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송별시다. 최구제가 남산으로 가니, 장안성의 모퉁이에서 손잡고 이별할 때에 물었다. “며칠을 지난 다음에 돌아와 다시 볼 수 있겠는가?”하고, 다시 부탁하기를 “산중에 계수나무가 있으니 그대의 돌아옴은 이 계수나무 꽃이 싸락눈 같이 되기 전으로 기약하라.” 하니 곧 돌아올 것을 이렇게 바랄 뿐이다.
* 崔九弟(최구제) : 즉 최흥종(崔兴宗)을 가리킨다. 박릉(현 하북성 정주) 사람. 당 시인. 일찍이 종남산에 은거하여 왕유, 로상(盧象), 배적(裵迪) 등과 함께 유람하며 시를 짓고, 거문고와 술을 즐기며 유유자적했다. 잠시 우보궐(右补阙), 요주장사(饶州长史)를 지냈다. 그는 왕유의 아내 최씨의 동생이자 왕유의 어머니 최현군의 조카이다. 아홉째는 최씨 형제의 서열이다.
* 南山(남산) : 망천(辋川)을 지칭한다. 최흥종의 별장이 남산에 있었다.
* 城隅(성우):성의 모퉁이. 여기서는 경성인 장안성의 모퉁이다.
* 이 시는 중국 자료에는 제목이 <崔九弟欲往南山馬上口号與别(최구제욕남산마상구호여별)>로 되어 있다.
* 王維(왕유) : 자 마힐(摩詰). 산시성[山西省] 출생. 9세에 이미 시를 썼으며, 서(書)와 음곡(音曲)에도 재주가 뛰어났다. 아우인 진(縉)과 함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특히 기왕(岐王)의 사랑을 받아 731년 진사에 합격, 태악승(太樂丞)이 되었다. 후에 제주(濟州:山東省 荏平縣)의 사창참군(司倉參軍)으로 좌천되었으나, 734년 우습유(右拾遺)로 발탁되어 감찰어사 ·좌보궐(左補闕) ·고부낭중(庫部郞中)을 역임, 이부낭중에서 급사중(給事中)이 되었다. 안녹산의 난을 당하여 반란군의 포로가 되어 협박을 받고 할 수 없이 출사하였다. 반란 평정 후 그 죄가 문책되었으나 아우 진의 조력과 반란군 진중에서 지은 천자를 그리는 시가 인정받아 가벼운 벌로 치죄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 다시 등용되어 상서우승(尙書右丞)의 자리까지 벼슬이 올라갔다. 그 때문에 왕우승이라고도 불렸다. 또한 왕유는 육조시대(六朝時代)의 궁정시인의 전통을 계승한 시인이라 하여 장안(長安) 귀족사회에서는 칭찬이 자자하였고 존경도 받았다. 그의 시는 산수 ·자연의 청아한 정취를 노래한 것으로 수작(秀作)이 많은데, 특히 남전(藍田:陝西省 長安 동남의 縣)의 별장 망천장(輞川莊)에서의 일련의 작품이 유명하다. 맹호연(孟浩然) ·위응물(韋應物) ·유종원(柳宗元)과 함께 왕맹위유(王孟韋柳)로 병칭되어 당대 자연시인의 대표로 일컬어진다. 또 그는 경건한 불교도이기도 해서, 그의 시 속에는 불교사상의 영향을 찾아볼 수 있는 것도 하나의 특색이다. 《왕우승집》(28권) 등이 현존한다. 그림은 산수화에 뛰어나, 수묵(水墨)을 주체로 하였는데, 금벽휘영화(金碧輝映畵)에도 손을 대고 있어 화풍 또한 다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순정 ·고결한 성격의 소유자로, 탁세(濁世)를 멀리하고 자연을 즐기는 태도 등은 남송문인화의 시조로 받들어지는 원인이 되었다. 송나라의 소동파(蘇東坡)는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평하였다. 당시는 장안(長安)에 있는 건축의 장벽산수화(牆壁山水畵)나 《창주도(滄州圖)》 《망천도(輞川圖)》 등이 알려져 있었으나 확실한 유품은 전하여진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