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문학가 괴테는 “신대륙에서 가지고 온 것 중에서 악마의 저주와 신의 선물이 있는데, 악마의 저주는 담배이고 신의 선물은 감자이다.”라고 말했다. 옥수수가 자라기에는 너무나 높은 해발 4,000m 근처 안데스산맥을 탐험하면서 스페인의 정복자들은 페루 사람들이 파파(Papa)라고 부르는 작고 속살이 노란 구근류(球根類)의 식품을 재배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은 '스페인인에게도 맛있는 식품'이라고 생각했다. 그 식물은 맛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운반하기 쉽고 오래 저장할 수 있었다. 페루인들은 그것을 옥외에서 얼려서 말리는 저장법을 알고 있었다. 정복자들이 약탈한 재화를 스페인으로 실어 보내면서 운반선의 식량으로 감자도 함께 실었다. 스페인인들은 그것을 파타타(Patata)라고 불렀다. 사실 감자가 페루에서 발견된 모든 은(銀)보다 인류를 위해서 더 값진 것이었다. 남미와 북미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음에도, 아이러니컬하게도 남미의 감자가 북미까지 도달하는 데 거의 200년이 걸렸다. 스페인에서 이탈리아를 거쳐 북부 유럽으로 이식 재배된 감자는 선편으로 다시 바다를 건너 버뮤다로 와서 거기서 버지니아 식민지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위험한 흰꽃독말풀과 사리풀에 연관 지어진 감자는 오랫동안 결핵에서 문둥병에 이르는 각종 질병의 발병원이 된다는 억울한 지목을 받았다. 1596년 스위스의 식물학자 카스파 바우힌(Caspar Bauhin)은 자신의 저서에 '감자를 먹으면 배에 가스가 차서 붓고, 음란한 생각을 하게 되며, 나병을 일으킨다'라고 묘사했다. 스코틀랜드의 성직자들은 그것이 성서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감자는 금단의 열매라고 주장했다. 1630년, 프랑스의 브장송 의회는 "감자를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라고 단정 짓고 감자 심는 것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까 감자가 널리 보급될 수 없었다. 그래도 감자의 모양이 남성의 고환(睾丸)과 비슷하기에 최음제(催淫劑)로 알려지면서 영국의 왕 헨리 8세는 자신의 정원에 감자를 재배하여 자주 먹었다고 전해진다. 예나 지금이나 남성들의 정력 증강 욕구는 정력보다 왕성했다.
프랑스에서 감자를 인기 있는 식품으로 보급시키고자 마리 앙트와네트(Marie Antoinette)는 무도회에 감자꽃으로 된 화환을 머리에 쓰고 나타났다. 이 천재적 광고를 생각해 낸 사람은 연구 결과 식량 부족 시나 기근이 들 때 감자가 밀의 대용식량이 될 수 있음을 알아낸 화학자요, 영양학자이며 ‘감자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트완 오귀스탱 파르망티에(Antoine Augustin Parmentier)에 박사였다. 감자를 심지 않으려는 농부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려고 그는 자기 실험농장 주번에 군인보초를 세워 뒀다가 야간이면 철수시켰다. "여기 심은 감자는 왕족과 귀족을 위한 것이다. 훔쳐 먹는 자는 엄벌에 처하겠다"라는 표지판도 세웠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농부들은 밭으로 몰래 들어와 그 식물을 훔쳐갔다. 감자는 가난한 사람들의 주식으로 널리 보급되었다. 너무 보급되었는지도 모른다. 1840년대의 아일랜드인들은 거의 전적으로 그것만 먹고살았다. 작은 경작지에 감자를 심으면 여섯 아이를 가진 한 가족이 먹고도 돼지 한 마리, 소 한 마리를 덤으로 기름 수 있었다. 잠자는 땅속에 묻혀 있었으므로 군인들의 약탈과 말발굽에도 비교적 무사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1845년 불과 수주일 사이에 아일랜드의 모든 감자가 시커멓게 타 죽어 갔고, 그 병은 유럽대륙으로 퍼졌다. 이 해에 가장 극심한 감자 흉작으로 100만 명이 넘는 아일랜드인이 굶주리게 되었다. 이 감자 흉작은 미국으로의 이민을 촉진시켰다. 수천 명의 아일랜드인, 독일인, 폴란드인이 미국으로 건너갔던 것이다.
<감자꽃을 꽂은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
<감자의 아버지 파르망티에가 루이 16세와 앙투아네트에게 감자꽃을 바치는 모습>
체중에 신경을 쓰는 요즈음에는 감자는 흔히 살을 찌게 하는 식품이라고 외면당한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미국의학협회는 지적하고 있다. 보통 크기의 삶은 감자 한 개에는 70 내지 100 칼로리의 열량이 들어 있다.(버터를 바르지 않았을 때) 코티지치즈(스팀밀크로 만든 신맛이 강한 치즈)나 사과 한 개를 먹을 때 섭취하는 열량보다 적은 열량이다. 그리고 감자의 약 77% 는 물이다. 감자는 비타민 C와 미네랄이 풍부한 주식 가운데 가장 싼 식품이다. 동양에는 16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한국에는 1824년 북방(만주 간도)에서 도입되어 1890년대부터 일부 재배되기 시작했다. 기록상 순조(純祖) 24년(1824년) 만주의 간도로부터 유입되었는데 ‘단맛이 나는 마’라는 뜻으로 ‘감서(甘薯)’ 또는 감저(甘藷)라 불렀으며, 이 외에 생김새가 말방울 같다고 해서 ‘마령서(馬鈴薯)’, 콩만큼 영양이 풍부하다고 해서 ‘토두(土斗)’라고도 불렀다. 그러다가 일본에 병합된 후에 본격적으로 재배되어서 구황작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하찮은 일에 목숨을 걸면 안 되지만 인간이란 존재는 늘 이를 망각하고 하찮은 일로 싸우거나 심지어 국가 간에 전쟁도 불사(不辭)한다. 감자에 얽힌 사소한 문제로 이혼 위기까지 간 부부의 이야기도 있다. 깨소금이 쏟아지는 신혼 시절을 보낸 영호남 출신 커플의 이야기다. 어느 날 부인이 감자를 맛있게 쪄서 설탕을 뿌려 내놓으면서 남편에게 먹으라고 한다. 남편이 신문에 눈을 떼지 않은 채 따스한 감자 하나를 들어서 덥석 물고 먹었다. 그런데 설탕이다. 깜짝 놀란 남편이 감자는 소금 찍어 먹어야지, 어째서 설탕에 찍어 먹느냐고 부인을 핀잔하면서 먹다 남은 감자를 그릇에 던져버린다. 성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핀잔을 들은 부인이 소금 찍어 먹는 집안이 어딨 냐고 화를 낸다. 급기야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서 이혼위기에 이르렀다. 둘은 이혼법정에 서게 되었다. 판사가 둘의 이혼 사유를 들어보더니 한마디 했다. “나는 감자 재배지인 강원도 출신인데, 우리는 감자를 고추장에 찍어 먹어요. 소금에 찍던, 설탕을 뿌리던, 고추장에 찍어 먹든 무슨 문제 있나요? 각자 입맛대로 먹어야죠. 이혼 불성립입니다.” 아디아포라 (Adiaphora)는 그리스어로 하찮은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하찮은 일로 자존심 세우면서 목숨 걸지 말고 살아야겠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