오삼계를 미색으로 유혹하기 위하여 일부러 술집을 차리고 그를 기다리기로 한 것이었다.

양아 오삼계가 직접 찾아오기만을 기다렸는데, 어느 날 드디어 그 기회가 왔다. 오삼계가 수하들을 거느리고 몸소 주막을 찾은 것이다. 지금부터 양아가 펼치는 미인계를 자세히 엮어서 살펴보자. 오삼계를 맞는 양아가 꾀꼬리 소리 마냥 감미롭게 응대한다. “백락천(772~846)의 <항주춘망(抗州春望)>이란 시에 보면 ‘紅袖織綾誇柿蔕(홍수직능과시체) / 비단 짜는 붉은 소매에 감꼭지 문양 자랑하고, 靑旗沽酒趁梨花(청기고주진이화) / 푸른 깃발 주막에는 배꽃 쫓아 술을 파네.’라고 했사옵니다. 소첩은 장군이 오시기를 학수고대하고 이화주(梨花酒)를 준비했습니다.” 양아(楊娥)의 자태는 어느 날보다도 고혹적이지만 정숙해 보였다. 여인은 마치 예약한 손님을 맞듯 은밀한 내실로 사내를 안내했다. “어떻게 내가 올 것을 알고 이화주를 준비했다는 거냐?” 오삼계(吳三桂)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양아를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아래위를 훑어봤다. “소첩이 주막 매화를 개업한 지 벌써 반년이 넘었습니다. 반년 사이에 장군에 대한 소문을 많이 들어 언제고 오시면 정성껏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몸과 마음을 가다듬었습니다. 어서 뜸을 들이시지 마시고 한잔 시원하게 드시고 소첩도 한잔 주시지요!” 사내는 양아의 도발적 미색에 넋을 잃고, 그 좋아하는 술을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애첩 진원원이 죽은 후 수많은 계집을 섭렵했지만 이런 미인은 처음이었다. “내 오늘 너를 찾아오길 잘했구나. 그렇지 않아도 목이 칼칼하고 마음이 울적했는데 너와 걸판지게 마셔야겠다! 너희들도 방 하나 잡아 허리띠 풀고 마음 놓고 마셔라. 오늘은 청루 매화를 내가 몽땅 산다. 문을 잠그고 딴 손님은 받지 말거라.” 오삼계는 호위병사에게까지 술자리를 챙기는 태도가 역시 전쟁영웅답게 배포가 크다. 양아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래 너 오늘밤이 천국으로 가는 날.’인지를 알기나 하나 했다. “장군 아직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벌써 문을 닫으라시면 어떻게 해요. 저희 집은 식솔들이 많아서 웬만큼 벌어선 목구멍에 풀칠도 어려워요.”라며 뇌쇄적 웃음을 날렸다. “어허 걱정 말라니깐 이 천하의 오삼계가 사랑하는 계집 하나 책임 못 질까! 어서 걱정 말고 문을 닫아. 귀찮은 술꾼들이 오기 전에 어서!” “예 나으리! 아 참 오늘 저녁 8시에 어느 선비님께서 오시겠다고 다섯 분의 예약이 있는데 그분들은 워낙 조용하시니 상관이 없겠지요.” “어허 오늘은 이 청루를 몽땅 내가 전세를 낸다니까. 빨리 연락해서 딴 곳으로 가라고 해. 선비 나부랭이들이 오면 더 골치 아파. 관우(關羽)가 어떻고 공자, 맹자가 어떻고 하는 꼬락서니가 정말 듣기 싫어. 세상은 입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장검과 군대가 움직이는 거야. 네 이름이 양아라 했지? 너도 그것을 똑똑히 알아둬야 해.”

주색에 곯아 오삼계는 이화주 몇 잔에 벌써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해댔다. “예, 나으리 말씀이 옳습니다.” 양아는 사내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안주를 먹여주며 진한 여인의 향기를 마음껏 풍겼다. 술을 따르면서 재스민 향이 아침 안개처럼 피어올라 사내 코에 다다르도록 팔의 동작을 크게 했다. 성질 급한 사내의 손은 벌써 여자의 치마를 들치고 샅을 수도 없이 들락거리며 탐색전을 펴고 있다. “너의 고향이 어디냐? 그리고 올해 몇 살이나 됐느냐?” “계집의 나이는 무엇하러 물으세요? 술맛 좋고 밤을 즐겁게 해 드리면 되지요!” “그건 그렇다만 하룻밤을 자도 만리장성을 쌓으란 말도 있지 않느냐?” “소첩도 양반의 후예(後裔)이나 이젠 청루(靑樓)의 술이나 따르는 작부(酌婦)에 불과하옵니다. 과거는 묻지 마시고 즐겁게 술을 드시고 화대(花代)나 행하(行下)를 듬뿍 주세요.” 양아는 사내에게 더욱 바싹 붙었다. “내 너를 처음 본 순간 마음에 쏙 들었다. 오늘 나하고 인연을 맺자.” “성질도 급하셔라 이 양아는 비록 청루에 나와 있어도 값이 비싼 여자입니다. 첫 만남에 몸을 받칠 수는 없지요.” “그건 네 말이 옳다. 그러나 이 오삼계는 성질이 급해 그렇게 마냥 기다릴 생각이 없단다. 대신 몸값을 풍족하게 쳐주면 되지 않겠느냐?” 사내는 양아를 번쩍 들어 안고 침실로 성큼성큼 갔다. 옷섶 사이로 불룩 나온 젖가슴이 성욕을 더욱 부채질했다.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두 팔 위에서 양아가 버둥대보지만 억센 사내의 품을 빠져나오기엔 역부족이다. 술청과 침실의 거리는 문하나 사이다. 사내 두 팔 위에서 버둥대는 사이에 속옷 없는 겉옷은 아랫도리를 몽땅 드러내고 말았다. 양아의 목련꽃 빛깔의 아랫도리에 사내는 혀를 내돌리며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네 몸이 정말 보석 같구나!” 오삼계가 양아를 침대에 던지듯 내려놓는 바람에 두 다리가 벌어지면서 연꽃보다도 더 아름답고 진달래꽃같이 발그스레한 샅이 사내의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이때였다. “문 열어라 이년아 대낮에 왜 문을 잠그고 있느냐?” 술 취한 사내가 문을 발길로 쾅쾅 차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나으리, 오늘은 제 몸을 구경만 하시고 돌아가셔야겠어요! 제 막무가내 서방인데 용돈이 떨어지면 저렇게 와서 행패를 부린답니다. 힘이 장사인데 어서 이 자리를 피하세요. 창피당하시기 전에!” 허리띠를 풀려던 오삼계는 닭 쫓던 개의 표정으로 비밀통로를 통해 줄행랑을 쳤다. 양아는 오삼계의 복수전에 덫을 놓는데 1차로 성공을 거두었다. 몸을 쉽게 주면 헤픈 여자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하는 사내들의 성정을 여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헤헤, 마님 잘 잘했지요?” “그래, 네가 아주 잘했다. 네가 봐서 내가 거북해하는 손님이 있으면 앞으로도 그렇게 해주렴!” 양아는 은화 한 잎을 하인의 허리춤에 찔러 넣어주었다. 여인은 힘 좋고 풍채까지 아름다운 하인을 필요에 따라 남편으로 둔갑시켜 술꾼과의 곤혹스러운 순간들을 그때그때 지혜롭게 넘겼다.

“나으리, 아버님의 함자(銜字)가 그 유명한 총병관(摠兵官) 오양(吳襄)이시지요? 역시 명문가 자제분은 뭣이 달라도 다르셔” 아버지 이름이 그녀의 입에서 나오자 오삼계는 잡았던 계집의 유방을 놓으며 “네가 어떻게 우리 가친의 이름을 아느냐?”며 정색을 하고 물었다. “소녀가 비록 청루에서 몸을 팔고 있으나 까막눈은 아니옵니다.” “그래, 네 모습이 청루에만 있기는 너무 아까운 미색이다.” 오삼계는 하루가 멀다 하고 그녀를 찾았다. 오늘도 서산에 해가 걸치자 사내는 여인의 치마폭으로 기어들었다. “양아야 너 이 매화를 청산하고 우리 집으로 들어오렴.”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왜 너는 우리말도 못 알아듣느냐? 우리 집 안방마님이 되라는 거지!” “그것은 싫사옵니다! 소첩은 남의 손에 매이는 것은 죽기보다 싫어하옵니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서 이냐? 요 탱탱한 구중궁궐로 천하의 사내들을 사로잡겠다. 그것이렸다!” 사내는 질투 섞인 표정으로 계집의 엉덩이를 꼬집었다. “아프옵니다. 그렇게 세게 꼬집으면 멍이 듭니다!” “멍이 들라고 그렇게 꼬집은 것이다. 멍이 들면 딴 늑대들이 주인 있는 몸이라 탐을 내지 않을 것이 아니냐?” “그것은 안 될 말씀이지요. 이 양아는 닭 대신 꿩은 아니 됩니다. 제가 듣기론 애첩 진원원(陳圓圓)을 이자성 휘하 유종민 장군에게 빼앗기고 방황하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것이 사실인지요? 사실이라면 장군답지 않네요! 계집은 많아요. 이 골목 저 골목 널린 것이 계집이잖아요. 저도 장군이 돈을 넉넉히 준다기에 장군 품에 안기지 않았나요?”

오삼계는 복사꽃 빛깔의 양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신나게 풀무질하다 멈추고,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하다가 다시 엉덩이에 힘을 넣어 여자의 감미로운 동굴을 압박했다.  “장군은 역시 힘이 장비(張飛)를 뺨치네요. 숱한 사내의 품에 안겨 봤으나 장군 품 같이 넉넉하고 푸근한 가슴은 처음입니다.” 양아는 사내의 물건이 깊이 들어가면 양미간을 약간 찡그리면서도 오히려 힘이 솟는 듯 사내의 허리에 양손을 얹고 환상적으로 호흡을 맞춰주었다.  “장군은 유종민 장군이 진미인을 데리고 노는 장면을 상상해 보셨나요? 이 계집도 한때는 요조숙녀 노릇을 했었는데 이 모양 이 꼴이 됐습니다.” 양아의 두 눈에선 어느새 수정 같은 눈물이 양 귓가로 흘러내렸다. “듣기 싫다. 그놈에 새끼는 내 이 주먹으로 언제고 명줄을 끊어 놓을 것이다.” 사내는 쾌락의 절정을 느긋이 즐기고 냉수 한 컵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술 한 잔 더 하자.”며 벌렁 자빠져 뒤처리도 아직 하지 않은 채 있는 계집에게 명령하듯 다그쳤다. “이곳엔 제가 주인이옵니다. 돈을 받기는 하지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아… 그렇구나, 내가 그것을 착각했구나. 미안하다. 나는 여기가 우리 집인 줄 알고 그랬구나! 앞으론 그렇게 하지 않으마! 그런데 오늘만은 내 명령을 받으면 안 되겠느냐? 자 어서 술 한 잔 주렴. 목이 타서 죽겠다.” 사내는 어미 앞의 젖먹이 같이 귀엽고 착해 보이기까지 했다. “요즘 내가 그년 때문에 밤잠을 못 이루고 있다. 네가 진원원을 대신해 줄 수는 없겠느냐?” “방금 말씀드렸지요. 이 양아는 비록 청루에서 몸을 팔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양아로 살렵니다. 어서 술이나 드시고 밤이 깊기 전에 돌아가세요. 제 서방이 오면 다리 모가지가 부러집니다.” “알았다.” 오삼계는 양아의 말에 목에 가시가 걸린 듯 찜찜해하는 눈치다.

날이 새자 사내는 출근하듯 청루 매화로 갔다. 양아는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이다. “어쩐 일이세요? 이렇게 아침 일찍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다. 내 여자가 되어주면 네가 해달라는 대로 모든 것을 해주마!” 양아는 속으로는 기뻤지만 겉으로는 할 수 없다는 듯이 다음날 그를 따라나서기로 했다. 양아는 오삼계에게 가기 전에, 남편의 영전에 무릎을 꿇고 복수할 기회가 생겼다며, 자신이 직접 오삼계의 목을 베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러나 매일매일 복수의 칼날을 갈면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그녀는  복수의 기회를 바로 눈앞에 두고 진이 다  빠져  결국  감기 몸살로 드러눕고 말았다. 그리고는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되어 결국 아무도 모르게 숨을 거두었다. 양아는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으며, 너무나 큰 아쉬움을 남겼다. 결국 양아의 미인계는 미수에 그쳤으니 이는 미수에 그치고만 대표적 미인계였다. 애통하게도 세상을 끊어 바꾸지는 못했고, 나라를 기울여 망하게 하지 못했으니 어찌 절세미인(絶世美人)이나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 할까?

오삼계는 애송이인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초반에 여러 문제 때문에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오삼계는 운남에서 한족 왕조를 다시 건국한다는 명분을 세워 군사를 이끌고 삼번(三藩)의 난을 일으켰다. 이에 평남왕(平南王) 상지신(尙之信), 정남왕(靖南王) 경정충(耿精忠)도 호응하여 1673년에 중원으로 군사를 몰았다. 이때 북경에 살던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吳應熊)과 그의 2남인 오세림은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 어린아이는 궁형에 처해져 내시가 되었다.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 정했다. 삼번의 난 이전 청의 명장들이 건국 초기의 전통인 숙청에 휘말렸기에 청 진압군은 약체였고, 숙련된 장군인 오삼계는 진압군을 격파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이미 67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그 해 8월에 노환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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