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통일한 당나라 태종 이세민은 나라를 이끄는 힘이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당(唐)의 북쪽에 동서로 제법 큰 세력을 펼치던 동돌궐과 서돌궐도 이세민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4 년 만에 무릎 꿇렸고, 십 년도 채 안 된 정관 9년(635년)에는 왼쪽 옆구리를 집적거리던 선비족(鮮卑族)의 나라 토욕혼(土谷渾)을 물리쳤다. 그러자 당(唐)은 대제국이 되었고 수십 개 주변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형세가 되어 수도 장안은 그야말로 국제도시였다. 당시 장안에는 각국에서 오는 조공 및 구혼 사신들이 줄을 이었다. 토번족(吐蕃族: 지금의 티베트족)의 제33대 찬보(贊普: 국왕) 송찬간포(松贊干布)는 13세에 즉위하여 청장고원(靑藏高原) 일대의 여러 토호들을 통일한 후 라싸(拉薩)를 중심으로 강대한 토번왕국을 건설하였다. 그는 당나라 전쟁에서 패한 후 밀접한 우호관계를 맺기 위하여 638년 후부터 두 번이나 사신을 보내어 혼인을 요청했으나 승낙을 받아내지 못하였다. 토번의 사자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문책이 두려워 토번에 돌아간 후 송찬간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 "당나라 천자는 공주를 우리에게 시집보내려고 하는데, 마침 토욕혼(吐谷渾)의 왕도 입조해서 혼인을 청하면서 우리와 이간질을 시켜 혼사를 허락받지 못했습니다." 마침 당시 당나라는 돌궐에 형양공주를, 토욕혼에 홍화공주를 시집보내기로 한 상황이었다. 토번과 토욕혼은 원래부터 마찰이 많았던지라 이 말을 들은 송찬간포는 즉시 20만 대군을 이끌고 토욕혼을 공격하였다. 토욕혼의 왕은 막강한 토번의 세력을 보고 기겁을 하여 청해(靑海) 일대로 퇴각하였다. 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14년(640) 송찬간포는 토욕혼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대군을 이끌고 당나라의 변경 송주(松州: 지금의 사천성 송반현松潘縣)를 침략하였다. 그리고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공주를 자기에게 시집보내지 않는다면 곧장 장안으로 쳐들어갈 것이라 위협했다. 매우 분노한 당 태종은 즉시 토번을 정벌하기 위하여 군대를 파견하였다. 송찬간포는 애초에 당나라와의 전쟁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당나라의 원정군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상대를 너무 얕잡아보고 무모한 행동을 하던 송찬간포는 결국 송주성 아래에서 당나라 군대에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에 송찬간포는 신하의 예를 갖추고 사죄를 청하면서, 황금 5000량과 진귀한 보물들을 바치며 화친을 맺고, 다시 혼인을 요청하였다. 이때 사신은 토번에서 두 번째로 큰 권력을 가지고 있던 대상(大相) 까르동찬(噶爾祿東贊)이었다. 당 태종(太宗)은 화친 혼사를 허락하는 조건으로 사신들에게 6단계의 시험에 통과해야 한다고 했다. 토번의 사신 까르동찬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황제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냈다. 좌우 양쪽 굵기가 같은 나무토막을 보고 뿌리 쪽을 찾으라는 것이 첫 번째 문제였다. 이 사신은 그 나무토막을 물속에 집어넣었다. 한쪽이 물속으로 조금 기울었다. 뿌리 쪽이었다. 다른 쪽보다 밀도가 더 높았던 것이다. 다음은 구멍이 뚫린 옥구슬이었다. 그런데 옥구슬 속에서 이리저리 어지럽게 구멍이 연결되어서 마치 미로처럼 되어 있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명주실을 이쪽 구멍에 넣어 저쪽 구멍으로 빼내라는 게 두 번째 문제였다. 까르동찬은 한참 생각하다가 구슬의 한쪽 구멍에 벌꿀을 살짝 발랐다. 그리고 개미 한 마리를 잡아 그 허리에 실을 묶더니 다른 한쪽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개미는 벌꿀의 달콤한 냄새에 이끌려 여러 갈래로 어지럽게 갈라진 좁은 길을 통과하여 다른 쪽 구멍으로 무사히 나왔다. 당 태종은 1백 마리 암말과 이들이 낳은 망아지 1백 마리를 한데 마구 섞은 다음 어미와 새끼를 제대로 짝짓는 문제를 세 번째로 냈다. 여기에 참여한 많은 사신들이 털 색깔이나 무늬 등을 근거로 분별하려고 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까르동찬이 꺼낸 묘수는 달랐다. 그는 1백 마리의 망아지를 울안에 가두고 하루 종일 아무 먹이도 주지 않았다. 이튿날, 고픈 배를 참을 수 없었던 망아지들은 울타리 문을 열기 바쁘게 어미에게 달려가 젖을 물고 배를 채웠다.
토번 사신의 문제 해결 능력이 탄복스러웠지만 당 태종은 다음 문제를 내었다. 병아리 1백 마리와 이들을 품에 안고 부화시킨 암탉 1백 마리를 한데 섞은 다음 병아리와 어미를 짝짓는 문제가 네 번째로 출제되었다. 토번 사신은 병아리가 먹이를 주거나 위험이 눈앞에 닥치면 하나같이 어미 쪽으로 달려간다는 사실을 그는 평소에 눈여겨 두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배가 부른 병아리는 먹이만으로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솔개 따위의 천적이 우는 소리를 흉내 냈다. 그러자 말 안 듣던 병아리들이 깜짝 놀라며 어미 품으로 뛰어들었다. 당 태종은 다섯 번째 문제로, 양 한 마리와 술 한 동이를 하루에 다 먹고 마신 뒤 거처로 돌아가라는 주문을 했다. 많은 사신들이 술 한 동이를 다 마시기도 전에 취하여 쓰러졌다. 술 한 동이를 다 마시고 양 한 마리를 다 먹은 이들도 자기 거처로 갈 방향을 가늠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가 쓰러졌다. 그러나 까르동찬은 술과 고기를 입에 대기 전에 거처에서부터 시험장까지 끈으로 연결해 놓았다. 술 한 동이 다 마시고 양 한 마리 다 먹고 취했어도 이 끈을 따라 순조롭게 거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지막 여섯 번째 문제도 참으로 까다로워서 풀기 힘들었다. 당 태종이 5백 명이나 되는 궁녀 가운데 시집보낼 문성공주를 섞어 넣은 뒤, 진짜 문성공주를 찾아내라고 일렀던 것이다. 똑같은 옷에 하나같은 분장도 그랬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색깔의 쓰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수많은 사신들이 문성공주를 가려내려고 갖은 방법으로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까르동찬은 미리 준비를 완전하게 갖추었기에 단 한 번에 성공할 수 있었다. 문성공주에게는 꿀벌들이 특별히 좋아하는 향내가 난다는 사실을 어느 궁녀의 어머니로부터 알아냈던 것이다. 이날, 까르동찬이 꿀벌 여러 마리를 날리자 이들은 어느 궁녀 어깨 위에 한꺼번에 내려앉았다. 바로 문성공주였다. 마지막 한 문제까지 다 알아맞힌 사신은 까르동찬 한 사람밖에 없었다. 금삿갓은 티베트에 가지 못해서 실물을 보지 못했지만, 라싸에 있는 포탈라 궁에는 이 험난한 시험 과정을 벽화로 남겨 옛날을 증언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문성공주는 원래 황제의 딸이 아니기 때문에 핏줄로 공주가 아니다. 말하자면 직업 외교관 형태의 화번공주(和蕃公主·정략상 이민족 군주에게 출가시킨 공주)를 양성해 놓는 것이다. 당 태종은 사촌 예부상서 이도종(李道宗)을 강하왕(江夏王)에 봉하고, 그의 딸을 양녀로 맞아 문성공주에 봉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당 태종과 장손황후(長孫皇后)의 양녀로 궁궐에 들어가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문성공주는 당 태종이 자기를 토번족의 국왕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매우 착잡하였다. 토번의 도성 라싸까지는 7천 리가 넘는 멀고 먼 곳이었다. 한번 가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곳이다. 방년(芳年)의 꽃다운 나이에 두 민족이 대대로 우호관계를 맺는 것이라지만, 낯설고 물선 타향에 버려지는 것이다. 친지라고는 아무도 없고 풍속도 전혀 다른 먼 이역 땅으로 떠나야 하는 공주의 심정은 일찍이 한나라의 왕소군(王昭君) 심정과 비슷할 것이다. 그래서 중국에는 왕소군에 대한 시나 글들이 매우 많다. 태종은 토번왕 송찬간포를 부마도위(駙馬都尉) 겸 서해군왕(西海郡王)에 책봉했다. 그리고 문성공주를 위해서 많은 혼수품을 마련해 주었다. 그중에는 각종 가구·그릇·패물·비단은 물론, 고대의 역사·문학·각종 기술서적 및 의약품·곡물·누에알 등도 있었다. 특히 문성공주가 예물로 가져간 차에 매료된 송찬간포를 따라 왕실과 귀족들도 차에 탐닉했다. 티베트에서 생산되지 않았던 차를 맛본 티베트 사람들은 차의 효능과 맛에 빠져들었다. 쓰촨성에서 만들어진 차가 문성공주의 혼례길로 유명해진 당번고도(唐蕃古道)를 통해 대량 유입되며 티베트인의 기호식품을 넘어 생활필수품이 됐다. 이것이 금삿갓이 다니던 KBS의 다큐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원형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25명의 시녀와 악대, 많은 장인(匠人)들을 함께 딸려 보냈으며,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성공주는 동불상(銅佛像)도 함께 가져갔다. 당시에 토번족은 서남지역에서는 여전히 강성한 국가였기 때문에 당 태종은 서남의 변방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그들과의 경제적 문화적 협조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들을 융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문성공주와 함께 대규모 문화사절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일설(一說)에는 문성공주가 송찬간포의 아들 공송공찬에게 출가하기로 되어 있었고, 결혼 후 3년 만에 남편이 죽어서 시아버지 송찬간포가 문성공주를 부인으로 맞은 것으로 기록한 것도 있다.
정관 15년(641) 정월 문성공주 일행은 장안(長安)에서 티베트의 라싸까지 약 3,000km에 이르는 장도(長途)에 올랐다. 청장고원(靑藏高原) 일대에 살고 있던 티베트인들은 문성공주 일행을 환영할 준비를 하였으며, 송찬간포는 그녀를 영접하기 위하여 대규모 영친(迎親) 행렬을 거느리고 청해(靑海)까지 달려갔다. 몇 달간의 긴 여정 끝에 문성공주 일행은 청해 남쪽의 하원(河源 : 황하 발원지)에 도착하여 송찬간포의 영접을 받았다. 송찬간포는 후행(後行: 결혼 때 신부나 신랑을 데리고 가는 일) 온 공주의 친부 강하왕(江夏王)에 봉한 예부상서(禮部尙書) 이도종(李道宗)에게 사위의 예를 표하고 찰릉호(扎陵湖)에서 성대한 영친(迎親) 의식을 거행하였다. 티베트의 월력인 장력(藏曆) 4월 15일 송찬간포는 문성공주를 데리고 북문을 통해서 라싸성으로 들어갔다. 공주의 풍속을 존중한 송찬간포는 갖옷을 벗어버리고 특별히 당 왕조에서 하사한 화려한 예복을 입고, 티베트인들에게 홍갈색 흙을 얼굴에 칠하는 풍속을 금지시켰다. 그리고는 새로 건축한 화려한 왕궁에서 송찬간포와 문성공주는 혼례를 거행하였다. 문성공주가 티베트에 시집간 것은 티베트의 역사와 문화를 뒤바꾸는 일대 사건이었다. 청해에는 일월산(日月山)이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문성공주가 이곳을 지나면서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하염없이 고향 생각에 잠겼다고 한다. 출발할 때 당 태종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하여 특별히 ‘일월보경(日月寶鏡)’을 주조하여 주었다. 고향이 그리울 때 그 거울을 보라는 것이다. 그때 고향생각으로 일월보경을 꺼내 보다가 수척한 자신의 모습에 놀라 거울을 길바닥에 내팽개쳐서 버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이 산을 '일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월산을 지나면 거꾸로 흐르는 도류하(倒流河)가 있는데, 중국의 모든 강들이 동쪽으로 흐르는데 이 강은 서쪽으로 흘러 청해호(靑海湖)로 들어간다. 전설에 의하면 문성공주는 이 강을 건너자마자 가마를 버리고 말을 타고 초원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자기의 몸이 장안의 집에서 점점 더 멀어져 감을 느끼자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울음소리와 흘린 눈물로 중국 세상의 모든 강물을 동쪽으로 흘러가게 하였지만 유독 이 강만은 서쪽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도류하(倒流河)'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문성공주는 라싸에서 생활한 이후 당 왕조의 선진 기술과 문화를 티베트인들에게 전수하여 토번사회의 발전을 촉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문성공주와 함께 티베트에 들어간 한족 기술자들의 도움으로 티베트족은 야금·농기구 제조·방직·건축·도자기 제조·방아·술 양조·제지(製紙) 등의 기술을 신속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문성공주는 티베트 계곡에 급류가 많은 것을 보고 강가에 물레방아를 설치하여 수력으로 방아를 찧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송찬간포는 이러한 기술이 토번의 경제발전 촉진에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더 많은 기술자들을 요청했다. 문성공주는 또 시녀와 함께 티베트 여인들에게 방직과 자수 기술을 전수하였다. 지금에 이르기까지 티베트 여인들이 짜는 푸루(야크 털로 짠 검은색 또는 다갈색의 모포)와 융단, 모전(毛氈) 등의 기술은 모두 문성공주로부터 전해진 것이다. 문성공주는 또 티베트인들에게 천문과 역법을 가르쳐주었다. 이후 장력(藏曆)에서는 한족의 음력 십이 간지와 육십갑자에 따라 일시를 계산하는 방법을 받아들였다. 문성공주가 데리고 간 악대는 티베트 음악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악대가 가지고 간 악기는 지금도 50여 개나 보존되어 있다. 라싸의 대소사(大昭寺)에 공주가 가져간 불상을 포함하여 소중하게 보관되어 있는 그 악기들 중 대부분은 현악기인데 지금 보아도 색채가 선명하고 아름답다. 매년 장력 2월 30일 양보회(亮寶會)가 되면 그것들은 사내(寺內)의 다른 문물과 함께 일반인들에게 공개된다. 문성공주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녀가 그 멀고 험난한 길에 불상을 가지고 간 것 그 자체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불교를 깊이 신봉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송찬간포도 정치적으로 불교의 교의가 토번족 토속 신앙인 분교(笨敎) 보다 통치에 훨씬 더 적합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그는 불교를 통해 왕권을 공고히 하고 찬보의 절대적 권위를 수립하였다. 이에 그는 불법(佛法)을 제창하고 신봉한 문성공주의 주장을 강력하게 옹호하면서 400여 개에 이르는 사원 신축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부터 티베트 불교가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티베트에 세워진 최초의 불교사원인 방대한 규모의 라싸 대소사는 바로 문성공주의 배려로 건축된 것이다. 대소사 안에는 지금도 공주가 가지고 간 석가모니 불상이 모셔져 있다. 대소사 입구에는 공주가 직접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버드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당나라 버들인 '당류(唐柳)' 또는 '공주류(公主柳)'라 한다. 문성공주는 티베트에 들어간 이후 송찬간포와 네팔 출신 적존공주(赤尊公主)의 부탁으로 와조(臥措)에 적존공주를 위해서 절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조캉사원이라고 불리는 지금의 대소사(大昭寺)이다. 적존공주(赤尊公主)는 공식적인 사서(史書)에는 기록이 없는데, 신화와 전설로 구전되어 오고 있다. 그녀는 네팔의 공주로 송찬간포가 네팔과의 화친을 위해 결혼했다고 한다.
그 후 공주는 다시 서북쪽 모래밭에 순수한 당나라 양식의 사원을 지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소소사(小昭寺)이다. 대소사의 건축 양식을 통해서 우리는 문성공주의 뛰어난 재능을 엿볼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대소사를 지을 때 계속 담이 무너져 내려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 문성공주는 천문학과 금(金)·수(水)·목(木)·화(火)·토(土)의 오행설을 운용하여 천문과 지리를 관찰한 다음, 라싸의 지형이 나찰마녀(羅刹魔女)가 누워있는 형상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공주는 나찰마녀의 심장 부위에 절을 지어 그녀의 심장을 눌러야만 절이 온전하게 지어질 수 있다고 봤다. 그러나 공주가 계산한 나찰마녀의 심장 부위는 홍산(紅山)의 동쪽 1km 지점으로 그곳은 호수와 소택지였다. 문성공주가 지목한 대소사 부지는 호수와 소택지여서 그것을 메우지 않고서는 도저히 건물을 지을 수 없었다. 이에 공주는 다시 오행의 상생상극 이론에 근거하여 송찬간포에게 절을 지을 때 흰 산양으로 흙을 져다 호수를 메우게 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송찬간포는 공주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에 646년 비로소 대소사의 공정이 시작되었다. 이 사원의 공사는 라싸 역사상 최대의 대공사였다. 2년간의 공사를 거쳐 마침내 웅장한 사원이 건축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지금의 대소사인 것이다. 648년 웅장한 대소사와 소소사가 모두 완공되었다. 대소사 즉 조캉사원은 200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송간찬포는 현명하고 아름다운 문성공주를 위하여 포달라궁(布達拉宮)을 지어주었다. 모두 1,000간의 궁실로 이루어져 있는 포달라궁은 그야말로 화려하고 웅장하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두 번에 걸쳐 증축한 것이다. 포달라궁의 본전의 높이는 13층, 길이는 117m, 점유 면적 36만여㎡에 이른다. 포달라궁 내부에는 많은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까르동찬이 당태종을 만나 6개의 문제를 풀던 이야기와 문성공주가 티베트로 들어가는 도중에 겪은 일 및 라싸에 도착했을 때 열렬한 환영을 받던 장면 등의 벽화가 있다고 한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거대한 포탈라궁은 티베트 전통 건축예술의 백미로 꼽히고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문성공주는 당시 한족(漢族)으로서는 변새(邊塞)의 평화 유지를 위한 화친공주로서 정치적으로도 대단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 더하여 한족과 장족의 문화 교류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러나 『전당시(全唐詩)』에 실린 4만 8천9백여 수에 이르는 작품 가운데 문성공주의 화친 사건을 직접적으로 읊은 시가 한 편도 없다. 왕소군(王昭君)의 화진 결혼은 수많은 명시들이 있는데 반해, 문성공주의 역할이나 일월산의 신기한 전설도 당나라나 후세 시인들의 시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 인간의 심금을 울리는 눈물 나는 스토리 텔링이 없는 건조한 역사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 문성공주가 세상을 떠난 지 1백5십여 년 뒤, 시인 진도(陳陶)의 <농서행(隴西行)> 4 수(首) 중에 아래 두 구절이 있을 뿐이다.
自從貴主和親後(자종귀주화친후) / 스스로 귀한 임금 따라 화친을 한 후에
一半胡風似漢家(일반호풍사한가) / 오랑캐의 풍속의 반가량이 중국과 닮았네.
하나가 더 있다면 당대(唐代)의 변새시인(邊塞詩人) 중 한 명인 이기(李頎)의 <고종군행(古終軍行)>의 율시(율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行人刁斗風沙暗(행인조두풍사암) / 행인의 엉클어진 머리에 모래바람 어둡고
公主琵琶幽怨多(공주비파유원다) / 공주의 비파소리 많은 원망 서렸겠네.
송찬간포도 문성공주와 백년해로를 하지 못하고 짧은 결혼 생활 후에 사망한다. 황제의 친딸이 아니어서 그런지 홀몸이 된 문성공주는 당나라로 돌아가지 않았다. 송찬간포의 어린 손자가 왕으로 즉위했다. 당태종에게 문성공주를 화번공주로 요구했던 까르동찬이 재상으로 티베트를 섭정했다. 그는 10년 전 당태종이 부여한 당나라 관직도 갖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에 문성공주가 있었다. 그리고 까르동찬도 667년에 사망했다. 문성공주는 영륭(永隆) 원년(680)에 40여 년간의 티베트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났다. 문성공주가 세상을 떠나자 토번은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고 그녀를 송찬간포의 묘에 합장시켰다. 티베트인들은 두 개의 기념일을 제정하여 그녀를 기리고 있다. 하나는 문성공주가 라싸에 도착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마련한 장력 4월 15일의 '사허다와절(沙喝達瓦節)'이고, 다른 하나는 문성공주의 탄신일로 알려져 있는 장력 10월 15일이다. 티베트에는 문성공주에 관한 희극이 많다. 민간에는 그녀에 관한 아름다운 시가와 전설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티베트인들은 라싸의 팔각대가(八角大街)와 같이 그녀가 지나갔던 곳을 성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녀는 한족과 티베트 두 민족에 있어서 우호의 화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