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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班婕妤 又(반첩여 우) / 또 반첩여

금삿갓의 漢詩工夫(251031)

by 금삿갓

班婕妤 又(반첩여 우) / 또 반첩여

- 王維(왕유)


恠來粧閣閉

괴래장각폐

●○○●●

이상하구나, 장각이 닫혀있고


朝下不相迎

조하불상영

○●●○◎

조회를 마쳐도 마중하지 않네.


總向春園裏

총향춘원리

●●○○●

모두가 봄 동산 속을 향하여


花間語笑聲

화간어소성

○○●●◎

꽃 사이 웃고 떠드는 소리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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多見(다견)이 爲常(위상)이오. 少見(소견)이 爲恠(위괴)니, 恠夫人皆迎媚至尊而婕妤(괴부인개영미지존이첩여)는 獨閉却粧閣(독폐각장각)하고, 罷朝而下(파조이하)하야. 絶不相迎(절부상영)하니 抑何甘遠幽默(억하감원유묵)이 如是乎(여시호)아.

많이 보이는 것은 항상 있는 일이요, 적게 보이는 것이 괴이한 것이니, 괴이하게도 부인은 모두 지존을 아양 떨며 맞지만, 첩여는 홀로 장각을 닫아걸고, 조회를 마치고 내려와도 끊고 영접을 아니 하니, 도리어 어찌 달콤함을 멀리하고 그윽하게 침묵함이 이와 같은가?

又推婕妤之意曰(우추첩여지의왈) “我卽相迎(아즉상영)이 亦無益處(역무익처)오. 総不過向春園裏花間(총불과향춘원리화간)에 多一人笑語之聲而已(다일인소어지성이이)라”하니, 其自甘恬退如此(기자감념퇴여차)러라.

또 첩여의 뜻을 미루어 말하기를 “내가 곧 맞이함은 또 더 할 곳이 없고, 모두가 봄 동산에 꽃 사이를 향함에 불과하며, 한 사람을 웃고 말하는 소리가 많을 뿐이다.”라 하니 그가 스스로 달콤하고 편안함으로부터 물러남이 이와 같다.

班婕妤(반첩여)는 官名(관명)이오. 姓(성)은 班(반)이라. 班婕妤得寵於君(반첩여득총어군)이라가 失寵於君(실총어군)하야. 獨處深宮(독처심궁)하야. 愁苦感歎(수고감탄)을 豈可詳述也哉(기가상술야재)아.

반첩여는 관명이오, 성은 반이라. 반첩여가 임금의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임금의 총애를 잃어 깊은 궁궐에 홀로 처하니 근심과 괴로움을 느껴 탄식함을 어찌 자세히 설명해 말할 수 있겠는가?

* 班婕妤(반첩여) : 전한 부풍(扶風) 안릉(安陵) 사람. 성제(成帝)의 후궁으로 반첩여(班倢伃)라고도 부르는데, 첩여는 상경(上卿)에 해당하는 궁중 여관(女官)의 이름이다. 처음에 소사(少使)로 궁중에 들어왔다가 대행(大幸)을 입어 첩여가 되었다. 어질고 우아하여 처음에는 성제의 총애를 독점했지만, 자태가 가볍고 날씬한 데다 노래와 춤에 능한 조비연(趙飛燕) 자매가 궁에 들어오고 나서는 총애가 식었다. 홍가(鴻嘉) 3년(기원전 18) 자신이 조비연 자매에게 미치지 못함을 알고, 또 모함에 빠져 해를 입을까 걱정하여 스스로 장신궁(長信宮)으로 물러나 태후(太后)를 모시며 지냈다. 부(賦)를 잘 지어 「자도부(自悼賦)」와 「도소부(搗素賦)」, 「원가부(怨歌賦)」 등을 지었다. 성제가 죽자 봉원릉(奉園陵)으로 있다가 죽었다.

* 恠來(괴래) : 이상히 여기다. 래(來)는 어조사의 형식으로 쓰였다.

* 粧閣(장각) : 궁녀의 화장을 하는 거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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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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