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이 없으면 우유나 고기를 먹지, 왜 저렇게들 난리야?” 벌떼처럼 몰려들어 빵을 달라면서 소리 지르는 인파들에게 던진 그녀의 일성(一聲)이다. 그녀는 프랑스 국민들의 배가 얼마나 고픈지 알 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녀가 바로 역사상 가장 사치스러운 왕비로 알려진 프랑스의 마리 앙트아네트(Marie Antoinette, 1755~1793)이다. 방탕(放蕩)·사치(奢侈)·무지(無知)·허영(虛榮)의 대명사처럼 낙인(烙印) 찍힌 그녀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왕가의 왕녀로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안주인이 된 지 10여 년이 되었으나 이곳 사정엔 깜깜하다. 그녀의 특별 영토인 트리아농 궁에만 있기 때문이다. 그곳엔 남편 루이 16세도 마음대로 출입이 불가능하다. 그녀의 이 말로 프랑스 대혁명을 촉발시킨 도화선 역할을 한 것이다. 하지만 마리 앙투아네트가 했다는 이 말은 사실이 아니라는 게 요즘의 정설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체제에 비판적인 세력들은 선전선동에 능하고 가짜뉴스를 실제처럼 생산하는데 능통하다. 혁명에 기름을 붓기 위한 선동용 가짜뉴스였던 것이다. 실제로는 루이 14세의 아내였던 스페인 왕가 출신 마리 테레즈 왕비의 말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마리 테레즈가 “빵이 없다면 파이의 딱딱한 껍질을 먹게 하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예쁘고 사랑스러웠으나 결코 사랑받지 못했던 그녀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해보고자 한다.
유럽의 패권(霸權)을 놓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는 여러 세기 동안 대립상태였다. 이런 대치관계를 종식시키려고 양국은 동맹을 맺게 되고, 그 동맹을 더욱 단단하게 하기 위해 양국의 공주, 왕자를 혼인시킨다. 오스트리아의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와 프랑스의 루이 16세가 그 주인공이다. 정략결혼으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가 겉으론 우방국이 되었으나 국가와 국민적으로 쌓였던 악감정이 오뉴월 볕에 봄 눈 녹듯 녹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같은 정서가 반영되어서인지 루이 16세는 눈이 시릴 정도로 파란 눈에 금발 머리를 가진 앙투아네트의 아름다움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당시 띨빵의 대명사답게 유럽에 소문 짠하다. 뚱보에 추남이며 똥매너에 춤맹 몸치에 음치(音癡)를 겸비했다. 교회에서 성가(聖歌)를 부를 때에 박자, 음정 무시하고 제 혼자 잘났다고 큰소리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고 기록돼 있다. 점잖은 무도회에도 똥꼬바지 차림에 머리빗 뒤 주머니에 꽂고, 깻잎머리 스타일로 나올 정도로 매너가 꽝이다. 하루 종일 사냥이나 열쇠 조립 놀이에 빠져서 녹초가 되어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들지만 마누라의 몸에는 손도 안 대고, 코를 있는 대로 골면서 퍼져 잔다. 그러니 한창 몸이 용광로처럼 끓어오를 나이의 마리가 신경질이 용솟음치는 것은 안 봐도 비디오다. 반면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닭 대가리 그 자체이다. 쭉쭉빵빵한 몸매, 천성적인 애교와 상냥함, 명랑 쾌활이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개인정보 보호법이 발효되기 전에 그녀의 학교의 생활기록부를 몰래 들여다보면 13살 될 때까지 불어, 독일어를 쓸 줄 몰랐던 Stone Head였다. 유럽 왕실의 필수조건인 교양·독서·지식과는 아예 담을 쌓고, 디스코텍, 오락실, 유명 아이돌가수 공연장에만 쫓아다니는 유명한 7 공주파 날라리였다. 게다가 질리도록 넘쳐나는 풍요로움에 어려서부터 길들여진 탓에 훗날 왕비가 돼서도 국민들의 빈궁한 삶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좋은 환경에서 잘 먹은 영양가가 머리로는 가지 않고 가슴으로만 모였는지 머리 보다 가슴이 좋았단다.
당시 귀부인들 최대의 관심사는 누구의 유방이 가장 아름다운가에 있었다. 그래서 여인들이 모이면 서로의 유방을 겨루는 ‘유방 콘테스트’를 열곤 했는데, 프랑스 왕실 부인 모임에서 예쁜 유방 1위는 언제나 앙투아네트 왕비가 독차지하곤 했다는 것이다. 호화로운 베르사유 궁정에 모인 귀부인들로부터 만장일치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방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녀의 가슴을 석고로 떠서 유방 모양 과일 그릇과 와인 잔 등을 만들었다. 조각된 그녀의 가슴 모형 잔은 왕비의 별장인 트리아농 궁의 유명한 명물이었다. 이 유방 잔은 그녀가 결혼하고 7년간의 처녀생활을 할 때 욕구불만이 최고도에 달했을 20세 무렵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반구형의 예쁜 잔은 젖꼭지를 밑으로 한 유방을 세 마리의 산양이 머리로 잔을 떠받들고 있는데, 수컷 산양(山羊)은 남성 욕망의 심벌로 이를 본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처녀아내(處女妻)’의 욕구불만이 잘 나타나 있다고 했다. 그녀의 가슴 사이즈는 자그마치 바스트 109㎝, 웨스트 58㎝이었다고 한다. 100만 달러의 보험금이 걸렸던 소피아 로렌(Sophia Loren)의 유방이나 풍만한 젖가슴으로 일세를 풍미했던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의 유방도 이에는 못 미쳤다. 역사적으로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방만 호사한 것이 아니었다. 클레오파트라는 두 유두(乳頭)에 황금 링을 걸고 다녔는데, 그 유방이 너무 예뻐서 안토니우스가 그녀의 유방을 본떠서 황금의 술잔을 만들어 여기에 술을 따라 마셨고 한다. 이뿐 아니라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왕비였던 메살리나는 유방을 황금 빛깔로 색칠했다고 하듯이 오랜 옛날부터 유방에 문신(文身)을 하고 화장을 하거나 장식품을 다는 것이 유행했다고 한다.
여성의 가슴에 대한 시대적 변천을 보면, 르네상스 시대 여자들은 자신의 가슴을 남자들의 눈앞에 드러냈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자연 그대로 수유(授乳)의 의미를 드러냈다면 절대주의 시대에는 성적 의도를 가지고 도발적으로 노출시켰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르네상스 시대에는 저절로 드러난 유방을 여자들이 목이나 얼굴을 가리지 않듯, 자연스러운 표현의 일환으로 가리지 않았다. 이후 시대가 흐르면서 여성의 유방은 옷 속으로 꼭꼭 숨어들어갔다. 하지만 절대주의 시대에 들어서면서 감췄던 유방을 가슴이 파인 의복 형태인 데콜테(Decolletee)가 발달하면서 의도적으로 다시 드러내게 됐다는 게 풍속사가(風俗史家) 에두아르트 푹스(Eduard Fuchs)의 분석이다. 특히 이 시대에는 코르셋을 통해 가슴의 형태를 극단적으로 강조하는 방식을 취했다. 여자들은 상의를 될 수 있는 한 넓고 깊게 팠다. 심지어 영국 찰스 2세의 궁정에서는 여인들의 복장이 모두 가슴을 완전히 드러낸 것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가슴 노출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목걸이 역시 여성 가슴에 남자의 눈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고, 특히 황금 십자가 형태 목걸이가 인기를 끌면서 일부 도덕적인 성직자들은 이를 신에 대한 모독으로 까지 생각했다고 한다. 여인들은 당당하게 가슴을 드러낸 채 거리를 활보했고 심지어 예배를 보기 위해 교회에 올 때도 가슴을 드러냈다. 그래서 고지식한 성직자들은 교회에 그 같은 복장을 한 채 오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같은 풍습은 강력한 인기를 얻었고, 17-18세기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선 오히려 일부 교단의 수녀(修女)들까지도 가슴을 드러내놓고 다녔다고 한다.
아무튼 이 웃기지도 않는 두 사람이 정략적으로 결혼을 하게 되는데, 야사(野史)에 따르면 프랑스는 별 희한한 요구조건을 내 건다. 시집올 때 오스트리아 물건은 속옷 하나라도 가져와서는 안 된다는 별 얄궂은 조건이지만 어쩌겠나, 딸 가진 부모가 죄인 것이다. 프랑스와의 국경 도시인 스트라스부르에 임시궁궐이 뚝딱 세워지고 신하들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쳐다보는 가운데 옷을 홀라당 벗고 프랑스제 속옷과 겉옷으로 모두 갈아입는다. 장신구도 또한 프랑스제로 바꾼다. 당시 이 광경을 보려고 양국에서 관광객이 많이 모였는데, 당시 25살의 젊은 괴테 조차도 이 행사를 보기 위해 일주일 전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양국의 정략적 필요에 따라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나서 오스트리아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5세의 왕세손 루이 오귀스트(루이 16세)의 결혼 계기를 마련하였고, 약혼 문서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전해졌다. 이렇게 결혼은 성사된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루이 16세의 결혼식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5,000여 명의 하객들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그날 무슨 일인지 엄청난 천둥과 번개가 쳤고, 결혼 축하 불꽃놀이를 즐기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압사해 130여 명이 사망했다. 이 조짐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불길(不吉)하고도 어두운 그림자로 엄습해 온 것인가 보다. 그녀가 왕세자비로 간택되어 베르사유 궁에 들어온 것은 그녀가 14세 때이며, 그의 남편은 황태자로 한 살 위인 15세 때였다. 그녀는 18세에 왕비가 되었고, 21세에 임신할 때까지 7년 동안 루이 16세는 비뇨기과의 질병 때문에 왕비를 처녀의 몸으로 그대로 있게 했다. 물론 병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7년이라는 긴 세월을 첫날밤은 물론 합방도 못하고 처녀로 지내게 했던 것이 나이 어린 왕비의 정신적인 면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결혼 첫날밤은 차치하고 매일 밤을 독수공방 하고 있다는 딱한 사정을 전해 들은 그녀의 오빠인 요셉 2세(Joseph II)는 매우 걱정이 되어 빈에서 일부러 파리로 와서 루이 16세를 설득해 그의 고추를 외과수술을 받게 했단다. 그 결과 사나이로서의 구실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왕비는 비로소 결혼 7년 만에 남편과 첫날밤을 치를 수 있었는데, 그다음 날 왕비는 어머니인 오스트리아의 여왕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에게 기쁨의 편지를 썼다고 한다. 훗날 알려진 바에 의하면, 루이 16세의 성적 결함(缺陷)은 알고 보니 의외로 단순한 진성 포경(包莖) 즉 우멍거지가 그 원인으로 밝혀졌다. 성공리에 고래잡이 수술(포경 수술)을 마친 왕실 주치의는 “골프 드라이버는 반드시 헤드커버를 벗기고 쳐야 멀리 갑니다.”라고 점잖게 충고했단다. 루이 16세의 병이 고쳐짐에 따라 부인과의 결혼생활도 원만해졌고 왕비는 임신이 되었다. 그래도 왕비는 무료한 생활에 한계를 느껴 쾌락을 얻기 위해 밤이면 마차를 몰고 젊은 족속들과 어울려 극장과 도박장을 출입하기 시작했다. 이것에도 싫증을 느끼고는 보석과 값진 장신구를 사들이는데 열중했다. 나중에는 1년에 무려 100벌의 옷을 만들게 했고, 귀걸이, 목걸이, 팔찌, 반지 등 새로운 장신구에도 눈을 돌리는가 하면 연극, 경마, 무도회를 매일 밤 열고, 베르사유 궁전 안에 ‘꿈의 궁전’이라는 프티 트리아농 궁을 꾸며서 매일 밤 친구들과 고관대작의 부인들을 불러들여 연회를 열었다. 처남의 도움으로 고추 수술을 받았지만 루이 16세 이 놈은 알고 보면 천성적으로 섹스 능력이 없는 놈이었다. 밤마다 무르팍 깨지도록 버벅댔지만 배삼룡처럼 비실비실 물러난다. 그래도 어찌어찌하여 그녀에게서 2남 2녀를 낳았으니 의무는 다했다고 봐야 한다.
밤마다 토끼처럼 깔짝깔짝 하니 열불이 있는 대로 터져 버린 그녀는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묻지마 관광 무도회에 푹 빠져 밤이면 밤마다 화려한 꽃놀이패로 놀아 재낀다. 이 부부는 각각 다른 침실을 사용했는데, 트리아농 궁에는 남편도 함부로 들어오지 못했다고 한다. 스웨덴 상원의원의 장남으로 유럽 귀부인들의 마음을 달뜨게 만든 동갑내기 미청년 한스 악셀 폰 페르젠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가슴앓이 한다. 일본 만화가 이케다 리요코 원작, 나가하마 다다오, 데자키 오사무 감독의 “베르사유의 장미”라는 애니메이션이 그녀의 삶을 다룬 것으로 유명하다. 한데, 페르젠은 19세 때 왕실 가면무도회에서 그녀를 만나서 사랑을 하게 되는데, 조금 후에 루이 16세가 황제로 즉위하자 황비가 된 그녀에게 나쁜 소문이 돌까 봐 조국인 스웨덴으로 돌아가서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한다. 그 후 30세에 다시 파리로 왔는데, 그때 그녀가 페르젠에게 트리아농, 생클루, 튈르리 궁의 야간 비밀 방문과 성 출입을 허락해 준다. 그렇게 사랑을 키워갔다. 1793년 38세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처형된다는 비보(悲報)를 들은 페르센은 그의 누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며, 단 한순간도 사랑하지 않은 순간이 없었고, 내 모든 것을 바쳤고, 가슴 깊이 사랑하였으며, 수천 번이라도 내 목숨과 바꿀 수 있었던 여인이 이제는 없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사랑하는 누이여, 지금의 나는 그저 그녀의 곁에서 죽고 싶은 심정일뿐이다. 오로지 그녀를 위하여” 정말 깊이 사랑하긴 한 모양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사치와 허영으로 왕실의 재정을 파탄시켰고, 그건 고스란히 프랑스국민의 궁핍으로 전가되었다. 또한 그녀의 엽기적(獵奇的) 애정 행각은 극에 달해 ‘베르사유의 매춘부’라는 별명이 붙여졌고, 세간에는 ‘왕비의 남녀 애인 34명 명단’이라는 블랙리스트가 찌라시처럼 돌아다녔다. 급기야 백성들의 분노와 원망은 일거에 폭발하며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대혁명을 일으킨다. 프랑스 대혁명의 한 가지 단초를 제공했던 보석 사기극이 있었다. 1775년 왕실을 출입하는 보석 세공사였던 샤를 오귀스트 베머와 폴 바상지는 세계 최고급의 다이아몬드 647개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배열된 훌륭하고 아름다운 목걸이를 만들었다. 당시 160만 리브르 상당의 가격이다. 루이 15세가 그의 애인인 듀 바리(Madame du Barry) 부인에게 선물하려고 주문한 것인데, 루이 15세 왕이 갑자기 죽어서 목걸이를 팔 수 없게 되자 빚더미에 앉게 된다. 이에 보석상은 이 목걸이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판매하려 했지만 너무 고액인 데다가 평소 적대(敵對)하던 듀바리 부인을 위해 만들어진 목걸이라 왕비는 이를 구입하지 않았다. 그러자 보석상은 당시 왕비와 친분이 있다고 말하고 다니던 모트 백작 부인(Comtesse de la Motte)에게 중개를 의뢰하게 된다. 모트 백작 부인은 1785년 왕비에게 아첨하여 재상으로 출세하기를 바라고 있던 루이 르 네 에드와르 드 로안 추기경에게 접근하여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 목걸이를 탐내고 있다고 말하며 이를 대신 구입하여 왕비에게 선물하도록 한다. 젊고 아름다운 모트 백작부인은 대담하고 치밀하게 역사적인 대사기극을 준비하고 있었다.
추기경은 왕비의 총애(寵愛)를 잃게 되자 원래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전전긍긍하던 터였다. 모트 부인은 남편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추기경을 유혹했다. 그와 잠자리를 함께 하는 동안 그녀는 자신이 왕비의 친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를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완전히 믿게 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홍등가를 돌아다니며 마리 앙투아네트와 체형이 닮은 매춘부를 발견하고 가짜 왕비의 역할을 시켜 어둠 속에서 밀회를 나누도록 일을 꾸민다. 추기경과 가짜 왕비와의 대면은 어둠 속에서 잠깐 이루어졌다. 가짜왕비는 “당신은 이것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아시겠죠?”라는 이상한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그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건네주었을 뿐이다. 추기경이 왕비의 발아래 몸을 던지자 그녀는 밤의 어둠 속으로 서둘러 도망쳐 갔다. 이러한 연극을 한 다음 모트 부인이 추기경에게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사기 위한 왕비의 대리인 역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추기경은 왕비의 환심을 사기 위해 흔쾌히 승낙한다. 목걸이를 손에 넣은 모트 부인은 곧 목걸이를 분해하여 팔찌, 펜던트, 반지로 만들어 자신이 착용하고 남은 다이아몬드를 팔아넘겼다. 그 돈으로 값비싼 가구와 사치스러운 옷을 사고 왕족이 타고 다니도록 화려하게 장식된 4륜 마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추기경은 왕비가 감사의 표시로 그 어떤 신호를 보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허사였다. 게다가 보석 세공사들은 대금의 지불을 독촉했다. 결국 보석 세공사 베머는 마리 앙투아네트로부터 직접 목걸이 값을 받기 위해 그녀에게 간다. 교묘하게 계획된 사기 수법은 당장 드러났다.
루이 16세는 사건을 공표하지 않고도 그들을 벌할 수 있었지만 그들에게 공식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했다. 왕과 왕비에게 이 재판정은 돌이킬 수 없는 화근(禍根)이 되고 말았다. 증언대에 선 모트 부인은 자신이 욕심 많고 은혜도 모르는 왕비의 희생자라고 거짓말을 해대며 왕비를 비난했다. 그녀의 이러한 비난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민중들에게 마약처럼 녹아들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미 국민들 뇌리(腦裏)에 ‘베르사유의 매춘부’로 알려져 있었고, 귀족사회는 썩을 대로 썩었으며, 백성들은 굶주림에 지쳐 있었으므로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모토 부인을 믿으려 하는 풍조가 훨씬 커져 갔다. 추기경과 모트 백작부인은 체포되었고, 이 둘은 재판에 회부되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의 체면은 더 깎이게 되고, 백성들의 귀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목걸이를 훔쳤다는 소문으로 퍼지게 된다. 그 후에 추기경은 법정에서 목걸이를 사취했다는 혐의는 벗었지만 공직에서 해임되었고, 모트 백작부인은 매질과 낙인(烙印)이 찍히는 형을 받은 뒤 종신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혁명 이후 영국으로 도망친 그녀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방하는 <회고록>을 썼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목걸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그 사건은 그녀를 부도덕한 여성으로 회자되게 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목걸이를 둘러싼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 파리 시민들은 부패한 왕실과 무능한 정부에 분노하다 못해 냉소하기에 이르렀다. 혁명의 발걸음은 이 사기극에 의해 더욱 빨라졌다. 혁명의 지도자였던 가르비엘 드 미라보와 같은 사람은 이 목걸이사건을 ‘혁명의 전주곡’이라고 명명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1787년에 둘째 딸 소피 엘렌 베아트리스 공주가 태어난 지 11개월 만에 죽고, 1789년에는 장남이자 왕위계승권자인 루이 조제프 왕자가 척추 결핵으로 죽게 되어 어머니로서의 큰 슬픔을 맡는다. 그 시기에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사회적 상황은 최악으로 치닫게 된다. 식료품 가격 폭등, 거듭된 자연재해, 국가 재정 파탄으로 사회 불안과 불만이 고조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둘러싼 악의적인 소문이 날로 증폭되어 갔다. 그녀는 프랑스에 불행을 몰고 오리라는 악의적인 선전에 시달려야 했고, 혼외정사를 하며 정부(情夫)를 갈아치우는 음탕한 여자라는 소문,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 그녀가 낳은 왕자가 루이 16세의 소생이 아니라는 소문 등 갖가지 나쁜 소문에 시달렸다. 모트 백작부인을 비롯한 일당이 추기경과 보석상을 속이고 왕비를 사칭하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한 일명 ‘목걸이 사건’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평판에 결정적인 악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1789년 7월 14일 파리 시민들의 바스티유 감옥 습격으로 프랑스혁명이 시작됐다. 파리 시민들은 10월에 베르사유를 습격했고, 왕실 가족은 튈르리 궁에 유폐되었다. 왕실 가족은 1791년 6월 20일 왕당파 세력이 강한 몽메디로 도주하려 했지만 바렌에서 붙잡혀 실패했다. 당시 탈출할 때 왕실 측근들은 잽싸게 도망갈 수 있는 작은 마차를 권하지만 앙투아네트는 너무 초라하다고 거부한다. 그래서 화장도구, 화장대, 가구, 식량, 식기류, 와인, 변기 등을 싣고, 마차 내부에는 식당, 와인저장고, 화장실 등을 갖추었다. 결국 마차가 아니라 바퀴 달린 거대한 선박 같았다고 한다.
그러니 멀리 도망을 못 가고 잡혀버리고 만다. 마차 타고 도망치다가 혁명군에게 잡힌 루이 16세는 압송 도중에 볼멘 목소리로 이렇게 투덜댔다고 한다. “짐이 국민에게 자유를 주었는데 국민은 짐에게 자유를 주지 않는다. 짐 혼자 자유가 없다는 건 불공평하지 않는가?”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이 친구는 옥에 갇혀서도 커틀릿 5조각, 큰 닭 1마리, 포도주 석 잔을 순식간에 해 치웠단다. 아무튼 루이 16세는 1793년 1월 21일에 처형됐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해 10월 15일 사형 판결을 받고 그녀의 나이 36살에 모든 게 끝난다. 그녀의 사형을 결정한 재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온갖 혐의가 걸렸다. 그녀는 혁명정부로부터 국고 낭비, 정부의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백성에 대한 기만, 프랑스를 멸망시키려는 시도, 전쟁 유발 등으로 기소당했다. 국고 낭비 혐의는 당시 정부에 워낙 만연하던 것이라, 이걸로 사형을 걸면 사형당하지 않을 관료가 별로 없었지만 그래도 유죄로 인정되었다. 소위 반역죄 및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 혐의는 루이 16세와 함께 유죄로 인정됐다. 백성에 대한 기만의 경우 그 유명한 다이아몬드 사건이 있었으나 조사 결과는 “왕비는 다이아몬드 사건과 아무 관련이 없다.”였다. 즉,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혐의에 대한 기소는 무죄가 선고됐다. 심지어 아들 루이 17세와의 근친상간이라는 혐의도 제기되었다. 루이 17세에게서 증언을 얻어 이를 바탕으로 혐의를 제기한 것인데, 당시 심신 미약 상태였던 루이 17세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만신창이 상태에 말 그대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를 이소 이유로 삼았다. 말하자면 거의 마녀 사냥과 같은 재판이었다.
결국 국고낭비, 반역죄,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죄를 유죄로 인정하여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사형이 선고된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로서 남편 루이 16세와 달리 그다지 품위 있는 대접을 받으며 죽진 못했다. 왕실 전용 황금마차를 타고 정장을 제대로 차려입고 육군 병력의 정중한 호위 하에 단두대로 이동해 죽은 루이 16세와 달리, 허름한 옷차림에 머리카락을 강제로 짧게 깎인 다음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사형수를 호송할 때 흔히 쓰인 가축 수송용 마차에 실려 대중들에게 욕을 먹으며 호송됐다. 그럼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단두대 앞에 설 때까지 품위와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처형 직전의 마지막 유언은, 사형 집행자 샤를 앙리 상송의 발을 밟고서 남긴 사과 말인데 “실례합니다, 무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였다. 실제로 사형 전에 그녀가 남긴 글에는 “부끄러워할 것 없어요, 나는 죄를 지어서 죽는 게 아니니까요.”라고 적혀 있었다. 사형이 집행되고 혁명재판소로 각처에서 쇄도한 축하 글들 중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심약한 남편을 휘두르며 고국을 위해 스파이 활동을 하여 프랑스를 배신하고, 사생활이 추잡하기 이를 데가 없었으며 심지어 아들과 근친상간을 한 여자.”, “국민의 피를 게걸스럽게 먹던 거만한 오스트리아 여자의 머리가 마침내 떨어졌다.” 모두가 가짜 뉴스에 현혹되어 한 여성을 악마화하는데 이바지한 모양새이다. 프랑스의 유명한 수제 초콜릿 회사인 드보브에갈레의 기원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약을 편하게 먹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복용하던 약의 불쾌한 맛에 대해 불평했는데 약사였던 슐피스 드보브가 약에 코코아와 설탕 등을 조합하여 동전 형태 초콜릿을 만들어 바치자 약을 잘 먹었단다. 드보브는 1800년에 여러 초콜릿 회사들을 통합하여 드보브에갈레를 창업했고 최고의 품질의 초콜릿을 만들었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