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측천무후(則天武后)나 로마의 메살리나(Messalina) 같은 황제급(皇帝級) 여인이 아니고서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숫자의 남성과 관계를 맺었다고 당당히 고백한 여인. 그것도 길거리에서 발길에 차이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당대 최고의 거장(巨匠)이거나 곧 그런 반열에 오를 사나이들을 떡 주무르듯이 침대에서 요리한 최고의 여인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이 글은 미술평론이나 미술사학 관련이 아닌 그냥 한 여성의 남성 편력을 들여다보는 것이니까 너무 폄훼했다거나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마시라. 그냥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미술사적으로 엄청난 업적을 세운 한 여인을 폄훼(貶毁)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녀의 자서전 <Out of this Century : Confessions of an Art Addict>와 리사 이모르디노 브릴랜드(Lisa Immordino Vreeland) 감독의 다큐멘터리 <Peggy Guggenheim : Art Addict>의 내용을 근거로 작성해 본 것이다. "내 첫 번째 성취는 잭슨 폴락(Jackson Pollock), 두 번째는 아트 컬렉션이다."라는 말로 다큐는 시작한다. 스스로 예술가는 아니지만 그만큼 그녀의 삶이 예술에 중독되었다는 표현일 것이다. 언젠가 지휘자 토마스 쉬퍼스(Thomas Schippers)가 그녀에게 남편이 몇 명이나 있었는지 물었을 때, 그녀는 "내 남편을 말하는 건가요,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남편을 말하는 건가요?"라고 대답했다.
사랑과 예술의 경계에서 페기 구겐하임의 연애, 욕망, 그리고 미술사와 미술관의 탄생에 직간접으로 크게 영향을 미친 그녀의 남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나는 사랑으로 예술을 모았다.” “나는 사랑했던 남자들로부터 예술을 배웠고, 예술로부터 사랑을 배웠다.” 그녀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 문장은 단순한 자서전적 고백(告白)이 아니라, 20세기 미술사의 핵심을 요약한다고 할 수 있다. 페기의 연애는 곧 미술 운동의 이주 경로였고, 감정의 교차점에서 새로운 예술이 태어나기도 했다. 1979년, 베니스 대운하(大運河)를 내려다보는 팔라초 베노에르 데이 레오니(Palazzo Venier dei Leoni). 페기 구겐하임은 바로 이 자신의 갤러리 정원에서 마지막 날들을 보냈다. 그녀의 곁에는 화려한 그림들만이 아니라, 평생을 함께했거나 스쳐간 남성들의 진한 그림자가 늘 따라다녔을 것이다.
그녀의 간략한 출신 배경을 보자. 그녀는 1898년 8월 26일 뉴욕에서 벤자민 구겐하임(Benjamin Guggenheim)과 플로레트 셀리그먼(Florette Seligman)의 셋 딸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벤저민 구겐하임은 독일어를 쓰는 스위스계 유대인 출신인 아버지 마이어와 함께 19세기 후반 은, 구리, 납 등 금속 채굴 및 제련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일곱 형제 중 한 명이었다. 어머니 셀리그먼 가문도 명문 은행가 집안이었다. 1912년 4월, 페기의 아버지는 영국에서 미국으로 향하던 타이타닉호의 처녀항해(處女航海) 중 사망했다. 부호였던 그는 사고 현장에서 구명정(救命艇)을 먼저 타고 나갈 수 있었지만, 자신보다 어려운 이들에게 자기 자리를 내어줬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행한 것이다. “페기야...너를 두고 가서 미안하구나...” 페기의 아버지 벤자민이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마지막 말이다. 타이태닉호에서의 신사적 태도로 그는 뉴욕타임스에 큰 사진과 함께 자세한 기사로 실렸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그녀는 45,000불 정도를 상속받아서 그리 부유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뉴욕의 아방가르드 서점인 ‘Sunwise Turn’에 점원으로 취업해서 일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회계처리를 하면서 상류층 인사, 예술가들과 교류하면서 전위적인 분위기와 보헤미안 예술가들의 세계에 대한 안목이 길러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스콧 피츠제럴드(Scott Fitzgerald)와 사진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도 그즈음 사귄다. 22세 때에 어머니로부터 250만 불을 상속받으면서 본격적인 예술 수집가의 대열에 나선 것이다. 당시 스티글리츠는 5 애브뉴의 갤러리에서 세잔, 피카소, 마티스의 전시회를 미국에 처음 소개한 장본인(張本人)이다. 페기는 스티글리츠의 아내이자 추상화가인 조지아 오키프(Georgia O’Keeffe)를 통해 첫 남편이 될 문학가 겸 화가, 조각가인 로렌스 베일(Laurence Vail)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1921년 미국에서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파리에서 살게 된다. 이 지점에서 그녀의 남성편력을 살펴보자. 1,000명을 모두 살펴볼 수는 없고, 그중 영향력이 있었던 중요한 인물들만 살펴본다. 글을 쓰는 순서는 무순(無順)이다. 필자 금삿갓이 페기 구겐하임의 마음속에 들어가 볼 수도 없었고, 인터뷰를 해본 것도 아니기에 누가 더 중요하거나 더 사랑했는지 따위는 알 수 없다. 그냥 생각나는 순서로 대충 나열한 것이니까 이해하기 바란다.
<베일과 함께 낳은 아이들과 단란한 시간>rㅡ는
1. 다다이즘 조각가이자 작가이며 폭력적인 첫 남편 로렌스 베일(Laurence Vail)
베일은 화가인 미국인 부모에 의해서 파리에서 태어나 옥스퍼드에서 문학을 전공하고 이탈리아 등지를 여행하면서 파리 사교계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희곡과 수필, 조각, 그림을 그리는 등 파리 클럽이나 카페에서 ‘보헤미아의 왕’ 노릇을 하고 있었다. 1922년에 페기와 결혼했다. 그의 눈에 그녀는 예술, 삶, 문학을 가르칠 수 있는 젊은 여성이었다. 그는 몽파르나스에서 만 레이(Man Ray),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마르셀 뒤상(Marcle Duchamp) 등의 예술가들을 페기에게 소개했고, 결국은 이들에게 그녀를 빼앗기게 되는 것이다. 23살 때인 1921년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다. 그 여행 중에서 그녀는 폼페이의 다양한 에로스 벽화를 보게 되었고, 다양한 체위로 묘사된 성행위 벽화를 보고 자신도 그림처럼 모든 체위(體位)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고 술회(述懷)했다. 이로서 그녀의 섹스 중독증이 발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로렌스 베일은 섹스에 대한 그녀의 적극적인 태도에 놀랐다. 어머니가 외출했을 때 파리에 있는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은근슬쩍 그녀에게 성적(性的)인 접근을 했는데, 그녀가 쉽게 "네"라고 대답하자 깜짝 놀랐다. 그는 어머니가 언제 집에 돌아오실지 모르니까 여기보다는 호텔이 나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페기는 모자를 집어 들고 "지금 당장 어때요?"라고 말했단다. 그는 결혼 후 폭력적으로 변한다. 페기에게 주먹을 휘두르거나 진득한 잼을 머리카락에 문지르면서 모멸감을 주기도 했다. 폭력(暴力) 남편을 피해 아이들을 데리고 런던·스위스로 도피하는 일이 잦았다. 페기는 “결혼은 파괴적이었지만, 내 인생에서 예술을 준 사람”이라고 훗날 회상했다. 그들은 프랑스 남부의 깐느 옆에 있는 Pramousquier에 정착했지만, 베일은 1928년 페기를 배반하고 미국의 사진가 케이 보일(Kay Boyle)과 바람이 난다. Vail은 1932년에 출판된 그의 결혼 생활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 소설 <Murder, Murder>를 썼다. 하지만 그들의 결혼 생활은 파탄지경이었다.
<홈스의 군 복무 시절 모습>
2. 아무런 작품도 남기지 않은 작가 존 페라 홈스(John Ferrar Holms)
인도에서 영국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도 했던 그는 당대에는 천재로 인정받으면서 지성과 표현력으로 위대한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작품을 남길 것으로 모두들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그의 동료나 친구들 그를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은 그를 셰익스피어나 플라톤과 같은 맥락(脈絡)에서 언급되어야 할 인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36년 인생은 거의 흔적조차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는 1925년부터 1927년까지 Calendar of Modern Letters에 문학 비평을 발표했고 , <A Death>라는 단편 소설도 썼지만 주변 작가들의 비망록이나 주석서에 그의 이름들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그는 주나 반스(Djuna Barnes), 에드윈 뮤어(Edwin Muir), 에밀리 콜먼(Emily Holmes Coleman), 안토니아 화이트(Antonia White), 페기 구겐하임 등과 교류했다. 주나 반스는 자신의 소설 <Nightwood>를 홈스와 구겐하임에게 바쳤다. 남을 칭찬하지 않던 시인 에드윈 뮤어는 아주 간결하게 "홈스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놀라운 사람이었다."라고 했다. 페기 구겐하임은 홈스를 자신이 아는 사람 중 단연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여겼다. 그녀의 연인들이나 그녀의 주변 인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막스 에른스트, 마르셀 뒤샹, 사뮈엘 베케트 등 대단한 인물들이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는 상당히 놀라운 평가였다. 홈스와 6년간의 파란만장(波瀾萬丈)한 관계를 견뎌낸 페기는 홈스와 함께하는 것이 "마치 5차원 세상에 사는 것과 같았다"라고 말했다. 이런 마법에 걸린 다른 사람들로는 윌리엄 게르하디(William Gerhardie), 알렉 와우(Alec Waugh), 그리고 라디오 선구자 랜스 시브킹(Lancelot De Giberne Sieveking)이 있었다. 랜스 시브킹은 홈스가 자신의 악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글을 쓴 사람 중 가장 친숙한 문학적 인물'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었다. 홈즈의 외모는 180cm가 훨씬 넘는 키에 넓은 가슴과 어깨, 그리고 불타는 듯한 머리카락, 슬픈 눈, 관능적인 입술, 그리고 생각할 때 휘날리곤 했던 작고 뾰족한 수염은 사람들이 스페인 귀족, 엘리자베스 시대의 궁정(宮廷) 신하, 또는 도스토옙스키의 등장인물을 떠올리게 했다. 페기 구겐하임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매우 닮았다"라고 주장했다. 알렉 와우는 "그는 내가 예상했던 천재의 모습이었다."라고 간단히 언급했고, 에드윈 뮤어(Edwin Muir)는 프라하에 있는 그의 숙소로 몰려든 낯선 사람들이 우울한 붉은 머리 거인을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고 묘사했다. 1928년, 홈스는 애인 도로시(Dorothy)와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프랑스 남부에 있는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에마 골드먼(Emma Goldma)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홈스는 페기 구겐하임과 운명적인 첫 만남을 가졌다. 페기 구겐하임은 그가 1934년 낙마 사고의 후유증으로 죽을 때까지 그와 평생을 함께했다. 남편의 바람기로 멜로드라마 같은 사건 이후, 구겐하임은 남편을 떠났고, 홈스도 도로시를 버렸다. 페기의 수백만 달러 상속 재산 덕분에 그들은 적어도 편안한 생활을 했다. 페기는 나중에 이렇게 썼다. "존 홈스와 저는 2년 동안 여행만 다녔다. 최소 20개국을 여행했고, 1천만 마일을 여행했다." 마침내 1931년, 그들은 런던에 정착했다. 그들은 다트무어 외곽에 있는 외딴 튜더 양식의 저택인 헤이포드 홀을 여름 별장으로 삼았다. 이곳에서는 술이 술술 흘러나왔고, 이야기도 끊이지 않았다. 안토니아 화이트(Antonia White), 에밀리 콜먼(Emily Coleman), 그리고 주나 반스도 손님으로 자주 초대되었다. 홈스의 사망으로 홀로 되면서 외로움과 자유를 동시에 얻은 페기는 ‘최대한 유용한 존재’가 될 방법을 궁리한다. 그 결과 1937년 런던에 ‘구겐하임 죈(Jeune)’ 화랑(畫廊)을 연다. 인상주의 이후의 미술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그는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마르셀 뒤샹에게 조언을 구한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나를 기초부터 교육시켜야 했다. 당시 나는 현대미술의 여러 경향을 구별할 수 없었던 문외한이었다. 그는 나에게 초현실주의와 입체주의, 추상미술의 차이를 가르쳐 주었다. 그런 다음 나를 모든 미술가에게 소개했다. 그들은 모두 그를 숭배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가는 곳마다 넘치는 환대를 받았다.” 그 시기에 화랑에서 전시한 작가가 장 콕토(Jean Cocteau), 칸딘스키(Wassily Kandinski), 브랑쿠시(Constantin Brâncuși), 아르프(Jean Arp), 알렉산더 콜더(Alexander Calde), 몬드리안(Pieter Mondriaan), 이브 탕기((Yves Tanguy) 등이었다.
<더글러스 가먼>
3. 갤러리 구겐하임 죈(Jeune)을 열도록 이끈 더글러스 가먼
1934년, 잡지 편집자이자 시인이며 사회주의자인 더글러스 가먼(Douglas Garman)은 페기 구겐하임이 사우스 하팅에 있는 어머니의 별장을 방문했을 때 서식스(Sussex) 시골의 매력을 소개했다. 페기의 연인인 작가이자 비평가(批評家)인 존 페라 홈스가 죽기 1년 전에 함께 살고 있던 런던에서 처음 만났다. 홈스가 낙마 사고와 수술 합병증 등으로 떠난 후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져서 결국 연인으로 발전했다. 햄프셔에서 여름을 보낸 후, 페기는 피터스필드(Petersfield) 근처 서식스 숲 속의 집인 Yew Tree Cottage를 샀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정말 가정적이었다. 이른 봄이면 숲은 야생 마늘로 가득했고… 아이들(페겐과 신드바드)은 새 둥지를 찾는 것을 좋아했고, 우리는 천상의 뻐꾸기 울음소리를 들었다."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그와의 삶을 통해 그녀는 자신의 삶을 재구성하기 시작했고, 오랫동안 품어왔던 자신의 미술관을 열겠다는 꿈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뒤샹과 그의 작품 샘(Fountain)>
4. 의심은 가지만 정말 플라토닉 사랑을 고집한 마르셀 뒤샹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은 그녀가 파리에 머물 때 첫 남편 베일의 소개로 만났다. 1930년 어느 날 파리에서 페기는 뒤샹을 만나러 간다. 그날 페기 구겐하임은 뒤샹의 아틀리에 계단을 오르다 미끄러졌다. 그녀가 들고 있던 와인 잔이 깨졌고, 뒤샹은 웃으며 말했다. “페기, 예술이란 건 이렇게 넘어지면서 배우는 거야.” 그 말에 그녀는 완전히 매혹됐다. 두 사람은 그날 밤 새벽까지 포도주를 마시며 ‘레디메이드’와 ‘사랑의 실험’에 대해 토론했다. 이상하게도 뒤샹은 그녀를 침대로 이끌지 않았다. 그녀도 침대로 유혹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벽에 붙은 자신의 ‘샘(Fountain)’ 사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변기(便器)가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야.” 그녀는 그 순간 깨달았다. 이 남자는 예술을 침대(寢臺)로 삼는 사람이다. 그녀는 그에게서 ‘육체의 사랑’ 대신 ‘개념의 사랑’을 배웠다. 뒤샹과의 지적 연애는 그녀의 첫 번째 예술적 계시였다. “사랑이 꼭 몸으로만 표현될 필요는 없구나.”라면서 훗날 그녀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었다. “뒤샹은 나를 유혹하지 않았다. 대신 나로 하여금 예술을 유혹하게 만들었다.” 사실 20세기의 가장 냉소적이고 장난기 넘치는 예술가인 뒤샹은 뉴욕에 머물던 시기에 브라질 예술가 마리아 마틴스((Maria Martins)를 만났다. 그녀는 미국 주재 브라질 대사의 아내였는데, 결혼했지만 매우 자유롭고 반항적이었다. 그녀는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를 융합하여 고통, 괴로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독특한 조각 형태를 개발했다. 뒤샹은 이 여인에게 꽂혀서 열렬한 연애편지를 보내고 죽고 못 살 정도였으니 페기는 눈에 찰 리가 없었을 수도 있겠다. 그래서 마르셀 뒤샹은 페기 구겐하임을 파리에서 아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소개했다. 뒤샹은 다양한 모습과 표정으로 보아 그녀가 현대 미술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챘고, 그녀에게 미술을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여성을 가르치는 것은 재정적으로 수익성이 없는 일로 여겨졌지만, 그는 서비스에 대한 대가로 특별한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 더욱이 페기는 런던에 갤러리를 열 계획이었고, 그곳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로 가득 채우는 것을 일종의 의무로 여기고 있었다. 뒤샹의 우정은 페기가 만날 수 있는 최고 예술가들을 잔뜩 소개해 주었다. 뒤샹은 장 콕토(Jean Cocteau)를 소개했고, 콕토는 전시 서문을 썼다. 베케트는 서문을 번역하여 네덜란드 화가 헤이르 판 벨데(Geer Van Velde)에게 소개했다. 구겐하임 죈느(Guggenheim Jeune) 갤러리는 1938년 1월 24일 장 콕토의 드로잉 30점으로 개관했다. 파리에서 보내온 두 장의 커다란 리넨 시트에는 생식기(生殖器)와 음모(陰毛)를 드러낸 여러 인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 물건들은 크로이던(Croydon) 공항에서 압수되어 억류되었는데, 페기와 뒤샹이 서둘러 힘을 써서야 통관되어 전시할 수 있었다.
<첼리체프와 그의 작품>
5. 러시아 화가의 불꽃같은 질투 ― 파벨 첼리체프
러시아 귀족가문 출신의 파벨 첼리체프(Pavel Fyodorovich Tchelitchew)는 초현실주의 화가 겸 세트와 의상 디자이너였다. 그는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파리로 망명하였다. 그는 예술보다 육체를, 철학(哲學)보다 욕망을 믿는 남자였다. 그는 동성연애자였으며 페기 구겐하임과 불꽃 같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은 호텔 침대 위에 캔버스를 펼치고 서로의 몸을 그리며 사랑을 나눴다. 페기는 웃으며 그 장면을 “살아 있는 누드화 수업”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의 질투는 폭풍 같았다. 어느 날, 그녀가 그에게 말하지 않고, 뒤샹의 전시회에 혼자 다녀오자 그는 분노(憤怒)에 차서 그녀의 초상화를 찢어버렸다. “너는 예술가를 사랑하지 않아. 예술가의 이름을 사랑하지!”라면서 그녀에게 엄청 화를 냈다. 페기는 조용히 담배를 피우며 그 말을 들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인정했다. “맞아, 나는 그들의 이름도, 그들의 열정도, 그들의 파멸조차 사랑했다.”라고 되뇌었다. 그가 불같이 화를 내고 떠난 뒤, 그녀는 침대 옆에 찢어진 초상화 조각을 걸어두었다. 그녀는 말했다. “그건 내 첫 번째 ‘개인전’이었어. 내 감정이 걸린 작품이었으니까.” 남다른 예술과 사랑에 대한 감정을 가진 페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맥스 에르스트와 그의 작품 안티포프>
6. 두 번째 남편, 다다이스트이자 초현실주의 화가 맥스 에른스트
맥스 에른스트(Max Ernst)는 독일 태생으로 작가 및 예술가로 성장한 루이제 슈트라우스와 결혼하였으나 처자식을 독일에 둔 채 프랑스에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예술 활동을 하고 있었다. 초창기에는 어려운 생활을 했으나 파리와 미국 등을 드나들며 전시한 그의 작품이 알려져 그런대로 견뎠다. 1938년, 파리의 한 파티. 페기 구겐하임은 맥스 에른스트(Max Ernst)의 눈빛에 사로잡혔다. 그녀가 다가가 “어떤 그림을 좋아하나요?”라고 묻자, 그는 “당신이 내 그림 같네요.”라고 답했다. 그 한마디로 둘은 함께 영혼과 육체의 용광로(鎔鑛爐)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그의 작품을 여러 점 구입하여 런던의 갤러리에 전시했다. 2차 대전으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게슈타포는 그를 체포했다. 그녀는 그를 나치의 검문소에서 구해내기 위해 직접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서류를 위조(僞造)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사랑을 위해 국경을 넘었다. 결국 1941년, 둘은 미국으로 탈출해 결혼했다. 뉴욕에서 함께 운영한 <Art of This Century> 갤러리에서 그들은 예술계의 ‘파워 커플’로 떠올랐다. 그들의 침실엔 캔버스와 붓이 널려 있었고, 에른스트는 종종 페기의 알몸 위에 직접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하곤 했다. 그녀는 웃으며 “나는 그의 캔버스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사랑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람기 많은 에른스트는 새로운 여인을 만나 페기를 떠나게 된다. 구겐하임과 결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전부터 관계를 맺던 레오노라 캐링턴(Leonora Carrington)과 계속 연루되어 그녀와 함께 말을 타며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에른스트에게 새가 집착의 대상이었던 것처럼 캐링턴에게는 말이 그랬다. 1946년 10월, 그는 캘리포니아주 베벌리힐스에서 미국 초현실주의 화가 도로시아 태닝(Dorothea Tanning)과 이중 결혼식을 올렸다. 이들은 1953년까지 애리조나주 세도나에서 살았다. 페기는 두 번째 남편도 배신하고 떠났지만 “그가 떠났어도, 그림은 남았으니까.”라고 위안했다. 이 결혼은 그녀를 상처 입혔지만, 동시에 초현실주의를 미국으로 옮겨온 전환점이었다. 즉 사랑의 대가로 그녀는 미술사를 얻은 것이었다.
<샤무엘 베케트와 고도를 기다리며>
7. 고도를 기다리는 밤의 철학자 사무엘 베케트
1939년 Boxing-day(12월 26일) 파리의 허름한 바인 Bosquet’s restaurant에서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취해 있었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가 연 파티에서 그녀는 테이블 건너편에 안경을 쓴, 가늘고 조용한 아일랜드 남성의 모습을 보았다. 베케트는 제임스 조이스의 비서 겸 서기 노릇을 하고 있을 때이다. 그녀는 오래도록 사무엘 베케트를 응시했다. 그녀가 자신을 ‘구겐하임 가문의 딸’이라고 소개하자, 베케트는 무심(無心)하게 말했다. “그건 이름이지, 영혼은 아니잖아요.” 그 말에 그녀는 즉시 이 남자에게 끌렸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거의 말없이 생제르맹데프레에 있는 그녀의 아파트로 향했다. 그들은 그 후 12일 동안 같은 침대에서 함께 보냈다. 그들의 사랑이 유일하게 방해받은 순간은 베켓이 침대에서 뛰어내려 근처 가게에서 샴페인 몇 병을 사서 돌아왔을 때와 중간중간 샌드위치나 크로와상을 먹을 때뿐이었다고 한다. 페기가 마침내 포옹에서 벗어나자, 베켓은 "고마워요. 오래도록 즐거웠어요."라고 중얼거렸단다. 페기는 자신의 책에서 베케트를 "서른 살쯤 되어 보이는 키가 크고 늘씬한 아일랜드인으로, 커다란 녹색 눈을 하고 있었지만 결코 상대방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안경을 썼고, 항상 멀리서 지적(知的)인 문제를 풀고 있는 듯했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어리석은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라고 썼다. 또 그녀는 훗날 “그의 침묵(沈默)이 내 모든 철학보다 깊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낮에는 글을 쓰고, 밤에는 그녀에게 프루스트를 읽어주었다. 베케트는 페기가 고전 미술에 대한 관심을 멈추고 현대 미술 작품 수집에 집중하도록 설득했다. 하루는 그녀가 “왜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나를 이해하지 않기 때문이지.” 베케트와 그녀가 파리에서 보낸 밤과 아침의 이야기를 조이스나 다른 사람에게 꼭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가 한참 동안 페기를 못 만나다가 우연히 페기를 찾아와서 그녀의 집에서 2주간을 함께 보낸 적도 있었다. 베케트는 그 내내 술에 취해 있었다. 섹스를 시도했으나 전혀 짜릿하지 않았다. 베케트는 술을 마시면 발기를 유지하는 데 애를 먹었다. 그럴 때마다 두 사람은 침대를 박차고 나와 파리 거리를 거닐며 술을 계속 마셨다. 이 관계는 베케트가 더블린에서 온 아일랜드 여성과 성관계(性關係)를 가졌을 때 처음으로 끝났다. 그는 페기에게 이런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랑 없이 사랑을 나누는 건 브랜디 없이 커피를 마시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며 용서를 구했다. 페기는 그 헛소리를 전혀 믿지 않았다. 그러나 베케트가 사창가에서 포주에게 칼에 찔린 직후, 그들은 화해했다. 그때 페기가 그의 병실을 찾아가 최대한 유혹적으로 사랑한다고 말했다. 베케트는 곧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고, 그녀를 떠났다. 떠나면서 남긴 이별 편지는 단 한 문장이었다. “당신은 나의 암흑 속 등불이었지만, 지금은 불을 꺼야 할 시간입니다.” 그녀는 그 편지를 버리지 않고 간직했다가 베니스 집 벽에 걸어두었다. “그건 내 삶의 가장 짧은 시(詩)였어,”라고 그녀는 말했다. 베케트는 더 이상 페기와 함께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그는 자신보다 여섯 살 많은 피아니스트 수잔 드슈보-뒤메닐과 관계를 맺었다. 수잔은 상처받은 작가를 곁에서 잘 보호하여 결국 1961년 그의 아내가 되었다. 페기는 베케트에게서 거절당하자 샘의 친구 중 한 명과 잠자리를 가졌고, 이는 베케트의 사랑에 질투의 불을 다시 지피려고 했다. 그녀는 이 아일랜드 남자를 되찾는 데 어느 정도 집착하며 친구 에밀리 콜먼에게 "그와 함께 있는 게 너무 좋아. 점점 더 내 진짜 삶이 되어가고 있어. 이제 다른 모든 것, 필요하다면 섹스까지도 포기하고 그에게 집중하기로 했어."라는 마음을 내비치는 편지를 썼다. 그녀는 베케트의 삶에서 수잔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나이 든 음악가를 제대로 된 경쟁자로 여기지 않으며 "그녀는 커튼을 치는 동안 나는 장면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베케트는 페기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잠자리를 거부했다. 페기는 그를 “내가 아는 남자 중 가장 침대에서 능숙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잭슨 폴록과 그의 벽화>
8. 창조의 폭발과 실패한 섹스의 알코올 중독자 잭슨 폴록
1943년, 구겐하임은 누더기 차림의 젊은 화가 잭슨 폴록(Jackson Pollock)을 처음 봤다. 그의 손에는 페인트가 묻어 있었고, 눈빛은 마치 술에 취한 짐승 같았다. 그녀는 즉시 그에게 반했다. 그러나 이번엔 육체가 아니라, 예술적 본능에 끌렸다. 당시 폴록은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아직 개인전을 열지 못했고, 그의 상징적인 드립 페인팅(Drip Painting) 중 첫 작품을 제작하기까지는 몇 년이 걸렸다. 구겐하임은 그의 작품에 대해 확신이 없었지만, 조수였던 하워드 푸첼과 연인이었던 마르셀 뒤샹에게 설득당했다. 두 사람 모두 폴록의 작은 작품에서 가능성을 보았던 것이다. 페기 구겐하임은 잭슨 폴록에게 맨해튼 타운하우스 벽화를 의뢰했고, 당시로서는 흔치 않은 매월 150달러 주기로 계약을 했다. 폴록과 그의 미래 아내가 될 리 크래스너(Lee Krasner)는 뉴욕에 있는 공동 아파트에서 근근(僅僅)이 살아가고 있었기에, 그 돈은 정말 큰 도움이었다. 폴록은 그녀의 후원금으로 매일 술을 마시고, 그림을 그릴 생각도 않았다. 마치 조선시대 유명한 취옹(醉翁)인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이나 취화선(醉畫仙)인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 그림그리기에는 게으르고 마냥 취생몽사(醉生夢死)였다. 페기는 분노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그의 부인 크래스너는 계약 미이행으로 후원금이 끊길까 걱정이었다. 기다리던 페기도 못 참고 기한을 정해서 작품을 제출하라고 독촉을 했다. 마감일 전날 밤 크래스너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폴록은 아직 캔버스에 하나의 점이나 줄도 그리지 않고 술 취한 몽롱(朦朧)한 눈빛으로 헤롱거리고 있었단다. 그녀는 그의 경력이 끝났다고 확신하며 잠들었단다. 다음 날 아침 그녀가 눈을 떴을 때, 160제곱피트(약 4.5제곱미터)의 캔버스는 이미 광란의 에너지 넘치는 붓놀림으로 변해 있었다. 청록색, 노란색, 빨간색, 검은색의 얼룩들이 하얀 배경 위에 고리처럼 휘감기고 소용돌이쳤는데, 폴록은 훗날 이 광경을 "미국 서부의 모든 동물, 소, 말, 영양, 물소가 몰려드는 듯한 광경"이라고 묘사했다. 모든 것이 그 빌어먹을 표면을 가로질러 돌진하고 있었다. 폴록은 캔버스를 말아 구겐하임의 아파트로 몇 시간 남지 않은 채 가져갔다. 페기는 오히려 그가 마구 던진 페인트 속에서 새로운 미학을 봤다. 그녀는 말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자기 영혼을 내던지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복잡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했다. 폴록이 취해 그녀의 파티에서 난동을 부렸을 때도, 그녀는 조용히 그를 감쌌다. “그는 내 아이 같았어요. 하지만 그 아이는 신의 불을 가지고 놀았죠.” 그녀의 감정적 후원이 없었다면, 폴록의 추상표현주의(抽象表現主義)는 세상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그를 침대에서 사랑했는지는 모르지만, 예술 속에서 사랑했다. 여배우 에이미 매디건((Amy Madigan)이 구겐하임을 연기한 에드 해리스(Ed Harris) 감독의 2000년 영화 <폴록>에서는 폴록과 페기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암시가 있었다. 사실 그는 몸과 정신으로 페기의 그물 스타킹 속으로 뚫고 들어온 예술가의 드문 모습이었다. 폴록의 이 벽화는 크기가 대형이라서 아파트 벽을 헐어야 했다. 페기가 1948년 뉴욕에서 유럽으로 돌아갈 때 이 그림을 아이오와 대학에 기증했는데, 이 학교 미술학과 학장이 운반비 40달러가 비싸다고 페기에게 좀 지원해 달라고 서한을 보냈단다. 현재 시가로 대충 1억 5천만 달러가 넘는 엄청난 고가(高價)의 그림인데...운반비가 아깝다니. 쩝.
<브랑쿠시와 우주의 새>
9. 섹스 한 번에 얼마씩 깎아줄까? -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루마니아 출신의 프랑스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도 페기의 낚싯대에 걸렸다. 1940년 여름, 2차 대전은 치열(熾烈)하게 전개되고, 나치는 프랑스로 진군하고 있었다. 파리의 예술가와 상인들은 예술을 싫어하는 나치가 점령하기 전에 가능한 한 많은 작품을 팔아치우려 애썼다. 그중 일부는 유대인이었고, 그들이 소유한 현대적이고 추상적인 예술품은 독일군의 눈에는 퇴폐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대로에는 폭탄이 떨어지고 있었지만, 예술과 남자에게 중독(中毒)된 페기는 아직 무척 중요한 일이 남아 있었다. 전쟁의 공포를 무릅쓰고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스튜디오에 페기 구겐하임이 나타난 것이다. "전쟁 중에 브랑쿠시 작품을 사고 싶었어요."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우주의 새>는 브랑쿠시가 가장 좋아하는 조각품 중 하나였어요. 매일 그를 보러 갔었죠. 조각을 보러 간 것이지만 그와 잠을 자지 않을 수가 없었죠. 한두 번이면 될 줄 알았는데, 끔찍한 건 그와 섹스를 하면 <우주의 새>가 더 싸질 거라고 생각했던 거예요." 사실 브랑쿠시는 흥정하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성격이 급해서 돈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그냥 가격을 물어보는 정도였는데, 너무 비싸다고 느꼈단다. 그래서 친구가 브랑쿠시를 만나서 다시 합의를 봤고, 어쩔 수 없이 원래 요구했던 금액을 지불했다. 어쨌든 그녀는 그 새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제가 <우주의 새>를 가지고 돌아가려고 할 때, 브랑쿠시는 그 작품을 품에 안고 꺼내 보였는데, 그의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어요. 그가 저와 헤어지는 것인지, 아니면 그가 가장 아끼는 작품과 헤어지는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조각의 모티프에는 인간 머리와 남근(男根)의 상징이 내재되어 있다고 한다.
<이브 탕기와 페기에게 선물한 목걸이>
10. 한 쌍의 귀걸이로 남은 이브 탕기
이브 탕기(Yves Tanguy)는 1938년 런던 구겐하임 죈(Guggenheim Jeune) 미술관에서 열린 페기 구겐하임 전시회 당시, 자신의 가장 작은 작품인 귀걸이를 선물했다. 이후 그녀는 1942년 10월 20일 뉴욕 미술관 겸 갤러리인 '이 세기의 예술(Art of This Century)' 개막식 날,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귀걸이와 함께 이 귀걸이 중 하나를 착용하며 추상(抽象)과 초현실주의에 대한 그녀의 공평한 입장을 보여주었다. 두 미술 사조(思潮)를 대변하는 두 사람의 사랑을 한 몸으로 받아낸 그녀의 퍼포먼스의 결정판이었다. 나중에 이브 탕기의 아내는 저녁 식사 중 그와 페기의 불륜 사실을 알고 그녀에게 생선을 던지려고 했다고 한다. 불륜녀와 아내랑 셋이서 태연하게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탕기의 담력이 새 가슴 금삿갓은 존경스러울 뿐이다.
<케이지가 건반 뚜껑만 열고 4분 30초간 연주 하지 않는 작품>
11. 전위음악가(前衛音樂家)로 백남준의 친구였던 존 케이지(John Cage)
어떤 소리든 음악을 이룰 수 있다는 그의 믿음은 그의 가장 중요하고 논쟁적인 작품인 <4분 33초(1952)>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창 시절 음악으로 평균 점수를 무척 떨어뜨렸던 음치 금삿갓의 눈에 이런 것도 음악이라 할 수 있다면 이 세상에 음악 아닌 것이 없겠다. 이 작품은 건반 커버를 열어서 뒤쪽으로 제쳐놓고 4분 30초가 지난 후, 다시 건반 커버를 내려서 덥는다. 이 작품 <4분 33초>는 연주자가 콘서트 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는 동안 발생하는 소리들로 구성된다. 이후 몇 년 동안 케이지는 <4분 33초>의 반교조적(反敎條的)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잠재력을 탐구하며, 음악·무용·시·연극·시각 예술·관객 참여, 그리고 우연의 조합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을 선보여 왔다. 음악에서처럼, 그는 통제력, 창작력, 그리고 결단력을 내려놓고 모든 참여자의 자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한 창의성을 발휘했다. 케이지는 예술이 삶을 스스로 드러내는 방식이며, 예술이 삶에 스며들어 있으며, 둘은 분리될 수 없다고 믿었다. 그의 전위적인 공연을 페기의 갤러리에서 개최하자는 제안을 그냐가 거절하자 둘의 관계가 틀어졌다. 그러다가 나중에 둘은 다시 화해를 하고 일본을 같이 방문해서 백남준의 부인인 오노 요코와 함께 도쿄와 교토 등에서 며칠을 같이 보냈다.
<페기와 그의 자녀들>
페기 구겐하임이 만나서 사랑을 나눈 남자들 중 대충 이 정도의 인물로 마감을 한다. 이 외에도 유명한 예술가가 엄청나게 많지만 다 다룰 수는 없다. 1965년 <ARTFORUM>의 헬렌 프랭컨탈러(Helen Frankenthaler) 인터뷰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1,000명의 남자와 자면서 미술품을 침대에서 구매한 것이 많으냐고 물었을 때 “침대에서 그림을 많이 산 것 같지는 않아요. 다만 제가 일어나기 전에 사람들이 아침 일찍 찾아오곤 했던 기억이 나요. 한순간도 편할 틈이 없었죠. 9시쯤부터 사람들이 전화하기 시작했어요. 사실 제가 침대에서 직접 산 유일한 그림은 달리(Salvador Dali)의 작은 그림이었는데, 제목은 <풍경 속에서 잠자는 여인>이었어요! 정말 침대에 딱 맞는 그림이었어요.”라고 대답했다. 베니스의 혼자 남은 자신의 궁전이자 미술관에서 말년의 구겐하임은 종종 정원에 앉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사랑한 남자들은 모두 그림 속에서 아직 살아 있어.” 그녀의 집 벽에는 뒤샹의 사진, 에른스트의 조각, 폴록의 캔버스가 걸려 있었다. 방문객이 “당신은 왜 그렇게 많은 남자를 사랑했나요?” 묻자 그녀는 웃으며 답했다. “나는 남자를 사랑한 게 아니라, 그들이 가진 창조(創造)의 불꽃을 탐했어요.” 그녀의 욕망은 예술을 낳았고, 그 예술은 세계의 미술관을 채웠다. 그녀의 침실은 곧 현대미술의 산실이었다.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인터뷰에서 그녀가 일곱 번의 낙태와 실패한 코 성형 수술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냉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니 그녀의 회고록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고어 비달은 그녀의 회고록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녀는 파티를 열고 작품과 사람들을 수집했지만, 구겐하임에게는 뭔가 멋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금삿갓에게 페기 구겐하임의 연애사는 스캔들의 목록이 아니라, 현대 미술의 계보(系譜)와 예술가들의 가슴을 연결하는 오묘한 비밀 지도로 보인다. 베일은 그녀에게 예술의 길을, 뒤샹은 그녀에게 사유(思惟)의 문을, 첼리체프는 욕망의 어둠을, 에른스트는 예술의 고통을, 베케트는 언어의 고독을, 그리고 폴록은 창조의 불을 남기거나 알려주었다. 그녀는 그 모든 남자를 통해 변하지 않는 하나의 진리에 이르렀다. “사랑은 변하여 끝나지만, 예술은 남는다.” 그리하여, 한 여자의 욕망은 결국 한 세기의 미학으로 승화되었다. 베니스의 대운하 위로 석양이 질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한다. “나는 예술을 사랑한 것이 아니다. 나는 사랑 자체가 예술이 되는 순간을 사랑했다.” 예술 세계에서는 전설적이었지만 인간적인 모성애에서는 냉정하고 결핍이었다는 평가도 많다.그녀는 예술가가 아니면서 더 예술적인 삶을 삼며, 예술에 큰 획을 그었다. 아무튼 현대 미술사는 그녀와 그녀의 삼촌 솔로몬에게 큰 빚을 진 셈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