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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27. 2023

(27) 원조 레즈비언 - 세자빈 봉씨

★ 18禁 역사 읽기 ★ (230526)

세종대왕은 5천 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성군(聖君)으로 빛나는 업적을 이뤘는데, 무수한 업적 중 훈민정음의 창제(創製)야 말로 세계사에 유일무이한 사례로 우리 국민은 물론 세계인들이 놀라고 존경하는 업적이다. 그러나 세종대왕도 몇 가지 부분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실책으로 이어진 게 있다. 정책적으로는 화폐개혁, 사민(徙民) 정책,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 등이 있고, 인간적으로는 아들과 며느리 등 식구들의 관리가 부실하였다. 역사 수업이 아닌 관계로 인간적인 면모만 들여다보자. 아버지 태종처럼 왕자의 난을 통한 권력 쟁취의 경험이 없던 세종은 자기 자손들도 아버지가 지명하거나 장자상속 원칙대로 물 흘러가듯 잘 될 거라 생각하였다. 그래서 본인 사후의 대비책을 생존해 있을 때 철저히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수양대군의 계유정난과 왕위 찬탈이 생긴 거다. 이것도 역사이니 각설(却說)하고, 집안의 내밀(內密) 한 것만 다루자. 정력이 좋고 밤일을 즐겨했던 세종이니 더욱 그런 부분에 신경을 쓰지 않았으니 안타깝다. 세종은 7명의 공식적인 부인들로부터 18남 7녀 즉 25명을 낳았고, 3명이 일찍 죽었다. 정력이 절륜해도 이 정도 해결하려면 정력제가 필요해서인지 늘 밥상에 수탉과 소의 고환(睾丸)을 즐겼다. 또 일본으로부터 조선에서 나지 않는 정력제인 침향(沉香)을 공물로 받기도 했다. 이런 그가 장자인 문종의 밤일 관리가 제대로 안 되어서 가정이나 조정(朝廷)의 아주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겼다. 골 때리는 맏며느리들의 해괴한 짓거리다. 그리고 본인이 선택하여 결혼을 시킨 임영대군(臨瀛大君)의 남씨부인, 막내아들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송씨부인을 악질(惡疾 : 나쁜 병)이 있다는 이유로 소박을 놓는다. 인간적으로 며느리 넷을 손수 이혼시킨 거다.

세종의 맏아들이자 제5대 임금인 문종(文宗)이 아직 세자였을 때, 세자빈(世子嬪) 휘빈김씨(徽嬪金氏)가 느닷없이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유는 단 하나, 휘빈 김씨가 너무 밝히다가 사고를 친 것이다. 그녀는 안동김씨 판돈녕부사 김구덕의 손녀이자, 상호군 김오문 딸이다. 세자 이향(李珦)은 풍채가 좋았지만 성격이 섬세하고 학문을 즐겼던 반면, 휘빈 김씨는 세자보다 4살 연상일 뿐 아니라 몸집도 컸고 풍만(豊滿)했으며, 대가 세고 색기(色氣)를 주체 못 해 세자를 참기름으로 멸치 볶듯 들들들 볶아 내외 사이에 궁합(宮合)이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혼 초창기에는 왕실의 법도에 따라 세자가 14살이라서 아직 합방 나이인 15살이 아니라서, 15살이 되자 신부인 김씨의 조부가 사망하여 1년간 상중에는 합방을 못하도록 되어 있다. 한창 성(性)에 대한 호기심이 많을 나이에 세자빈이 2년간 독수공방한 것이다. 그러다가 합방이 공식 허락되니 3년 굶은 사람처럼 허기져서 세자에게 덤볐나 보다. 밤마다 시달리던 세자가 피골이 상접한 모습으로 빌빌거리자, 저러다가는 임금이 되기도 전에 산송장 치겠다고 다들 걱정했다. 사실은 성에 대해 잘 모르는 세자가 동궁(東宮)에서 밤새도록 글만 읽고 동궁전(東宮殿) 나인들의 시중만 받아들이면서 세자빈의 처소에 들지 않았다. 사정을 모르는 궁내인들은 세자빈에게 밤마다 너무 당해서 저런 몰골인가 하고 수근덕 거렸을 것이다. 하루속히 세손(世孫)을 낳아야 하는 세자빈은 마음이 초조한 건 더했다.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동궁의 코빼기도 못 보고 매일 허벅지를 은장도로 찌르면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런데 세자는 동궁의 궁녀 효동(孝童)과 덕금(德金)의 수발을 받으면서 밤을 지새운다니 속이 검댕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뭔가 동궁을 꼬일 방법을 강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세자빈은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시녀 호초(胡椒)에게 민간에서 쓰는 갖가지 비법을 묻자 호초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을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사랑을 받는답니다.”라고 대답했다. 시녀인 호초는 원주목사 이반(李蟠)과 기생사이에 난 서출이다. 세자빈의 밀명에 따라 동궁 나인들의 신발 태운 재를 세자에게 먹이는 비방을 하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그래서 재차 비방(祕方)을 찾으니, 호초는 대신들의 첩인 중가이와 하봉래에게서 들은 방법인 교미 붙는 뱀의 정액을 세자빈이 치마 속에 차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세자궁의 시녀 순덕이 세자빈의 약낭에서 가죽신 껍질을 발견하고 세자빈의 어머니께 이 일을 보고했다. 뒤늦게 세자빈이 각종 비방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종과 소헌왕후의 추궁에 세자빈이 모든 것을 자백하였다. 또 순덕이 가죽신 껍질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자백이 명확 하자, 세종은 1429년 7월 18일 세자빈을 폐위하여 폐빈으로 강등시켰다. 또한 폐빈 김씨의 아버지 김오문과 호초의 아버지의 이반의 직첩을 거두고 김씨의 오빠 김중엄도 파면시켰다. 또 세자빈에게 압승술(壓勝術)을 가르쳤다는 죄로 호초는 참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비방을 압승술(壓勝術) 또는 염승술(厭勝術)이라고 한다.

그 후 다시 새로운 세자빈을 간택하게 되는데, 저번 며느리가 박색(薄色)인데 음기가 세어서 그러니 이번의 자격조건은 우선 예쁘고 유순하며 내성적이고 가냘픈 여자 즉 송혜교 같은 여자였다. 그 당시 예조판서 허조(許稠)는 예쁜 얼굴로만 뽑으면 덕(德)이 빠질 수가 있으니 불가하다고 했다. 세종은 기업에서도 면접 때 잠깐 보고 사람의 인성을 어떻게 파악하는가, 그래서 먼저 학교 성적이나 필기시험 같은 것을 보니, 우리도 각 규수의 집안 내력이나 평판을 들어보고 그 여식을 취사 선택하면 될 거다라고 실행했다. 이렇게 해서 요즘 말로 하면 3차 면접까지 하는 3간택(三揀擇) 즉 초간, 재간, 삼간으로 선발된 미스 조선 진(眞)이 바로 순빈봉씨(順嬪奉氏)였다. 세자빈은 하음봉씨로 창녕현감과 이조참판을 지낸 봉여(奉礪)와 행주기씨의 딸로서 얼굴 매우 아름답고, 허리가 가늘기가 버들이요, 피부는 비단결 같았다고 적혀있다. 선정된 순빈봉씨를 보자 왕실에서도 안심하게 되었다. 저 정도라면 체격으로 보나 성질로 보나 세자가 마음대로 휘어잡기에 문제가 없을 뿐 아니라 얼굴도 잠자리에서 별 트집이 없을 거라고 본 거다. 영조가 삼간택시 후보들에게 물은 것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했다. 정순왕후만이 사람의 마음이 헤아리기 어려워 가장 깊다고 대답하여 간택되었다. 열 길 물속 보다 한 길 사람 속이 더 깊다고, 보기에 새초롬하고 청순한 봉씨는 외모와는 정반대로 휘빈김씨 저리 가랄 정도의 색광(色狂)에 질투광이었다.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거다.

세종은 혼례식후에 며느리를 불러서 한나라 유향(劉向)이 편찬한 열녀전(列女傳)을 주고 잘 타일렀건만 며칠 만에 그 책을 뒤 정원에 버렸다나 뭐라나. 공부와 일만 즐기고 밤무대에는 허약한 세자에게 만족 못한 봉씨는 욕구불만으로 짜증과 신경질을 있는 대로 부린다. 더구나 궁궐에 술을 숨겨 놓고 마시면서 취하면 궐내를 마구 돌아다녔다. 또 질투심에 해당 궁녀나 다른 궁녀들을 구타하기 일쑤였다. 어떤 때에는 거의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할 정도로 폭력적이기도 했다. 이 밖에도 순빈의 경솔한 행동들은 실록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세자가 종학(宗學)에 옮겨 거처할 때 시녀들의 변소에 가서 벽 틈 사이로 외간 사람을 엿보았다거나, 궁궐 여종에게 남자를 사모하는 노래를 부르게 했다. 세자빈의 자리에서 결코 모범적이지 못한 행동을 한 것 등이 문제로 지적됐으나 세종은 순빈 봉씨의 거친 성품과 그녀가 했던 가벼운 행동들을 어느 정도는 용인했다. 오로지 국가의 기둥인 적장자의 세손을 보아야 한다는 일념으로 세자빈의 기행(奇行)을 묵인해 준 것이다. 그리고 세손을 보기 위해 세자에게 권씨, 정씨, 홍씨 3명을 승휘(承徽 : 세자의 후궁)로 들여 주었다. 한편으로는 세자를 불러서 정실부인에서 적자가 태어나는 게 최고이니 세자빈 침소에 자주 들어가라고 아들 내외의 밤일까지 충고했으나, 세자가 필이 다른데 꽂혀서 실제 몇 번 합방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러니 세자빈 봉씨의 입장에선 속에 천불이 날 지경이었다.

세자의 후궁으로 들어온 권씨가 임신을 하게 되자 더욱 초조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급기야 도저히 용납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게 된다. 바로 몸종인 소쌍(召雙)이라는 계집종을 꼬여서 동성애에 탐닉하게 되는 거다. 장차 조선의 국모가 될 귀한 여자가 계집종과 동성애를 저지른 거다. 봉씨가 소쌍이와 같이 수일을 밤을 보내니 자연히 궐내에 소문이 나고, 동궁도 이 사실을 듣고 세자가 세자빈 침소에서 소쌍에게 물으니 모두 실토하였다. 그러자 세자가 경고를 하였지만 봉씨는 멈추지 않고 더욱 심하게 행동했다. 원래 소쌍이는 후궁 권씨의 사비(私婢) 단지(端之)와 친하게 지내면서 같은 방에 기거했는데, 봉씨와 잠자리를 하자 단지가 질투를 했다. 그러자 봉씨가 또 다른 사비 석가이(石加伊)를 시켜서 소쌍이를 감시하고 미행케 하였다. 봉씨는 천성이 문란했는지 아니면 동성애에 만족을 했는지 나중에는 석가이까지 잠자리에 끌어들여 관계를 가진다. 그 당시 동성애는 그저 여인네끼리 빨고, 핥고, 비비고, 문지르고 등의 기본적인 수를 쓴 것만이 아니었다. 술에 취하는 등 분위기와 때에 따라 아주 고차원의 고단수까지 동원했다는 기록이 있다. 예를 들면 오이를 사용하는 거다. 우리가 생각하면 보통 가지(茄子)를 사용할 거라고 상상하지만 그 당시에 오이를 대용했단다. 오이는 겉이 우툴두툴하고 가시 같은 뾰족한 돌기가 있어서 불가능할 텐데, 칼로 껍질을 다듬었을까? 이것은 요즘으로 치자면 성인용품점에서 판매하는 여성용 딜도 종류였을 것이다. 카사노바들의 무용담에 따르면, 적당한 굵기의 오이를 펄펄 끓는 물에 잠깐 동안 데쳐서 겉면만 약간 손질한단다. 그러면 단단하던 몸체가 약간 물렁물렁해지고 잘 부러지지도 않으면서 적당히 꿋꿋하기가 사내의 그것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나? 양 끝 부분을 적당히 손질하면 동성연애녀 둘이서 양쪽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마치 남녀의 행위 마냥 즐길 수 있었다. 

어느 나라나 역사적으로 봤을 때, 여자들만이 기거하는 구중궁궐(九重宮闕)에는 동성애가 은밀하게 존재했다. 특히 아랍 국가가 그 기교와 기술이 가장 발달되었고, 하렘이라는 이름으로 이라크의 아바스왕조(750 ~ 1258) 때 극치를 이루게 된다. 아바스 하렘의 정점인 칼리프 알 무크타디르는 4,000여 명의 노예 첩들, 11,000여 명의 하인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렘을 거느렸다. 하렘의 꼭대기에는 칼리파의 어머니가 있었다. 다른 문화권과는 달리 아바스 왕조에는 본처의 개념이 없었고, 아내들은 본처나 후처의 구분 없이 모두 똑같이 대해야 했다. 여성들끼리의 동성애를 레즈비언(Lesbian)이라 부르는데, 그리스의 섬 레스보스에서 온 것인데, 그곳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동성애자는 사포(Sappho)였다. 사포는 기원전 7세기에 태어난 뛰어난 시인이자 작곡가였는데, 여학교를 운영하며 제자들과 연애를 했다. 그것은 당시에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렘에는 천인화(天人花)라는 기술이 뛰어난 레즈비언 윤락녀가 있었는데, 이들을 비비는 여자라는 뜻의 ‘무사히카’라고 했다. 이들은 크고 잘 발달된 클리토리스(陰核)를 가지고 있어, 남근처럼 발기시켜 상대 여성의 클리토리스를 자극해 주었다고 한다. 천인화들은 경험이 풍부한 노파들에게서 ‘음핵을 서로 문지르는 기술’을 배우고, 상대가 흥분해서 정신을 잃을 때까지 음부에 바르는 방향제인 샤프란을 사용하여 정신을 홀리는 마사지 비법을 전수받았다. 이처럼 하렘의 성애법은 도구를 이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술탄들이 후궁들의 정숙한 생활을 위해 오이까지도 통째로는 안 되고, 얇게 썰어서 반입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동성애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고, 금욕의 상징으로 변발(辮髮)을 한 하녀 계층에서 유행했는데, 싱가포르에서는 1950년대까지도 흔한 풍습이었다. 변발 하녀들은 부모가 결혼을 강요하면 혼인식만 올리고, 돈을 모아 남편에게 두 번째 아내를 사주고 다른 변발 여성과 동성결혼을 했다.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는 한 쌍”이라는 뜻으로 ‘상지(相知)’, 두부 가는 맷돌이라는 뜻으로 ‘마두부(摩豆腐)’라 불렀다. 우리나라에선 여자끼리 하는 동성애를 밴대질이라고 하고, 그런 부부사이를 "맷돌부부"라고 하니 뜻이 비슷하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동성애는 그다지 흉이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권장 사항이었다. 스파르타 왕의 조카이며 개혁입법가인 리쿠르고스(Lycurgus)는 "시민(남자)은 남자애인을 갖지 않으면 진정한 시민이 아니다"라고 말할 정도다. 리쿠르고스가 역사적으로 실존한 인물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대의 여러 역사가들은 리쿠르고스가 공동체적이고 군국주의적인 개혁으로 스파르타 사회를 바꾸었다고 본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등도 동성연애자였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대화>에서 미소년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세밀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 아테네에서는 성인남자들이 소년들에게 스승으로서 지식을 가르치며 성관계를 갖는 게 일반적인 풍조였다고 한다. 따라서 이 시대에 흔히 "연애"라고 하면 이성 간의 사랑이 아니라 남성들 간의 사랑을 일컫는 게 보통이었다. 이성애보다 동성애가 얼마나 더 애착적이고 끈끈한지를 증명하는 실화가 있다. 스파르타의 막강한 군대가 테베와의 전쟁에서 박살이 났던 이유는 테베의 ‘신성대’라는 특공대에게 쪽도 못쓰고 깨졌기 때문이다. 이 특공대는 3백 명의 정예부대로서 모두 동성애자로 구성됐다. 이들이 용감했던 이유는 애인 앞에서 놀라운 용맹성을 발휘했으며, 위험이 닥치면 서로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 항전을 했기 때문이다. 철학자 플라톤은 말했다. “사랑하는 연인으로만 이루어진 국가나 군대를 만들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모든 병사들이 연인과 함께 싸운다면 아무리 적은 세력이라도 세계를 정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수도 한양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다음과 같은 이상야릇한 19금(禁)의 동영상이  19세 주인공인 순빈 봉씨에 의해서 이루어지곤 했다. 그녀에게 남편 세자의 품은 없지만 대신 시비 소쌍이와 매일 뜨거운 밤을 보내느라 요즘 삶이 훨씬 행복했다. 소쌍이의 능란(能爛)한 애무(愛撫) 솜씨는 순빈 봉씨의 몸과 마음을 마음대로 다루었다. 소쌍이의 능란한 손놀림과 감미로운 입술에 순빈 봉씨는 눈이 절로 감기며 황홀해져 호흡이 거칠어지자, 소쌍이가 말했다. “마마, 시원하시와요?” “응응, 시원한 게 아니라 몽롱하다. 더 세게. 그래, 더 세게 비비고 눌러 다오.” “네, 마마, 알겠사옵니다.” 소쌍이는 세자빈 봉씨의 온몸을 마음대로 다루었고 특히 은밀한 그곳은 더욱 진하게 마사지했다. 그러자 그녀들은 흥분하여 몸이 뜨거워지자 알몸이 되어 격렬하게 ‘맷돌질’을 하게 되었다. 이때 소쌍이가 남자 역할을 맡았고, 순빈 봉씨는 여자 역할이었다. 겉보기에는 얌전한 순빈 봉씨는 소쌍이와 동성연애로 세자의 손길 없이 욕정을 달래고 있었다. 후궁으로 들어온 권씨가 잉태를 하자, 소헌왕후는 세종과 상의하여 권씨를 종4품 승휘로 책봉하였다. 더욱 화가 솟구친 순빈 봉씨는 주야를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소쌍이와 동성연애에 몰두했다. 어느 날 세자빈 봉씨는 승휘(承徽) 권씨에게 트집을 잡아 온몸에 유혈이 낭자하게 회초리를 휘두르자, 그 소식을 들은 소헌왕후는 세자빈 봉씨에게 “여자의 질투는 칠거지악(七去之惡) 중 하나이니라. 너는 만백성의 사표가 되어야 하거늘 세자의 정기를 몸에 기르고 있는 승휘에게 감히 매질을 했단 말이냐?” “어마마마,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용서하옵소서.” 세자빈 봉씨는 간신히 용서를 받았으나 마음속에서는 이를 갈았다.

어느 날 순빈 봉씨는 소쌍이를 불러 다른 시비 석가이와 함께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얘야, 석가이야, 노래를 좀 부르러무나”. 말하자면 아녀자가 사내를 유혹하는 내용의 노래였다. 이 둘은 어느덧 세자빈과 삼각관계에 이르고 말았다. 그해 가을 동궁에서 순빈 봉씨의 총애(寵愛)를 차지하려는 시비 소쌍이와 석가이가 세자의 침전 뒷곁에서 언쟁을 벌였다. 소쌍이가 석가이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네가 개지 사람이냐? 사람이라면 어찌 그런 추잡스러운 노래를 하느냐?” “흥, 너야말로 개 같은 년이다. 밤마다 세자빈 사타구니에 고개를 처박고 온갖 추잡스러운 짓거리를 한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아?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개 같은 년이지.” 이때 두 궁녀가 다투는 소리를 들은 세자 이향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 궁녀를 불러 다그쳐 묻자 두 궁녀는 모든 사실을 토설(吐說)하였다. 소헌왕후는 세자빈을 불러 묻자 세자빈 봉씨는 대답했다. “그러하옵니다. 사실이오나 어찌 그 일이 제 혼자만의 일이겠습니까?” “아니 뭐라고?” “이는 궁중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니옵니다. 궁중의 여인네들도 사람이옵니다.” 세자빈 봉씨가 궁녀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밝히자 그동안 궁녀들 간에 있었던 동성연애가 세상에 확 알려지게 되는 순간이었다. 홍석천의 커밍아웃은 난리 축에도 끼지 못했을 정도다. “마마 궁중에서는 예로부터 그러한 일이 계속 있었고, 사람은 다 제 짝이 있는데, 저는 무슨 죄로 밤마다 잠을 못 이루라는 법이 있사옵니까. 그렇다고 제가 사내를 은밀히 침전에 불러들인 것도 아니옵니다.” 할 수없이 소헌왕후는 이 사실을 세종에게 알리자, 세종은 매우 경악했다. “맷돌 부부라고요?!” 세종은 대신들에게 의견을 묻자 사형(死刑)을 주장했다. 하지만 세종의 노력으로 죽음만은 면하고 폐출(廢黜)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사실 우리나에서 역사적 기록에 언급된 최초의 동성애자는 아마 신라 제36대 왕 혜공왕(惠恭王 : 758-780) 일 것이다. 그는 경덕왕(景德王)의 적자로서, 삼국 통일의 위업을 이룬 태종무열왕의 직계손으로는 마지막 임금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던 경덕왕은 고승(高僧)인 표훈대덕(表訓大德)에게 아들을 얻게 상제(上帝)에게 청해 달라고 말했다. 표훈대덕은 하늘로 올라가 상제를 만나고 내려와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안 된다고 왕에게 전했다. 왕이 딸을 아들로 바꾸게 해 달라고 청하자 표훈대덕은 다시 상제를 만나 아들이 태어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상제는 그렇게 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이 경고대로 원래 여자가 되어야 했으나 남자로 태어난 혜공왕은 어려서부터 여자의 놀이를 즐겼으며 치장하기를 좋아하고 도사들과 어울려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나라가 크게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이다. 경덕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나이가 8세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모후인 만월부인 김씨가 섭정을 하였다. 그러나 왕권의 기반이 약해 조정의 중신들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키면서 정치적 불안정이 커졌다. 결국 혜공왕은 780년 이찬 김지정(金志貞)이 반란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왔을 때 왕비와 함께 살해되었다. 혜공왕 이후 신라 왕실은 점차 기력을 잃고 쇠퇴일로를 걸으며, 지방권력과 장보고(張保皐) 같은 권신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혜공왕과 비슷한 말로를 보여준 임금은 고려시대 공민왕(恭愍王 : 1330-1374)이다. 왕은 몽고 공주출신의 노국공주가 병사하자 큰 슬픔과 고통 속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다 자제위라는 궁정 청년 근위대를 만들고. 그들과 동성애를 즐긴다. 그중 후궁 익비(益妃)와 사통 하여 임신까지 시킨다. 이를 최만생(崔萬生)이 은밀히 공민왕에게 보고하였다. 공민왕은 “이 사실을 아는 자를 모두 죽여야겠다.”라고 말했다. 최만생은 자신까지 죽게 될까 두려워 홍륜에게 다시 이 사실을 알렸다. 며칠 후 그들은 쿠데타를 일으켜, 신하들과 궁녀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방화를 일삼았다. 결국 공민왕은 도망가려다가 홍륜, 권진, 홍관, 한안, 최선, 최만생 등에 의해 붙잡혀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에 홍륜에게 암살되었다. 그해 새로 정권을 잡은 세력이 최만생 등을 처형하고 자제위(子弟衛)를 폐지하였다. 공민왕의 자제위가 순전히 왕의 욕망만을 위해 만들어진 궁정 호스트들도 아니다. 정권교체 후 조선의 사가(史家)들이 부패한 고려 왕실의 필연적 멸망을 정당화하기 위한 왜곡과 과장일 가능성이 크다. 자제위는 원․명 교체기에 반원기치(反元旗幟)를 높인 공민왕이 친원파에 대한 방어적 목적과 북방수복의 원대한 꿈의 실현을 위한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더 높다. 어쨌거나 예술적 재능으로도 뛰어났던 개혁군주 공민왕은 어이없게 자신이 쓰다듬어 준 한 청년의 손에 비명횡사하고 만다. 동국통감의 기록을 살펴보자. 고려 공민왕 21년 임자년 10월의 기록이다. “자제위를 설치하여, 연소하고 용모가 아름다운 자를 선발해서 소속시킨 다음 대언 김흥경으로 총관하게 하였다. 이에 홍윤, 한안, 권진, 홍관, 노선 등이 음란하고 더러운 짓으로 왕의 총애를 얻어 항상 와내(臥內 : 침전)에서 모시었다.” 고려 공민왕 22년 계축년 2월의 기록이다. “왕이 익비의 궁에 거둥 하여 홍윤, 한안, 김흥경 등으로 하여금 통간(通奸)하게 하니, 익비(益妃)가 거절하였는데, 왕이 칼을 뽑아 치려고 하자 익비가 두려워하여 복종하였다. 이로부터 홍윤 등이 왕명이라고 거짓 꾸며, 자주 왕래 하였는데, 익비도 그 거짓됨을 알았으나 거절하지 못하였다. 왕은 천성이 여색을 좋아하지 않았고, 노국공주가 살아있을 적에도 동침할 때가 매우 드물었다. 노국공주가 훙(薨 : 사망)한 뒤 비록 여러 비를 맞아들였으나 이들을 별궁에 두고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공주만 슬피 생각하다가 마침내 심질(心疾)이 되었다. 그리하여 항상 스스로 곱게 화장을 하고 부인의 형상을 한 다음, 먼저 내비(궁궐 노비) 중에서 젊은 자를 방안에 들여 보자기로 그 얼굴을 가리고는 김흥경과 홍륜의 무리를 불러서 음란한 행동을 하게 하고는 왕은 옆방에서 창벽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다가 마음이 동하면 즉시 홍륜의 무리를 이끌고 와내로 들어가서 그 형상과 같이하게 하였다.”

그 외 공식적 기록에 남겨진 동성애자의 모습은 신라 원성왕대(785-798)에 묘정(妙正)이라는 미소년 사미승(沙彌僧)의 얘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그는 절의 우물인 금광정(金光井) 가에서 발우(鉢盂)를 씻는 일을 맡고 있었다. 어느 날 자라 한 마리가 우물 속에서 떠올랐다가 다시 가라앉는 것을 보고 매번 먹다 남은 밥을 자라에게 주었다. 법회가 끝나는 날, 묘정이, “내가 너에게 은덕을 베푼 지 오래되었는데 너는 나에게 무엇으로 갚으려 하느냐?”라고 하자, 자라는 목에서 구슬 한 개를 토했다. 묘정은 언제나 그 구슬을 허리에 차고 다녔는데, 어느 날 우연히 묘정을 본 원성왕은 그를 크게 소중히 여기고 내전(內殿)으로 맞아들여 옆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다. 그 뒤 사신을 따라 당나라로 갔을 때 황제로부터 신하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정을 존경하고 좋아하였다. 한 관상가가 그를 본 뒤 황제에게, “저 사미가 다복한 상이 아닌데도 남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것을 보면 기이한 물건을 지니고 있음이 틀림없다.”라고 하였다. 황제는 그의 몸을 검사하여 허리에서 구슬을 찾아내었다. 황제는 원래 4개의 여의주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난해 하나가 없어졌는데, 묘정이 가지고 있는 구슬이 잃어버린 구슬과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구슬을 빼앗고 신라로 돌려보냈다. 그 뒤부터 묘정은 남의 사랑과 신뢰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동성 간의 사랑이 궁정이나 귀족들의 전유물이 아님은 분명하다. 구체적인 기록에는 남지는 않았으나 구전(口傳)으로 전해진, 민간의 동성애 전통과 관련된 민담과 구전가요는 많이 있다. 우선 화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화랑은 삼국시대 이전, 부족공동체 사회에서부터 자생적으로 존재해 온 청년 조직을 후에 국가에서 인위적으로 재편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들은 국선(國仙) 또는 풍월주(風月主)를 화랑의 우두머리로 하고 그를 따르는 낭도들로 구성되었는데, 세속오계로 대표되는 정신적 가치관 밑에서 강한 단체정신으로 여러 수련을 통해 심신을 단련시켰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단체 생활과 끈끈한 집단정신으로 자연스럽게 동성애적 상황이 발생할 수 도 있겠다. 또 몇몇 향가의 기록 속에 은근히 배어 나오는 낭도들 간의 사랑과 그리움의 감정 등을 감안했을 때, 화랑도에서 동성애적 행위와 사랑은 꽤 공공연하게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일제 때 일본 학자들이 이런 주장을 공식화하였으나, 조선시대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도 화랑에서 남색의 행위는 부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 유랑(流浪) 예인(藝人) 집단 남사당(男寺黨)과 그 외 승방(僧房)과 머슴사이에서 남자끼리, 또는 여자끼리의 사랑 얘기는 많이 전해진다. 김대문의 <화랑세기>에는 사다함(斯多含)과 무관랑(武官郎)의 사랑이 최고다. 무관랑은 사다함 몰래 금진랑주(金珍嫏主)와 정을 통한 것이 마음에 걸려 병으로 죽자, 사다함도 7일간 통곡하다가 죽었다. 김유신 장군이 풍월주일 때 밑에서 같이 있던 보종공(宝宗公)과 염장공(廉長公)이 동성애였고, 세 사람이 깊이 사귀었던 양도공(良圖公)과 흠순공(欽純公), 천광공(天光公) 등의 우정을 벗어난 동성애적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양도공은 친아버지 모종공을 닮아 그림이 뛰어났고, 근친결혼을 싫어해서 부인과 교접을 않고, 흠순공과 친하게 지내다가 천광공과는 부부처럼 지낸 것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는 청나라 상인들과 미소년들이 거래를 통해 동성애 행위를 한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이 부분은 중국 고전소설 홍루몽에서 미동(美童)들이 손님을 접대하는 술집 얘기로 뒷받침된다. 박지원도 청나라 문인들이 미소년을 추천하여, 은근히 중국의 동성애 풍습을 드러냈다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당시의 조선의 풍속상 이런 동성애 행위는 매우 엄격히 배척하는 분위기였을 텐데, 유학자이자 실학자인 박지원이 그러한 동성애 풍습을 자세히 기록해 놓은 것이 매우 신기하다. 기록된 내용 중 한 가지를 살펴보면 이렇다. 왕삼빈(王三賓)은 민(閩 : 복건성) 지방 사람이다. 나이는 스물다섯인데, 아마도 윤형산(尹亨山)의 청지기 같기도 하고 혹시 기려천(奇麗川)의 비복(婢僕) 같기도 하다. 창대가 말하기를, “어제 아침에 우연히 명륜당 오른쪽 문 가리개 아래에 있었는데, 기려천과 왕삼빈이 팔짱을 끼고 목을 나란히 하여 홰나무 뒤에 서 있더니 한참 뒤에 입을 맞추고 혀를 빨더군요. 마치 전각 위의 얼룩무늬 목을 한 비둘기처럼 하였는데, 사람이 가리개 사이에 있으면서 훔쳐보는 줄도 모릅디다. 왕삼빈은 수도 없이 음란한 교태를 간드러지게 떨더이다. 그저께 새벽에는 책을 가지고 윤 대인의 구들방에 갔더니 왕삼빈이 윤 대인의 이불속에서 머리를 내밀고 책을 받았습지요.”라고 한다. 곡정의 비복인 악씨(鄂氏)도 그 아름다운 젊은이를 닮았다. 왕삼빈은 비단 얼굴이 잘생겼을 뿐 아니라, 글씨를 이해하고 그림을 잘 그린다. 비교적 소상히 적고 있는 것이다.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의 임꺽정(林巨正)에 머슴들끼리의 남색(男色) 행위가 묘사되고 있으며, 그 외 현대 문학작품에서 동성애 묘사는 다양한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단편적인 기록들이나 구전을 통해 우리 역사 속에서 동성애는 보편화된 삶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사회 구석구석에서 일정 부분 상존해 왔던 것은 사실이다. 이 세자빈 봉씨의 동성애사건은 어을우동(於乙于同) 또는 어우동(於于同), 유감동(兪甘同)의 음란 기행과 더불어 조선 초기의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은 대표적 음풍사건(淫風事件)으로 기록된다. 이 사건 이후 세자는 새로운 정식 아내를 맞이하지 못하고, 후궁이었던 권씨를 승진시켜 세자빈으로 삼았고, 권씨가 아들(단종)을 낳은 후 곧 죽었다. 여자에 신물이 났는지 더 이상 정비를 들이지 않았다. 문종은 즉위 후 부친 세종의 상을 마칠 즈음 죽게 되어서 재위 기간 동안 정식 왕비가 없었던 조선 유일의 왕으로 남게 된다.

일반적으로 남성애자를 게이(Gay), 여성애자를 레즈비언(Lesbian)으로 부른다. 레즈비언 커플에서 남성 역할을 부치(Butch), 여성 역할은 펨(Femme) 이라 한다. 성관계 시 주로 손가락을 상대의 질에 삽입하는 쪽을 깁(Give), 삽입을 받는 쪽은 텍(Take), 둘 다 하는 포지션을 깁텍 또는 깁앤텍(Give & take)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레즈비언들이 깁앤텍이며, 깁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온깁, 텍만을 고집하는 사람을 온텍이라고 한다. 역사상 유명한 동성애자들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1. 소크라테스

그리스의 철학자로 사사로운 일상사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고 온종일 올리브 나무 밑에 앉아 귀족 청년들과 정의, 덕, 경배, 영혼 등 철학적 주제들을 토론하며 지냈다고 한다. 청년들의 교사이자 연인이었던 그는 아테네의 관습이었던 동성애를 구현한 인물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여자와 동침하면 육신을 낳지만, 남자와 동침하면 마음의 생명을 낳는다.”는 등 동성애 예찬론을 펼친 바 있다

2. 사포

사포는 기원전 6세기쯤 에게해의 레스보스섬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섬의 이름이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들을 지칭하게 되었다는 것을 빼면 그녀에 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 당시 레스보스섬의 귀부인들은 시를 지어서 낭송하는 자유스러운 모임들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진다. 

3. 미켈란젤로

다비드 상, 시스틴 성당의 벽화 등 뛰어난 화가이자 조각가로 명성을 떨쳤지만 소네트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인 탁월함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지은 대부분의 소네트는 젊은이들에게 주로 보내기 위한 연시였다. 57살에 토마소 드 카발리에리라는 멋진 젊은 귀족을 만난 미켈란젤로는 나머지 생애 동안 그에게 몰두했다. 수많은 소네트를 지어 그에게 보냈으며, 육체적 관계보다는 소크라테스가 주창한 플라토닉 러브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의 죽음 역시 카발리에의 품 안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4.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가 처음으로 동성애자임을 알리는 신호탄은 24살 때 17살 소년에게 불경한 짓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견책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상당히 비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그의 노트들은 거울에 비춰봐야 바로 보이게끔 반대로 씌워졌다.  이러한 이유로 그의 파트너였던 세자르, 볼트라피오, 안드리아, 그리고 그가 입양한 상속자 델지 같은 젊은이들을 근사하게 차려 입히는 것을 좋아했다는 것  말고는 우리가 그의 사생활에 대해 아는 바는 별로 없다. 그는 또한 카프로찌라는 10살짜리 소년을 데리고 산적도 있다.

5. 성 아우구스티누스

354년생인 그는 실상 기독교 교육을 받거나 세례를 받은 적은 없다.  학교도 비기독교 문화의 중심지였던 마다우로스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그가 동성애에 빠진 것은 370년 경이며, 훗날 그의 '고백론'에 기술하고 있다. 이어 동양적 사상과 결부된 기독교의 한 형태인 마니교에 빠져들었으며, 마니교 역시 어떠한 성애도 용납하지 않았으나 동성애 자체가 성생활에 빠진 타락을 방지한다는 이유로 동성애에 대해서만은 관용적이었다. 그는 철저한 여성혐오론자였으며 현재의 기독교적 고행의 기반을 닦은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게이와 레즈비언들에게 가해진 수세기에 걸친 억압과 박해가 바로 아우구스티누스 같은 인물에서 비롯됐다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6. 셰익스피어

그의 희곡에서는 동성애에 대한 별 언급이 없고 단지 <뜻대로 하세요>, <십이야> 등에서 일부 등장인물이 다양한 혼성적 옷차림이나 성별을 구분할 수 없게 하는 에피소드 등을 보여 주는 데 그치고 있다. 하지만 1590년대 쓰여 1609년에 출판된 것으로 보이는 소네트에서는 분명한 표현이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분석하자면 셰익스피어가 사랑하는 청년과 그 청년이 사랑하는 흑발의 여인에 대한 적개심이 드러나 있다. 초판 발행 시 이 소네트에서의 대명사들이 바뀌고 순서가 바뀌었던 탓에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이 소네트가 동성애에 관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가 동성애자냐 아니냐는 지금까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오랫동안 그의 소네트는 동성애적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읽혀져 왔다.

7. 차이코프스키

동성애의 고통으로 번민했던 신경쇠약의 음악가. 1840년에 태어난 차이코프스키는 어릴 때부터 예민한 신경을 지닌 아이였으며, 음악적 재능 또한 남달랐다. 결혼을 했지만 일 년 만에 잘못된 결혼임을 인정했고 그가 진정 사랑에 빠졌던 것은 조카 '봅'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의 관계는 플라토닉적으로 이어져 갔으며 봅 역시 35세의 나이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동성애자였던 것으로 알려진 음악가는 슈베르트, 생상, 브리튼, 코플란드, 레너드번스타인, 사뮤엘 바버 등이 있다. 

8. 다윗과 요나단

성서에서 다윗이 동성애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바로 다윗이 요나단을 보고 한 행동을 묘사한 장면으로서 “얼굴을 땅에 대고 세 번을 절을 하였다. 다윗이 진정될 때까지 그들은 서로 입을 맞추고 눈물을 흘렸다.”인데 이 ‘눈물을 흘렸다’라는 내용을 원래의 히브리어로 정확히 번역하면 ‘자신을 넘치게 하다’, 즉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는 ‘사정하다’였다. 하지만 전장에서 사울과 사랑하는 요나단은 죽어 버렸고, 요나단의 죽음에 대해 다윗은 ‘여인의 사랑을 뛰어넘는 사랑’이란 말을 하며 다윗은 그를 추도한다. 

9. 엘리노어 루스벨트

먼 촌수의 숙부였던 4연임 대통령인 플랜클린 루스벨트와 결혼해서 6명의 자녀를 두었고 여성의 권리, 세계 평화, 지구상에서 소외되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의 편에 서서 거리낌 없이 활동함으로써 논란을 몰고 다녔던 영부인이었다. 베일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사생활은 대부분 여성들과 정열적으로 혹은 이성적으로 교제한 것이었다.  특히 프랭클린의 초선을 취재하던 레즈비언 AP 기자 로리나 히콕과는 오늘날 기준으로 봐도 극도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키스하고 싶다."는 등의 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 편지들을 매일 보내기까지 했다.

10. 바이런

낭만주의 시인으로 이상과 현실 사이에 가로놓인 건널 수 없는 거리에 대해서 동료 낭만주의자들보다도 더 어둡고 냉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관습에 묶이지 않은 그의 동성애로 인해 아주 일찍부터 게이들의 상상력을 점화시킨 선구자였다. 19세기나 20세기의 비평가들은 바이런의 이러한 양성애적 기질을 깡그리 무시했으며 많은 사료가 말살되었다. 

11. 알렉산더 대왕

동성애자는 유약하다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 버린 남자. 어려서부터 동료였던 헤파에스티온을 사랑하여 그가 죽었을 때 미친 듯이 괴로워했고 그를 살려내지 못한 의사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시켰다. 다른 고대문헌을 보면 페르시아 원정 시 얻은 시동 바고아스를 사랑해 평생 동안 친구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알렉산더 외에도 군인적 동성애자로는 시저, 트라잔, 프레디릭 대제, 아라비아의 로렌스 같은 인물이 존재하지만 군인적 색깔의 명성에 덮쳐서 동성애자에 대한 인식은 가려지게 마련인데도 알렉산더는 남성을 사랑한 군인으로 역사상 가장 잘 알려져 있다. 

12. 오스카 와일드

알프레드 경과의 동성애 재판으로 20세기 최고의 스캔들을 일으킨 극작가.  커밍아웃의 선구자. 댄디즘을 말할 때 가장 먼저 거론되는 인물로 일생동안 최대의 영광과 오욕을 동시에 경험한 인물이다.

13. 앙드레 지드

‘좁은문’, ‘지상의 양식’, ‘사전꾼들’, ‘전원교향악’ 등의 작가로 194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 일생을 청교도적인 도덕과 동성애적 관능주의 사이에서 고통받았다. 자서전 한 알의 밀알이 죽지 않는다면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동성애적 고백을 하고 있다. 그는 요즘의 우리가 성에 대한 본질주의적 견해라 일컫는 것을 신봉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4. 마르셀 프르스트

의식의 흐름을 좇는 형식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한편으로 현대 문학의 최고봉에 이른 작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감추었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역시 동성애를 다루고 있으나 여러 가지 복잡한 장치로 의미가 숨겨져 있다. 그러나 당시 동성애를 다루는 데 유행이었던 의학적 방법이 간과하고 있는 새로운 종류의 담론을 활짝 열었다.

15. 미셸 푸코

20세기 최고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노골적인 게이사우나 출입에 따른 비화도 유명하다. 광기의 역사, 임상의학의 탄생, 성의 역사 등의 저작이 있고 성의 역사 시리즈는 성적 정체성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시초이자 중심이 되었다. 

16. 나이팅게일

백의의 천사라는 이미지에 가려져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그녀가 일생에 정열적으로 사랑한 한 사람은 여성이었다. 그녀가 간호사가 된 이유도 사랑하던 여성에게 결별을 선언당한 때문으로 알려져 있으며 일생을 환자들과 더불어 헌신하며 살았다.

17. 버지니아 울프

‘올란도’, ‘델러웨이부인’, ‘세월’, ‘자기만의 방’ 등의 작품을 남긴 20세기 초반 영국 최고의 여류 문인이자 페미니즘의 선구자였다. 결혼생활을 지속했으나 사실상 그녀가 강렬한 정서적 유대감, 성적 호감을 느낀 대상은 늘 여성이었고 그녀의 작품 속에서도 암시된다. 템즈강에 뛰어들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18. 록 허드슨

배우로서의 명성뿐 아니라 에이즈문제의 심각성을 알리는데 본의 아니게 기여하게 된 미국의 영화배우로 전성기 때는 남성적이면서 로맨틱한 남자주인공의 전형으로 여성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으나 비밀리에 남자들과의 교제를 계속했으며 에이즈에 감염 후 전 세계적으로 충격을 일으키며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19. 테네시 월리암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등의 극작가. 동성애를 작품 속에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의 작품 속에 암시적으로 깔려있어 게이들의 존재를 미국 인의 의식세계에 감동적인 방식으로 전달했다. 말년에 게이임을 밝히고  회고록에서 게이 문제를 진솔하게 밝혔다.

20. 바슬라프 나진스키

20세기 최고의 발레리노였던 나진스키는 발레사(史)의 전설로 통하며, 어려서는 ‘발레의 신동’이었고 성장해서는 ‘발레의 신’이었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지구의 중력을 무시라도 하는 듯한 도약은 신의 몸짓이었다. 그는 ‘발레뤼스’ 발레단의 단장인 디아길레프와 동성연애를 했고, 파리에서 명성을 얻어 예술계의 명사가 되었을 때 로댕도 그의 춤추는 모습을 3점의 조각으로 남겼고 시인 장 콕토는 팸플릿을 직접 디자인하기까지 했다. 그가 동성 연인인 디아길레프와 헤어져서 여자무용수와 결혼하자 질투심에 불탄 디아길레프가 그를 발레단에서 해고하는데 이를 견디지 못한 나진스키는 결국 정신질환에 걸려 발레리노로서의 종언을 고한다.

이 외에도 무수하다. 미술계 거장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미켈란젤로·화가 프란시스 베이컨, 음악계의 헨델·슈베르트·차이코프스키, 팝스타 엘튼 존·프레디 머큐리·보이 조지·조지 마이클, 팝아트 거장 앤디 워홀, 천재 철학자 비트겐슈타인, 패션계의 크리스천 디올·장 폴 고티에·마크 제이콥스·입 생 로랑·조르지오 알마니·베르사체 등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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