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뎀시(Jack Dempsey), 베이브 루스(Babe Ruth), 바비 존스(Bobby Johnes), 빌 틸든(Bill Tilden), 레드 그레인지(Red Grange), 베이브 디드릭슨(Babe Didrikson), 그리고 누트 록니(Knute Kenneth Rockne) 이들에 대한 공통점은 무엇일까? 미국 스포츠의 역사를 잘 모르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처음 듣는 이름일 것이다. 이들은 모두 1910~1930 년대 미국의 스포츠 영웅들이다. 순서대로 뎀시는 8년간 프로복싱 헤비급 챔피언, 루스는 전설의 홈런왕, 존스는 마스터스대회를 창시한 골프의 전설, 틸든은 그랜드 슬램 10회의 테니스 황제, 디드릭슨은 여자 스포츠의 지존(至尊), 그레인지와 록니는 미식축구 명예의 전당이다. 이 모든 선수들의 영웅스러운 모습은 바로 위대한 스포츠 기자이며 해설가, 시인이었던 그랜틀랜드 라이스(Grantland Rice)의 글과 해설 덕분이다. 이런 해설자가 1932년 어느 날 육상경기의 스타이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22세의 처녀를 로스앤젤레스의 브렌트우드 컨트리클럽으로 데려가 이 처녀가 골프도 잘 칠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았다. 이 처녀는 천부적 소질을 지닌 체육인으로서(그는 생애 최초로 창을 던졌을 때 투창의 세계기록을 세웠다) 소프트볼, 다이빙, 수영, 사격, 사이클, 스케이팅에서 탁월한 솜씨를 보였다. 그 처녀는 그때까지 골프채를 잡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최초의 타구는 250야드나 총알처럼 날아갔다. 그 처녀의 이름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베이브 디드릭슨이었다. 그녀는 꾸준히 골프를 연습했고, 3년 후 골프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녀는 원래 육상선수였는데, 거의 모든 종목의 스포츠에 달인이었다. 요즘으로 치자면 농구의 매직 존슨, 축구의 펠레, 골프의 타이거 우즈, 육상의 칼 루이스, 테니스의 힝기스, 야구의 베이브 루스 등이 그녀의 몸에 빙의(憑依)된 것 같았다. 운동만 잘한 게 아니라 재봉(裁縫) 솜씨도 뛰어나서 자기의 골프복을 스스로 만들어 입었다. 텍사스주 재봉 챔피언십에서 우승도 했다. 가수이자 하모니카 연주자였고, 머큐리 레코드에서 여러 곡을 내었고, 히트곡도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노르웨이 출신 선원으로서 텍사스주 포트아더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밀드레드 디드릭슨(1911 ~ 1956, Mildred Ella Didrikson)이었고, 골프 경기 중에 만난 레슬링 선수 George Zaharias와 1938년 결혼한 뒤에는 남편의 성을 추가했다. 또 야구선수 Babe Ruth 못지않은 슈퍼 스타라 해서 'Babe'란 닉네임이 붙여져 'Babe Didrikson' 또는 'Babe Zaharias'라고도 불렸다. 학교 때 한두 번 유급을 해서 그녀의 출생 연도는 1914년, 1912년, 1911년 등 3가지로 알려져 있었다. 아마도 1932년 LA올림픽 때 제출한 1914년 6월 26일 출생 자료가 세계체육사에 그대로 기록돼 있고, 골프협회에 제출한 1912년의 출생연도는 LPGA의 공식자료였으며, 최근 이 문제를 확실히 규명하기 위해 미국골프협회(USGA)가 그녀가 자라난 곳이자 묘지가 있는 텍사스 버몬트에 가서 확인한 결과 비문에는 1911년 6월 26일생으로 새겨져 있어 USGA에서는 1911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노르웨이인으로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의 7남매 중 여섯째인 디드릭슨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운동에 남달리 뛰어났다. 4살 때 가족과 함께 텍사스주 보몬트로 이사했다. 거기서 그녀는 어린 시절 야구 경기에서 홈런 5개를 친 후 "Babe"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어릴 때 모습은 비쩍 마르고 보통 키였는데, 성장한 뒤의 체격도 175㎝ 62㎏였다. 20세기뿐만 아니라 인류사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여성 체육인이라 일컬어지는 그녀는 육상 전 종목과 골프, 테니스, 야구, 축구, 농구, 사격, 승마, 수영, 다이빙, 포켓당구, 볼링, 폴로, 사이클..... 암튼 어느 종목을 막론하고 그녀가 소질을 보이지 못한 운동이 없었다. 1932년 올림픽 육상 선수로 처음 출전해서 4 종목에서 세계 신기록을 경신하면서, 금메달(80m 허들, 창던지기) 2개, 은메달(높이뛰기 동률 1등인데 기술이 다르다고 2위로) 1개를 획득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 보험회사의 비서로 근무하면서 직장 농구팀에 소속되어 1931년에 전 미국 아마추어 농구 AAU 챔피언십에서 우승했다. 1932년에 AAU 챔피언십에 10 종목에 출전해서 5 종목은 완승하고 나머지 5 종목은 공동 우승했다. 1934년 디드릭슨은 메이저 리그 스프링 트레이닝 시범 경기 3경기에서 총 4 이닝을 던졌다. 브루클린 다저스, 보스턴 레드삭스, 뉴올리언스 펠리컨스를 상대로 투구를 했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매우 빠른 90.2m의 강속구였다. 가장 멀리 던지는 여성 기록 보유자다. 사격장에서 다섯 발을 연거푸 과녁에 명중시키는 정확도를 보였고, 이외에 다이빙대회 우승, 여자농구 올스타 3회, 볼링 메이저리그 선수 등등 열거하기도 복잡하다.
재미있는 일화를 보자. 그녀가 농구선수로 활약했던 고등학교 연감에는 "그녀가 공을 잡으면 점수 기록원이 미리 점수를 올렸다"라고 기록 돼 있다. 더 기가 막힌 사례를 하나 더 들겠다. 1932년 일리노이에서 열린 올림픽 대표선수 선발전 겸 전미 육상대회에 그녀는 텍사스주 대표선수로 "혼자" 출전한다. 다른 주들은 각 종목별 대표 선수들이 대거 참가하는데 텍사스는 딸랑 그녀 혼자 출전한 거다. 그러자 관중들이 웅성거리는 건 당연하다. 이 LA올림픽 선발전에서 디드릭슨은 한나절에 6개 종목 우승과 4개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하기도 했다. 그녀는 육상 8개 종목에서 올림픽 대표선수 자격을 통과했고 그중 5개 종목에서 세계기록 보유자였다. 이날 벌어진 경기는 모두 열 종목인데, 그 결과는 위에 언급한 바와 같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나는 2시간 30분 동안 날아다니다시피 경기장을 누볐다. 장애물경기를 끝내자마자 높이뛰기를 하고, 이어 곧바로 멀리뛰기하는 곳으로 가면 창던지기나 포환 던지기 쪽에서 내 이름을 호명하는 게 들렸다." 그럼에도 야구공 던지기, 80m 장애물, 창던지기, 높이뛰기는 세계 신기록이다. 각 종목마다 주전선수를 내보낸 개최지 일리노이주가 종합 2위에 그친 반면 텍사스는 그녀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종합우승을 차지했던 거다. 각 매스컴에서는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대사건"이라고 흥분했다.
1932년 LA 올림픽, 그 당시 올림픽은 한 여성 선수가 3개 종목만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투창, 80m 허들, 높이뛰기를 택했다. 출전 제한만 없었으면 원 우먼 쇼로 올림픽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녀는 세 종목에 출전해 80m 장애물(11.7초)과 창던지기(43.69m)에서 금메달을 따고, 높이뛰기에서는 1.67m로 동료 미국인 Jean Shiley와 공동 우승했으나 정통스타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은메달에 그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높이뛰기는 다리부터 먼저 넘는 스타일이 전부였는데, 그녀는 현대기술인 머리부터 넘기는 웨스턴 롤오버를 구사했다. 당시로 봐서는 교과서에 없는 "엽기적 스타일"을 구사했던 거라서 심판들이 넘기는 했으나 우승은 줄 수 없다고 해서 신기록을 세우고도 은메달이다. 창던지기 종목의 경우 1차 시기에서는 다른 선수들을 관찰할 생각으로 준비운동도 없이 연습 삼아 던진 게 그대로 세계 신기록이 되어서 금메달이 확정되었다. 세계 스포츠계는 달리기(Run)·뛰기(Jump)·던지기(Throw)는 전혀 성격이 다른 종목인데, 그녀가 모두 우승을 차지하자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한다. 본래 그녀는 10개 종목의 출전 티켓을 다 땄으나 "여성 출전 종목 제한규정"에 걸려 3개 종목만 출전한 거였다. 하기야 그 당시는 여권 신장이 아직 안 돼 쿠베르탱도 공공연히 "여자의 플레이는 시시하고 보기도 좋지 않다."는 발언을 하던 때였다.
그녀가 늦게 입문했지만 가장 화려한 업적을 일군 종목은 바로 골프다. 그녀가 골프에 입문한 계기는 아주 어처구니없는 일에서 비롯된다. 올림픽에서의 우승으로 자동차회사에서 차를 선물 받았는데, 그녀도 모르게 광고에 게재됐고, 그 이유로 아마추어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래서 그녀는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이든 해야 했다. TV 만담 쇼에 출연해서 썰렁한 개그로 농담 따먹기, 트레드밀(Treadmill)에서 달리면서 하모니카 불기, 프로야구 연습경기에서 볼 던져주기, 남녀 혼성 농구팀인 House of David팀으로 전국 순회공연, 당대 최고의 당구 고수인 루스 맥기니스(Ruth McGinnis)와 내기 당구, 오락극의 일원으로 보드빌(Vaudeville) 순회공연 등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의 이런 행동을 비웃으며 Muscle-moll(머슬 몰 : 근육으로 먹고사는 사람)이라고 비아냥댔다. 매스컴에서도 쿵작 쿵작 호들갑을 떨며 스포츠 영웅이 쇼걸로 전락했다고 딴지를 걸었다. 그러던 중에 스포츠 대기자인 그랜틀랜드 라이스의 도움으로 골프에 입문하게 된 것이다. 이 종목이야 말로 그녀를 가장 화려하게 비상하도록 한 종목이었다. 그녀는 골프 선수 생활 중 82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1933년 봄, 여름 동안 골프를 배운 뒤 처음 참가한 경기에서 77타를 기록했으나 탈락했다. 그러나 1935년에 텍사스 토너먼트에서 이 글을 기록하며 첫 우승을 따내고 만다. 당시 미국도 골프는 고급 스포츠여서 출신 배경이 초라한 24살의 처녀가 우승하자 기존 그룹들로부터 반발이 많았다. 마치 흑인인 타이거 우즈가 최초로 우승하자 백인 선수들이 클럽하우스에서 프라이드치킨 먹게 생겼다고 비꼬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골 촌닭 박세리가 처음 우승했을 때랑 비슷한 거다. 그녀가 승승장구하자 골프 상류층들의 등쌀에 시달린 미국골프협회는 그녀가 "한때 돈 받고 농구시합 했었다."는 이유를 들어 아마추어 자격을 박탈하는 추태를 부린다. 그게 오히려 본의 아니게 그녀를 프로로 졸지에 전향시킨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여성 프로골프 대회가 별로 없어서 출전할 기회가 별로 없다. 아마추어 대회가 훨씬 많았다. 프로가 된 그녀는 프로와 아마추어에게 모두 개방된 텍사스오픈과 웨스턴오픈에 참가를 하게 된다. 텍사스오픈에서 그녀가 기록한 장타는 무려 336 야드였다. 거의 남성 장타자의 거리다. 웬만큼 쳐도 250 야드를 가볍게 넘기는 그녀에게 기자가 장타의 비결을 묻자 "브래지어 끈을 느슨하게 하면 돼요. 가슴만 없으면 20 야드는 더 보낼 텐데."라고 말했단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녀와 거의 동시대의 인물로 보비 존스, 샘 스니드 등과 함께 세계 골프사상 가장 위대한 골퍼의 한 명이던 바이런 넬슨은 그녀의 골프플레이를 본 뒤 "남자 PGA에서도 디드릭슨의 드라이버샷보다 더 멀리 나가는 선수는 8명을 넘지 않는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남녀 통틀어 최장타 수준이었다. 관심만 쏟았다 하면 어떠한 종목이든 세계정상이었던 까닭에 한동안 "디드릭슨은 여자가 아니다."는 구설수에 올랐지만 1938년 130㎏의 프로레슬러 자하리아스와 결혼하고, 남편이 "만족한 성생활을 하고 있다."라고 말해 오해가 풀리기도 했다. 참고로 그녀의 남편이 그녀의 매니저 역할을 했고, 플로리다에 그들의 골프장을 개장했다. 그녀는 재미있는 여러 가지 골프 묘기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나란히 티 5개에 공을 놓고 첫 번째 친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연달아 몰아치기. 자기가 친 공을 자기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게 하기. 걸어가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고 스윙해서 치기 등등이다. 그녀는 3년간 3년간 다른 스포츠에 참가하지 않는 규정을 지켜서 1942년에 다시 5년 만에 아마추어 자격을 되찾았다. 일반인도 그렇듯이 그녀가 골프에 심취한 이유는 그만큼 골프가 어려웠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른 어떤 스포츠 종목도 그녀가 마음먹고 참가하면 특별한 연습 없이도 금메달 또는 세계 신기록을 양산하는데, 골프만큼은 많은 시간을 연습에 투자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추어 자격을 다시 획득한 후 1943년부터 그녀가 다시 프로로 전향했을 때인 1947년 사이에 그녀는 17개 아마추어 토너먼트에서 연속 우승했다. 그녀는 또한 1947년 영국 여자 아마추어 골프 토너먼트에서 우승한 최초의 미국 여성이 되었다. 1947년에 그녀는 17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1940년 웨스턴 오픈에서 우승한 것을 시작으로 그녀는 이 타이틀을 열네 번이나 지켰다. 1945년 메이저 대회 2개 석권하고, 1945~1946 두 시즌동안 17개 대회 연속우승은 남녀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프로로 전향하여 1948 ~ 1950년 전미(全美) 오픈을 제패하며 3년 연속 최고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아마추어 골프계에서 더 이상 적수가 없음을 확인 한 그녀는 프로전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그 자리에서 남자들만의 경기인 US오픈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남자프로골프협회(PGA)는 그날로 부랴부랴 PGA 경기에는 여자가 참가할 수 없다는 규정을 만든다. 여자에게 지면 얼굴을 들 수 없으니까. 그녀는 남자골퍼의 최고기록과 맞먹는 기록을 세운 첫 여성이며, 여성에게는 불가능하다던 70타를 깬 여성이다. 그녀는 선배 골퍼 Patty Berg와 함께 1949년 Ladies Professional Golf Association(LPGA)을 공동 창립했다. Berg는 첫 해에 회장을 맡았고, Didrikson은 남은 생애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계속해서 그녀는 1955년까지 100만 달러 수입을 기록한 첫 여성 골퍼다. 50년 6개 대회, 51년 8개 대회, 52년 5개 대회를 우승한 것은 그녀의 놀라운 집중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1953년에 그녀는 결장암으로 인공항문 수술을 받고 나서, 3개월 뒤 전미 오픈에서 15위를 했다. 다음에 월드 챔피언십 3위, 점점 기세가 오르더니 다음 해인 1954년에는 5개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중 US오픈은 4라운드 합계 언더 29타로 2위 인 '미국여자골프의 어머니' 베티 힉스에 무려 12타나 앞서며 자신의 10번째 메이저타이틀을 쥐었다. 이 최다차 우승 및 최고령 우승자, 최다 메이저타이틀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다. 또한 생애 여섯 번째로 "올해의 최우수 여자선수"로 뽑히게 된다. 1955년 또다시 대장암이 재발하여 텍사스주 갤버스턴 에 있는 John Sealy 병원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0여 년을 골프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는 스포츠 역사에 화려한 발자취를 남기고 45년의 생애를 마친다. Associated Press와 스포츠전문가들은 그녀를 20세기 전반 50년 간의 가장 뛰어난 운동선수로 지명하여 위대한 디드릭슨(Great Didrikson)이라고 명명했다. ESPN은 그녀를 20세기 최고의 북미 운동선수 10위로 선정했다. LPGA 초대회장 "패티 버그"의 회상은 이렇다. "그녀는 여자 골프의 개념을 바꾸었습니다. 여성들에게 우아한 스윙만 강조되던 시대에 힘을 위주로 하는 그녀의 파워 스윙은 혁신적이었습니다. 여자골프는 그녀의 재능과 개성에 힘입어 발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녀는 1951년 LPGA 명예의 전당에 헌액 되었고, 이것은 현재는 세계 골프 명예의 전당에 속한다. 1957년 그녀는 사후에 미국 골프 협회가 골프에서 뛰어난 스포츠맨십을 인정하여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Boby Jones 상을 받았다. 그녀는 2016년 텍사스 육상 코치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탬파 포레스트 힐스 지역에 시(市)가 그녀의 이름을 붙인 골프장 Babe Zaharias Golf Course를 개장했고 이 골프장이 랜드마크가 되었다. 그녀의 일대기는 TV영화 <베이브>로 제작되어 배우 수잔 클라크(Susan Clark)가 그녀의 역을 맡아 에미상을 수상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