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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May 28. 2023

(28) 넬슨 제독을 침몰시킨 – 엠마 해밀턴

★ 18禁 역사 읽기 ★ (230528)

인류 역사의 큰 물줄기를 바꾸어 놓는 획기적인 전투가 많다. 바다를 제패하는 게 세계를 제패한다고 생각하는 사가(史家)들에 의해서 세계 3대 해전 또는 4대 해전이라고 불린다. 보통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살라미스 해전, 스페인 함대와 영군 해군의 칼레해전, 영국 함대와 나폴레옹 함대의 트라팔가르 해전, 이순신 장군과 일본해군과의 한산도 대첩 등을 들기도 한다. 아무튼 이중 트라팔가르 해전을 승리로 이끌어 나폴레옹을 몰락의 길로 몰아넣어 유럽의 역사가 바뀌게 한 명장이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이다. 그런데 이런 맹장(猛將)이자 지장(智將)인 그를 한눈에 꼼짝 못 하게 포로로 만들어 옭아맨 여인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엠마 해밀턴(Emma Hamilton)이다. 그녀는 원래 1765년 4월 26일에 영국 체셔주의 네스턴에서 대장장이인 헨리 라이언(Henry Lyon)의 딸로 태어났다. 처음에 에이미 라이언(Amy Lyo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엠마 하트(Emma Hart)로 고쳐 불렸다. 아버지를 생후 2개월에 여의고, 외할머니 댁에서 양육되다가 12살부터 런던으로 가서 부잣집 가정부 일을 하게 된다. 그때 같이 일하던 집의 하녀 중 제인 파월(Jane Powell)이라는 배우지망생이 하나 있었다. 배운 것은 없어도 눈치가 빠르고 영리했던 엠마는 이런 곳에서 안주하다가는 인생에 답이 없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 그래서 물꼬를 트기 위해 제인 파월을 따라 여러 연극 리허설에 참여하는데, 이게 잘 되어서 코벤트 가든에 있는 왕립 극장(Theatre Royal Drury Lane)에서 일하게 된다. 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라고 어떻게 굴러가는지 두고 보자.

당시 런던에 제임스 그레이엄(James Graham)이라고 스코틀랜드 출신 돌팔이 의사가 하나 있었는데, 자신의 직업을 성과학자(Sexologist), 돌팔이 의사(Quack doctor)라고 칭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충 성의학(Sex Therapy)인데, 런던 시내에 ‘건강의 신전(Temple of Health)’이란 사이비 교단 비슷한 걸 차려 놓고, 예쁘고 젊은 모델들이나 귀족 부인들이 발가벗고 춤추거나 모델 포즈를 취하게 하여 보여준다. 방문 환자들에게 별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데, 가장 인기 있었던 게 ‘천상의 침대’였다. 가로 3.7m, 세로 2.7m의 돔 식 시설물에 음악, 신선한 꽃, 동양의 향기, 에테르 가스 등이 풍기도록 설계하였다. 고객이 침대에 누워 모델들이 발가벗고 춤추는 걸 보고 있으면 침대로 약한 전기충격을 주어서 누워있던 고객이 쾌락을 얻게 하는 거였다. 커플들을 임신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놓이게 하고, 그들의 움직임은 침대가 다양한 소리를 내게 만들어서 더욱 열정적으로 섹스에 몰입하도록 하였다. 문제는 이게 대단히 세련된 상류계층 문화가 되었고, 이 사기꾼은 이게 몸에 좋은 거라고 약을 팔아서 불임 커플들이 줄을 지어서 찾아오니까 그와 모델들이 영국 사교계의 스타가 된다. 십 대 초반의 돈 없고 백 없는 연습생이었던 엠마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엠마는 에이미 라이언(Emy Lyon)이란 이름으로 ‘헤베 베스티나 여신(Hebe Vestina)’역으로 그 모델 일을 해야 했다. 그러던 중에 엠마는 첫애인 윌렛 페인 대위를 만나서 사랑을 나누다가 헤어졌다.

1780년 엠마가 15살이 되자 엠마의 재능을 알아봤던 귀족이며 포츠머스의 하원의원인 27살의 해리 경(Sir Harry Fetherstonhaugh)이라는 바람둥이가 그녀를 자기의 우파크 별장에 데리고 가서 정부로 삼았다. 그는 훗날 조지 4세 왕이 되는 웨일스 왕자와 친분이 좋았다. 자기 저택에서 파티를 열 때 식탁 위에서 발가벗고 춤추는 게 엠마가 주로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해리 경은 엠마를 자기 정부(Mistress)로 칭했는데 당시 엠마의 나이는 고작 15세였다. 그러던 중 엠마가 덜컹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해리 경은 당연히 엠마를 부인으로 맞을 생각도, 애인으로 대해줄 생각도 없었다. 더구나 파티, 사냥, 술 등 만 생각하지 엠마가 가진 아이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게 대했다. 찬밥 신세인 엠마는 곧 해리 경의 저택에서 열리던 파티의 단골손님인 해리 경의 친구인 찰스 그레빌(Charles Francis Greville)과 눈이 맞는다. 찰스 그레빌은 엠마의 아이 엠마 카루(Emma Carew)를 집에서 키우지는 않지만 양육비를 대는 조건으로 그녀를 정부로 데려갔다. 그레빌은 엠마를 패딩턴 그린에 있는 시골 별장에 데리고 있었는데, 집에서만 지내게 했다. 또한 어디서 평민 여자를 데리고 와서 첩으로 삼았다는 구설수를 듣기 싫었는지 엠마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리를 극도로 싫어했다. 엠마에게 연습생 시절 이름을 쓰지 못하게 하고, 사교계를 멀리 하고 단정한 옷을 입게 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쳤다. 그레빌의 요청에 따라, 그녀는 이름을 엠마 하트(Emma Hart)로 바꾸었고, 차분한 색상의 수수한 옷을 입고 사회생활을 피했다. 그는 엠마의 어머니가 가정부이자 보호자로서 그녀와 함께 살도록 주선했다. 그레빌은 또한 엠마에게 좀 더 우아하게 발음하도록 가르쳤고, 가끔 그의 친구들 중 몇 명을 데려와서 그녀를 만나도록 초대했다. 

그레빌은 새로운 모델과 뮤즈를 찾고 있던 그의 친구인 화가 조지 롬니(George Romney, 1734~1802)를 위해 그녀를 소개했다. 엠마는 롬니의 가장 유명한 초상화의 모델이 되었고, 그의 화가적 상상력을 부채질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곧 런던의 유명인이 되었다. 그래서 롬니는 그녀의 나체를 스케치하고 후에 그녀가 없는 동안 여러 가지 다양한 포즈로 그녀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수많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따라서 롬니의 작품과 특히 그의 인상적인 젊은 모델의 인기를 통해, 그녀는 엠마 하트라는 이름으로 사교계에 유명해졌다. 그녀는 재치 있고, 총명하고, 빨리 배우고, 우아하고, 그리고 그녀의 그림이 증명하듯이, 매우 아름다웠다. 롬니는 그녀의 외모와 시대의 이상에 적응하는 능력에 매료되었다. 롬니와 다른 화가들은 그녀를 다양한 모습으로 그렸는데, 이로 인하여 그레빌은 모델료를 두둑이 챙겨서 쓸 수 있었다. 그래도 워낙 낭비벽이 심하던 그레빌은 서서히 재정이 파탄되게 이르렀고,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한 시점이 되었다. 롬니는 매번 엠마의 초상화를 그리다 전라(全裸)의 모습도 그리는 등, 그만 이 젊고 매력적인 아가씨에 깊이 빠진다. 그녀는 타고난 화냥기를 어찌할 수 없었는지 롬니와도 몰래 로맨스를 나누게 된다. 당시 영국 화단에서 초상화 부문은 그와 조슈아 레이놀즈(Joshua Reynolds, 1723~1792),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와 같이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사실 그는 그들에 비해 기량이 조금 떨어졌지만 바로 이 엠마의 초상화를 그리고부터 기량과 인기가 치솟아 대등한 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그녀는 마치 로마의 루크레티아나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헤베(Hebe)와 유노(Juno) 등 신화적 인물로 분하여 초상화가 그려졌는데, 롬니 말고도 안젤리카 카우프만, 벤저민 웨스트, 게빈 해밀턴, 빌헬름 티슈바인 등 다양한 화가들이 그녀를 그렸다. 실존 인물 중 초상화가 많기로 최상위 클래스일 것이다. 사실 엠마는 롬니에게 하나의 환상이요 꿈의 동경이었다. 엠마는 모델로 나타날 때마다 <파리스 심판(The Judgement of Paris)>에 참가하는 헤라와 아테네 그리고 아프로디테로 번갈아 변신해 롬니의 초상화는 그리는 것마다 비슷한 것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실력이 일취월장해 갔다. 그래서 화단에선 이탈리아의 계관시인 페트라르카(Petrarca, 1304∼1374)가 그의 연애 시 <칸초니에레>에서 숭상한 자기의 이상형 미녀 ‘라우라(Laura), 단테의 베아트리체, 보카치오의 피암메타가 재탄생한 것이라고 극찬을 했다.

사실 롬니는 엠마를 짝사랑하며 라우라로 보고 있다. 특히 밤마다 하루는 헤라로 변신해 지상에선 단 하나밖에 없는 신비로운 체위로 욕망을 채워주고, 또 다른 하루는 아테네로 변해 또 다른 지혜의 세계를 보여주고, 또 다른 밤엔 아프로디테로 나타나 아름다움과 사랑의 극치를 보여줬다. 연속 3일을 지상에서는 누릴 수 없는 꿈같은 아름답고 황홀한 쾌락을 경험한 후  밤낮 없는 3박 4일의 작업을 하여 페트라르카의 이상형 라우라와 비슷한 초상화가 탄생했던 것이다. 또 그리고 어느 날 늦은 밤 꿈인지 생시인지 몽롱한 상황이 벌어졌다. 화실 밖에는 보름달이 휘영청 밝게 비추고 램프 속의 촛불만이 그의 캔버스를 밝히고 있을 때다. “아직 안 주무세요?” 어디서 전설 속 매력적인 사이렌 음성 같은 고운 목소리가 들렸다 엠마가 그림자처럼 조용히 비몽사몽 상태인 그의 앞에 나타났다. 롬니는 하루종일 붓과 싸움에 지쳐 막 잠이 들려는 찰나였다. “이 밤중에 웬일이시죠?” 롬니는 마치 헛 것을 본 것처럼 여인에게 물었다. “롬니 씨가 그린 제 초상화가 너무 마음에 안 들어 오늘 저녁 제가 확실하게 포즈를 취해 줄 테니 보티첼리(1445∼1510)의 <비너스의 탄생> 정도쯤은 그려주세요. 그러면 저의 모든 것을 가지세요.” 너무 생생한 목소리와 모습에 잠은 십리 밖으로 달아나고, 신들린 듯 화폭에 엠마의 아름다운 모습이 담겼다. 몇 주 걸려도 불가능했던 작품이 하룻밤 사이에 기적같이 이루어진 것이다. 너무나 동경한 것이 꿈으로 나타나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그 당시 엠마는 그레빌과 헤어지고, 그레빌의 외삼촌 해밀톤 경과 결혼하여 나폴리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 건너 수천리 멀리서 현몽(現夢)을 하여 그의 창작열에 불꽃을 댕겨 준 것이다.

롬니는 서둘러 엠마의 초상화를 공개했다. 온 영국 화단에 폭발적인 반응이다. 초상화의 선풍적 인기는 도버해협을 건너 파리를 휩쓸고, 나폴리에까지 1주일도 안돼 주인공인 당시 해밀턴 부인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그러자 반응은 즉각 나타났다. 해밀턴 부인은 롬니에게 이탈리아로 극비 사생(寫生) 여행을 오라고 제의했다. 르네상스의 발상지인 베네치아와 피렌체를 같이 여행하며 그림 공부를 더 하라는 일정이다. 그들은 마치 신혼의 꿈을 품은 허니문을 온 것인 양 했다. 이탈리아에 먼저 정착한 해밀턴 부인은 외교관 부인답게 해박한 지식으로 롬니를 안내한다. “이 산마르코 광장은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았던 광장이에요. 산마르코 박물관 앞에 있는 폴로리안 카페는 이탈리아에서 제일 오래된 카페예요. 저기서 낭만의 에스프레소 한 잔 하죠. 그리고 저 산마르코 캄파닐레 종탑은 99M나 된다네요. 오랜 세월 저렇게 서 있잖아요. 불쑥 솟은 남자의 그것이 저렇게 우람하고 허물러 지지 않으면 어떨까요?” 광장엔 어느새 석양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한다. “바닷바람이 차가워요. 호텔로 가서 샤워를 하고 쉬고 싶네요.” 해밀턴 부인이 롬니의 어깨에 기대며 사랑을 재촉한다. “내일 일찍 일어나 리도섬을 구경을 하고 피렌체로 가요. 그곳에 가도 볼 것들이 많지요. 그곳엔 메디치 가문을 중심으로 르네상스의 메카죠. 롬니 씨도 그곳에 가면 화가로써 거장들의 영감을 얻으실 거예요.” 해밀턴 부인의 특유의 육감과 향기가 롬니 등뒤로부터 풍겨왔다.

“아직 준비 안 됐어요?” 몇 주전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을 비몽사몽 간에 본 건지 꿈꾼 건지 아리송한데, 지금 해밀턴 부인이 침대에서 빨리 올라오란다. 보통 여자가 적극적으로 나오면 사내는 도리어 수세에 몰려 침대의 전투에 쭈빗쭈빗하게 된다. “어서 이리 오세요.” 여자는 급했던지 침대에서 내려와 사내의 손을 잡아 침대 위로 끌어올린다. “제가 무서우세요? 자 당신 맘대로 나를 가지세요. 그런데 혼자만 즐기지 말고 저도 행복하게 해 주셔야 돼요.” 해밀턴 부인의 몸에선 진한 재스민 향과 감미로운 육향이 풍겨 나온다. 감미로운 키스를 하자 입에서 일어난 욕망의 에너지가 점차 밑으로 내려가서 온몸으로 퍼진다. 솟아오르고 탱탱한 한 쌍의 복숭아에선 아프로디테를 떠올리게 했다. 분위기가 더 열기를 뿜어내자 쾌락의 메카인 동굴에서는 비너스 향기가 풍겨 나와 롬니를 통째로 삼킬 듯 블랙홀처럼 무섭게 여의봉을 빨아들였다.

다시 과거로 돌아와서, 그레빌이 생각해 낸 돌파구는 엠마를 적당히 처리하고, 돈 많은 아내를 구하는 것이었다. 신사(Gentry) 타이틀과 인맥만으로 부잣집 딸내미를 아내로 맞아 자금을 충당하는 건 당시로는 흔했던 일이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에서 신사(Gentry)는 예의 바른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계급 자체를 뜻하기도 했다. 곧 그레빌은 돈 많은 미혼 상속녀 헨리에타 미들턴(Henrietta Middleton)을 만난다. 그레빌은 애초에 엠마의 미모에 빠져 엠마를 받아들였지만 자신이 엠마의 애인으로 알려지는 것은 싫어했다. 엠마를 그린 롬니의 작품들이 유명세를 탈 때도 그레빌은 “저는 그런 여자 안 만나요”라고 말하고 다녔다고 하며, 어떻게든 곧 엠마를 치울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든 어느 날 엠마를 데리고 런던으로 나가서 자신은 외삼촌 해밀턴 경을 만나서 볼일을 본다. 해밀턴 경은 나폴리 공국의 영국 대사로 있는데 잠시 귀국한 것이다. 볼일이란 다름 아니라 엠마를 외삼촌 해밀톤 경에게 정부(情婦)로 팔아넘기는 전략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엠마는 혼자서 보슬비가 오는 하이드 파크를 걷다가 우연히 첫사랑 윌렛 페인을 만난 것이다. 오랜만에 해후한 두 사람은 뜨거운 입김과 눈길을 교환하자마자 나란히 손을 잡고 모종의 아지트로 사라졌다.

마침 그때 공원 한쪽에서 이들의 행동을 불타는 눈으로 쏘아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호레이쇼 넬슨(Horatio Nelson)이었다. 그는 잠시 휴가를 나와서 쉬고 있었는데, 청초하면서도 관능미가 물씬한 뇌쇄적(惱殺的) 미녀의 그림자가 자기도 모르게 끌어당기듯이 그녀의 뒤를 따라가게 되었다. 그날 밤 사내는 런던의 안개비가 내리는 늦은 밤에 버버리 코트의 깃을 세우고 엠마의 아지트를 찾았다. 용감히 문을 두드린다. “누구세요?” 한 쌍의 탐스런 유방이 넬슨의 두 눈에 지중해의 아침 태양처럼 솟아 들어왔다. “누구시죠?” 엠마는 넬슨의 시선은 의식 않고 안개비에 젖은 채 문밖에 장승같이 서 있는 사내의 정체를 물었다. “나 넬슨 제독이요.” 넬슨 제독이란 말에 엠마는 잠시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평정을 찾았다. “근데 제독께서 이곳엔 무슨 일이지요? 이곳엔 프랑스 함대나 스페인 함대도 없는데요. 더 넓은 바다로 나가 보세요.”라며 문을 쾅 닫는다. 사내는 너무 당혹스러워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런던에서 아니 영국에서 넬슨을 문전박대하다니 말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 물러설 수가 없다. 그러나 엠마의 입장은 다르다. 방금 전까지 옛 애인 윌렛 페인과 숨이 막히도록 사랑을 하고 막 방을 나간 사이에 넬슨이 찾아든 것이다.

엠마가 넬슨을 모를 리 없다. 런던의 뭇 여인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영웅적 사내라는 것을 알고 있으나, 지금은 그를 받을 마음도 몸도 여유가 없다. 그러나 넬슨의 입장은 다르다. 천하를 호령하던 넬슨이 이름도 모를 여자에게 문전박대의 수모를 그냥 넘길 수가 없는 것이다. “아가씨, 내 코트가 너무 젖었으니 이것을 좀 말려 입고 가고 싶소.” 말을 마치자마자 들어오란 대답도 듣기 전에 넬슨의 발은 방문턱을 넘고 있었다. “이게 무슨 무례한 행동이세요?” 엠마는 흐트러진 옷을 정장으로 갈아입고 넬슨을 맞으려고 마침 전라상태였는데, 그 순간 사내가 방으로 쳐들어온 것이다. “어머나, 빨리 나가세요.” 비명에 가까운 엠마의 금속성 고성이다. 사내는 잘 됐다는 표정으로 “이미 다 봤는데 뭘 그러시오?”라고 말하고는 젖은 코트를 벗어 엠마 옆의 의자에 던졌다. 희미한 램프 불에 비친 엠마의 나신은 신의 작품처럼 보였다. “그대가 내 영혼을 죽였소. 책임을 져야 하오.” 여인은 알 듯 모를 듯 한 사내 말에 감전되어 옷 입는 것을 잊고 넬슨의 표정을 살폈다. 말로만 듣던 영국 최고의 사내가 지금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을 허기진 맹수 같이 눈을 번뜩이면서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인은 두 손으로 키스 마크가 선명하게 이곳저곳에 나 있는 유방을 감싸 안으며 현실인가 꿈인가를 확인하고서야 천천히 벗었던 잠옷을 다시 입었다. 오늘은 밤이 깊었으니 이만 돌아가시고, 날이 밝은 어느 날 뵙기로 하지요.” 여자는 사내가 돌아가기를 희망하며 배웅하려는 자세로 넬슨 곁을 지나 문 쪽으로 향하고자 했다. 그 순간에 사내는 여자를 독수리가 먹이를 채어가듯 억센 두 팔로 한 몸으로 만들었다. 여인은 잠옷 바람이다. 두 남녀는 더 말을 잊은 채 뜨거운 육체로 사랑의 전쟁을 일으킨다. “소녀는 엠마이고 시골에 있을 때부터 제독님의 명성을 알고 있었어요.” 엠마가 더 적극적이다. 예 애인 윌렛 페인의 정액을 아직 씻기기도 전이다. “나는 하이든 파크에서 엠마 양에게 내 영혼을 빼앗겼소. 내 생애에 그대 같이 완벽한 여인은 처음 봤소.” 희미한 램프 불에 비친 한 덩어리가 된 남녀의 나신은 대형 거울 속에서 신화를 만들 듯 끝없이 욕망의 고개를 넘고 넘는다. “제독님 귀대하셔야 합니다.” 다급한 부관의 음성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것은 여명이 창문 틈으로 들어오고 있을 아침이었다. 그리곤 헤어졌다.

그렌빌은 그동안 방탕하게 생활했던 재정 파탄과 도박 빚으로 고생하다가 정말 아름다운 애인 엠마를 해밀턴 경의 애인으로 넘겼다. 나폴리에 가고 나서야 자신을 늙은 해밀턴에게 넘겼다는 걸 안 엠마는 처음엔 분해서 잠자리는커녕 3일 밤, 4일 낮을 식음을 전폐하고 되돌려 보내줄 것을 요구했다. 영리한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을 사실상 키워준 것이 그레빌이고, 자신 역시 깨끗하지 못하기에 태도를 바꿔 고분고분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렇게 결심을 하고 나니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해밀턴과 잠을 한방에서 잔 지 7년 만에 첩에서 정실부인이 되었고, 나폴리 외교가에 없어서는 안 되는 만인의 연인인 동시에 영국 정부로선 로비스트로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한 축을 이루게 된다. 즉 엠마는 그 미모와 밝은 성품으로 금방 나폴리 사교계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나폴리 공국의 마리아 카롤리나 왕비의 귀여움까지 독점하게 되었다.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는 동생 마리 앙투와네트로부터 프랑스 조정의 극비 사항까지 입수할 수 있어서 그녀와 가장 가까운 엠마는 영국 입장에서는 최고의 스파이였다. 따라서 윌리엄 해밀톤(Sir William Hamilton, 1730~1803)의 입장에선 엠마와 결혼하는 것이 신분을 떠나 본인에게 더 큰 이득이었을 수도 있었다.

해밀턴 경은 1758년 1월에 캐서린 바로우(Catherine Barlow, 1738~1782)와 결혼하여 금슬 좋은 부부로 소문났으나 슬하에 자녀 없이 1782년 8월 캐서린이 44세로 사망했다. 52살의 해밀턴 경은 실의와 슬픔에 차 있었다. 그는 외교관으로 골동품수집가, 고고학자이며 화산학자였다. 1764~1800년간 나폴리 대사를 역임하는 동안 베수비우스 산과 에트나 산의 화산을 연구한 업적으로 1770년 영국왕립학회가 매년 수여하는 최고 과학업적상을 수상하였다. 그는 가정교사를 고용하여 그녀에게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역사, 그림, 무용, 노래 등을 가르치며 영국이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킨 이유 등을 설명해 주면서 엠마에게 자상하게 대했고, 엠마는 윌리엄 경에게 존경심을 갖는다. 윌리엄 경은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귀족 명사들이 참석하는 만찬이나 이벤트에 엠마가 등장하여 노래 부르고 춤추며 손님들과 지적인 대화를 나누며 접대하는 모습에 만족한다. 더욱이 조각이나 그림에서나 볼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를 엠마가 활인화(活人畵), 전문용어로 Tableaux Vivant(움직임이 없는 살아 있음)로 연출하는 것이 최고의 매력이었다. 이른바 ‘엠마의 자태(Emma's Attitudes)’로 이름 지어서 거기에 매료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국 국왕의 허락을 받고 1791년 9월 6일 정식으로 결혼했다. 당시 26세인 엠마는 60살의 해밀턴 경의 두 번째 부인으로 합법적인 '엠마 해밀턴 부인(Emma, Lady Hamilton)'이 된 것이다. 

1798년 9월 22일,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에 승리한 살아있는 전설 넬슨 제독이 전투 중에 다친 성치 않은 몸으로 나폴리를 방문한다. 나폴레옹의 독재에 항거하여 영국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넬슨을 존경하여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던 엠마와 해밀턴 경은 넬슨을 그들의 저택이 있는 팔라조 세싸(Palazzo Sessa)로 영접한다. 사실 전에 해밀턴 경은 넬슨의 해군 상관이었다. 마침 9월 29일이 넬슨의 40세 생일이라 무려 1,800명의 손님을 초대하여 축하파티를 열던 중 넬슨이 쓰러진다. 당시 넬슨은 오른팔이 없고, 치아도 거의 빠진 데다 기침으로 고생하고 극도의 피로에 지쳤기 때문이었다. 엠마는 넬슨을 그녀의 침실로 데려가 9일간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이후 엠마는 공공연히 넬슨의 비서이자 통역관, 정치적 중개자 및 정부(情婦)가 된다. 신사(Gentry)들이 여는 파티의 쇼걸이었던 하층민 출신 엠마가 귀족에다 유럽의 명사·예술가로 변신하여 영국 전사(戰史)의 영웅인 호레이쇼 넬슨의 정부가 된 스캔들은 영국 신문에 실리면서 당시 세기의 가십 거리가 된다. 

그런데 이즈음 프랑스혁명의 영향이 나폴리에도 불어 닥치자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비 마리아 카롤리나(Maria Carolina, 1752~1814)를 비롯한 왕당파 귀족들은 시칠리아로 피신한다.  1799년 7월, 이때 왕비와 절친한 친구이자 중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엠마가 넬슨과 왕비 사이의 중개역할을 하여 넬슨이 나폴리 탈환에 참여, 반왕당파 반란을 진압해 나폴리 왕가를 구출함으로써 나폴리 왕으로부터 브론테 공작 작위를 받았다. 1800년 윌리엄 경은 나폴리 대사직을 그만두고 엠마와 넬슨 등과 함께 런던으로 귀향한다. 그 후 엠마는 아예 넬슨과 동거하며, 1801년 딸 호레이샤 넬슨(Horatia Nelson, 1801~1881)을 출산한다. 그런데 넬슨과의 관계는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던 불륜 관계였다. 한편 넬슨은 엠마와 혼외정사 후 다시는 본부인과 함께 살지 않았지만 넬슨 부인은 결코 이혼하지 않았다. 어쨌든 해밀턴 경은 늦게 결혼한 새파랗게 젊은 아내에게 그다지 집착하지 않았던 듯하다. 런던에 돌아와서도 한 집에 살면서 엠마가 넬슨과 바람을 피우든 말든 무관심했다. 다시 말하면 유부남과 유부녀가 배우자들의 묵인(?) 하에 공공연히 불륜을 저지르지만 누구도 흉보거나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특이하다. 넬슨은 런던으로 돌아와서 있다가 1805년에 다시 원정에 나서는데, 엠마는 넬슨이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그가 보낸 편지 한 통을 받는다. 그 속에는 딸 호레이샤 앞으로 쓴 편지와 엠마에게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엠마에게 쓴 편지에서 넬슨은 “엠마 해밀턴이 자기 지위와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 사후 유산을 물려줄 것”을 분명히 했다.

이 편지를 쓰고 이틀 후인 1805년 10월 21일, 넬슨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전사한다. 이 편지가 유언장이었던 셈이다. 넬슨은 교전 중 프랑스 측 총탄에 저격됐으며, 피격 후에도 4시간여 동안이나 지휘를 계속했지만 결국 다음의 말을 남기고 47세에 절명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임무를 완수했습니다(Thank God, I have done my duty).” 유언대로 그의 시신은 부패를 막기 위해 브랜디에 몰약과 장뇌를 넣어 그의 기함 빅토리 호에 실려 일단 가까운 지브롤터로 옮겨졌고, 거기서 속을 납으로 입힌 관에 옮긴 후 5주 만에 영국에 도착하였다. 넬슨의 장례식은 다음 해 1월 8일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국장으로 거행했다. 32명의 제독과 100명의 함장들, 1만 명의 수병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치러졌다. 넬슨이 평소 원하던 대로 나일 해전에서 격침한 나폴레옹의 기함 오리앙(L'Orient) 호의 돛대로 만든 관에 넣어 안장되었다.

1803년 4월 남편 해밀턴 경이 사망하고, 1805년 10월에 연인 넬슨 제독을 잃고, 국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 참가조차 허락받지 못한 엠마는 슬픔과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낸다. 다구나 넬슨의 본부인 프란시스 니스베트로부터 멸시와 푸대접을 받았다. 특히 넬슨의 형 윌리엄 넬슨(William Nelson, 1757~1835)은 동생의 전사로 인한 모든 영예와 부를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유언을 따르기는커녕 해밀턴 부인과 딸 호레이샤를 문전박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얼마 되지 않은 재산마저 가로챈 못돼 먹은 사람이었다. 윌리엄 해밀턴의 유산 관리인이 그레빌이었다. 엠마의 전 애인이자 해밀턴의 조카였는데, 그는 엠마에게 제대로 유산이 상속될 수 있도록 돕지 않았다. 그녀의 외모를 유지하기 위한 지출은 늘어만 갔다. 결국 빚을 갚지 못하고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넬슨의 유물을 경매로 내놓기에 이르기도 한다. 출소 이후에는 빚쟁이들을 피해 프랑스 칼레로 도망가야만 했다. 그리고 1815년 1월. 그녀는 영원히 넬슨과 해밀턴의 곁으로 가게 된다. 그녀의 나이 4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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