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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哭孟浩然(곡맹호연) / 맹호연을 곡하다.

금삿갓의 漢詩工夫(251116)

by 금삿갓

哭孟浩然(곡맹호연) / 맹호연을 곡하다

- 王維(왕유)


故人不可見

고인불가견

●○●●●

옛 친구는 만날 수 없어도


漢水日東流

한수일동류

●●●○◎

한수는 날마다 동으로 흐르네.


借問襄陽老

차문양양로

●●○○●

양양의 늙은이에게 물어보니


江山空蔡州

강산골채주

○○○●◎

채주에는 강산이 텅 비었다 하네.

강.JPG

此(차)는 維(유)이 孟浩然之死而作也(맹호연지사이작야)라. 故人(고인)은 從此(종차)로 不可得見 則世事速迅(불가득견즉세사속신)과 浮生存亡(부생존망)이 如水之東流而不復還(여수지동류이불부환)이라. 故(고)로 見漢水而感傷也(견한숭감상야)라. 問于襄陽之老翁(문우양양지노옹) 則答云 孟浩然之死後(즉답운맹호연지사후)에는 蔡州之江山(채주지강산)이 空虛若無人耳(공허약무인이)라.

이 시는 왕유가 맹호연의 죽음에 지은 것이다. 친구를 이제부터는 볼 수 없으니, 세상사의 빠름과 부평초같이 떠다니는 인생의 存亡(존망)이 마치 물이 동으로 흘러가 다시 돌아오지 않음과 같다. 그러므로 한수를 보고 아픔을 느낀 것이다. 양양의 노인에게 물으니 “맹호연이 죽은 뒤로는 채주의 강산이 공허하여 아무도 없는 것 같을 뿐이다.”라고 답한 것이다.

구름.JPG

*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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