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수천 년 역사 이래로 거의 혈통과 문벌에 의한 통치가 기본이었다. 조상의 혈통을 잘 타고나야 출세하거나, 왕이 될 수 있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王侯將相宁有種乎)?"라는 요즘 진보진영의 프레임처럼 확 먹히는 선동구호를 Catch-phrase 삼아 농민 출신 진승(陳勝)이 친구 오광(吳廣)고 함께 통일 제국 진(秦) 나라 타도의 서곡을 열었지만 실패한 후 무수히 봉기해도 성공하지 못했다. 한반도에도 고려 때 사노비(私奴婢) 만적(萬積)이 같은 구호로 봉기했지만 실패했다. 진나라 말기에 하급 관리 출신 유방(劉邦)이 성공하여 진나라를 멸하고 한(漢) 나라를 세웠고, 오늘 이야기할 주원장(朱元璋)이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밑바닥 출신 황제이다. 그는 어릴 때 가난하여 떠돌이 거지, 도적, 승려 등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로 미천한 생활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거대 제국 명(明) 나라의 초대 황제가 되었다. 중국의 황제는 알다시피 처첩(妻妾)이 어느 정도 규정으로 정해 있었다. 역사적으로 보면 하(夏)는 12명, 상(商)은 38명, 주(周) 나라에 와서 121명(1 후, 3 부인, 9 빈, 27 세부, 81 어처)이 공식화되어서 후대에서도 이 수준에서 약간씩 증감을 보이면서 유지되었다. 그러나 천자(天子)는 하늘의 아들인데 못할 게 없으니 여인을 두는 것은 규정이 어떻든 마음대로다. 그래서 속설(俗說)에는 한(漢) 무제(武帝) 때 4만 명, 당(唐) 현종(玄宗) 때도 4만 명, 수(隨) 양제(煬帝) 때는 6만 명이었다니 몇 개 사단 병력이다. 이럴 정도니 후궁들 간에 황제의 총애를 차지하려는 암투는 말해서 무엇하랴.
주원장은 봉기해서 전장을 누빌 때부터 문벌들로부터 여인을 취했는데, 서왕(徐王) 마씨의 딸 마수영(馬秀英)이 곽자흥(郭子興)의 양딸로 제1부인이 되어 황후이다. 그는 안휘성(安徽省) 정원 출신의 장수 오정(吳禎)과 함께 중국의 남쪽을 정벌하고, 그가 즉위한 후에도 바다를 지키는 정해장군(靖海將軍)을 맡겼다. 이런 인연으로 주원장은 오정의 여동생 취아(翠娥)를 첩으로 맞아 혜비(惠妃)로 봉했다. 오정은 형인 오량(吳亮)과 함께 주원장을 도와서 개국공신이 되었지만 형은 먼저 죽었다. 오정에게는 여동생 둘이 있었는데, 언니가 혜비인 취아이고 동생이 취영(翠英)이다. 공신에다가 황제의 처남이니 아버지가 없는 관계로 왕의 장인인 국구(國舅) 대우를 받았다. 오정은 서울과 고향에 대저택을 소유하고 임지(任地)와 조정을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다. 때마침 혜비 취아의 여동생인 꽃다운 소녀 취영이 고향에서 그녀의 언니를 방문하러 오게 되었다. 명나라 궁의 규정에 따르면 외척(外戚)은 부름을 받지 않으면 입궁할 수 없다. 혜비는 태조 주원장에게 여동생 취영을 자기가 기거하는 선진궁(宣進宮)으로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자기가 사는 모습을 자랑도 할 겸 여동생이 보고 싶기도 해서 황제에게 허락을 받은 것이다. 껄덕쇠인 주원장은 혜비의 여동생은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은근히 음심(淫心)이 동하여 제까닥 허락한 것이다. 드디어 취영이 입궁하여 언니와 이야기 꽃을 피우다가 보니 벌써 저녁이 된 것이다. 밤에 사가(私家)로 나가게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동생을 별궁인 인화궁(仁和宮)에 머물게 했다. 혹시 황제가 밤에 와서 무작정 합방을 하려고 할까 봐 궁녀에게 명하여 궁문의 대나무 발을 내려놓고, 궁문 밖에 월계화(月季花) 화분을 내놓았다. 궁궐의 관례로 월계화 화분이 나와 있으면 그 궁녀는 그 기간에 월경을 하는 것이니 황제가 그것을 보고 접근을 하지 않는다. 이 암호는 한나라 궁중에서 전해 내려온 것이다. 혜비의 이 월계화 작전은 과연 황제의 출입을 잘 막았다. 그날 밤 태조가 여동생 취영이 궁금해서 슬쩍 인화궁을 지날 때, 그 꽃을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밤에만 그렇지, 낮에는 황제가 궁의 어느 곳이나 갈 수 있기에 그가 들어오는 것을 거절할 수 없다. 다음날 아침, 태조는 혜비의 여동생이 어떤 모습인지 보고 싶은 마음에 인화궁 앞에서 서성거렸다. 그때 혜비와 그녀의 여동생 취영은 그곳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젊고 아름다운 취영은 숨으려고 해도 이미 너무 늦었다. 그녀는 부끄러워서 얼굴이 빨개졌고, 고개를 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태조 주원장(太祖 朱元璋)은 이 수줍은 아름다운 처녀의 태도에 점점 더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궁내의 모든 궁녀들이 서로 교태를 뿜으면서 자기 눈에 들려고 하는데 비해, 이 소녀는 도리어 피하려고 하니까 더 흥미가 당긴 것이다. 혜비 취아와 취영은 비록 한 부모의 자매이지만, 사람은 매우 달랐다. 혜비 취아가 우아하게 예쁜 반면에 동생 취영은 얼음 같이 맑고 깨끗하며, 커다란 눈동자에 쌍꺼풀이 곱게 나서 그 눈을 한번 보면 호수에 빠지는 느낌이었다. 또 혜비 취아는 벌써 입궁한 지 세월이 흘렀고 식상해지는 기시였지만 동생 취영은 여전히 꽃다운 나이에 매끄럽게 보였다. 태조는 다가가서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아 자매의 화장을 계속하게 했다. 취영은 황제를 처음 알현해서 정신이 없고 허둥지둥했다. 그때 한 송이의 옥류꽃이 태조의 발치에 떨어지고 있었다. 태조는 이를 주워서 취영의 머리에 가볍게 꽂아주었다. 그러자 취영이 부끄러워 거의 눈물이 맺혀 울 뻔했다. 그 후 그녀는 서둘러 머리를 마치고 후궁으로 도망쳤다. 늘 얌전하던 혜비는 여동생이 이렇게 낭패한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태조가 언짢았지만 감히 발설하지 못하고, 완곡하게 태조를 흘겨보았다. 그러면서 말했다. "동생은 시골에서 자란지라 남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데, 황제가 오늘 이렇게 그녀를 쫓아다니면 다음번에는 감히 궁궐에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태조가 웃으며 "내가 어딜 쫓아다녀? 시골 출신이지만 당신보다 훨씬 멋있네."
태조는 잠시 묵묵히 앉아 있다가 취영이 나오려 하지 않자 자신도 재미가 없어, 혜비에게 몇 마디 마구 지껄이고는 천천히 궁을 빠져나갔다. 황제가 나가자 취영은 정말로 궁에서 하룻밤 더 잘 엄두를 내지 못했다. 자매의 정이 깊은 혜비도 여동생을 궁에서 하룻밤 더 머물게 할 수 없어 급히 관감(官監)에게 판여(板輿)를 태워 취영을 오빠 오정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오정(吳禎)은 주원장이 태조가 되자 개국공신으로 후작이 되고, 대장군이 되었다. 더구나 큰누이 취아가 혜비가 되어, 오정은 국구(國舅)로 응천에 국구부(國舅府)를 하사 받아 가족을 데려와 살게 되었다. 오정의 아내는 몽골 미인으로, 화이양(淮揚) 도사(都司) 티에바란(첩발란, 帖勃闌 또는 철발란 鐵勃蘭)의 여동생이다. 원나라 말기 화이양이 장사성(張士誠)에게 점령당한 후, 티에발란(帖勃闌)은 충성을 다했지만 순절했다. 여동생 티에란(帖闌, 鐵蘭)은 홀로 남겨져 용흥(龍興)으로 도망쳤고, 거기서 오정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오정에게 바쳐졌다. 오정은 그녀의 놀라운 미모를 보고 총각 신세로 자연스럽게 티에란을 아내로 맞았다. 두 사람은 결혼 후 더욱 열정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큰 여동생은 혜비로 입궁했고, 작은 여동생도 시골에서 마침 와서 즐겁게 살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순조로운 법은 없다.
보름여가 지난 7월 7일은 우리네의 칠석(七夕)이고 중국은 당시 칠교일(七巧日)이라는 명절이었다. 인화궁의 혜비는 다시 궁감을 보내 부드러운 가마를 태워 그녀의 여동생 취영을 궁으로 맞아들이게 했다. 취영이 거절하자 오정은 "큰누이가 귀비인데, 어찌 거역할 수 있겠느냐. 둘째 여동생은 가는 게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날 취영은 도망치듯 인화궁을 나와 오빠의 국구부로 돌아갔지만, 태조가 자신에게 꽃을 꽂아준 일은 숨겼다. 당시 그녀의 오빠 오정이 궁중의 상황을 물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 취영은 언니의 명령과 오빠의 간곡한 권고를 거절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부드러운 가마를 타고 내감들의 안내로 궁으로 들어왔다. 취영은 가마 안에 앉아 그날 지나던 문과 건물을 기억해 보았지만, 복도와 문을 지나자 계속 이리저리 구불구불 걸어가며 한참 동안 가마를 멈추지 않았다. 취영은 이번이 두 번째 입궁일 뿐이라 어느 곳이든 어디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잠시 후, 수십 개의 관문을 지나 어느 곳에 도착하자, 가마는 점점 느리게 걷기 시작했다. 백 걸음도 못 가서 가마가 멈추자, 서너 명의 궁녀들이 와서 가마 발을 들쳐 취영을 부축하여 가마에서 내리게 했다. 두 명의 궁녀가 앞에서 길을 안내했고, 취영을 데리고 죽헌(竹軒)에 도착했다. 사방의 모든 집기들이 맑고 푸른색을 띠고 있어 매우 아름다웠다. 또 헌문에 들어서면, 매우 멋진 객실이 있다. 몇 개의 책상은 깔끔하고, 벽 사이에는 유명인의 서화가 걸려 있다. 서가에는 온갖 고서가 가득 쌓여 있고, 옆에는 월동문(月洞門)이 있다. 궁녀가 취영을 데리고 월동문으로 들어갔는데, 이 방의 장식이 저 객실보다 더욱 정교했다. 거문고, 바둑, 서예, 그림 등 없는 것이 없다. 책상의 골동품은 모두 민간의 소녀 취영이 본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눈이 침침해질 정도로 아름다운 것을 느꼈다. 월동문 왼쪽에는 작은 침대가 설치되어 있는데, 비단 휘장(羅帳)에 비단금요(錦褥)가 화려하다. 정중앙의 둥근 탁자 위에는 과일 잔이 놓여 있었고, 그 궁녀는 취영을 의자 위에 앉혔다. 한 궁녀는 급히 두구차(荳蔲茶) 한 잔을 따라왔다. 취영은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치아가 서늘해지고 미간이 향기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 맛과 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취영은 차를 마시면서 차를 건네는 궁녀에게 "혜비마마께서는 왜 아직도 안 오십니까?" 그러자 궁녀가 대답하였다. "혜비마마께서 황제를 모시고 연회를 베풀고 계시며, 우리에게 오소저와 함께 잠시 머무르라고 당부하셨습니다. 황제가 곧 떠나시면 혜비마마께서는 몸을 빼서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취영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오가 되자 궁녀들이 식사를 가져다주었고, 취영은 마구 먹었다. 그녀의 언니가 오지 않자 마음이 초조해져 죽헌을 나와 사방으로 잠시 놀았다. 헌 밖에는 매우 큰 정원이 있는데, 이때는 늦여름과 초가을로, 특별히 즐길 만한 화초가 없었다. 다만 짙은 그늘과 푸른 나무가 일대의 분홍벽을 가리고 있어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정말 가슴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았다. 취영은 몇 군데의 정자를 둘러보고, 날이 저물어가자 죽헌으로 돌아와 보니, 그 원탁 위에 이미 술자리가 놓여 있었다. 네 명의 궁녀들이 가지런히 서 있었고, 취영이 들어오는 것을 보자 모두 미소를 지으며 맞이했다. 취영은 그녀의 언니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이 좀 조급해졌다. 막 물어 보려던 참이었다. 문득 월동문의 오른쪽 작은 문이 서서히 열리고, 환패 소리가 딩동하고, 한 미인이 어여쁜 모습으로 들어섰다. 취영은 그녀의 언니인 줄 알고 급히 일어나 맞이하였으나, 자세히 보니 모르는 사람이어서 어리둥절해졌다. 그 미인은 오히려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며, "오아가씨가 초조해하는 것이 아닌가?" 취영이 대답할 겨를도 없이, 그 미인은 또 말했다. "혜비마마께서 황제께 붙잡혀 계십니다. 보아하니 오늘은 시간이 없으신 가 봅니다. 그래서 저를 불러 오소저를 모시고 저녁 식사를 대접한 후에 집으로 돌려보내 드리라고 했습니다." 취영은 언니가 시간이 없어서 저녁도 못 먹는다는 말을 듣자마자 가마를 타고 돌아가려 했다.
미인은 웃으며 말했다. "오아가씨, 조급해하지 마세요. 기왕에 왔으니 저녁식사를 하고 가야 합니다. 게다가 저는 마마의 명령에 따라 아가씨를 모시러 왔습니다. 만약 아가씨가 지금 집으로 돌아간다면, 혜비마마께 제가 어떻게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그녀의 말은 부드러우면서도 완곡하고 일리가 있어, 자연스럽게 취영이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 미인은 취영을 자리에 앉혔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궁녀들은 술을 따랐고, 그 미인은 정성스럽게 술을 권했다. 취영은 후한 정에 마지못해 몇 잔을 마셨지만, 그 미인은 잔을 기울이며 술을 권했고, 자기도 곁들여 먹는 걸 보니 주량이 꽤 센 모양이었다. 취영(翠英)은 점점 취기가 올라 약간은 견디지 못했다. 미인은 그제야 궁인에게 밥을 더 가져오라고 분부했는데, 취영이 술기운이 올라 머리가 어지럽고 눈이 침침한데 어찌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미인은 친히 와서 취영을 부축하여 그 화려한 침상에 눕힌 후, 궁인들에게 잔을 거두게 했다. 그리고 취영의 귓전에 대고 "오아가씨, 잠시 편히 쉬십시오, 제가 곧 가마를 가지러 가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취영은 이때 사지가 나른하고 눈꺼풀이 무거워 뜰 수 없어 고개를 약간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미인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침대 위에 누워 있던 취영은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가 지났는지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궁중의 물시계 소리에 놀라 깼다. 눈을 뜨고 보니, 책상 위의 촛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궁녀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취영은 졸린 눈 속에서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을 크게 뜨고 보니, 과연 누군가가 있었고, 자색 옷과 금색 띠를 한 남자 복장이었다. 맙소사! 취영은 자신도 모르게 "아" 하고 소리를 지르며 뛰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사지가 나른하고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한참 동안 발버둥을 쳤고, 조금도 생각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마가 오히려 향기로운 땀으로 져졌고, 가슴은 가냘프게 헐떡이며, 두 발은 상하로 마구 흔들렸다. 보랏빛 옷을 입은 남자는 그녀가 깨어나자 몸을 돌려 방금 풍만하여 복숭아 같은 소녀의 부드러운 가슴을 살짝 누르며, "아가야, 애태우지 마라." 취영은 급히 그의 손을 밀쳤으나, 목소리와 웃는 얼굴을 자세히 알아보니, 분명히 그의 형부인 황제였다. 정신이 번쩍 난 취영은 이를 깨물고 속으로 욕을 했다. "취아 혜비 이 천한 계집애야, 나를 이렇게 팔다니! 네가 이런 함정을 썼는데, 나를 죽이는구나." 말하면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고, 말을 마친 후에는 흐느끼며 정말 슬프게 울었다. 태조는 취영이 우는 것을 보고 "언니를 탓하지 마라. 이 일은 모두 내 생각이다. 언니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라고 말을 했다. 취영은 이때 정말 화가 나서, 황제가 있든 없든 간에, 얼굴을 확 뒤집고, 큰소리로 외쳤다. "이런 계략을 써서, 저를 어떻게 하려는 것입니까?" 태조는 화가 나기는커녕 더욱 귀여워지는 듯 웃음을 띠며 "어쩌자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 사랑스럽고 잘 생겨서 궁으로 들어오게 했다. 만약 나에게 시집오려고 한다면, 나는 결코 푸대접하지 않을 것이다. 네 언니를 봐라, 지금 혜비로 봉하고 인화궁에 거처하고 있지 않느냐? 궁녀 내감, 봉황 수레, 산해진미, 비단 능라를 즐기고 있다. 온갖 시비들이 한 걸음씩 앞뒤로 옹위하고 있으니, 얼마나 영광스럽고 위풍당당한가. 그 벼슬아치 집 딸들 중 누가 나에게 시집오려고 하지 않겠느냐? 그러나 나는 한 사람도 눈에 띄지 않고 다만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 너의 속마음을 알 수 없다."라고 말했다.
여자의 허영심은 보통 있게 마련이다, 취영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일찍이 언니가 혜비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속으로 부러워했다. 궁에 들어가 보니 온통 진주빛 화려한 옷차림, 화려한 황금빛 찬란함이 그녀로 하여금 어느새 부러운 마음이 생겼다. 이때 태조의 말을 듣고 취영의 마음은 비로소 움직였고, 태조의 온갖 유혹의 말에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태조는 취영이 잠자코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움직인 것을 알고는 입을 놀리지 않고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유난히 부드럽게 행동하여 성숙한 남자의 수완과 매력을 보여주었고, 애무와 입맞춤도 알맞게 하면서 취영을 부둥켜안았다. 과연 취영은 태조의 봄바람에 몸을 담그고 부드러운 고양이로 변하여 애교를 부리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태조가 입맞춤을 하는 사이에도 일부러 목덜미를 비쭉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봉작이 없지 않았요?" 오씨 자매는 어린 시절 개를 가지고 놀면서 먹이로 개를 길들이던 생각대로 황제에게 줄 듯 말 듯 애를 태웠다. 여동생이 언니보다 더 현명했다. 태조는 몸이 달았지만 키스만 하며 군침을 흘렸다. 성욕이 극에 달한 태조는 "우리 궁의 비들은 누구도 너처럼 아름다울 수 없으니, 내가 너를 오미인(吳美人)으로 봉하겠다."라고 했다. 취영은 듣자마자 베개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은했다. 태조는 스스럼없이 이 가인(佳人)을 품에 안고 실질적인 야간전을 시작했다. 두 사람은 담소할 것도 없이 둘 다 좋은 꿈에 빠졌다. 그날 밤 태조는 깊은 잠을 잤다. 이 작은 죽헌은 자흥(子興)의 동원(東院)에 비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래도 자신을 돌아보면 태조는 인생의 성취감을 느끼게 된다. 보통 그는 성취감의 향락에 깊이 도취된 후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평생을 전쟁터를 누비면서 생사의 길림길을 전전했고, 무수한 인명을 죽인 그는 하루도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금 옆에 잠들어 있는 그 아름다운 여인을 다시 한번 붙잡고, 그리고 그는 이 생생하고 아름다운 생명 속에 자신을 깊숙이 박아 넣었다. 이 젊고 아름다운 생명은 그 감각을 좋아하게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시 안정되는 것을 느낀다. 취영은 그의 좋은 감각을 오래도록 보존시켜 준다. 따라서 취영은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그의 곁에서 시침(侍寢)하기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 된 것이다.
이튿날 태조는 오미인을 장춘궁(長春宮)에 머물게 하고, 오정에게 취영을 미인으로 책봉했다고 일러주었다. 오정은 즉시 궁에 들어가 사은을 표했다. 이어 태조는 오미인을 사랑하게 되어 매일 장춘궁에서 자며 영비, 유비, 혜비를 까맣게 잊고 지냈다. 영비와 유비는 아직 별다른 불쾌감을 나타내지 않았지만, 여동생에 대한 혜비의 질투로 눈물을 흘렸다. 매우 분한 마음으로 변했다. 몇 번인가 장춘궁으로 달려가 여동생과 필사적으로 싸우려 했지만, 다행히 궁녀들이 간신히 뜯어말렸다. 혜비는 비록 궁녀의 말을 따랐지만, 마음속에 칼을 꽂은 것처럼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오빠 오정을 몰래 궁으로 불러들여 취영이 궁에 들어온 그날의 경위를 낱낱이 들었다. 또한 취영이 그 후의 교태를 믿고 총애를 베푼 행동까지 오정에게 들려주며, 취영이 자신을 괴롭혔다고 말했다. 이제 그 누이는 안중에 없었다. 말을 마치자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혜비가 여동생이지만 자신은 친정 오빠로서 신하에 불과하니 겉으로는 "마마께서는 너무 상심하지 마시고 옥체를 보중 하시옵소서. 이 일은 부인을 궁에 들여보내서 오미인을 말리거나, 타이르도록 하겠습니다."라며 다급하게 위로했다. 오정이 궁에서 돌아와 그의 아내 티에란에게 혜비 자매의 중재를 맡도록 일렀다. 그리고 티에란은 혜비의 부름을 받고 연가마를 타고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혜비가 황제에게 말하여 티에란의 입궁 허락은 받았음은 물론이다. 자기와 오미인과의 사랑 다툼을 중재한 다는 사실은 숨긴 채, 장춘궁에 놀러 간다고 했다. 오정은 그와 사랑하는 아내의 사랑이 여기서 끝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의 감정은 영원히 사라질 수 없는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호색한인 태조 주원장은 공신 오정의 아내이지만 여자니까 궁금증이 아니 생길 수 없었다.
티에란은 궁궐에 들어가서 큰 시누이 혜비를 만나 자초지종을 들은 후에 그녀를 다독여 위로를 하고, 자기가 해결하겠다고 호언장담했다. 원래 북방 유목민의 여인들은 성격이 호방하여 모든 게 시원시원하다. 그녀는 장춘궁으로 작은 올케인 오미인을 만나러 갔다. 거기서 두 여인은 오랜만에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티에란은 오미인의 눈치를 보면서 혜비의 뜻을 얘기할 기회를 노리는데, 오미인이 너무 수다를 떨어서 틈을 찾지 못하고 시간이 자꾸 흘러갔다. 궁녀들은 연신 맛있는 음식과 향기로운 차와 술을 대령하니 생전 처음 방문한 궁궐의 맛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은근히 시누이들이 부럽고,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한 기술은 무엇일까 궁금하기까지 하다. 만약 나에게도 그런 기회가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라는 상상의 날개도 펼쳤다. 호랑이 얘기하면 범이 나타난다고, 티에란이 오미인의 이야기를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막연히 황제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황제가 슬그머니 나타난 것이다. 황제는 두 여인의 자리에 끼어들어 술잔을 같이 나누게 되었다. 공신 오정의 아내 즉 처남댁의 얼굴도 색다른 미녀였다. 몽고의 초원에서 말을 타면서 발육된 탄탄하게 건강한 몸매가 야성미를 뿜어내며 도발적으로 황제의 시선을 받고 있었다. 하늘하늘한 비단옷 위로 봉긋하게 솟은 야생미 넘치는 젖가슴이 그녀의 숨소리와 웃음소리에 따라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자 황제는 아랫도리가 묵직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그래서 연신 궁녀더러 술을 더 가져오게 한다. 그런데, 티에란 역시 황제의 능글거리는 눈길이 싫지 않다. 유목생활은 여성의 정조 개념이 희박하다. 형사취수(兄死取嫂) 제도와 손님에게 마누라를 빌려주는 풍습도 있었다. 더욱이 티에란은 어릴 때 부타 마유주를 마시면서 자랐기 때문에 술도 세다. 두 사람의 눈길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오미인이 질투하기는커녕 두 사람을 적극적으로 묶어 주기로 했다.
오미인은 올케 티에란이 취하자,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부축하여 들여보내, 침대에 눕도록 했다. 그리고 황제의 등을 떠밀어 그들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도록 하고, 자신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주원장은 오정의 부인이 장막 안에서 잠들어 있는 줄로 알았다. 사실 티에란의 주량이 놀라울 정도라서 취한 척하며 장막에 누워 있었던 것이다. 티에란은 침대에 누워 눈을 꼭 감고 황제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았다. 명태조 주원장은 장막 앞에 다가가 티에란이 하얗게 잠든 볼을 보고 귀여운 듯 턱수염으로 쓰다듬으며 입술을 내밀었다. 여인의 향기가 폐에 스며들었다. 주원장이 몇 번을 더 뽀뽀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무런 표현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술기운과 향기가 사람을 더욱 흥분시켰다. 주원장은 아예 손을 뻗어 저고리를 풀었지만 티에란은 여전히 깊이 잠든 척했고, 이를 본 주원장은 그녀의 허리띠를 풀고 긴 바지와 반바지를 함께 벗겼다. 이때도 깨어나지 않자 명 태조 주원장은 불타올라 손으로 젖가슴을 쓰다듬었고, 이때 티에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명태조 주원장은 그녀가 깨어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옥체를 안아 회전시켰다. 티에란은 황제의 목을 꼭 껴안고 끊임없이 웃었다. "원순제(元舜帝)가 몽골족 무녀가 누드 춤을 추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황제가 말했다. "짐도 보기 좋아하나, 궁궐의 비빈 중 아무도 춤을 출 줄 모른다. 그대가 원하는 대로 춤을 추기를 바란다." 그래서 티에란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누드 춤을 추었다. 주원장은 황홀한 두 눈을 부릅뜨고 만취한 듯 온몸을 뜨겁게 달궜다. 그는 땀범벅이 된 티에란을 안고 어상막(御床幕) 안으로 들었다. 주원장이 숨을 헐떡이며 남편 오정과의 관계는 어떠한지를 물었다. 그러자 티에란은 웃으며 "나무토막 같은 서방을 황제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의 은총을 받으니 천국에 오른 것 같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음 날, 명 태조 주원장은 내시를 보내 영춘궁(迎春宮)을 정비하게 하고, 장춘궁 못지않게 장식하여 티에란에게 거주하도록 했다. 밤이면 주원장이 다시 와서 그녀와 놀았다. 티에란은 주원장이 체격이 우람하고, 정력이 넘치며 많은 방중술을 사용하는 맛을 제대로 보았다. 궁에서 사는 것은 마치 선경(仙境)과 같아서 하루하루 걱정 없이 지내다가 보니 궁궐 밖으로 나가는 것을 잊었다. 그러나 이 일은 오미인과 궁녀들만 알고 있을 뿐 오혜비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마누라에게 궁궐로 가서 여동생 문제를 조정하라고 보냈더니 소식이 없어서 오정은 밖에서 매우 초조하게 기다렸다. 7~8일이 지났는데도 티에란이 궁 밖으로 아오지 않자, 오정은 마음속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을 위로했다. 오정은 궁으로 가서 알아보려 했으나, 외척이 부름을 받지 않고 궁에 들어갈 수 없는 규정 때문에 들어갈 수 없었다. 오정은 어쩔 수 없이 직접 영안문 밖에서 내감들에게 탐문했지만, 다들 모른다고 했다. 어느 날 어린 내시가 인삼을 선물로 가지고 오정의 집으로 왔다. 그때 오정이 뇌물을 듬뿍 쥐어주고 궁궐에 간 마누라의 행방을 알려달라고 했다. 어린 내시는 큰돈을 받자 비밀이라면서 국구의 아내가 황제와 매일 영춘궁에서 술 마시고 놀고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드디어 의심하면서 상상했던 일이 사실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늘이 무너지고 딸이 꺼지는 심정이었다. 황제와 마누라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당장 어떻게 할 수 도 없는 일이었다. 한편 이 시기에 태사(太師) 호유용(胡惟庸)이 역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일찍이 주원장의 봉기에 힘을 보태어 개국 공신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그의 고향집 우물에 석순(石筍)이 자라고, 조상의 무덤에 밤이면 상서로운 빛이 감돌곤 해서 주변 사람들이 점괘를 보니 호유용이 나라를 경영할 큰 인물이 된다고 나왔단다. 그 소식을 들은 호유용이 천민이고 도적과 중노릇을 한 주원장도 황제가 되었는데, 대대로 고관의 후예인 자신이라고 못 될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급기야 역심을 품고, 마침 마누라를 황제에게 도둑맞은 오정에게 와서 같이 힘을 모아 거사를 치르자고 결의를 한 것이다.
어느 날 밤, 태조는 영춘궁에서 티에란과 술을 마신 후, 쌍쌍이 손을 맞잡고 함께 침상으로 가려던 중, 구름과 비가 한바탕 내리치고, 대궐문 밖에서 함성이 크게 일었다. 이어서 천지를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궐문 앞 발소리가 어지러웠다. 태조는 침대 위에 장막을 쳐들고 궁인들에게 나가서 물어보라고 분부했다. 내감들이 허둥지둥하며 뛰어 들어왔다. "도둑놈이 쳐들어와서 문을 닫았으니, 빨리 황제께서 도적을 피해야 합니다!" 태조는 매우 당황하여 티에란과의 운우지정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서둘러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왔다. 방금까지 뒤엉켜 있었고, 살갗의 온기와 체향이 아직 남아 있었지만 태조는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옷도 제대로 갖추지 도망갔다. 앞에는 예닐곱 명의 내시와 많은 궁녀들이 모두 몸을 던져 옹호했다. 태조와 티에란은 영춘궁의 정문을 나섰다. 남쪽의 근신전 위에 횃불이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수십 명의 시위대가 싸우다가 물러났지만, 도둑들이 몰려들어 선두의 손에 큰 칼을 들고 힘껏 달려들어 용감하게 싸웠다. 태조는 그것이 바로 국구 오정이라는 것을 알고, 그가 구하러 온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를 부르려 했다. 다시 보니 오정이 도리어 시위들을 마구 베고 혈로를 뚫고 자기를 향해 오는 것이다. 태조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미인을 돌볼 겨를도 없이, 티에란을 궁녀 더미로 밀어 넣고, 자신은 사람들 틈으로 도망쳤다. 마치 과거 곽광경의 집에서 강도를 당했을 때, 마누라 마수영의 생사를 도외시하며 도망치듯이 말이다. 오정은 무사를 이끌고 영춘궁으로 들어갔지만, 태조와 티에란을 찾지 못하고 궁문을 나섰다. 그는 다시 시위대와 만나 복도에서 싸우기 시작했다. 오정의 칼은 마치 맹호가 산을 내려오는 것 같았다. 열 명이 넘는 시위대도 막아낼 수 있었고, 불과 한 순간도 채 되지 않아 그에게 맞아떨어졌다. 오정은 시위대를 물리치고 곧장 장춘궁으로 향했다. 오미인도 궁 밖에서 싸움 소리를 들었다. 오미인은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고, 옆에 있던 몇몇 내감 궁녀들은 서둘러 오미인을 끌어안고 피했다. 대궐 문을 나서자 오정에게 정면으로 부딪혔는데, 오정은 그의 여동생을 보자 화가 치밀어 칼을 들고 소리쳤다. 오미인은 오빠의 살기가 가득한 얼굴에 놀라 전전긍긍하며 올케가 영춘궁에 있다고 고자질을 했다. 오정은 "영춘궁에 가봤는데 사람 그림자도 안 보이는데 나를 속이려 하느냐?"라고 말하며 곧장 여동생 오미인에게 칼을 들이댔고, 오미인은 급히 몸을 피해 땅에 쓰러져 피바다에 누웠다. 오정은 그녀의 생사를 묻지 않고 다시 뛰어들어 인화궁으로 태조와 티에란을 찾았다. 이때 티에란은 궁녀들과 함께 복도에 모여 숨었다. 오정은 티에란을 알아보고 그녀를 비틀어 병아리를 끌 듯 잡아서 자세히 물어보려던 중 태조가 황급히 오른쪽 복도에서 돌아 나오자 테란을 한 칼에 치고, 칼을 들고 태조를 쫓았다. "주원장, 도망가지 마라." 태조는 누군가가 뒤쫓아 오는 것을 듣고 놀라서 혼이 빠져서 다시는 회랑을 걷지 못하고, 다시 경복궁을 지나쳐, 나는 듯이 집경문을 뛰쳐나와 어원으로 도망쳤다. 오정이 이를 놓치지 않고 쫓아오자 태조가 금수교를 건너고, 오정도 금수교에 오르자, 태조는 숨을 헐떡이며 도망쳤다. "군신의 의리를 생각하지 않고, 감히 짐을 시해하려 하느냐?" “퉤! 너는 나의 두 여동생을 강점하고도 만족할 줄 모르고, 나의 아내마저 더럽혔는데, 무슨 군신이 군신이냐!" 하고 혼신의 힘을 다해 태조에게 칼을 내리쳤는데, 태조가 급히 몸을 피하자, 오정의 혼신의 힘을 다한 칼이 그만 금수교의 난간에 박혀 칼등마저 거의 함몰되었다. 오정이 그 칼을 뽑으려는데, 잘 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화가 나고 원망스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필사적으로 잡아당겨서 다리 난간을 부러뜨려서야 겨우 그 칼을 뺄 수 있었고, 칼날이 이미 빠져버린 상태였다. 그 사이 태조는 멀리 도망쳤고 금군(禁軍)들이 들이닥쳤다.
갑자기 군대에서 휙 소리가 난 후, 밧줄이 갑자기 던져져서 오정을 붙잡았다. 오정은 분노와 자신의 무예만 믿고 날뛰다가 오라에 걸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30여 명의 오정의 무사들도 모두 금군에 의해 죽었고, 한 명도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했다. 날이 밝아서야 군사 행동이 진정되고 궁이 안정을 되찾았다. 반역자 오정(吳祯)과 엽승(葉升), 서경(徐敬) 등은 모두 일가친척들을 모두 묶어 어전으로 올려 태조가 친히 국문하기로 했다. 오미인은 오른팔에 칼을 맞고 흰 능으로 싸여 있었고, 티에란도 궁인의 시체 옆에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두 눈은 굳게 닫혀 있었고, 안색은 회백색이었으며, 어깨에 난 칼자국의 피는 여전히 줄줄 흐르고 있었다. 가슴을 만져보니 아직 숨이 멎지 않았다. 어의들이 티에란의 상처를 싸매고, 다시 티에란이 깨어나는 것을 보고 태조는 근심을 내려놓았다. 문무 대신들이 차례로 입궐하여 줄을 서서 문안을 드렸다. 태조는 오정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냉소했다. "짐은 너를 푸대접한 적이 없는데 왜 당을 규합하고 반역하느냐?" 오정이 듣고 화가 치밀어 올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꾸하려 하자 태조는 그가 속사정을 말할까 두려워 급히 명을 내려 오정, 서경, 엽승 등 세 사람과 그 가족의 식구를 묶어서 베어버리라 했다. 그때 정범 외에도 억울하게 죽은 신하와 백성이 모두 13,769명이었다. 하지만 최고는 역시 마황후다. 마황후는 곤녕궁에서 이 소식을 듣고 자신도 모르게 크게 놀라며 말했다. "황제는 오로지 공로를 세운 신하들을 함부로 육탄하니, 명나라 강산도 원(元)의 전철을 밟아야 할 것 같다."라고 생각하며 즉시 봉가를 올리고 친히 태조에게 간청하러 왔다. 그때 태조는 이미 당인들을 하나하나 처벌한 후, 궁으로 들어가 오미인과 테란을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태의원의 진료를 받고, 상처 치료약을 바르고, 상처를 단단히 묶고, 피의 옷을 갈아입었다. 태조도 놀라지 않고 장춘과 영수를 돌아보고 인화궁으로 왔다. 모든 비빈들은 태조께 문안드리러 왔다. 내중의 오혜비는 범인이 자신의 오빠 오정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서 전전긍긍하였다. 태조는 혜비의 속사정을 알아채고 도리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혜비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사은하였다. 원래 국법에 따르면, 황제의 친족과 국척이 반란을 도모하면, 비는 반드시 죽거나 냉궁(冷宮)으로 강등되어야 한다. 조정 대신이 혜비와 오미인을 폄하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지만 태조는 일절 묵살했다. 이때 혜비는 태조가 궁으로 들어가자 황급히 일어나 마중을 나와 상례를 하고 나서, "역당 처리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태조는 화가 나서 "오정이 패역하여 내가 이미 베어버렸다." 혜비는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자업자득인데 왜 우느냐." 혜비가 감히 무슨 말을 더 하겠나, 다만 급히 손수건을 찾아 눈물을 닦을 뿐이었다. 마침 마황후께서 도착하자 혜비는 다시 마중 나갔다. 마황후는 인화궁에 들어가 태조를 만나 간단한 절만 올리고 맞은편 금의자에 앉았다. 혜비가 옆에서 시립하고 있었다. 마황후는 태조에게 "신첩이 폐하께서 당을 크게 벌하신다는 말을 듣고 조정의 고굉지신도 적지 않은데, 이런 사람들을 지금 모두 주살하는 것이 어찌 중심을 잃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태조는 "그들의 역모가 이미 드러났으니 마땅히 받아야 할 죄인데 무슨 인심을 잃었느냐?"고 대꾸했다. 마황후는 "이런 신하들을 도륙하여 여러 신하들이 황공히 불안해하는 것은 인심이 멀어진 명백한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태조는 저도 모르게 말문이 막혀 고개를 떨구었다. 마황후는 또 말했다. "신첩의 우견에 따르면, 폐하께서는 급히 명령을 내리셔야 합니다. 이번 당안에 대해 첫 번째 반역자는 이미 처벌받았으니, 남은 한 명도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자 태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황후는 태조가 그녀의 간언을 받아들인 것을 보고 기뻐하며 일어나 봉년을 타고 궁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조정에 올라갔을 때, 태조는 과연 당안에 대한 추궁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렇게 해서 신하들은 비로소 점차 안심할 수 있게 되었고, 조정의 정사도 점점 더 정상적이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정사(正史)와 야사(野史)가 약간 혼재되어 있다. 정사에는 오정은 반역으로 처벌받아 죽은 것이 아니라 병사하고 엄연히 융숭하게 매장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어쨌든 명(明) 나라 초기 태조 주원장은 영웅은 호색(好色)이라고 공신의 여동생 둘과 그 공신의 아내까지 탐하다가 죽음의 문턱까지 갈 뻔한 것이다. 호색은 다마(多魔)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