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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雜詩 又(잡시 우) / 또 잡시

금삿갓의 漢詩工夫(251031)

by 금삿갓

雜詩 又(잡시 우) / 또 잡시

- 王維(왕유)


君自故鄕來

군자고향래

○●●○○

그대 고향에서 오셨으니


應知故鄕事

응지고향사

○○●○◆

응당 고향 일을 아시지요?


來日綺窓前

내일기창전

○●●○○

오던 날 비단 창문 앞에


寒梅著花未

한매저화미

○○●○◆

차가운 매화 안 피었나요?

꽃.JPG

此(차)는 逢故鄕之友(봉고향지우)하야. 問家消息者也(문가소식자야)라. 乃言曰(내언왈) “君(군)이 自吾故鄕而來(자오고향이래)하니, 也應知故鄕之事(야응지고향지사)리라. 君之來日(군지내일)에 吾家之窓前梅(오가지창전매)가 今已開放乎(금이개방호)아. 未開放乎(미개방호)아. 不可知也(불가지야)라.”

이는 고향 친구를 만나서 집안 소식을 물은 것이다. 이에 말하기를 “그대가 나의 고향으로부터 왔으니, 또한 응당 고향의 일을 알 것이다. 그대가 떠나오던 날에 우리 집 창 앞의 매화가 지금 이미 피었는지? 아직 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라고 한 것이다.

此人(차인)이 不問其家中消息(불문기가중소식)하고 何必只及於窓梅耶(하필지급어창매야)아. 此必素所愛惜故(차필소소애석고)로 問之者也(문지자야)오. 我爲客頗久(아위객파구)하야. 節屆發梅故(절계발매)로 爲一問耳(위일문이)라.

이 사람이 그 집안의 소식은 묻지 않고, 하필 다만 창 앞의 매화에만 미쳤는가? 이는 반드시 평소에 사랑하고 아꼈기 때문에 물은 것이고, 내가 나그네 된 지 자못 오래되어 계절이 매화가 필 때에 이르렀었기 때문에 한번 물은 것이다.

*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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