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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Jun 01. 2023

(29) 예뻐서 나라와 낭군을 잃은 - 도화부인

★ 18禁 역사 읽기 ★ (230531)

중국의 역사상 초(楚) 나라는 무척 오랜 시기에 걸쳐 다양한 형태의 나라로 등장한다. 주(周) 나라 즉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있었던 초(楚) 나라가 일반적, 역사적인 초나라이다. 그 후에 잠깐잠깐 나타났다 사라진 초(楚) 나라는 매우 많지만, 그래도 우리들에게 가장 익숙하게 들리는 게 항우(項羽)가 세우 초나라이다. 장기판의 초한(楚漢)이 바로 그것이니까. 역사 순서로 살펴보면, 진(秦) 나라 말에 농민 출신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반란을 일으켜 세운 나라를 장대한 초(楚)라는 뜻으로 장초(張大楚國)라고 불렀다. 항우가 초기에 세운 후초(後楚)와 다시 자기 이름으로 세운 서초(西楚)가 있고, 동진(東晉) 시대에 환현(桓玄)이 세운 환초(桓楚)도 있다. 수말당초(隨末唐初)에 주찬(朱粲)이 세운 주초(朱楚), 수당(隨唐) 교체기에 임사홍(任士弘)이 세운 임초(林楚), 당나라 때 이희열(李希烈)이 세웠던 이초(李楚)가 있다. 또 오대십국(五代十國) 시대에 마은(馬殷)이 세운 마초(馬楚) 또는 남초(南楚), 금(金) 나라 시대의 괴뢰 정권인 장방창(張邦昌)의 위초(僞楚) 또는 장초(張楚), 남송(南宋) 초기의 종상(鐘相)이 세운 종초(鍾楚), 서하(西夏) 말기에 임득경(任得敬)이 세운 임초(任楚) 등이 있다. 하지만 춘추전국 시대의 초나라가 가장 오랫동안 존속하였고, 춘추오패(春秋五霸)와 전국칠웅(戰國七雄)에 속하는 등 그 위세를 역사에 남기고 있다. 그 후 진시황(秦始皇)에게 멸하게 된다. 초나라는 일찍이 주나라 초기 주문왕(周文王)을 섬겼고, 주성왕(周成王)에 의해 초만(楚蠻) 지방을 봉지(封地)로 받았다고 하나, 지리적 여건상 중국의 남쪽이고, 밀림으로 덮인 지역이며 한족(漢族)이 아닌 묘족(苗族)의 나라였을 것이다. 주나라가 이왕(夷王) 때부터 혼란스러워지자 초는 주나라로부터 떨어져 독립을 선언했다.

지리적으로 주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지금의 사천성을 포함한 남쪽지역이다. 초나라 6대 왕 웅거(熊渠)는 스스로 선포하기를 “나는 오랑캐 지역에 있으니, 중원 여러 나라들과 같은 국호와 시호를 사용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 세 아들 웅강(熊康), 웅홍(熊紅), 웅집자(熊執疵)을 각각 구단왕(句亶王), 악왕(卾王), 월장왕(越章王)으로 불렀다. 초나라 스스로가 중원의 제후국들과는 나라의 격이 다름을 천명하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제후국들 쪽에서도 초나라를 오히려 야만족(오랑캐)의 나라로 여겨 중원에 나타나는 것을 꺼려했다. 이 무렵부터 여러 나라에서 군주의 시해(弑害)가 유행하고, 서로 영토를 넓히려고 경쟁하던 국면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천하의 도리나 의리 따위는 땅에 떨어지고, 오로지 먹느냐 먹히느냐의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이 난무하게 된다. 따라서 초나라도 강성하여 중원을 넘보기 시작했다. 초 무왕(武王)은 제후국인 수(隨) 나라를 정벌하면서 존재감을 알리며, 봉호를 올려달라고 했으나 주나라는 초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자 초는 스스로 땅을 넓히면서 자존감을 과시하는 전략을 썼다. 무왕의 아들 문왕(文王) 때에 이르러 장강(長江) 한수(漢水) 유역에 있던 군소 국가들이 모두 초나라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다른 제후국을 정벌할 때 적당한 대의명분이나 슬로건이 필요했지만 초나라의 문왕은 색다른 슬로건이 있었다. 바로 아름다운 여인을 쟁취하고 땅도 쟁취하는 것이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오늘의 주인공 도화부인(桃花婦人), 곧 식부인(息婦人)은 기원전 700년 무렵, 춘추시대 자그마한 제후국 진(陳) 나라의 도성 완구(宛丘 : 지금의 허난성 저우커우周口 화이양淮陽)에서 진장공(陳莊公)의 둘째 딸로 태어난다. 춘추시대 4대 미인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미모가 뛰어났다. 춘추시대 4대 미녀는 제나라 문강(文姜), 월나라 서시(西施), 정나라 하희(夏姬), 그리고 식부인을 꼽는다. 기원전 684년, 그녀는 또 다른 약소 제후국인 식(息) 나라의 군주에게 시집을 간다. 그 시대의 귀족이나 왕녀들도 뾰족한 수없이 옛적 여인의 삶의 궤적 그대로이다. 장녀는 채(蔡) 나라 애공(哀公)인 헌무(獻舞)에게 시집을 갔다. 식부인(息婦人)은 성이 규(嬀)씨였기 때문에 일명 ‘규씨부인(嬀氏夫人)’ 혹은 처음 시집을 갔던 나라의 국호를 따 ‘식규(息嬀)’라고도 불리며, 미모가 복숭아꽃처럼 아름다웠다 하여 ‘도화부인(桃花夫人)’이라고도 불린다. 용모가 매우 빼어났지만 그 미모로 인해 본의 아니게 나라와 서방을 멸망시킨 매우 기구한 인물이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공주의 몸이었으니, 아름다운 한 폭 풍경화처럼 세상 떠날 때까지 줄곧 행복했다면, 역사는 그녀를 무대에 다시 불러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불행은 자기가 태어난 진(陳)에서 식(息)으로 시집가는 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약소국은 주변국이나 강대국에 정략적으로 공주를 시집보내서 강화를 맺는 것이 상례였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시집간 지 얼마 뒤에 친정인 진(陳)으로 부모를 뵈러 가는 길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간에 지리적으로 진(陳) 나라와 식(息) 나라 사이에 채(蔡) 나라가 있고, 식나라와 인접한 밑에 초강대국 초(楚) 나라가 있었다는데 불행의 씨앗이 잉태되었음이 분명하다. 식부인이 시집을 가는 길이든, 친정으로 돌아가는 길이든 진(陳)이나 식(息)으로 가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나라가 바로 채(蔡)이다. 이 제후국 채에는 식부인의 언니가 진즉 채의 군주 애후(哀侯)에게 시집와서 그의 부인이 된 지 몇 년이 지나고 있었다. 문제는 채나라 임금인 애공(哀公) 헌무(獻舞)가 호색한이라는데 있었다. 식후(息侯)의 부인이 천하절색으로 그 명성이 사방에 널리 퍼지자 채애공은 평소 이것이 항상 속으로 불만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풍습에 언니가 시집가면 동생이 잉첩(媵妾)으로 따라가는 습속도 있었으므로, 동생까지 데려왔다면 금상첨화였을 텐데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런데 마침 식후의 부인 식규(息嬀)가 친정인 진나라로 근친을 가게 되었고, 가는 길에 이웃한 자기 나라에 들러 언니를 만나보고 간다는 전갈이 왔다. 이 소식을 듣고 채애공은 속으로 몹시 기뻐했다. ‘천하절색 처제가 이번에 우리나라에 온다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대한 잔치를 열고 어떻게 한번 해 봐야 되겠다.’라고 별렀다.

그는 즉시 국경 부근까지 안내하는 사람을 보내어 식부인(息夫人)을 영접하게 하는가 하면, 별궁에다 그녀를 위해 크게 잔칫상을 차리도록 지시했다. 마침내 식부인이 도착했다. 아름다운 처제를 보자 채애공은 그만 넋이 나가 어쩔 줄 모르더니 점차 흑심을 품었다. 그는 식부인을 끔찍이 환대하고 서로 마주 앉아 친절히 굴었다. 식부인은 곧 언니를 만나게 해 주려니 하고 형부 채애공의 환대를 고맙게 받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채애공은 언니를 부르지도 않고, 형부로서의 체통을 잃고 은근히 추파(秋波)를 던지는 등 농지거리를 서슴지 않았다. 술을 따른다는 명목으로 가까이 와서 손목을 부여잡고 은근히 음담패설을 놓으면서 수작을 부렸다. 식부인은 그에 비해서 한 마리 고고한 학처럼 품위를 지키고 그의 언동을 적절히 회피하면서 마지못해 견뎠다. 그의 추태(醜態)가 도를 넘어가자 식부인은 마침내 화가 폭발했다. 그녀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수행원들과 함께 언니를 보지도 않고 채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버렸다. 그런데도 채애공은 반성하는 태도가 아니라 마치 잡았던 물고기를 놓친 듯이 애석해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처제가 근친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다시 한번 수작을 부려 볼 기회가 있으려니 하고 기다렸다. 참으로 채애공의 음욕은 끝이 없었다.

식부인 규씨는 친정인 진나라에서 근친을 마치고 식나라로 돌아갈 때, 아예 채나라를 거치지 않고 먼 길을 돌아 자기 나라로 갔다. 그리고 본국으로 돌아가자 남편인 식후에게 채애공의 무례함을 일일이 고했다. 이 일을 전해 들은 식후는 이만저만 노한 게 아니었다. 하지만 힘이 없는 나라로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에 초나라로 비밀리에 사자를 보냈다. 이때 초의 군주는 문왕(文王)이었고 도성은 영(郢 :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시荊州市 장링현江陵縣)이었다. 또한 조공을 바치는 동시에 초문왕(楚文王)에게 비밀 전략을 보고했다. “채후(蔡侯)가 제(齊) 나라의 힘을 믿고 대왕께 조공을 바치지 않건만 어찌하여 그냥 보고만 계십니까? 만일에 대왕께서 군사를 일으키시어 이를 징벌하실 의향이 계시다면 제가 기꺼이 앞장을 서겠습니다. 방법은 다름이 아니오라 대왕께서 병사를 일으켜 우리 식나라를 치는 척하시면 우리는 즉시 채나라에 구원병을 청하겠습니다. 원래 채후와 저는 동서지간이라 반드시 구원병을 이끌고 달려올 것입니다. 그때에 초군이 채의 수도를 점령하고 뒤에서 채군을 친다면 그까짓 채후 쯤이야 어디로 도망쳐 달아나겠습니까. 그리하면 모든 나라가 대왕의 뜻을 높이 받들 것입니다.” 초문왕은 이 서찰을 받자 크게 기뻐했다. 사실 그동안 초나라는 주변의 모든 나라로부터 조공을 받고 있었다. 다만 채나라만이 여식(女息)을 제환공의 셋째 부인으로 들여보내고, 그 위세를 빌어 초나라에 굴복하지 않고 있어 마치 앓던 이와 같았던 것이다. 그 앓던 이를 빼내게 되었으니 초문왕은 신바람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초나라 군사는 계책대로 식나라로 쳐들어가고, 이에 식나라는 채나라에 구원병을 청했다. 과연 채애공은 동서지간은 별 볼일 없어도 아름다운 식부인 생각이 나서 아무 생각 없이 병차(兵車)를 일으켜 식나라를 도우러 뛰어갔다. 그러나 채군은 영채(營寨)를 세우고 휴식할 여가도 없이 초나라 복병에게 공격을 당했다. 채애공은 급히 식성(息城)으로 도주했지만, 식후는 성문을 굳게 닫고 채군을 영접해 들이지 않았다. 채애공은 달아나다가 기진맥진해서 드디어 초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초의 문왕의 군대가 신(莘 : 지금의 허난성 루난현汝南縣 인근) 지방에서 채의 군대를 대파한 뒤 애후를 생포했던 것이다. 이에 식후는 초문왕의 승전을 축하하며 부고(府庫)를 열어 뇌물을 바친 후, 초군을 배불리 먹이고 초문왕이 회군(回軍)할 때 국경까지 가서 전송했다. 채애공은 그제야 식후의 속임수에 빠져 이런 처지가 되었다는 걸 알았다. 포로가 된 채애공은 식후에 대한 원한이 뼈에 사무칠 정도라 도저히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한편 초문왕은 귀국하자 즉시 분부했다. “채후를 펄펄 끓는 가마솥에 넣고 삶아라. 그 고기를 태묘(太廟)에 바치겠노라.” 초나라 대부 죽권(鬻拳)이 곁에서 간했다. “제발 고정하십시오. 만일 채후를 지금 죽이면 이 소문을 들은 모든 나라 제후는 다 우리를 겁내고 두려워하여 마음속으로 멀리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를 돌려보냄으로써 모든 제후에게 우리의 덕을 보이십시오.” 죽권이 이렇게 조리 있게 간했으나 초문왕은 그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죽권이 초문왕의 소매를 잡고 칼을 뽑아 왕을 겨누면서 단호하게 다시 아뢰었다. “신은 차라리 왕과 함께 죽을지언정 살아서 왕이 모든 나라로부터 지탄받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그제야 초문왕이 깜작 놀라 소리쳤다. “칼을 거두어라. 과인은 그대 말을 듣겠노라.” 이리하여 채애공은 겨우 죽음을 면했다. 이에 죽권이 다시 초문왕에게 아뢰었다. “왕께서 다행히 채후를 죽이지 않으시니 이는 우리 초나라의 복입니다. 그러나 신이 왕을 협박한 죄는 만사(萬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신을 죽여주십시오.” 문왕이 허락하지 않자 죽권은 칼을 뽑아 들더니 스스로 자기 발꿈치를 잘랐다. 그러고는 주위의 사람들에게 소리쳤다. “신하 된 자로서 왕에게 무례한 자는 나의 꼴을 보아라.” 초문왕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좌우에 명하여 육권의 끊어진 발을 소중히 보관하도록 했다. 초문왕은 죽권을 태백(太伯)으로 부르며, 후손 대대로 대혼(大閽 : 성문을 지키는 두령의 벼슬)의 직책을 맡겼다.

초문왕은 마침내 채애공을 자기 나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전송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 자리에는 많은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 쟁(箏 : 거문고 비슷한 악기)이라는 악기를 탄주(彈奏)하는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의 용모는 무리 중 단연 뛰어났다. 채애공이 호색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초문왕도 사실은 자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은근히 그를 부추겨 술도 얼큰하겠다 같이 즐겨 볼 심산으로 예쁜 여자를 가리키며 채애공의 속마음을 떠 보았다. “저 여인은 재색을 겸비한 우리 초나라의 미희요. 가히 채애공에게 한잔 술을 바치게 할까요?” 불감청(不敢請) 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고, 채애공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마다하지 않았다. 그 여인은 왕의 명을 받아 큰 잔에다 술을 가득 부어 채애공에게 바쳤다. 채애공이 술잔을 받아 단숨에 주욱 들이마시고 나서 그 잔을 초문왕에게 바쳐 올리며 축원했다. “만수(萬壽) 무강하소서.” 그러면서 채애공은 식후(息侯)의 속임수로 자신이 포로 신세가 되고, 끝내 이렇듯 궁색한 처지에 몰린 그 원수를 갚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래서 초문왕의 호색심을 발동시켜 본 것이다. “미인이라고 하면 단연코 제 처제인 식후(息侯)의 규씨(嬀氏) 부인이지요. 이 세상 천하에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은 또 없을 것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여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지요. 천상의 선녀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녀가 지상에 하강했다고 생각하시면 큰 어긋남이 없을 것입니다.” 입에 침을 마르도록 칭찬했다. “그렇게 미인입니까?” 초문왕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자 채애공은 서둘러 말했다. “그녀의 눈은 맑은 물 같고, 뺨은 마치 복숭아꽃 같지요. 동작 하나하나가 극히 사랑스럽습니다. 지상에 그런 절세미인은 두 번 다시없습니다.” 채애공은 미사여구(美辭麗句)에 최대의 찬사를 합쳐 감정을 넣으면서 그녀를 칭찬했다.  초문왕이 듣다가 길게 탄식했다. “그 여인을 한번 볼 수 있었으면.......” 채애공이 슬며시 권유했다. “대왕의 위엄으로써 아녀자 한 명쯤이야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생각만 있으시다면 쉬운 일이지요.” 이 말을 듣자 초문왕은 크게 기뻐했다. 그들은 서로 술잔을 권하면서 크게 취해 그날의 잔치를 파했다.

채애공은 초문왕의 마음속에 애욕의 씨앗을 심어 복수의 계기를 만들어 두고, 자신은 호랑이 굴에서 도망치듯 초나라를 떠나 서둘러 본국으로 돌아갔다. 채애공의 말을 들은 뒤로 초문왕은 밥맛도 없고 오매불망(寤寐不忘) 식부인 규씨를 수중에 넣을 방안만 생각했다. 그리고 사방을 순수(巡守)한다는 명목을 내세우고 식나라로 갔다. 이에 식후는 멀리까지 나와서 초문왕을 영접하여 조당(朝堂)에다 잔칫상을 벌이고 연회를 베풀었다. “지난날 짐은 군후(君侯)의 부인을 위해서 약간 수고한 바가 있소이다. 짐이 여기까지 왔는데 군후의 부인은 어째서 짐에게 술 한 잔 권하기를 주저하시오?”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 식후는 초문왕의 위력에 눌려 거역하지 못하고 즉시 내궁으로 사람을 보냈다. 이윽고 환패(環佩) 소리와 감미로운 향기를 풍기면서 부인 규씨가 들어와 초문왕을 배알 했다. 초문왕은 답례를 하는 것도 잊고, 그녀의 미모에 잠시 정신이 흔들렸다. 규씨가 백옥잔에 술을 가득 부어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는데, 그 손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과연 천상(天上)의 여자였다. 초문왕은 속으로 감탄하며 그 술잔을 받으려 했는데, 규씨가 그 잔을 곁에 있는 궁인(宮人)에게 주어 대신 바치게 했다. 초문왕이 그 술잔을 받아 단숨에 마시는데, 식부인 규씨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바로 내궁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때부터 초문왕은 식부인에 대한 욕심이 더욱 생겼다. 초문왕은 연회가 파하고 영빈관으로 돌아갔으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다음날 초문왕은 답례를 하겠다는 명목으로 친히 영빈관에서 잔치를 베풀고 식후를 초청했다. 그리고 비밀리에 무장한 초나라 군사를 매복시켰다. 식후가 술이 얼큰히 취했을 때였다. 초문왕이 취한 채하면서 식후에게 주정(酒酊)을 했다. “짐은 군후의 부인께 큰 공이 있으니 다시 한번 군후의 부인이 짐을 위해 한 잔 술을 권하도록 하시오.” 식후가 곤란한 얼굴로 미안한 듯이 사양했다. “원래 저희는 조그만 나라이므로 상국(上國)의 모든 분부를 일일이 받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대왕께서는 이점 널리 양해하십시오.” 초문왕이 주먹으로 술상을 치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대는 동서(同壻)의 의리를 배반하고 감히 그런 말로 짐에게까지 거역하는가? 게 아무도 없느냐! 이 필부(匹夫)를 당장 체포하라.” 식후가 어쩔 여유도 없이 자기 나라 수도에서 적의 매복 군사들에게 사로잡혔다. 이렇게 한 후에 초문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궁으로 들어가서 식부인 규씨를 찾았다. 규씨는 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듣고서 탄식했다. “범을 방으로 끌어들였으니 누구를 원망하리오. 모두가 나의 불찰이구나.” 라며 우물에 몸을 던지려는데 마침 달려온 초나라 장수 투단(鬪丹)이 규씨의 앞을 가로막으며 외쳤다. “부부가 다 함께 죽으려 하십니까?” 식부인 규씨는 이 말을 듣자 죽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투단은 규씨를 데리고 초문왕에게 갔다. 초문왕은 좋은 말로 규씨를 위로하고 식후를 결코 죽이지 않겠다는 것과 식나라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없애 않겠다는 것을 왕명으로 다짐했다.

식부인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걸 알고, 하는 수 없이 초문왕을 따라 초나라로 가야 했다. 초나라 사람들은 규씨의 볼이 도화(桃花) 같다 해서 그 후로 그녀를 도화 부인이라고 했다. 초문왕은 식후를 여수(汝水) 땅에다 안치(安置)시키고 겨우 십가지읍(十家之邑)을 봉해 주고, 식나라 종묘와 신위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영토는 초나라에 병합했다. 마치 꿩 먹고 알 먹고 이다. 그러니 식후는 한 달도 채 안 되어 울화를 참지 못해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규씨 부인의 미모 탓이라고도 하고, 식후가 제 죽을 꾀만 내었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결국 초나라 왕이 식나라 땅과 절세미인을 독차지하게 되어 버린 사건이었다. 초문왕은 식부인을 데리고 오자 만사를 제쳐놓고 그녀와만 시간을 보냈다. 이리하여 함께 산 지 3년 동안에 초문왕과 식부인 사이에서 웅간(熊艱)과 웅운(熊惲) 두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기이한 일은 식부인이 3년 동안 함께 살면서도 초문왕과 단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초문왕은 처음 일 년간은 멸망한 식나라를 생각해서 그러려니 하고 지냈다. 그다음 2 년도 임신하여 배부른 그녀를 채근할 수 없는 일이라 흘려보냈다. 마침내 초문왕이 화가 치밀었다. 삼 년간을 참았으니 화가 날만도 했다. “부인께서 이렇듯 삼 년 동안을 마치 벙어리처럼 입을 꼭 다물고 말하지 않는 까닭이 무엇이오?” 식부인은 대답 없이 울기만 했다. “아이를 둘씩이나 낳았음에도 과인을 남편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오?” 식부인은 고개를 흔들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초문왕이 마구 다그치자 그제야 식부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어 대답했다. “여자의 몸으로서 두 남자를 섬겼으니 비록 절개를 위해 죽지는 못하였을지언정 또 무슨 면목으로 사람을 대해서 입을 열고 말할 수 있으리까.” 식부인은 말을 마치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 초문왕은 이 모습을 보자 속이 상했다. 그렇다고 따로 위로할 말도 마땅치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애당초 이 모든 일이 채애공 그놈 때문이오. 짐이 부인을 위해서 원수를 갚아 주리라. 그러니 부인은 과도히 슬퍼하지 마라.”라며,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로 쳐들어갔다.

채애공은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날벼락 맞은 꼴이 되고 말았다. 곧 초군 앞에 나아가 웃옷을 벗고 꿇어 엎드려 사죄하고 부고(府庫)를 몽땅 털어 모조리 바쳤다. 그때서야 초문왕은 군사를 거두고 물러났다. 또 주혜왕 2년 때 일이다. 전 해에 초문왕은 파(巴) 나라 임금과 함께 신(申) 나라를 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초문왕은 파나라 군사를 업신여기고 혹사했다. 그러자 마침내 파나라 임금은 반란을 일으켰다. 이때 초나라를 지키던 수장 염오(閻敖)는 어찌나 급했던지 수채 구멍으로 빠져나가 달아났다. 초문왕은 파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도망 온 염오를 즉시 잡아 죽였다. 이에 염씨(閻氏) 일족은 목숨을 건지기 위해 사죄하고 빌었으나 속으로는 초문왕을 몹시 저주했다. 얼마 후 파군이 초나라를 치자 초문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나루터에서 크게 싸웠다. 그러나 내부에서 원한을 품고 시기만 기다리던 염씨 일족 수백 명을 어찌 막을 수 있으리오. 염씨 일족은 초군으로 가장하고 초진(楚陳) 안에 들어가서 초문왕을 찾았다. 그중 한 사람이 초문왕을 보자 파군과 싸우는 척하다가 활을 잔뜩 잡아당겨 갑자기 돌아서면서 초문왕을 쏘았다. 화살은 초문왕의 뺨에 꽂혔다. 염씨 일족은 이에 기세를 올려 닥치는 대로 초군을 쳐 죽였다. 이때 파군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전 병력을 초문왕의 진영으로 투입했다. 마침내 초군은 대패하여 죽은 자가 열 명중 일곱여덟이었다. 초문왕은 뺨에 화살을 맞은 채 달아났다. 파나라 임금은 크게 이기자 더 이상 초군을 추격하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에 염씨 일족은 초나라를 떠나 파군을 따라가 파나라 사람이 됐다.

한편 초문왕은 패잔병을 거느리고 성으로 돌아갔다. 성 안에서 수문장 죽권이 물었다. “왕은 싸움에 이기셨습니까?” 초문왕이 대답했다. “졌노라.” “선왕이 칭왕(稱王)하신 이래 우리 초군은 싸워서 패한 일이 없습니다. 더구나 파나라로 말하면 조그만 나라가 아니옵니까? 그런데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서 졌으니 모든 사람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간 황(黃) 나라가 우리에게 조례(朝禮)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왕께서 황나라를 쳐서 이기고 돌아오시면 남의 조소(嘲笑)를 면할 수 있습니다.” 하면서 성문은 열리지 않았다. 초문왕이 분연히 모든 군사에게 말했다. “이번에 가서 또 이기지 못하면 과인은 결코 성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초문왕은 그 길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황나라를 쳤다. 초문왕이 친히 북을 쳐서 사기를 돋우니 군사들도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황나라 군사를 쳐부쉈다. 그날 밤이었다. 초문왕은 진중에서 꿈을 꾸었다. 식나라 군후가 산발한 머리를 흔들며 눈을 부릅뜨고 나타나서 원한 맺힌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였느냐? 그리고 내 나라를 없애고, 내 영토를 빼앗았느냐? 그리고 내 아내까지 뺏어 갔느냐? 내 이미 상제께 너의 죄를 낱낱이 고하였다.” 식나라 임금은 손을 번쩍 들어 초문왕의 상처 난 뺨을 갈겼다. 초문왕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화살에 맞은 뺨이 찢어지고 피고름이 흘렀다. 초문왕은 크게 놀라 즉시 군사를 거두었다. 그러고는 영채(營寨)를 뽑고 본국으로 향해 떠났다. 초군이 초 땅에 이르렀을 때였다. 초문왕은 자다 말고 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겨우 아픈 몸을 반쯤 일으키다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군사들이 모여들었을 때 초문왕은 이미 흉하게 눈을 부릅뜨고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이에 초나라 군사들은 애통해하면서 귀국했다.

한편 죽권은 초문왕의 시신을 영접하고 장례를 지냈다. 그래서 초문왕의 뒤를 이어 웅간(熊艱)이 왕위에 올랐다. 이 웅간이 식부인의 큰아들이었다. 초문왕 장례를 마친 후 죽권이 말했다. “나는 두 번씩이나 왕의 명령을 거슬렀다. 그럴 때마다 왕은 나를 죽이지 않고 오히려 내 뜻을 받아들여 주셨다. 이제 왕이 안 계신데 내 어찌 더 이상 이 세상을 살기 바라리오. 왕의 뒤를 따라 지하로 돌아가리라.” 죽권은 집으로 돌아가 가족들을 모은 후 말했다. “내 죽거든 반드시 나를 성문 곁에다 묻어 다오. 자손만대에 내가 성문을 굳게 지킨다는 걸 알게 하리라.” 마침내 죽권은 칼을 뽑아 스스로 자기 목을 찌르고 죽었다. 하지만 초문왕의 동생 자원(子元)이 왕위와 형수인 식부인을 차지할 목적으로 자기 형 문왕에게 “식부인의 친정인 진(陳)을 치면 친정이 가까워진 식부인도 웃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해 문왕이 전쟁에서 죽도록 하였다는 설도 있다. 장남인 웅간(熊囏)이 왕이 된 후, 사치와 사냥질에만 빠져 지내고 민심을 돌보지 않아 즉위한 지 3년 만에 동생 웅운(熊惲)이 그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니 그가 초성왕(楚成王)이다. 그러나 쭉 왕위를 노리고 있던 자원은 도화부인의 마음을 얻으면 그 아들인 초성왕을 더욱 수월하게 몰아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겼고, 그러려면 그녀가 살던 중원으로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조카 성왕에게 청하여 가까운 정(鄭) 나라를 공격했으나, 정나라 측은 힘으로는 자신들이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계교를 짜서 아예 성문을 활짝 열고 군사들을 집결시키지도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그냥 평소대로 살라고 하여 전쟁 분위기를 전혀 내지 않는 개무시 작전을 발휘했다. 이 작전은 제대로 먹혀서 자원으로 하여금 당황해서 철수하게 하였고, 이 소문은 빠르게 퍼져 자원에게 망신을 준다. 그런데 식부인 또한 이 소식을 듣고 피식 웃었다고 하니 그녀를 웃게 한 것은 성공했다. 하지만 자원은 포기하지 않고 억지로 식부인의 거처로 가서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하였고, 결국 이 소식을 들은 초성왕에게 죽는다. 식부인은 인간사에 더더욱 환멸을 느껴 궁궐의 더욱 깊은 곳으로 숨어 죽을 때까지 그곳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나마 그녀에게 위안이 있다면 그녀의 둘째 아들인 초성왕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명군이 되었고, 훗날 그녀의 증손자인 초장왕(楚莊王)은 춘추오패(春秋五霸)의 강자가 된다.

식부인의 사망에 관한 사가들의 기록은 정확하게 내려오는 것이 없고, 다만 이 아름답고 기구한 운명의 여인에 대한 후세의 문인들은 너도 나도 필(筆)을 들어 찬사를 보내게 된다. 먼저 842년, 황주(黃州) 지방의 자사(刺史)로 좌천된 시인 두목(杜牧)이 그보다 무려 1천5백 년 앞서 춘추시대를 살았던 도화부인(桃花夫人)을 그리며 읊은 칠언시, <제도화부인묘題桃花夫人廟>이다. 기구한 식부인(息夫人)을 떠올리며, 서진(西晉) 때의 권신(權臣)이자 부호 석숭(石崇)의 애첩 녹주(綠珠)를 비교한 것이다. 녹주는 낭군과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금곡루(金谷樓)에서 떨어져 죽어서 절개를 지켰지만, 식부인은 서방을 살리기 위해 자신은 개가(改嫁)를 하는 희생을 했다. 두 여인은 모두 자기의 참사랑 한 남자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과 정신을 온전히 던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細腰宮裏露桃新(세요궁리로도신) / 궁의 미녀 속에 새로운 복사꽃 피니

脈脈無言度幾春.(맥맥무언도기춘) / 아무 말 없이 몇 해를 보냈다네.

畢竟息亡緣底事(필경식망연저사) / 마침내 식나라 망한 게 무슨 연유인가

可憐金谷墜樓人(가련금곡추루인) / 가련하리, 금곡에서 떨어진 사람이여.

다음 시는 왕유(王維)가 지은 <식부인(息婦人) 또는 <식규원(息嬀怨>이다. 맹계(孟棨)의 ≪본사시(本事詩)≫에 따르면 당현종(唐玄宗)의 형 영왕(寧王)이 떡장수의 어여쁜 아내를 빼앗았다. 한 일 년여가 지난 어느 날 영왕이 그녀에게 아직도 떡장수를 그리워하느냐고 물었고, 그녀는 원래의 남편을 잊을 수가 없어서 눈물을 흘리고만 있었다. 이때 왕유가 즉석에서 이 시를 썼다고 한다. 식부인으로 떡장수 부인을 비유함으로써 ‘차고풍금(借古諷今)’의 효과를 내었다. 영왕은 왕유가 지은 시를 보고 그녀를 돌려보냈다고 한다.

莫以今時寵(막이금시총) / 지금 받는 사랑 때문에

能忘舊日恩(능망구일은) / 옛날의 정을 잊으라 말라.

看花滿眼淚(간화만안루) / 꽃을 보면 눈물 가득 고이기에

不共楚王言(불공초왕언) / 초왕과는 말을 섞지 않는다네.

청나라 때 소설가 설근(雪芹) 조점(曹霑)은 여성과 일상에 대한 세심한 관찰로 <홍루몽(紅樓夢)>을 썼는데, 식부인을 다음과 같이 시를 지어 찬탄한 바 있다.

楚宮慵婦眉黛新(초궁용부미대신) / 초나라 궁전의 부인은 화장도 게을리 

只有無言對暮春(지유무언대모춘) / 그저 말없이 늦은 봄날 바라보고 있네.

千古艱難唯一死(천고간난유일사) / 천고에 가장 어려운 것이 죽음인데,

傷心豈獨息夫人(상심기독식부인) / 가슴 아픈 사람이 어찌 식부인뿐이랴.

당나라 시인 송지문(宋之問)도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可憐楚破息(가련초파식) / 가련하다 초나라가 식나라를 무너뜨리니,

斷腸息夫人(단장식부인) / 애끊는 식부인여,

乃爲泉下骨(내위천하골) / 우물 아래에 뼈를 묻을지언정

不作楚王嬪(부작초왕빈) / 초왕의 후궁은 되지 않았다.

楚王寵莫盛(초왕총막성) / 초왕의 총애가 크다고 말하지 말라.

息君情更親(식군정경친) / 식나라 낭군의 정이 더욱 두텁다.

情親怨生別(정친원생별) / 가까운 정과 생이별이 원한이니,

一朝俱殺身(일조구살신) / 어느 날 함께 죽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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