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南宋) 말기 1245년 경, 송강(松江) 오니경진(烏泥涇鎭)은 오늘날 상해(上海) 화경진(華涇鎭)이다. 그곳은 이름에서 보듯이 검은 진흙 갯벌 지역이었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은 바로 이런 황량한 땅에서 농사를 짓고 뽕나무와 누에, 콩, 목화를 재배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주식(主食)인 벼와 밀의 소출이 좋지 않아 사람들은 누에를 키우고, 삼을 심어 비단과 베를 짜는 것으로 일상 소득을 늘렸다. 눈만 뜨면 밤늦게까지 낡은 물레를 삐걱거리며 돌려 실을 뽑는 여인은 이름도 없이 팔려온 민며느리였다. 사람들은 그녀의 성씨가 황(黃)씨라는 것만 알아 아황(阿黃)이라고 불렀다.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읜 여인이 무엇으로 살아가겠는가? 민며느리로 팔려와서 부림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세탁과 밥을 짓고, 밤에는 물레를 돌려 실을 뽑고 옷을 지어야 하는 아황은 손발이 쉴 틈도 없이 일을 해야 했다. 그래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심지어 가끔 매까지 맞아야 했다. 힘겨운 생활에 아황은 물레를 돌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목화가 있기는 하지만 오래된 물레로 실을 뽑으니 무슨 좋은 실이 나오고, 이런 실로 무슨 좋은 천을 짤 수 있겠어? 오늘 물가에서 빨래하다가 왕(王) 씨네 부잣집 하녀 주(珠)가 면포(綿布)로 된 옷을 빨래하는 걸 보았어. 그 면포는 부드럽고 짜임새가 좋고 실밥도 없고 말이야. 그런 실은 어떻게 뽑고 그런 천은 어떻게 짰는지 모르겠어. 아무튼 이런 낡은 물레로는 뽑지 않았을 거야. 나는 실을 잘 뽑고 천을 잘 짜기로 유명한데도 이 정도밖에 안 되니 말이다. 하늘의 직녀가 내려와도 이런 베틀로는 그렇게 예쁜 면포를 짤 수 없을 거야. 주가 그러는데 그 옷은 광동(廣東)의 상인에게서 산 길패(吉貝)라는 천으로 지었다고 했어. 광주(廣州)인들도 그런 능력이 없어서 애주(崖州)의 여족(黎族)들만이 그렇게 좋은 길패를 짠다고 들었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아황은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지금 나는 소나 돼지보다도 못하게 사는데, 광동이나 애주로 갈 수만 있으면 천을 짜는 기술도 배우고 지긋지긋한 이놈의 집도 떠날 수 있겠는데.” 애주(崖州)는 지금의 해남성(海南省) 삼병시(三亚市) 애성진(崖城镇)이다.
아황은 이런 담대한 생각을 하는 자신에 깜짝 놀랐다. “수중에 돈 한 푼 없는데 어떻게 광주나 애주에 갈 수 있을까? 무작정 배를 탔다가 잡혀서 기생집에 팔리면 죽기만도 못할 거구! 내가 너무 엄청난 생각을 한 거 아니야?” 아황은 곧이어 머리를 흔들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일을 하는데 왜 위험이 없겠어? 새 삶을 살고 재주를 배우는데 이것저것 재서야 무슨 일을 하겠어? 대가를 치르지 않고 무엇을 얻을 수 있겠냐고? 두려울 게 뭐야? 기껏해야 죽는 거겠지? 지금처럼 살 바엔 죽기보다도 못해.” 이러고 있을 때 벼락치 듯 호통소리가 들린다. “아황, 등잔 기름은 공짜냐? 실 한 타래 뽑는데 이렇게 오래 걸려? 내일 아침 부두에 쌀 가지러 가야 하잖아. 내일 늦으면 네 년은 죽은 목숨이야!” 시어머니의 욕설이 들려오는 바람에 아황은 깊은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머리를 숙여 보니 벌써 실 한 타래를 다 뽑았다. 그녀는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웠다. 시아버지가 사전에 약속한 쌀을 받기 위해 이튿날 날이 밝자 오송강(吳淞江) 나루터에 나온 아황이다. 그녀는 외지에서 온 배들을 눈여겨보며 광주에서 온 상선을 찾으려 했다. 아황은 그 배들이 어디서 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냥 쌀을 싣고 온 배가 무석(無錫)에서 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때 아황은 한 짐꾼이 ‘길패’ 면포를 어깨에 메고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아황은 급히 다가가서 물었다. “아저씨, 이 천은 어디서 왔나요?” 짐꾼은 아황이 여자인걸 보고 걸음을 멈추고 대답했다. “애주에서 왔단다.” 아황은 신나서 또 물었다. “어느 배가 싣고 왔나요?” 짐꾼이 손으로 얼굴의 땀을 훔치고 나서 가리켰다. “저기 저 쌍돛 배야. 지금 강에는 쌍 돛대를 단 배는 하나밖에 없지 않으냐.” 아황이 짐꾼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보니 과연 키 높은 돛대 두 개를 단 큰 범선이 정박해 있었다. 아황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짐꾼은 급히 가던 길을 갔다. 아황은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좋은 기회야. 저 배가 오늘 저녁에 돌아가는 건 아닌지 잘 알아봐야겠어. 그리고 빨리 움직이자.”
저녁이 되어 쌍돛배가 오송구(吳淞口)를 나서자, 끝없이 펼쳐진 넓은 바다에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배는 돛을 활짝 폈다. 범선은 바람을 빌어 파도를 가르며 살같이 바다를 달렸다. 선주는 갑자기 짐칸에서 한 처녀가 불쑥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 물었다. “너는 누구냐? 왜 몰래 내 상선에 올랐어? 이 배는 천애해각(天涯海角)으로 가는 배야!” 그 처녀가 바로 18살의 아황이었다. 아황은 선주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저는 아황이라고 합니다. 민며느리인데요. 남편이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에요. 시어머니가 매일 죽도록 일만 시키고 때리기까지 해서 정말로 살 길이 없어요. 저를 천애해각까지 데려다주세요! 가는 동안 이 배의 허드렛일은 제가 다 도맡을게요.” 선주가 생각했다. “배에는 여자가 할 일이 적지 않으니 그것도 괜찮겠다. 이 애가 그렇게 힘들게 산다는데 도와주면 사람 목숨 하나 구하는 셈이니 복을 짓는 일이겠다.” 선주가 미소를 지었다. “바다에는 태풍이 있는데 무섭지 않으냐?” “저는 그렇게 귀하지 않아요. 바다에서 죽는다 해도 시달려 죽는 것보다 나아요.” “그렇다면 일어나라. 한 사람 목숨을 구하는 것이 7층 불탑을 쌓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으니. 그런데 이제부터 이 배에서 밥 짓고 빨래하는 일은 모두 네가 도맡아야 한다.” 그로부터 아황은 숙식을 해결하는 대가로 선주와 선원들의 옷을 빨고 하루 세끼 밥을 지었다. 다행히 상선이 해안선을 따라가면서 식량과 담수를 보충하기 위해 가끔 부두에 정박하는 바람에 아황은 그동안 육지에 오를 수 있어서 그렇게 힘들지 않았다.
그렇게 시일이 좀 흐르자 아황은 선주에게 대담한 질문을 했다. “송강부(松江府)에 싣고 간 길패면포(吉貝綿布)를 어디서 샀나요?” “그건 왜 묻느냐?” “제가 천애해각에 가고자 한 것은 실을 뽑고 천을 짜는 방법을 배우기 위해서예요. 안 그러면 왜 범의 굴에서 나와 바다 건너 멀리 가려고 하겠어요? 그래야 저의 시부모님이 저를 찾지 못할 거예요.”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이렇게 큰 뜻을 가지고 있다니. 어린 처녀애가 대단하구나. 좋다. 알려주마. 이런 길패는 애주(崖州)에 많단다. 그곳에는 목화가 많이 나고 여족(黎族) 여인들이 천도 잘 짜서 말이다. 나도 그곳에 가서 면포를 구입하면 돈은 많이 벌지만 애주로 가려면 풍랑이 거센 바다를 건너야 하기에 위험을 감수해야 한단다.” 선주의 말에 아황이 웃으며 대답했다. “선주님께서 돈을 버시고 제가 재주를 배우려면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죠.” “나는 바다에 익숙하니 괜찮은데, 이제 너는 고생 좀 할 것 같다.” “무슨 고생이요?” “네가 말을 모르는데 무슨 기술을 배운다는 말이냐? 그곳에서 네가 살아만 남아도 대단한 거지.” “말을 배우는 거야 뭐가 어려워요? 두렵지 않아요. 사람들이 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대담하게 여족인들과 자꾸 대화하면 그들의 말을 빨리 배울 수 있어요.” “하긴 그럴 것이다. 많이 듣고 많이 말하면 빨리 배울 수 있지. 너는 이제 열 살이 넘었으니 더 빨리 배울 거다. 참, 또 하나, 애주에는 모기가 많아서 사람이 물려 죽을 수도 있어.” 아황은 이번에는 소리 내서 웃으며 대답했다. “이렇게 큰 인간이 설마 그렇게 작은 모기를 두려워하겠어요? 여족인들이 사는 곳이니 저도 살아남을 수 있을 거예요.” 선주가 대견스럽게 말했다. “이렇게 철이 들었으니 너는 꼭 재능을 배울 수 있을 거다.”
아황은 다행히 마음씨 착한 선주를 만났다. 하지만 그녀에게 마냥 행운이 따르지는 않았다. 애주로 가려면 경주해협(琼州海峽)을 횡단해야 하는데,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는 점성(占城)으로 흘러갔다. 점성은 오늘의 베트남을 말한다. 풍랑이 잦아든 후 배는 다시 육지를 떠나 바다에서 십여 일 동안 헤매다가 애주에 이르렀고, 뱃멀미로 기진맥진한 아황도 끝내 애주의 뭍에 올랐다. 햇빛은 눈부시고 바다에는 푸른 파도 넘실거렸으며, 반달 모양의 황금색 백사장이 바닷가에 고요하게 펼쳐져 있었다. 야자수가 미풍에 한들거리고 파초가 숲을 이루며 바다와 야자나무 숲 사이에는 아담한 초가집이 그림 같았다. 이국적인 아름다운 열대 나라의 풍경에 아황은 놀랍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수중에 돈 한 푼 없고 지인 한 명 없이 어떻게 살 것인가? 아황이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데 멀지 않은 초가집 앞에서 도사 모양의 한 여인이 마당을 쓸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황은 한달음에 달려가 인사하고 공손하게 물었다. “도사님 여쭙겠습니다. 제가 진심으로 입도(入道)하고자 하니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곳에서 빨래하고 밥 짓고 하는 것으로 몸 둘 거처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그 여도사가 아황을 아래위로 훑어보니 생김새가 단아하고 체구가 단단했으며 입은 옷은 남루해도 하얗게 바랠 정도로 깨끗해서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아황이 간난신고 끝에 천애해각으로 온 사연을 들은 여도사가 입을 열었다. “네가 입도하면 바로 도우(道友)가 되니, 지금부터 우리는 동문 자매이다! 내가 너보다 몇 살 더 먹었으니 묘현(妙玄) 자매라고 불러라. 그런데 너는 도명(道名)을 지을 생각이 없느냐?” 아황이 대답했다. “아직 입도전이니 어떻게 지을지 모르겠습니다. 묘현자매님께서는 저를 아황이라 불러주시면 됩니다.”
몸 둘 곳을 마련한 아황은 초가집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곳곳을 말끔하게 정리했다. 묘현은 기분이 좋았다. 사원의 주지 도사인 묘운선사(妙韵仙師)가 선서(仙逝) 후 함께 할 짝이 없어 걱정하던 차에 아황이 하늘에서 내린 듯 불쑥 나타났으니 말이다. 묘운선사가 아황을 보낸 것이라 생각하니 묘현은 기분이 더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묘현은 야외에 나가서 산나물과 열매를 따 가지고 피곤한 몸을 끌고 돌아왔다. 아황은 그 김에 말문을 열었다. “사원의 소득이 얼마 없어서 자매님께서 너무 고생이 많으십니다. 거기다 저까지 와서 이제부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 제가 실을 뽑고 천을 짤 줄 아니 여족인들에게서 기술을 배워 길패면포를 짜면 소득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황의 말에 묘현은 흔쾌히 동의했다. 그날부터 아황은 여족인들로부터 방적(紡績)과 방직(紡織)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래 방적과 방직의 달인이었던 아황은 목화씨를 빼고 솜을 타며 실을 뽑고 천을 짜는 여족인들의 공법이 고향에 비해 훨씬 더 선진적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매일 여족인들의 방적과 방직기법을 눈으로 보고, 마음에 익힌 아황은 여족인들의 방직기법의 오묘함을 금방 파악하고 길패를 짤 수 있게 되었다. 아황은 영리하고 솜씨도 있는 데다 지금은 기술을 연찬(硏鑽)할 수 있는 시간도 많아서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낮에는 여촌(黎村)에 가서 실을 뽑고 천을 짜며 여족인들과 기술을 교류하고 저녁이면 사원으로 돌아와 등잔불 밑에서 혼자 방적과 방직기술을 연마했다.
과거에는 시부모가 시켜서 하니 힘들기만 했는데, 지금은 스스로 좋아서 저녁에 실을 뽑고 천을 짜는 심경이 그때와 전혀 달랐다. 아황은 신나고 재미있게 일하며 과거와 전혀 다른 문제를 고민했다. “목화로 천을 짜려면 먼저 목화씨를 뽑아내고, 목화로 솜을 타서 솜을 부풀리고, 그다음 솜으로 가는 실을 뽑아 천을 짜야한다. 지금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이 바로 목화씨를 뽑는 일이다. 두 손으로 목화씨를 하나씩 뽑으려면 속도가 너무 늦다. 도구를 만들어야겠다. 목화 속의 씨를 쉽고 빨리 분리할 수 있는 도구 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황은 목화씨를 뽑는 간단한 방법을 고안해서 여족 자매들과 공유했다. 그는 밀방망이 모양의 방망이를 많이 만들어 자매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목화를 돌 위에 올려놓고 방망이로 누르면 목화씨가 쉽게 빠져나왔다. 도구를 사용하자 목화씨를 제거하는 작업의 속도가 6~7배 이상 향상되었다. 기쁨에 넘친 여족 여인들은 도사가 다르다고 아황을 칭찬했다. 후에 아황은 또 솜을 타는 도구인 솜활도 혁신적으로 고쳤다. 그는 1자 5치의 기존 활의 길이를 4자 5치로 확대하고, 원래 가는 실로 되어 있던 활줄을 밧줄로 바꾸었다. 손으로 두드려서 솜을 타던 방법도 막대기로 두드리게 했다. 큰 활에 굵은 활줄에 막대기로 두드리자 솜을 탈 때 쟁쟁하는 쇠붙이 소리가 났고 솜도 더 잘 탈 수 있었다. 이런 개혁을 거치자 솜을 타는 일은 효율성이 크게 높아지고 솜이 골고루 잘 부풀려졌다.
그동안, 남쪽 바다는 수도 없이 밀물이 졌다가 썰물이 지고, 파도 소리도 그치지 않았으며 하늘의 달도 둥글었다 이지러지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아황은 그렇게 애주에서 십여 년을 지냈다. 어느 날 초승달이 서쪽 하늘에 걸렸다. 아황은 갑자기 고향 오니경의 달이 생각났다. 매일 저녁도 못 먹고 날이 어두울 때까지 일하던 그때 아황은 하늘에 걸린 조각달을 보면 언제나 저도 모르게 마음이 슬퍼졌다. 그런데 자유롭게 사는 지금도 왜 조각달을 보니 갑자기 마음에 슬픔이 차 오르지? 아아, 아마도 이게 바로 향수(鄕愁)인가 보다. 고향을 그리는 슬픈 마음은 언제나 명월이 교교한 밤이면 피리소리처럼 울려와 천애지각에 홀로 남은 이 마음을 감도는구나. 고향을 생각하면 온통 고통스러운 기억뿐이지만, 아황은 그래도 고향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황이 향수에 젖어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일어나니 놀라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상(宰相) 육수부(陸秀夫)가 어린 황제를 업고 바다에 투신했으며, 그 뒤를 따른 송(宋)의 군민 수가 3만 명이 넘는다는 것이었다. 송 왕조가 망하고 몽골인들이 나라를 차지하고, 국호를 원(元)이라 해서 왕조의 교체가 이루어진 것이다. 바닷물에 밀려 애주까지 온 송의 병사한테서 직접 이 소식을 들은 아황은 눈물을 흘렸다. “고향에 돌아갈 생각을 하자 송 왕조가 멸망하다니? 나라도 집도 없는 나, 설마 이게 내 운명이란 말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원(元) 왕조의 군사가 애주에 상륙하고 원의 관리가 애주 관아에 자리를 잡았다. 아황은 귀향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천애해각(天涯海角) 애주(崖州)에서 30년을 보내며, 머리가 반백을 넘긴 아황(阿黃)은 낙엽이 뿌리를 찾아가듯 끝내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을 떠날 때 묘령의 민며느리 처녀가 은발의 노부가 되어 돌아오니 감개가 무량했다. 고향말씨는 여전히 그 사투리였으나 고향 사람들은 그 사람이 아니었고, 고향 마을도 전에 없이 스산했다. 또 아황과 비슷한 연령대의 사람은 몇몇 밖에 남지 않았으며 그들마저 백발에 노쇠하기 그지없었다. 시부모는 벌써 세상을 뜨고 어린 남편마저도 이생에 없었다. 몇십 년 동안 도교 사원에 익숙한 아황은 고향에서도 사원에 기거했다. 아황이 도교 사원에 자리를 잡자 고향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황도파(黃道婆)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제 이름처럼 ‘도교사원의 황씨 할머니’가 된 것이다. 아황이 고향에 돌아와 보니 목화는 많이 재배하지만 물레는 여전히 과거 자신이 쓰던 삐걱거리는 낡은 방식의 물레를 쓰고 있었다. 황도파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이제 살면 얼마를 더 살겠는가. 내가 가진 재능을 관속에 넣어 가지고 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황도파는 고향의 여인들에게 자신이 발명한 알면기(軋棉機)를 만들어 이의 사용법을 가르쳤다. 목화의 씨를 뽑는 이 도구는 나무로 만든 틀 안에 축이 달린 쇠로 된 기둥 하나와 나무 기둥 하나를 세웠다. 상대적으로 가는 쇠 축과 좀 굵은 나무 축이 서로 맞물려 돌아가도록 해서 그 사이에 목화를 넣으면 두 축이 엇갈려 돌면서 솜은 앞으로 빠져나오고 씨는 뒤쪽으로 떨어졌다. 이를 사용하니 사람의 손으로 일일이 목화씨를 뽑을 때보다 효율이 열 배 이상 높아졌다. 황도파는 또 자신이 보완한 솜활도 고향 사람들에게 전수해서 고향 사람들은 그때부터 모두 그 솜활로 솜을 타면서 효율을 높였다. 황도파의 발명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목화씨를 뽑는 기계나 솜을 타는 솜활보다도 실을 뽑는 물레 삼정각답방차(三錠脚踏紡車)다. 물레는 원래 손으로 돌리던 것을 발로 돌리게 해서 힘도 덜 들었다. 그리고 남아도는 두 손으로 실을 뽑을 수 있으며, 원래는 하나만 쓰던 방추를 세 개로 늘려 동시에 세 갈래의 실을 뽑을 수 있게 만들었다. 방적의 효율이 세 배 증가한 것이다.
이는 당시 세계적으로 가장 선진적인 방적기였다. 황도파가 방직의 비조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람들은 신의 한 수 같은 황도파의 재능에 감탄하며 그녀를 여도사라 불렀다. 인적이 드물고 미개발 지대인 천애해각에서 이렇게 세계적으로 가장 앞서가는 방직도구들을 만든 그녀는 사람들의 감탄과 존경을 받을 만했다. 황도파는 살아 있는 한 창조와 발명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고향에 돌아온 후에도 그녀의 창조는 계속되었다. 강남의 비단에 꽃과 새, 산수를 비롯해 온갖 아름다운 무늬가 있는 것을 본 그녀는 베틀을 개조해서 면포에도 다양하고 아름다운 무늬를 넣기로 작심했다. 황도파는 배색과 씨줄의 색깔을 연구하고 면방직의 숙련공을 찾아 경험을 배웠다. 공든 탑은 무너지지 않는다. 황도파는 나뭇가지와 찻잎, 바둑판, 문자 등과 같은 무늬의 면포를 짜는 데 성공했다. 황도파의 대담한 기술적 혁신으로 고향의 방직업은 빠른 발전을 가져와 ‘오니경피(烏泥涇被)’라 불리는 면직물은 온 세상에 이름을 날리며 빨리 퍼져나갔다. 당시 한 시인은 오색찬란한 꽃이 피어난 오니경피가 비단을 방불케 하고 면포 같지 않게 마치 화가가 그린 예술작품과 같은 것을 보고 혀를 차며 즉흥적으로 시까지 읊었다. 이는 면방직분야에서 창조한 황도파의 기적을 형상적으로 잘 보여준다.
崖州布被五色繅(애주포피오색소) / 애주의 면포 아름다운 오색의 실을 켜서
組霧紃雲燦花草(조무천운찬화초) / 운무 같고 꽃 같은 아름다운 천을 짜네.
片帆鲸海得風歸(편범경해득풍귀) / 돛배 타고 큰 바다에서 바람 타고 돌아와
千軸烏鲸奪天造(천축오경탈천조) / 하늘의 조화를 뺏은 천 두루마리 오경 면포네.
오니경의 사람들만 황도파에게서 앞서가는 방직기술을 배운 것이 아니라, 송강부(松江府)는 물론이고 소주(蘇州)와 항주(杭州)의 사람들도 모두 황도파를 찾아왔다. 그로부터 강남의 면방직업은 빠른 속도로 발전해 강남은 당시 중국 면방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송강의 면포, 이 세상 으뜸’이라는 말은 지금까지 전해진다. 황도파의 창조와 혁신이 있었기에, 황도파의 기술 도입과 전파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경제는 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고 수공업은 면방직의 시대에 들어서게 되었다. 비싼 비단을 사지 못하는 서민들이 더는 베옷으로 추위를 막지 않아도 되었다. 면포로 지은 옷이 일상의 의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고향에 돌아온 지 10년이 가까워졌다. 황도파의 눈에는 자신의 얼굴에 갑자기 주름이 늘어난 것은 보이지 않고, 다만 늘 배가 붓고 식사를 못 해 손과 발이 바싹 여윈 것만 보였다. 어느 날 저녁, 침상에 누워 창밖으로 달을 바라보던 황도파는 갑자기 30년 전 애주에서 살던 때를 기억에 떠올렸다. 정신이 몽롱한 중에 황도파는 여(黎)족의 여인들과 물레를 돌리며 누가 실을 더 빨리 뽑는지 내기를 하는 자신을 보았다. 하얀 실은 점점 더 길어지고 점점 더 많아지다가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라 하얀 구름으로 변했다. 황도파가 그 구름을 잡으려고 팔을 뻗치니 자신의 몸이 둥둥 떠서 구름을 따라 저 멀리 하늘가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1330년경 황도파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이루었다. 그녀에게는 자손이 없었지만 그녀의 고향사람들은 그녀의 제사를 지내고, 선면사(先綿祠)와 황모사(黃母祠)를 지어 자자손손 그녀를 기린다. 7백 년 동안 황도파는 강남의 신앙이 되었고, 선면사에는 오늘날도 향불이 끊이지 않는다. 역사 자료에 따르면, 상하이 지역에는 황도파와 관련된 사당, 사찰, 당, 건물이 열 곳이 넘는다. 또 어린이들은 지금도 황도파를 노래하는 <황파파(黃婆婆)> 민요를 부른다.
황 할머니(黃婆婆), 황 할머니(黃婆婆), 우리에게 실 타는 법 가르쳐 주고(敎我紗), 베 짜는 방법도 가르쳐 주세요(敎我布). 하루에 실 두통 내고, 베 두필 짜도록 말이에요(兩只筒子兩匹布).
황도파는 이름도 없는 가난하고 평범한 여성이었기에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이 판을 치고 과학창조를 무시하던 당시 정사(正史)에는 그녀의 전기(傳記)가 기록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백성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중국의 문명사에 큰 기여를 한 황도파의 이야기는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녀의 이야기는 역사 교과서에 수록되어 오래도록 전해지고 후세에 길이길이 남았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