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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Jun 02. 2023

(30) 미인계의 고전 – 서시

★ 18禁 역사 읽기 ★ (230602)

병법(兵法)에서 자주 인용되는 게 단공(端公)의 삼십육계(三十六計)이다. 6개의 큰 계책 밑으로 작은 계책이 6개씩 있어서 36계인 것이다. 큰 6개의 계책은 승전계(勝戰計), 적전계(敵戰計), 공전계(攻戰計), 혼전계(混戰計), 병전계(竝戰計), 패전계(敗戰計)이다. 이중 패전계 즉 전쟁에서 열세인 상황에서 이를 뒤집거나 모면하는 전략을 6개로 들고 있다. 그 내용은 미인계(美人計), 공성계(空城計), 반간계(反間計), 고육계(苦肉計), 연환계(連環計), 주위계(走爲計)이다. 보통 우리가 불리할 때는 도망가는 게 제일이라고 말하는 ‘삼십육계 주위상(三十六計 走爲上)’이라는 전략은 가장 마지막 전략이다. 미인계는 병사를 움직이지 않고 적의 수장을 미녀로 유혹하여 내부 붕괴를 유도하는 아주 치밀하고 고차원적인 전략이다. 미인계로 쓸 미인의 조건과 인품이 최고로 훌륭하여 작전의 실패 없이 전 과정을 장기간 관리하기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중국 역사상 약육강식의 무대에서 수많은 미녀들이 재능과 미색을 겸비하고 이를 이용해 상대방을 자기 마음대로 요리했던 사례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 가운데서도 미인계의 대명사가 된 대표적인 여인이 바로 나라를 구한 미인 서시(西施)이다. 

서시는 춘추시대 말기 월(越) 나라 지금의 저장성 사오싱(紹興) 시 소속  주지(諸暨) 시 주뤄촌(苧蘿村) 출신이다. 원래 이름은 시이광(施夷光)이며, 이광(夷光), 서자(西子), 완사녀(浣紗女)라고도 일컬었다. 미인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4대 미녀(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 : 구분하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인물이다. 시씨(施氏)들이 주로 살았던 이 마을이 동서로 나뉘어 있었는데, 그녀는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이름을 서시라 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무꾼이었고 어머니는 빨래를 직업으로 삼았는데, 빨래하는 직업을 완사(浣紗)라 했다. 서시도 늘 시내에 나가 빨래를 했는데, 이 때문에 서시의 고향 마을의 시내를 완사계(浣紗溪)라 부른다. 서시가 물가에서 빨래를 하면 물고기가 서시의 미모를 보고 정신을 잃어 헤엄치는 걸 잊고 가라앉았다고 하는 전설에서 침어(侵漁)라 부른다.

이러한 미인의 조국인 월나라와 수십 년간 서로 물고 물리는 원수지간인 오나라와의 역사가 오늘의 주 스토리이다. 우리가 즐겨 쓰는 오월동주(吳越同舟), 와신상담(臥薪嘗膽), 토사구팽(兎死狗烹) 등은 이들 나라의 대결 상태에서 나온 고사성어이고, 서시빈목(西施矉目), 효빈(效顰), 빈축(嚬蹙) 등은 서시의 얼굴과 관련된 고사성어이다. 넓게 보면 이 모든 단어들이 서시와 관련이 있으니 그녀의 역할과 후세 사람들의 평가가 대단함을 알 수 있다. 오(吳)와 월(越)은 부자(父子)로 대를 이어 가면서 5차례의 피 터지는 전쟁을 거듭했다. 무슨 요즘의 국가 대표팀 A매치도 아닌데, 홈 앤드 어웨이 경기처럼 전쟁을 5차례나 지속적으로 했다니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나 보다. BC 510년부터 BC 473년까지 37년 사이에 큰 것만 5차례의 오월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이 나라와 임금 간의 전쟁이지만, 그 속내에는 이를 이끌었던 지략가인 오자서(伍子胥)와 범려(范蠡) 같은 인물의 활약이 중심이었다. 우선 오자서라는 출중했지만 불행한 결말을 맞은 비운의 사나이에 대해 먼저 알아보자. 오자서는 본래 초(楚) 나라의 대부 오사(伍奢)의 아들이다. 원래 이름은 운(員 : 사람이름으로 읽을 때 발음)이고 잘 알려진 자서(子壻)는 자(字)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 때문에 가히 고사성어 제조기 수준으로 다양한 고사성어가 그의 인생에서 연유되었다. 오자서와 직접 유래한 것만 치면 동병상련(同病相憐), 굴묘편시(掘墓鞭屍), 일모도원(日暮途遠), 부관참시(剖棺斬屍), 도행역시(倒行逆施), 심복지환(心腹之患) 등으로 6개가 떠오른다. 오씨 가문은 대대로 알아주는 강직한 귀족문벌로서 아버지 오사는 초나라의 평왕(平王)의 신하이면서, 비무기(費無忌)와 같이 태자 건(建)의 사부였다. 그런데 오사에 비해 비무기는 늘 태자로부터 핀잔을 듣는 상황이었다. 어느 해 평왕이 진(秦) 나라와 화평도 도모할 겸, 아들인 건(建)을 진나라 공주 맹영(孟嬴)과 결혼시키려고 한다. 그때 사신으로 간 간신 비무기(費無忌)가 태자비가 될 진의 공주 맹영을 보았는데, 매우 아름다웠다.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호색한인 평왕에게 잘 보이고, 장래를 보장받기 위해 그녀를 평왕이 차지하라고 극력 건의한다. 평왕은 그녀가 매우 아름다웠고 강권(强勸)하는 것이 싫지 않아서 덥석 그녀를 차지해 버렸다. 그리고는 태자에게 공주와 같이 온 잉첩(媵妾) 중 가장 예쁜 여자를 골라서 태자비로 주었다. 

한편 비무기는 나중에 일이 들킬 것을 우려해 태자를 계속 음해하였다. 그 음해에 넘어간 평왕은 태자 웅건(熊建)을 국방 수비 명목으로 변방에 보내버렸다. 비무기는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자 않아 태자를 계속 음해하여, 반란을 도모한다고 모함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은 속닥속닥 귀엣말에 약한 법이다. 비무기의 감언이설에 속은 평왕은 오사를 태자와 한편이라고 감금해 버린다. 이때 그리고 비무기는 화근(禍根)을 송두리째 없애기 위해 오사의 아들인 오상(伍常)과 오운(伍員 : 오자서) 마저 제거하려 했다. 평왕이 아비를 볼모로 잡고 두 아들에게 궁으로 들어오라 했으나, 오상만 오고 오자서는 태자 건과 함께 정(鄭) 나라로 달아났다. 결국 비무기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어 결국 오사와 오상만 참수했다. 오사는 둘째 아들(오자서)의 심리와 재능을 꿰뚫어 보고, 충언인지 경고인지 오자서가 살아 도망쳤으니 초나라는 앞으로 큰 환란을 겪게 되리라는 말을 예언처럼 남기고 죽는다. 초평왕은 오자서의 목에 천금(千金)의 현상금을 걸고 죽이고자 했지만 실패한다. 그 후 오자서는 정나라에서 태자 건이 진(晉) 나라 첩자 노릇을 하다가 정정공(鄭定公)에게 죽자 정나라를 탈출했다. 이때 오(吳)로 가려면 반드시 초나라를 거쳐야 했기 때문에 친구인 초(楚)의 수비대장 신포서(申包胥)의 조력으로 초에 입국하지만 초를 통과하여 오나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현상금 사냥꾼 자객들과 추격대에게 쫓기던 와중(渦中)에 강이 가로막혀 도주로가 없자 진퇴양난이었다. 그때 늙은 뱃사공이 배에 태워 강 너머로 보내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오자서는 이 뱃사공에게 은혜를 갚고자 해서 자신의 보검을 넘겨주려 했다. 이 뱃사공은 오자서가 현상금 천금짜리 지명수배자인데 그런 걸 받았다가 꼼짝없이 당한다며 받기를 거부하였다. 오자서가 이름이라도 알고자 물었으나, 나중에 잡혀서 누구의 도움으로 강을 건넜다는 발설(發說) 안 할 자신도 없으니 모르는 게 낫다고 안 알려준다. 오자서는 이런 그에게 무릎을 꿇고 감사를 표한 뒤 오나라로 길을 떠났다. 객설(客說)이지만, 먼 훗날 오자서가 오나라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동맹을 맺고 있던 정나라를 공격했다. 오군을 막을 방법이 없던 정나라 헌공(獻公)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오나라 군사를 물리는 사람에게는 후한 상을 내리겠다.’는 방(榜)을 널리 붙였다. 그러자 한 젊은 어부가 배 젓는 노 하나를 들고서 나섰다. 그는 오자서의 도피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뱃노래를 부르며 오나라 군영으로 혼자 들어갔다. 이 젊은 어부는 바로 그때 그 사공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가 부르는 노래를 듣고 오자서는 어부가 들고 온 노가 옛날 그 사공이 쓰던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사공의 은혜를 갚기 위해 어부의 청대로 정나라에서 군사를 돌렸다. 정헌공은 약속대로 이 어부에게 대부(大夫)의 지위를 주며 모셨고, 사람들은 그를 ‘어대부(漁大夫)’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드디어 고생 끝에 오나라에 도착한 오자서는 나름대로 환대를 받았다. 초나라의 명문이던 오씨 가문의 명성은 인접국인 오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상태였고, 심지어 그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인 오자서가 초나라에서 도주한 뒤 복수를 위해 칼을 갈고 있음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뜻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관망을 하다가, 오나라의 궁중에 왕권 다툼이 격심해지자 기회를 잡았다. 우여곡절 끝에 선선대왕(先先代王)의 셋째 아들인 료(僚)가 왕위를 계승하자, 선선대왕(先先代王)의 장남 제번(諸樊)의 아들이자 후일 합려(闔閭)라 불리게 될 광(光)은 당연히 이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겉으로는 이를 숨겼다. 오자서는 이런 광(光)의 본심을 꿰뚫어 봤고, 야심가인 데다가 능력도 확실하나 입지가 불안정한 그를 지원하는 게 자신의 복수를 이루는데 도움이 될 거라 여겼다. 따라서 그의 측근으로 들어가 그를 보좌하며 쿠데타를 성공시킨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광은 자신을 오왕 합려(闔閭)라 칭하게 되었고 당연히 최대 공신인 오자서를 재상으로 임명함으로써 측근으로 삼았다. 그 당시에 초나라에서 정쟁으로 백비(伯嚭) 일명 태재 비(太宰嚭)라고도 불리는 사람도 망명 왔다. 주변에서 백비의 관상이 간신상이라고 등용을 말렸지만 오자서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며 듣지 않았다가 나중에 호되게 당한다.

마침내 망명한 지 한참이 지난 BC 512년 오자서는 오왕 합려와 함께 원수를 갚기 위해 초나라를 침공한다. 그러나 당시 군권을 잡은 손무(孫武)의 반대로 철군한다. 그 후 다시 BC 506년에 대대적인 초나라 정벌을 하게 된다. 오자서의 아버지와 형을 죽였던 바로 자기의 조국이자 원수의 나라다. 당시 원수인 평왕은 이미 죽고 아들 초소왕(楚昭王) 때이다. 오자서는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길이 없어 평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를 꺼내 구리 채찍으로 3백 번이나 매질을 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래서 굴묘편시(掘墓鞭屍)라는 고사성어가 생긴 것이다. 이때 오자서의 친구 신포서는 산속에서 피난 중이었는데, 오자서의 복수극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아무리 복수라지만 시체 훼손은 인간 된 도리로써 차마 못 할 짓이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이에 오자서는 ‘날은 저무는데 길이 멀어서(日暮途遠 : 일모도원), 거꾸로 걸으며 거꾸로 일을 했다(倒行逆施 : 도행역시)’라고 답변했단다. 각설(却說)하고, 본격적으로 오월간(吳越間)의 5차전 A-매치의 전적(戰績)을 살펴보자.

제1차 오월전은 월나라의 제34대 군주이자, 초대 국왕인 윤상(允常)은 미부담(羋夫譚)의 아들이자, 미구천(羋句踐)의 아버지이다. 월나라는 이 미윤상(羋允常) 때부터 칭왕(稱王)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BC 510년 즉 오왕 합려 5년에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하여 굴복시켰다. 오나라의 일방적인 승리였다.(오왕 합려 > 월왕 윤상)

제2차 오월전은 BC 505년 월나라의 선제공격으로 개시가 되었다. 오왕 합려가 오자서와 함께 초나라를 공격하여 나름 성공했다고 초나라에 머물러 세월아 네월아 하고 즐기고 있었다. 그때 월나라의 윤상(允常 : 구천의 아버지)이 영토 확장의 욕구와 지난번 싸움의 복수전으로, 오(吳)의 수도가 텅 빈 틈을 타서 오나라를 침공해 버린다. 제1차전은 전초전이고 사실 이때부터 두 나라 간의 사활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오왕 합려(闔閭)는 주력부대 일부를 고국으로 급파해 물리친다. 오나라가 월나라를 크게 무찌른 게 아니고, 홈경기에서 그저 방어에 성공한 셈이므로 엄밀히 따지고 보면 무승부나 다름없다. 괜히 월나라가 오나라에 찝쩍거리다가 물러난 것이다. 앞으로 오와 월의 대를 이은 치열한 설욕전이 3차례의 전쟁을 통해 파란만장하게 전개되고 그 마지막 대미를 장식하는 서사시(敍事詩)에 희대의 미녀 서시(西施)가 등장하게 된다.(월왕 윤상 < 오왕 합려)

제3차 오월전은 BC 496년 즉 오왕 합려 19년, 월왕 구천 원년에 오나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다. 당시 월나라 왕인 윤상이 노환으로 죽고, 아들 구천(句踐)이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이때 아직 구천은 부친의 상중이었는데, 오왕 합려는 그 틈을 이용해 월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왕이 죽어 슬픔에 젖어있는 월나라 뒤통수를 치는 비정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난데없는 공격에 처음에는 허둥지둥했지만 월나라에는 범려(范蠡)라는 엄청난 전략가가 있었다. 월왕 구천은 결사대를 구성하여 맞서 싸우고, 범려는 아주 기발한 특공대를 조직한다. 전장의 노역을 시키려고 끌고 온 사형수들로만 구성된 자살특공대였다. 유족들에 대한 보상 등을 대가로 집단 자살을 시킨 것이다. 이들은 3열 횡대로 줄을 맞춰 오나라 진영으로 뚜벅뚜벅 다가가서 우뚝 선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입을 맞추어 크게 외친다. “너희 오나라 군사들, 우리는 천상의 특공대로 너희들은 하늘로 데려가려고 왔다!!”라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칼을 꺼내 자기 목을 쫙 베어 버린다.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대도 어니고 천상특공대라는 구라와 집단 자살쇼에 오군들은 어안이 벙벙하고, 눈이 똥그래진다. 계속해서 2열, 3열이 차례차례 와서 똑같이 고함지르고 목을 베어 자살을 하니 오나라 군진(軍陣)에서는 경악과 당혹에 휩싸여 일대 혼란이 일어난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월나라의 주력부대는 측면을 공격해 취리(檇李)에서 오나라를 대파해 버린다. 남의 나라 국상(國喪)을 틈타 비열한 전쟁을 일으킨 오왕 합려는 화살을 맞아서 부상을 입어 이로 인해 진중(陣中)에서 죽는다. 임종을 앞두고 합려는 아들 부차(夫差)에게 유언한다. “너는 이 아비를 죽인 구천을 잊지 말아라” 아버지인 합려의 죽음 앞에 복수를 다짐하는 아들이 바로 부차이다. 오나라의 새 왕이 된 부차는 아버지의 원수인 월나라 구천을 치기 위해서 군사력증강에 심혈을 기울이게 된다.(오왕 합려 < 월왕 구천)

제4차 오월전은 BC 494년 즉 오왕 부차 2년, 월왕 구천 3년에 오나라의 선제공격으로 시작한다. 오왕 부차는 초나라서 온 대부 백비(伯嚭)를 태재(太宰)로 삼았다. 오나라 병사들에게 훈련과 활쏘기를 익히게 하면서, 부차는 가시가 많은 장작 위에 자리를 펴고 자며, 방 앞에 사람을 세워 두고 출입할 때마다 “부차야, 아비의 원수를 잊었느냐!”하고 외치게 하였다. 와신(臥薪)이라는 고사가 여기서 유래되었다. 부차는 매일 밤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의 원한을 되새겼다. 늘 월나라에 복수하겠다는 의지를 다짐하였다. 한편 승리를 거둔 월왕 구천은 자기도취에 빠져 오나라를 또 공격하려 한다. 범려가 아직 때가 아니라고 간하였으나 월왕 구천은 말을 안 듣는다. 이 낌새를 간파한 오왕 부차가 아버지의 원한을 갚기 위해서 정예병들을 모아서 기습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월나라를 박살 낸다. 월왕 구천은 겨우 도망갔으나 수도는 완전 포위돼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신세가 되고 만다. 월왕 구천은 얼마 남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회계산(會稽山)에서 목숨을 부지한다. 범려는 월왕 구천에게 충고한다. “스스로 인질이 되어 겉으로는 복종하고 속으로는 후일을 도모하소서” 이 충고에 따르기로 한 월왕 구천은 대부 문종(文種)을 보내 오나라의 태재 백비를 몰래 만나서 항복의 조건을 타진한다. 범려의 판단으로 오자서는 분명 반대할 것이니 재물 욕심이 많은 백비에게 재물과 미녀를 제공하여 화친이 성립되도록 사전 로비를 한 것이다. 월나라에서 금은보화와 미녀 8명을 사전에 백비에게 뇌물로 줬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왕 부차는 오자서의 경고를 무시하고 월나라와 강화를 맺는다. 담보로 월왕 구천과 왕비는 오나라에 인질로 끌려간다. 월왕과 왕비는 노예와 똑같은 생활을 한다. 돌로 만든 집에 기거하며, 오왕 합려의 묘를 관리 청소하며, 말을 돌보고 부차가 말을 타면 말고삐를 잡아야 했다. 옷은 누더기 옷이고 머리는 항상 엉클어진 채로 일한다. 오왕 부차가 가마에 앉으면 그 앞에서 채찍을 들고 말을 몰아야 한다. 이런 생활을 3년이나 한 끝에 용서를 겨우 받고 인질에서 풀려난다. 고국으로 돌아온 구천은 통절한 심정으로 복수를 다짐한다. 스스로 밭에 나가 일하고 부인도 옷감을 짠다. 서민과 똑같이 생활하며 고기도 안 먹고, 물들인 옷도 입지 않는다. 언제나 말린 쓸개를 옆에 놓고 식사 때마다 그 쓴 쓸개 맛을 보며 다짐한다. 상담(嘗膽)이라는 고사는 여기서 비롯된 거다. 그 후 7년 만에 월나라는 부강한 국력을 보유하게 된다.

범려의 계책으로 월나라는 이즈음 미녀요원을 비밀리에 양성하기로 한다. 다름 아닌 미인계다. 전국을 뒤진 끝에 서시라는 기가 막힌 미인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 스토리를 보면, 어느 날 한 마을의 친구인 서시는 정단(鄭旦)과 나물을 캐며 놀고 있었다. 삼단 같은 머리가 등을 타고 허리까지 내려와 바람이 불면 머리카락이 수양버들같이 흩날렸다. 미인을 구하러 다니던 범려는 절묘한 생각이 들어 발길을 멈추고 그녀들에게 접근, 자신의 임무를 얘기했다. 서시와 정단의 미모가 예사롭지 않아서였다. 그녀들은 범려에게 무릎을 꿇어 절을 하고 연약한 몸으로 조국을 위해 일할 수 있게 됨을 기쁘게 생각한다며 뜻에 따르겠다고 했다. 범려는 서시와 정단의 집에 각각 백 냥씩의 금을 주었다. 범려가 서시와 정단을 데리고 궁궐로 들어갈 때, 그녀의 빼어난 미모를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던지 길이 막혀 수레가 움직일 수 없었단다. 사흘 만에 궁궐에 도착했는데, 궁전의 경비병들조차 그녀의 미모에 놀라 기절해 버릴 정도였다. 그녀의 얼굴을 보기 위해 몰려드는 군중이 궁궐 밖에 장사진(長蛇陣)을 쳤다. 범여는 그녀의 얼굴을 보여주고 사람들에게 1전씩 돈을 받았는데, 그 돈이 곧 산더미처럼 쌓였다. 그래서 그 돈으로 무기를 만들고 군사들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하였다. 서시는 범려에게 3년간 특별교육을 받는다. 글공부, 몸가짐과 기본예절, 가무, 방중술(房中術)과 남자 홀리는 기법, 법도, 국제정세 등 스파이로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가르쳤다. 그 과정에서 서시와 범려가 정이 들어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일설도 있다. 아무튼 서시와 정단을 오나라에 선물로 보내서, 오나라의 왕인 부차를 유혹하여 그가 정치를 돌보지 않고 주색에 빠지도록 함으로써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에 있었다.

모종의 임무를 띠고 서시는 정단과 함께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바치는 선물로 보내졌다. 부차는 서시를 보자 첫눈에 반하게 되었고, 오자서가 이를 경계해 “하(夏) 나라는 말희(妺喜)로 인해 망하고, 은나라는 달기(妲己), 주나라는 포사(褒姒)때문에 망했습니다. 미녀는 군주를 주색에 빠지게 해서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니 이들을 돌려보내야 합니다.”라고 간언 했다. 하지만 오왕 부차는 급기야 화를 벌컥 내며 오자서를 힐난(詰難)하며 서시를 챙긴다. 이때부터 부차는 오자서를 멀리하게 되고 서시와의 향락에 몰두한다. 부차가 얼마나 서시에게 빠졌던지 그 사례를 하나하나 들어 보자. 왕손웅에게 서시를 위해 영암산(靈岩山) 위에 고소대(姑蘇臺)라 불리는 관와궁(館娃宮)을 짓게 하고, 온갖 보석으로 호화롭게 장식하였다. 관와궁 안에는 향리랑(響履廊)을 만들어, 서시가 그 위를 지날 때마다 신발 끄는 소리가 청아하게 울리도록 했다. 향리랑은 요즘으로 치면 공명(共鳴) 장치이다. 땅을 파고 빈 항아리를 묻고 뚜껑으로 얇은 널판지를 덮은 위를 걷거나 춤을 추면 발자욱 소리가 울리는 것이다. 서시가 꽃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자 산 아래에 인공 늪과 화원을 조성해서 완화지(玩花池)를 만들었다. 서시가 달구경을 좋아하자 산 위에 큰 연못을 만들어 물가에 달이 비치게 하는 완월지(玩月池)를 조성했다. 거울보고 머리 빗는 걸 싫증 내자 집 앞까지 연못을 내어 우물가에 앉도록 오왕정(吳王井)이라는 연못을 만들었다. 육지가 지루하다고 하자 성안에 거대한 운하를 파서 강물을 끌어댄다. 서시가 연꽃을 딸 때는 비단으로 돛폭을 만든 금범경(錦帆涇)을 탔다고 한다. 그리고 서시와 함께 성의 남쪽 장주원(長洲苑)에서 사냥을 하며, 여름에는 소하만(消夏灣)으로 피서 가곤 하였다. 부차는 서시를 얻은 후부터 관애궁에서만 기거하며 서시와 함께 가무, 산수를 즐기는 데에만 열중하였다. 한 번은 월나라에서 흉년이 들었다면서 양곡 1만 석을 빌려 달라는 사신이 왔다. 이때도 대신들은 오자서 편과 백비 편으로 갈리어 뜨거운 격론 끝에 결론을 못 냈는데, 서시의 의견으로 양곡 1만 석을 월나라에 빌려 주었다. 다음에 돌려받은 1만 석은 싹이 트지 않도록 익혔다가 다시 말린 곡식이었다. 어릴 적부터 서시는 지병으로 가슴앓이를 앓고 있었다. 가슴이 아플 때마다 그녀는 얼굴을 몹시 찡그렸는데, 그 모습이 절묘하게도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부차는 그녀의 그 찡그린 모습에 넋을 잃어버릴 정도였다. 서시의 찡그린 모습이 아름다움을 자아낸다는 소문은 곧 궁궐 밖으로까지 새어나갔다. 그때 어느 시골의 아주 못생긴 여인이 자기도 찡그리기만 하면 아름다운 모습이 될까 싶어 항상 얼굴을 찡그리고 다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웃동네 사람들이 그 추녀의 찡그린 모습을 두 눈뜨고는 차마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처럼 찡그린 것을 본받는다는 의미로 효빈(效嚬)이라는 말이 생겼고, 눈살을 찌푸린다는 빈축(嚬蹙)이란 말도 생긴 거다.

서시를 위한 국고 낭비로 재정이 피폐(疲弊) 한 상태에서 오나라의 군대는 기강은 해이해지는 일이 잦자, 오자서는 사사건건 부차에게 반대를 하게 된다. 이를 몹시 껄끄러워하는 오왕 부차에게 서시가 온갖 아양을 떨어 오자서에게 칼을 선물하기에 이른다. 더 이상의 간섭과 반대는 싫으니 이 칼로 자살하라 이런 얘기다. 오자서는 껄껄 웃으며 이런 말을 남긴다. “내 죽으면 반드시 내 눈을 뽑아서 동문에 걸어다오. 월나라 군사들이 입성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볼 테다.” 이 말을 전해 들은 부차는 격노한 나머지 오자서의 시신을 가죽 자루에 담아 전단강 물에 던져버리라고 명령한다. 서시에 완전히 빠진 부차는 국력소모는 물론 더욱 정사에 소홀해진다. 그럴수록 서시는 범려에게 배운 국제정세를 들먹이며, 오나라가 천하의 패주(霸主)가 되어야 하니까 속국인 월나라를 제외한 다른 나라들을 통합하라고 꼬드긴다. 그 한 장면이다. 부차는 정국운영에 신하들과 격한 토론을 하다가 자신의 의견이 흔쾌히 관철되지 않았을 때 그는 술과 음식으로 감정을 다스리고, 마지막으로 영혼과 육체를 동시에 색(色)으로 위로했다. 이 같은 버릇은 서시가 오고부터 부쩍 횟수가 잦아졌다. 신권(臣權)과 왕권(王權)의 충돌에서 자신이 밀렸을 때 그는 분을 못 이겨 밤새껏 여색을 탐했던 것이다. 이럴 땐 한 여자의 방에서만 즐기는 것이 아니고 술이 깰 때까지 궁녀들의 방을 순회하는 것이다. 때문에 궁녀들은 부차의 돌출행동 때 번개 승은(承恩)을 입기도 해 은근히 기다리는 분위기였다. 

오늘 서시는 월나라에서 같이 온 정단(鄭旦)과 함께 온 정성을 다해 산해진미를 진두지휘 했다. 그녀는 서역에서 전해진 삼륵장류주(三勒漿類酒)의 하나인 비리륵(毘梨勒)도 꺼냈다. 침대 밑에 숨겨 놓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을 때 쓰려는 비장의 무기다. 시녀의 보고로 봐 오늘이 비리륵을 쓸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서시는 탁자 위에 술병을 올렸다. 술병은 핑크빛 비단에 싸여 있으며 비단엔 대나무 위에 학이 앉으려고 날개를 접는 모습이 수놓아졌다. 서시는 현관 앞까지 나아가 부차를 기다렸다. 그녀 뒤엔 두어 걸음 떨어져 정단이도 마중을 한다. 웬만해선 동석을 하지 않지만 오늘은 서시의 간곡한 부탁으로 한 남자를 위해 정단이 기꺼이 쓰리 썸으로 부차를 유혹하기로 한 것이다. 잠자리 날개 같이 투명한 옷으로 가린 그녀들의 육체는 거의 다 드러났다. 오늘따라 서시가 미간을 유난히 찌푸렸다. 부차는 서시의 찡그린 얼굴을 보자 대신들과 정국운영으로 갑론을박할 때 상한 마음을 잊고 달려와 덥석 손을 잡았다. “폐하, 폐하는 이 정단이 년은 계집으로 안보이십니까? 섭섭하옵니다.” 정단이 뽀로통해 뒤로 돌아서 바람처럼 거실로 들어간다. “허어, 내 어찌 너를 보고도 못 본 체 하겠느냐? 서시의 얼굴이 많이 상해 그리 말한 것을” 부차의 손은 어느새 서시의 초승달 엎어 놓은 듯한 엉덩이에 가서 손장난을 하고 있다. “폐하 개념치 마소서. 정단이 아직 나이 어려 폐하의 하해와 같은 승은을 몰라서 그러하옵니다.” 뾰로통해 한 발 앞서 들어온 정단은 비리륵을 따서 부차가 마시기 좋게 재빨리 술을 따라 놓았다. “폐하 이렇게 셋만이 오붓한 자리는 오랜만이지요? 이 술은 언니가 월나라에서 폐하를 위해 가지고 온 아주 특별한 술입니다. 파사호주라고도 하지요. 오늘은 저희 자매가 같이 더욱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부차는 단숨에 마셨다. 부차는 단숨에 마신 비리륵 몇 잔에 벌써 혀가 꼬부라졌다. 정단은 비파를 켜기 시작했다. 그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부차는 서시의 엉덩이에서 손을 빼지도 않고 다른 손으로 술을 따랐다. “자 우리 술을 더 마시고 마음껏 신나게 놀자. 정단이 너도 비파만 켜지 말고 이리 와서 같이 춤추며 노래하고 걸판지게 놀자.” 서시의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은 부차의 손장난으로 거의 다 벗겨져 그녀의 대리석 같은 몸은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정단은 서시와의 약속대로 부차에게 계속 술을 따르는 동시에 농익은 육체로 사내를 힘껏 끌어안으며 뜨거운 입김을 귓불에 쏘아 붓고 자리를 떴다. 부차는 몽롱한 의식으로 정단을 끌어안으려 했으나 여인은 어느새 거실 밖으로 나간 뒤였다. “폐하 서시 여기 있습니다.”  서시는 부차를 젖먹이 안 듯 안아 침실로 들어갔다. “내 기어코 제나라를 정복하리라. 오자서 놈이 반대를 했지만, 내일 회맹을 해서 내가 패자가 되면…”  부차는 자리에 들자 성난 수말처럼 서시에게 마구 달려들더니 화살 맞은 노루 모양 얼마 못 가서 축 늘어져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기 시작했다. 서시는 부차의 품에서 바람처럼 빠져나와 현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정단에게 오나라 부차가 회맹에 참가한다는 정보를 주어 월나라에 전하라고 했다.(오나라 부차 > 월나라 구천)

제5차 오월전은 BC 482년 즉 오왕 부차 14년, 월왕 구천 15년에 오왕 부차가 3만 대군을 이끌고 중원의 제후들과 회맹을 위해 떠나서 수도를 비웠을 때, 월왕 구천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다. 구천은 오나라 태자 우(友)를 포로로 잡았다. 그 후 BC 478, 476, 475, 473 등 4차례의 월나라의 공격으로 오나라를 멸망시킨다. 이때 오왕 부차가 구천에게 전에 살려준 예를 들어 항복했다. 마음 약해진 구천이 순간 망설였을 때 범려가 “쓸개를 핥으며 복수를 다짐하던 일을 잊으셨습니까!”라며 진언하였다. 구천은 전에 자신을 살려준 것도 있고 해서 명분상 직접 죽으라고 할 수는 없었기에 용동도(甬東島)에 백호(百戶)의 장(長)으로 봉하겠다고 제안한다. 일국의 왕에게 이런 제안을 한다는 것은 사실 그냥 곱게 알아서 죽어달라는 뜻이나 마찬가지다. 진짜 살려줄 생각이었으면 최소한 제후에 준하는 지위는 보장해주어야 한다. 부차는 자신이 늙어 군왕을 섬길 수 없다며 그 제안을 거절하고, 저승에서 오자서를 볼 낯이 없다며 고소대에서 얼굴을 가린 채 자결했다. 그 뒤 오나라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후 서시에 대한 기록은 정사(正史)에는 남아 있는 게 없다. 일설에는 월왕 구천의 왕비가 남편이 서시와 바람날까 두려워 서시를 강물에 넣었다고도 한다. 그녀가 죽은 후 가리비가 잡혔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가리비의 속살이 서시의 혓바닥을 닮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또 하나는 범려와 함께 국외로 탈출했다는 설이다. 

후한시대 조엽(趙曄)이 오월 지방의 민간전승을 기록하여 서시 전설의 기본 문헌이 된 『오월춘추(吳越春秋)』나 후한 원강(袁康)과 오평(吳平)이 쓴 『월절서(越絶書)』, 당나라 때 육광미(陸廣微)가 오나라의 지리와 풍습을 기록한 『오지기(吳地記)』 등은 모두 국외 탈출설을 취하고 있다. 월왕 구천은 오왕의 궁전에서 승리의 축하연을 열었다. 그리고 장수와 대신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그러나 이때 최고의 수훈감인 범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고, 오나라를 멸망시킨데 지대한 공로를 한 서시도 보이지 않았다. 백방으로 찾아도 허사였다. 얼마 후 구천은 범려로부터 친필 서신 한 통을 받았다. “대왕폐하 이 편지를 읽으실 때쯤엔 이미 저와 서시를 찾으실 수 없을 것입니다. 이미 부친의 원수를 갚고 소원이 이루어진 지금은 폐하께 제가 더 이상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폐하의 치세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뛰어난 미모로 오왕을 유혹했던 서시는 폐하마저도 유혹하게 될 것이고, 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저 자신도 세력이 강대해지면 폐하의 근심거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서 저희는 이제 폐하께 작별을 고하고자 합니다.” 이 편지는 서호(西湖) 주변에 버려져 있던 범려의 겉옷 주머니에서 발견되었고 한다. 사람들은 모두 두 사람이 호수에 뛰어들어 자살했을 것이라 여겼다. 사실 범려와 서시는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대부 문종에게 편지 한 통이 전달되었다. 내용은 이러했다. “교활한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 것 즉 토사구팽(兎死狗烹)처럼 적국이 망하면 공신들은 죽임을 면치 못하는 법일세. 월왕은 원수의 굴욕을 견뎌낼 수는 있어도 공을 세운 대신들을 인정할 수 있는 위인은 못되네. 우리는 그와 환난(患難)은 함께 할 수 있지만 즐거움을 함께 할 수는 없을 걸세. 이것이 바로 나와 서시가 멀리 떠나는 이유일세.” 문종은 그 이야기를 그냥 흘려버렸다고 한다. 결국 문종은 범려의 예상대로 자결을 강요받는다. 그리고 몇 년 안 가 구천도 병으로 죽고 월나라는 내분으로 쇠약해져 버렸으며, 국력을 회복한 초나라에게 멸망당하게 되었다. 구천에게서 벗어나 잠적한 범려의 이후 행적은 미스터리이나 《사기》에 의하면 그가 제나라로 도망쳐 자신의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로 고치고 그곳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한다. 거부가 된 범려의 재능을 알아본 제나라 사람들이 그를 재상으로 삼으려 하자 범려는 모은 재산을 모두 나눠주고서는 또 잠적해 버렸다. 치이자피라는 말은, 오나라의 공신이었으나 결국 모함에 의해 죽음을 당한 오자서의 시신이 말가죽으로 만든 자루에 담겨 물에 던져진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이후 범려는 도<陶 : 현재의 산둥성 허쩌(荷澤) 시 딩타오(定陶) 현>라는 곳에 갔는데, 그곳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범려는 이곳에서 장사를 시작해 거부가 되었고 장사의 성인 즉 상성(商聖) 도주공(陶朱公)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서시가 뛰어난 미인이고, 항주 부근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호(西湖)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서시호 또는 서호로 불리고, 중국에서 뛰어나게 맛있는 음식에는 서시라는 말을 앞에 붙였다. 이를테면 서시비(西施臂)하면 오월(吳越) 지방에서 나는 특미인 조갯살을 뜻한다. 그렇듯이 서시유(西施乳)하면 수컷 황복(黃鰒)의 뱃속에 있는 하얀 이리를 뜻한다. 이리는 물고기 수컷의 정소(精巢)를 말하고 곤이(鯤鮞)는 물고기 암컷의 뱃속에 있는 알을 말한다. 복의 이리를 그토록 절미(絶味)로 쳐주었다. 명나라의 만력제를 비롯하여 역사 속 수많은 귀족들과 왕족들이 즐겼는데 이 황복을 서시의 유방 즉 서시유(西施乳)라고 부르는 것은 복어의 모양이 유방의 모습과 같다 하여 이렇게 부른다는 설도 있고, 복어의 정소 부위에 해당하는 이리가 터졌을 때 나오는 흰 액체를 젖에 비유하여 서시유(西施乳)라 표현한다는 설도 있다.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특히 복을 좋아하여 그가 양주(楊州)의 장관으로 있을 때 복이 올라올 철이면 복 먹느라고 정사를 게을리했을 정도라고 했다. 많은 시인들을 불러 복 맛을 찬미케 하는 자리에서 소동파는 “사람이 한번 죽는 것과 맞먹는 맛” 또는 “천계(天界)의 옥찬(玉饌)”이라고까지 극찬을 했다.

서시에 관한 다양한 문학 작품이 있으나 서시와 서호를 대비한 소동파(蘇東坡) 즉 소식(蘇軾)의 시 한 편을 소개한다. 제목은 <음호상초청후우(飮湖上初晴後雨)>이다. 즉 처음에는 맑았다가 흐려지는 서호 가에서 한 잔 마시며 읊은 것이다.

水光瀲灩晴方好(수광렴염청방호) / 물빛 반짝이고 출렁이는 맑은 날이 좋거니와

山色空蒙雨亦奇(산색공몽우역기) / 산색이 몽롱하게 비올 때도 역시 특별하네.

欲把西湖比西子(욕파서호비서자) / 서호의 경치를 서시에 비교해 보자 하면

淡妝濃抹總相宜(담장농말총상의) / 옅은 화장 짙은 화장 모두 서로 어울리네.

소식은 항주통판(杭州通判)과 항주지주(杭州知州)를 지내서 두 번씩 서호와 인연을 맺었다. 이 시는 아마 소식이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재직하던 1073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동일한 제목으로 쓴 시 2수 중에서 뒤의 시이다. 서시와 같은 미인은 본래 화장을 어떻게 하든지 아름답듯이 서호 역시 계절에 관계없이 그렇다는 의미이다. 속이 쓰려 얼굴을 찡그려도 예뻤다니 더 말을 해서 무엇 하리. 맑은 날은 맑아서 좋고, 비 오는 날은 빗소리와 정취가 좋은 삶이 잘 사는 삶일 것이다.

다른 한 수는 세인(世人)이 말하는 중국 3대 책사(策士) 유기(劉基)의 시이다. 역사가들이 장량(張良)·제갈량(諸葛亮)·유기(劉基)를 3명의 위대한 군사전략가이자 책사로 꼽는다. 유기는 원나라 말기의 학자 겸 문신인데, 거지이며 탁발승이었던 하층민중 출신 주원장(朱元璋)을 이민족 국가 원(元)을 무너뜨리고 명(明)을 건국시키는데 지대한 공을 한 사람이다. 장량과 범려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을 버리고, 주군의 토사구팽을 벗어나서 명(命)을 보존한 사람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시를 쓴 것이다. 역사를 읊은 오언율시인 <영사(詠史)>의 21수 중 마지막 수이다. 오자서의 토사구팽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읽힌다. 인생은 각자 뜻한 바대로 살아간다는 인생각유지(人生各有志)가 필자의 가슴에 제일 와닿는다.

夫差臥薪日(부차와신일) / 부차가 섶에 누워있던 나날과

勾踐嘗膽時(구천상담시) / 구천이 쓸개를 핥았던 시절은

人生各有志(인생각유지) / 인생에는 저마다 뜻이 있나니.

况乃身踐之(황내신천지) / 더군다나 몸소 그것을 실천했지.

甯知姑蘇鹿(영지고소록) / 어찌 고소대에 사슴 뛰놀 줄 알았으랴

已與西施期(이여서시기) / 이미 서시와 더불어 기약했거늘

空令千載下(공령천재하) / 부질없이 천 년 세월 지난 뒤

痛恨于鴟夷(통한우치이) / 오자서에게는 몹시도 가슴 아픈 일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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