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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황제를 예물로 시집간 – 조희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 (230705)

by 금삿갓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진시황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춘추(春秋) 시대가 지나고, 전국(戰國) 시대가 오자 말 그대로 국가 간에 먹고 먹히느냐의 싸움판이다. 주(周) 나라 시절에 전국에 100여 개의 제후국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약소국들은 사라지고 천하의 대권을 노리는 전국칠웅(戰國七雄 : 연燕, 초楚, 제齊, 조趙, 한韓, 진秦, 위魏)이 있었다. 그중에서 진나라는 상앙(商鞅)이라는 위나라 출신 재상이 법치를 기본으로 한 변법(變法) 즉 부국강병책으로 최고의 강국이 되었다. 그 힘으로 나머지 여섯 나라를 짧은 기간에 차례차례 격파하여 중국통일이라는 어마어마한 역사를 세운 것이다. 아시다시피 China란 이름도 진(Chin)에서 유래된 것이다. 진시황 즉 영정(嬴政)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고 보니 제후국의 최고 통치자인 왕(王)이라는 호칭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 전설상의 인물인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한 글자씩 따와 황제라 칭했고, 자기는 첫 번째 시작하는 황제라는 뜻으로 시(始)를 붙여 시황제라 했다. 참고로 삼황오제의 삼황(三皇)은 <사기(史記)>에서는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을 꼽지만, 다른 사서에는 여와 대신에 황제(黃帝), 수인(燧人), 축융(祝融), 공공(共工)을 대신하기도 한다. 오제(五帝)는 사서에 따라 분류가 다양하나 대체로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요(堯), 순(舜)을 말한다. 오늘의 여자주인공 조희(趙姬)를 소개하기 위한 사전 배경 설명이 너무 길었다. 본론에 앞서 여자 주인공이 있으면 당연히 남자 주연도 존재하는 것이다. 우선 남자 주연의 활약상을 살펴보자. 그의 활약이 없었다면 그녀의 역할도 없었고, 진시황은 당연히 없었으며 중국은 춘추전국 시대로 몇 백 년을 더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 대대로 장사를 하던 한(韓) 나라의 여씨(呂氏) 집안에 여불위(呂不韋)라는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당시 페르시아나 그리스에서 MBA 과정을 수석으로 졸업했는지 모르겠으나 천부적 벤처사업가 기질이 있었다. 국제 간의 무역과 각종 금융업 등으로 거부를 이루었는데, 욕심이 끝이 없는 법이다. 어느 날 그는 조(趙) 나라의 수도인 한단(邯鄲)에 들어가 투자 유치도 하고, 현지 원재료도 확보하려고 하는데, 그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뒤바꿀 이인(異人)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한단에는 중원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진나라 소양왕의 태자였던 안국군(安國君)의 둘째 아들 영이인(嬴異人)이 인질로 와 있었던 것이다. 특이하게도 영이인(嬴異人)이 바로 여불위의 팔자를 고쳐줄 이인(異人)이요 귀인(貴人)인 것이다. 영이인은 비록 태자 안국군의 둘째 아들이었다고는 하나, 후궁인 하희(夏姬)의 아들이라 서자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이인의 어머니인 하희가 안국군의 총애를 전혀 받지 못했으므로 눈 밖에 나서 조나라에 볼모로 온 처지였다. 그러나, 이인을 한 번 만나본 여불위는 그의 잠재성을 꿰뚫어 보았고 가히 왕재라 여겼다. 당시 진(秦) 나라의 소양왕(昭襄王)은 이미 나이가 많았고 태자 안국군(安國君)의 정실부인인 화양부인(華陽婦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이런 상황을 여불위가 꿰뚫어 보고 미래의 벤처 캐피털 창업을 머릿속에 그린 것이다.

그래서 여불위는 사업의 선배이자 고수(高手)인 부친과 경영 의사결정을 위한 미팅을 하면서 다음과 같이 대화를 나눈다. “아버님, 농사를 지으면 몇 배를 남길 수 있습니까?”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내가 해 보니 10배를 남길 수 있다.” “별로네요. 보석상을 하면 얼마나 남길 수 있습니까?” “그건 100배는 남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왕이 될 자를 도와주고 나중에 권력을 차지하면 그 이익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아버지가 대답하기를 “그거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익이 있지 아니겠느냐?” “제가 기화가거(奇貨可居)를 골라 투자해서 천하의 수확을 얻겠습니다.”라고 대답하면서 모든 사업 계획을 확정한 것이다.

그는 그 길로 이인에게 달려가서 만났다. “이 여불위가 왕자님을 진나라의 보위에 올려놓겠습니다.” 여불위의 말이 떨어지자 이인은 전기에 감전되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여불위에게 코가 땅에 닿도록 큰절을 올리며, “제가 보위에만 오르면 공에게 무엇인들 못 해 드리겠습니까?” “아이고, 왕자님이 이러시면 체면이 떨어지십니다. 누가 볼까 겁이 납니다. 도리어 이 여불위의 큰절을 받으셔야지요?” 여불위는 능수능란(能手能爛)하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간이라도 빼서 줄듯이 상대의 비위를 잘 맞춘다. “왕자님 당장 거처를 옮기세요. 소인이 다 손을 써 놓을 테니, 좀 널찍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시고 덕망이 높은 인사들과도 교제도 하시고요. 우선 여기 황금 5백 냥이 있습니다. 아쉬운 대로 쓰시고 다음 올 때 넉넉히 가지고 오겠습니다.” 했다. 반신반의(半信半疑)한 이인이 “그대의 집이나 성대하게 만드시오.”라고 넌지시 거절했다. 그러자 여불위가 “저의 집은 왕자님의 집이 성대해진 뒤에야 비로소 성대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그 말에 흥미가 생긴 이인은 비로소 여불위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인 역시 여불위의 뜻에 응하여 자신을 진왕으로 만들어 주면 막대한 보상을 해주겠다고 당연히 약속했다.

여불위가 다녀간 후로 조나라 관리들의 태도가 확 바뀌었으며, 거처도 비록 볼모로 있지만 진나라 왕자로서의 체면에 손색이 없을 환경으로 변했다. 모두 여불위의 돈 위력이다. 게다가 예쁜 여자까지 붙여 낮 동안 시중을 들어주었다. 그는 오래간만에 젊고 예쁜 여자를 보자 그동안 억제했던 욕정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사실 조나라 국영방송 쇼 무대 백댄서 출신의 미녀로서 화류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조희(趙姬)다. 한단에서 난다 긴다 하는 풍류 묵객(墨客)들이라면 그녀를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알려진 최고의 가희(佳姬)이다. 그런 그녀가 지금 이인의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조희는 원래 여불위의 여자다. 그가 사업상 연예기획사처럼 그녀를 키워서 업계에 내놓고 원격조정 하는 배우이다. 그녀는 낮 시간만 이인을 위해 봉사한다. “왕자님 오늘도 소녀 이만 물러갑니다. 밤새 안녕히 계세요” 하면서 퇴근했다. 여자 목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뛰고 아랫도리가 꿈틀댈 한창때인 이십 대의 이인에겐 밤이 맨날 지옥이다. 낮에는 조희가 그림자같이 이인을 감시하고, 밤엔 조나라 관리가 역시 철저히 보호 관찰한다. 우리 안의 맹수이고, 둥지 안의 새이고, 어항 속의 금붕어 신세다. 그러나 이인은 여불위의 말을 믿고, 뻗히는 욕망을 참아가며 언젠가 보위에 오를 것이란 꿈을 꾸면서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조희는 낮엔 이인의 시녀로 변신을 하지만 땅거미가 지면 한단(邯鄲)에서 제일 잘 나가는 나이트클럽인 돈텔파파 도원(桃園)에서 밤무대를 휘젓고 있는 것이다.

여불위는 그녀를 통해서 조나라 조정의 정보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나이트클럽에 오는 조나라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의 허튼소리를 조희가 매일매일 그에게 정보 보고를 하기 때문이다. 낮에는 이인에게 붙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체크하였다. 이렇게 하니 여불위의 지시대로 이인은 밤낮으로 조나라의 유력 인사들과 교류를 하고, 밤늦게 까지 제왕의 자질을 갖추기 위한 제왕학(帝王學)을 파고들었다. 여불위는 조희를 통해 이인의 동태를 일일이 점검하면서 한 번쯤은 그가 사내구실을 할 기회를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약점을 많이 잡아 놔야 후일에 요긴하게 써먹을 수 있어서다. 지금 조희를 이인 곁에 시녀로 가장해 시중을 들게 한 것도 양동작전(陽動作戰)이다. 국제적 거상인 여불위는 진(秦), 조(趙), 위(魏) 세 나라를 거점으로 하는 장사꾼이다. 조희를 통해 정재계 등에서 필요한 사람들의 정보를 빼내 주는 일종의 동업자다. 여자는 사실상 내연의 관계에 있는 사내를 위해 필요에 따라서는 몸이든 돈이든 아낌없이 던지려 한다. 지금 조희는 여불위를 위해 한 몸을 희생하려 하고 있다.

“왕자님 이렇게 좋은 날씨에 제왕학만 공부하고 계세요? 인생도 즐겨가면서 하셔야죠.” 구름 한 점 없는 초가을의 청자(靑瓷) 빛 하늘이다. 여불위가 조희를 앞세워서 이인의 방에 들어서면서 인사차 건네는 말이다. “어머, 소녀가 들어오는 것도 왕자님은 모르셨나 봐?” 조희는 술상을 이인 앞에 놓으며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호수같이 맑은 그녀의 두 눈동자에 이인의 얼굴이 비쳤다. “아이고, 여공(呂公)께서 갑자기 어인 일이죠?” “왕자님이 적적하실 것 같아 같이 술이라도 한 잔 할까 해서 왔습니다.” 곧 술판이 벌어졌다. 여불위는 술 몇 잔에 얼굴이 연시같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니 술상 귀퉁이에 머리를 박고 코를 드르렁드르렁 곤다. 피곤하기도 하겠지만 이인과 조희와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려는 고도의 전술이다. 젊은 남녀는 여불위가 코를 골자 출발 신호라도 들은 듯 손이 바쁘다. 조희는 이제 방년 18세이나 화류계에서 닳고 닳은 여우다. 게다가 여불위로부터 지령을 받은 몸으로 사내를 사로잡아야 하는 처지이다. “왕자님, 왕자님은 천하의 미남이세요. 저 같은 여자가 감히 엄두도 못 낼 정도예요.” 조희의 옷차림은 보름달을 쪼개 엎어놓은 것보다 더 아름다운 한 쌍의 유방이 아스라이 들여다보였다. 귀양살이나 다름없는 볼모생활이 어느덧 5년이 된 그에겐 오늘 같은 환대(歡待)는 처음이다. 여불위가 쳐 놓은 그물이라는 것을 생각조차 않고 그는 조희의 미색에 빠져드는 것이다. “너는 내가 그렇게 보이느냐? 나는 네가 최고의 미녀로 보인다.” “물론이죠. 왕자님. 소녀 아직 나이 어리나 진(秦), 조(趙), 위(魏) 나라에서 온 유명 인사들을 두루 만나본 경험으로 왕자님 같이 풍류와 지덕을 두루 갖춘 미남을 보지 못했습니다.” 사실 이인은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온 이후 바깥출입은 최대한 견제당하고 거의 가택에 연금 상태였다.

그로서는 어떻게 해서든 조국 진나라로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여불위가 도성에서 최고로 치는 청루(靑樓)에서 이인을 위한 조촐한 연회를 베풀어 주었던 것이다. “공자님 대낮이에요. 그리고 여기선 안 돼요.” 이인은 술 몇 잔에 5 년 동안 참았던 욕정이 한꺼번에 용솟음쳐 여불위가 술상머리에서 거짓 코를 고는 것도 아랑곳 않고 조희를 끌어안아 넘어뜨리려 한다. 이때 “어허 대명천지(大明天地)에 이 무슨 망측(罔測) 한 짓이요? 나는 왕자님이 진나라에 임금 감으로 보고, 이 여불위의 전 재산을 바쳐 보위(寶位)에 앉히려 했었는데 한낱 남의 계집이나 훔치는 한량(閑良)에 불과했군요!” 여불위와 조희는 사전에 짜고 계산된 행동이었으나, 거구에 술까지 마셔 희여 멀건 얼굴이 저녁노을같이 붉게 타고 있어 위엄이 더 높아 보였다. “아, 여공 제가 그만 술 몇 잔에 정신을 잠깐 놓았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터이니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이인은 여불위 앞에 납작 엎드려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왕자님 어서 일어나세요! 이러시면 안 되시지요. 장차 진나라 임금이 되실 분이 저같이 미천한 장사꾼에게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제 말이 심했나요? 사실 이 여자는 제 내자(內子)나 마찬가지입니다. 왕자님께서 그렇게 탐이 나시면 제가 기꺼이 왕자님한테 받치겠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고생한 제 내자는 후일에 왕후가 되지 않겠는지요?” 이인은 여불위의 말에 얼떨떨한 표정으로 일어나 조희의 옆에서 떨어져 앉았다. “자 왕자님 이제 다 잊고 다시 술이나 드시죠. 그리고 어느 하루 날짜를 잡아서 정식으로 조희의 머리를 올려주시지요. 그래도 명색이 첫 여인을 맞는데, 이국에서라도 가례(嘉禮)를 제대로 치러야지요. 제가 모든 준비를 해놓겠습니다. 왕자님께서는 날짜만 잡아 놓으시면 됩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여불위의 주선으로 그동안 정돈도 안 되었던 이인의 거처는 말끔히 정리되어 침대 등 집기들이 새로 들어와 신방 분위기를 풍겼다. 사실 이미 조희의 몸에서는 여불위의 씨가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이인과의 합방을 더 미루다 가는 조희의 임신 사실이 탄로가 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계략으로 속전속결(速戰速決)로 혼례가 치러진 것이다. 일이 잘 된 건지 어쩐 건지는 모르지만 조희는 12 개월 만에 아이를 출산하게 돼 자초(子楚) 즉 이인은 그 아이를 자기 아이로 알고 의심을 안 했다. 이 아이가 후일에 최초로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秦始皇, BC259-BC210)이 된다. 신방에서 새 살림을 시작한 이인은 하루하루가 신이 나고 제왕학에도 시간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두 남녀는 사실상 부부이나 왕자와 시녀의 신분을 진나라로 귀국할 때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당시 진나라와 조나라의 국경은 한 시도 전운이 걷힐 날이 없었다. 지금 이인이 조나라에 볼모로 와 있는 것도 진, 조나라가 일진일퇴(一進一退)하던 국경분쟁에서 진나라가 패해 굴욕의 인질이 되었다. 볼모가 됐어도 고국에서 관심을 갖고 신경을 써주면 영어(囹圄)의 몸이 아닐 수도 있으나, 생모인 하희(夏姬)가 태자인 안국군(安國君) 즉 후에 효문왕(孝文王)되는 태자의 눈에 나서 그는 버려진 자식 신세가 되었다. “왕자님 오늘 밤도 편히 쉬시고 내일 즐겁게 뵐게요.” “응? 벌써 가려고? 그런데 오늘따라 혼자 있기가 싫은데 나와 함께 있으면 아니 되겠느냐?” “아니 되옵니다. 소녀는 하루하루가 바늘방석이 옵니다. 여불위공께서 손을 써 놔서 이렇게 생활은 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어림도 없사옵니다.” 사실이 그렇다. 조국(祖國)에서도 헌신짝 같이 돌보지 않은 볼모를 조나라에선 밥만 축내는 거추장스러운 존재에 불과하다.

두 나라 사이에 국경분쟁도 몇 년째 소강(小康)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 이인의 존재는 두 나라에서 잊힌 지 오래다. 본인으로선 조국으로 복귀할 대책이 전무한 상태에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에 여불위가 나타난 것이다. 그날따라 이인의 거처에 있는 늙은 오동나무에 한 쌍의 소쩍새가 날아와 목이 쉬도록 울고 있었다. 오동나무도 노쇠해 그런지 아직 초가을인데도 잎이 하나 둘 떨어지며 더욱 쓸쓸해 보였다. 이인의 마음도 늙은 오동나무 같이 외롭고 쓸쓸해 밤새껏 대취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보위에 오르면 너를 꼭 왕후에 앉히마. 오늘 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나와 같이 지내자.” 말을 마친 사내는 다짜고짜 여인을 쓸어안았다. 사실 조희는 기둥서방 여불위한테서 애를 실컷 태우다가 이인으로부터 확실한 약조(約條)를 받고 몸을 주라는 언질을 받았던 것이다. 두 남자가 모두 왕후로 만들어 주겠다고 했으니 마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져, 청루 도원(桃園)에서 교태를 부릴 때로 돌아갔다. “전하 이러시면 안 되는데요.” “전하라니 당치도 않다!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 “소녀와 둘만 계실 때는 전하라 부르겠습니다. 여불위공께서도 그리하라 하셨습니다.” 젊은 남녀는 뜨겁게 엉켰다. 사내는 아직 숫총각이다. 청루에서 이 남자 저 남자 품에서 몸으로 배운 여자의 운우지정(雲雨之情)은 전설의 황제에게 기교를 가르친 소녀(素女)를 방불케 했다. “전하 어느새 동창(東窓)이 밝았습니다. 집에 잠시 갔다 오겠습니다.” “아니다. 그냥 나와 같이 있자.” 그들은 한 쌍의 연리지(連理枝)같이 다리가 얽히고 포개져서 해가 중천에 솟을 때까지 이불속에서 헤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여불위는 애첩 조희를 이인에게 넘기고는 진나라로 향했다. 태자 안국군이 사랑하는 화양부인(華陽夫人)에겐 아들이 없고, 질투가 심해 잠자리를 끊긴 지 오래인 이인의 어미 하희(夏姬) 한테는 호박넝쿨에 호박 달리듯 많은 자식들이 있었다. 그래서 이인을 화양부인의 양자(養子)로 만들려는 것이다. 여불위는 진기한 물품을 잔뜩 싣고 가서 화양부인 집에 풀어놓았다. 눈이 휘둥그레지는 화양부인에게 여불위는 설레발을 치기 시작한다. “이거 다 조나라에 있는 자초(子楚)가 양어머님께 선물하는 거예요. 저는 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 양어머님이 초나라를 늘 근심하신다기에 이름까지 초나라의 자식이라는 자초(子楚)로 고쳤어요. 세상에 그렇게 지극한 효자 처음 봤습니다. 자초는 학문도 뛰어나고, 인품도 고매하여 비록 인질로 잡혀 있는 몸이지만 따르는 인물이 무수하고, 인기도 자자합니다.” “어허, 그 아이가 지 생모가 있는데 왜 나를 존경한다 했나? 꿍꿍이 속셈이 있는 것이 아니요?” 화양부인은 이인과 여불위의 속내를 정확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여불위의 파상적인 선물공세에 무너지고, 그녀의 동생 양천군(陽泉君)도 누이에게 후사가 없어 자칫 화를 당할 수도 있다는 여불위의 협박에 넘어갔다. 그 후에 무지막지(無知莫知)한 선물공세와 여불위의 말 빨에 녹아난 화양부인은 남편 안국군이 왕으로 즉위하자 그를 꼬드겨서 볼모로 가 있는 이인 즉 자초(子楚)를 태자로 세우게 된다. 이 자초가 훗날 왕에 오르게 되니 바로 장양왕(莊襄王)인 진시황의 아버지이다.

기원전 257년, 진나라 장수 왕흘(王屹)이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공격해 오자 장평대전(長平大戰) 때도 참아줬던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은 인내심이 바닥났던지 자초를 살해하고자 병졸들을 보냈다. 여불위는 이 병사들에게 무려 황금 600근을 뇌물로 뿌려 자초를 조나라에서 탈출시키고 그의 아내 조희와 아들 영정(嬴政)을 잠적시켰다. 효성왕은 자초의 처자식이라도 죽이려고 열심히 찾았지만 여불위가 잘 숨겨줘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후에도 조희와 영정은 조나라에서 지냈는데, 기원전 251년,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죽고 태자였던 안국군이 효문왕(孝文王)으로 즉위하면서 자초가 태자의 지위에 오르자 진나라로 몰래 입국했다. 자초의 할아버지인 소양왕은 무려 50년이나 왕위에 있던 중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여 효문왕이 되었으나, 그 역시 이미 상당히 고령(高齡)이었던 까닭에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되어 급사했다. 결국 효문왕의 태자였던 자초가 즉위하여 장양왕(莊襄王)이 된 것이다. 이리하여 여불위는 서자 출신인 데다가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의하여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졌던 떨거지 왕자를 당시 중원 제일의 초강대국이었던 진나라의 왕으로 만드는 가히 기적적인 성과를 올렸다. 말하자면 벤처기업을 세워서 몇 년 만에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당연히 백댄서 출신의 여불위 애인이었던 조희는 왕후마마가 되었고, 일등공신 여불위는 하남과 남양 땅의 10만 호를 하사 받고 문신후(文信侯)에 봉해졌다. 뿐 아니라, 진나라의 승상(丞相)으로 임명함으로써 보답하였다.

승상의 직위에 오른 여불위는 덕분에 진나라 정계의 실세로 떠오르게 되었으며, 한 순간에 중원의 정세를 좌지우지(左之右之)할만한 위치의 고관대작으로 거듭났다. 장양왕 즉 자초라는 사내는 원래 몸이 부실했는지 아니면 색골녀 조희에게 밤마다 너무 시달렸는지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숨을 꼴까닥 거두게 된다. 졸지에 자초의 아들 영정이 13살의 애리애리한 나이로 왕에 오르니, 바로 이 소년이 바로 훗날의 진시황제이다. 진나라 왕실의 피는 하나도 섞이지 않고, 장사꾼 여불위와 밤무대 무희였던 조희에서 나온 아이가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진 황제가 되었다. 아직 왕인 영정이 어렸기에 여불위는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명분으로 승상보다도 높은 상방(相邦)의 자리에 올라 진나라의 실세를 거머쥐었다. 또 왕의 아버지와 다름없다는 의미로 그 칭호를 중보(仲父 : 중부가 아님)라 하였다. 이렇게 엄청난 위세를 떨치게 된 여불위는 어린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하며 국정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해 나갔다. 한편, 남편인 장양왕을 잃은 진시황의 어머니인 조태후는 본래 여불위의 첩이었기에 홀몸이 된 이후 자주 여불위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본래 밤무대에서 놀던 뜨거운 여인 조희 즉 조태후는 밤이면 밤마다 참기 힘든 욕정에 몸부림치는 나날이 계속된다.

이쑤시개 한 통을 다 써가며 허벅지를 찔러대도 몸이 식질 않고, 은장도(銀粧刀)가 다 닳아도 안 되자 급기야 그녀는 옛 남자인 여불위를 침실로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몸이 달아오른 조희는 여불위를 내전(內殿)으로 은밀히 부른다. 뭔 말이 필요하겠는가? 말 보다 손이, 손 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다. 몸이 농익은 조희와, 테크닉이 완숙한 여불위와의 불륜은 금세 용광로가 된다. 여자가 늦바람 나면 눈에 뵈는 게 없다는 말 그대로 조희는 질펀한 그 자체다. 어느 날 인근 국가와의 전쟁을 마치고 돌아온 여불위가 피곤해서 쉬고 있을 때, 조희에게서 전쟁 승리를 축하하는 파티를 마련했으니 방으로 오라는 전갈이 온다. 그게 뭘 뜻하는지 잘 아는 여불위가 오늘은 너무 피곤해서 내일 가겠다고 한 발 뺐다. 그냥 포기할 조희가 아니다. 그녀는 4번이나 전갈을 보냈다고 한다. 결국 도살장에 개 끌려가듯 조희에게로 가서 없는 힘, 있는 테크닉으로 봉사한다. “아구, 내가 괜히 건드렸나 봐. 나는 점점 힘이 달리는데, 저 여자는 점점 힘이 더 생기니.” 여불위가 후회를 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욕정에 눈이 먼 조희는 시도 때도 없이 여불위를 불러내 어떤 체위로 질펀한 육체의 향연을 벌일까 온통 그 생각뿐이다. 급기야 둘의 불륜관계가 솔솔 궁궐 내에 퍼지게 된다. 진시황제의 어머니인 조태후와 여승상의 용서받지 못할 불륜. 여불위는 조태후와 자주 만나다가는 선왕(先王)의 정비(正妃)와 간통했다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서 자기 대신에 조태후를 만나줄 사람을 구했는데, 마침내 노애(嫪毐)를 환관으로 위장시켜 조희에게 보내게 된다. 노애는 양물이 컸고 정력이 대단하였기 때문에 조태후의 총애를 받았으며, 이후 조희와 노애는 사실상 연인 관계가 되었다.

노애는 대장장이 출신으로 소위 밤무대 스타였는데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남성의 여의봉이 크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모든 여자들이 그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늘 소망하였다. 주특기는 오동나무로 만든 수레바퀴를 자신의 그것에 매달아서 그 상태로 자신의 여의봉을 꼿꼿이 세워서 돌아다니는 것이다. 마음먹으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반나절이고 간에 그 짓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궁궐 내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여불위 또한 비상한 사내라서 그 낌새를 감지(感知)하고 비책을 강구한다. 우선은 조희와의 관계를 끊는 게 급선무였다. 그런데 그 뻘낙지 같은 끈적녀가 쉽게 떨어져 줄까? 이때 도성의 경찰청에서 특급 정보 보고가 여불위에게 올라온다. 절구공이나 야구 배트 같은 신무기를 장착한 어떤 제비족 두목이 고관대작 부인들과 통정하다가 발각이 나서 지금 남대문경찰서에 잡혀 와 있었다. 이 보고를 들은 여불위는 잽싸게 머리를 굴린다. 경찰 측근을 몰래 불러서 노애를 슬쩍 빼돌린 뒤 강남 물 좋은 나이트클럽에서 환상의 거시기 콘테스트를 개최한다고 소문을 냈다. 장안의 모든 옐로 페이퍼나 SNS 매체들이 앞 다투어 행사 내용을 전파했다. 삼남에서 왔다는 어떤 작자는 거시기를 세워서 젖은 수건 두 장을 걸어서 말린다며 쇼를 했고, 북방에서 온 어떤 녀석은 거시기에 두 되들이 술 주전자를 꽉 채워 걸고 다닌다고 묘기를 보였다. 어른 팔뚝 보다 더 굵은 놈도 나왔고, 길이가 한 자 반이나 되는 놈도 나와서 그 위용을 자랑했다.

그러나 이 날 쇼의 압권은 수레바퀴 돌리기였다고 기네스북에 기록돼 있다. 노애 놈이 아랫도리를 까고 나와서 자기의 거시기에 오동나무 수레바퀴를 끼워서 휘휘 돌렸단다. 모두들 사기가 아닌가 의심했다. 심사위원이 나와서 그 수레바퀴를 들어보고는 허리를 다쳤다나 뭐래나. 암튼 여불위가 기획 연출한 빅쇼는 성황리에 끝나고 이 소문은 온 장안에 퍼져 궁궐의 조희의 귀에 까지 들어간다. “어머나!!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세상에, 내 눈으로 봐야겠는데, 대 놓고 보자고 할 수도 없고” 조희는 몸이 달아서 만만한 여불위를 불러 닦달한다. 여불위로서야 오매불망(寤寐不忘) 바라던 바였다. 여불위는 노애를 궁형(宮刑)에 처한다고 소문을 낸 뒤 거짓 환관(宦官)으로 만들어서 조태후에게 데리고 간다. 위장(僞裝) 환관을 만들기 위해서 거세(去勢)의 증거로 당나귀의 거시기를 잘라서 제출했다는 일설도 있다. 고려시대에도 여걸 천추태후의 애인이었던 김치양(金致陽)의 물건이 노애의 그것처럼 커서 바퀴를 들 정도라고 야사에 적혀있다. 러시아제국 말기에 괴승(怪僧) 그리고리 라스푸틴의 물건이 말의 그것과 비견(比肩)되었고 러시아 귀부인들과 여황제의 밤을 즐겁게 해 줬다. 나중에 처형된 후에 그의 물건을 잘라 알코올병에 넣어 상트 페테르브르크 자연사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는데,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 혈액이 다 빠지고 쪼그라든 채로 알코올에 담겨있는데도 끝부분은 어린아이 팔뚝 정도이고 뿌리 쪽은 웬만한 사람의 팔뚝보다 굵다. 살아있을 때는 평소 30cm이고 발기 시에는 50cm에 달했다니 절구 공이로 쓸 수도 있겠다. 최상의 물건을 만났으니 더 이상 뭔 말이 필요하겠는가. 조희는 노애를 보자 너무 황홀해하며 “오느라고 수고했느니라. 그냥 앉아라. 절은 무슨 절까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술상 앞에 앉혔다. “황태후마마 그럼 소신은 물러갑니다.” 조희의 성급한 마음을 잘 아는 여불위는 재빨리 자리를 피해 주었다.

“황태후마마 목욕을 좀 했으면 좋겠는데요. 오늘따라 대장간에 일감이 많이 들어와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아참, 노애 총각은 무슨 일을 하오?” “예. 황태후마마 소인 대장장이입니다.” 대장장이란 말에 조희는 호기심이 발동했다. “아하, 그러하냐! 그럼 목욕부터 하여라.” 사내를 목욕탕으로 들여보내고 여자는 대장장이의 건강한 육체에 대한 궁금증으로 견딜 수 없었다. 참다못해 조희는 “물이 너무 차갑지는 않은가?” 라며 수건을 들고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진 채 목욕탕 안으로 들어섰다. 노애는 기겁(騎劫)을 하며 “황태후 마마 이러시면 아니 됩니다. 소인 금방 나아갈 것입니다.”라며 성급히 아랫도리를 두 손으로 가렸다. 그러나 조희는 노애의 말엔 아랑곳 않고 벌거숭이 사내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괜찮으니라. 그대로 씻기나 하렴.” 노애의 알몸은 그리스의 헤라클레스의 대리석 모델처럼 빛났다. 뜨거운 불 앞에서 망치질과 풀무질로 단련된 번질번질하고 헌칠한 몸매에 조희는 넋을 잃고 있다.

노애는 비록 노총각으로 있으나 그동안 대장간에 일 맡기러 온 주변 동네 부인들과 관계를 많이 가져서 여자라면 둘째 자리도 서러워할 것이다. 두 손으로 간신히 아랫도리를 가렸으니 워낙 거대하고 강력한 여의봉을 가진 그 라서 도저히 어떻게 감춰지질 않았다. 더구나 달나라 항아(姮娥) 같은 미녀의 발가벗은 나신(裸身)을 보고는 그놈이 용솟음을 치며 성질을 부리며 솟구치니 감당이 안 되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자석이 붙듯이 하나가 되었다. 노애는 거침없는 몸짓으로 조희를 안아 침상으로 옮겨 노련하게 운우지정을 즐겼다. 조희는 몇 번이고 숨이 막힐 듯한 쾌락을 만끽하고는 “너는 오늘부터 내 곁을 한 발작도 떠나서는 아니 되느니라.”라는 말을 마치고는 연꽃보다도 더 우아한 웃음을 머금고 사내의 가슴팍과 거대한 물건을 번갈아 쓰다듬으며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조희의 침실에 노애를 디밀어 넣고 여불위가 침실을 나오면서 혹시나 싶어 문 밖에서 잠시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서 조희의 들끓는 교성(嬌聲)이 금 새 문밖으로 튀어나온다. 그 교성 소리를 들은 여불위 섭섭하기는커녕 해방의 만세소리가 저절로 터져 나온다. 이후로 노애는 날이면 날마다 조희를 반쯤 죽여 놓는다. 남들 눈을 속여 몰래몰래 노애를 불러다 분탕질하던 조희는 늘 뭔가 2% 부족했다. 그래서 점괘(占卦)를 조작해 왕후가 함양(咸陽)의 궁궐에 계속 거처하고 있으면 좋지 않다는 결과를 내놓게 한다. 이런 불길한 점괘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는 함양에서 특정 방향으로 멀리 떨어진 땅으로 이사를 가야 한다는 점괘도 내놓았다. 그래서 진시황의 눈에 띄지 않는 옛 수도이자 함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옹(雍) 땅에 기년궁(蘄年宮)을 짓고 거처를 옮긴 후 둘은 마음껏 놀아났다. 불륜 상대라는 게 알려지지 않은 데다 태후의 최측근으로 늘 붙어 있었기 때문에 장신후(長信侯)에 봉해져 권세를 누리기까지 했다. 조희는 노애에게서 아들 두 명을 낳는다. 진시황제의 어머니인 조희가 노애를 끔찍이도 아끼며 갖가지 권세와 특혜를 주자, 진시황도 그들의 관계를 눈치챘으나 모른 척 눈 감아 주고 있었다. 그러자 노애는 마치 자기가 진시황의 계부나 된 것처럼 끗발이 하늘을 뚫는다. 노애의 휘하에는 떡고물 챙기려는 사람덜이 파리 꾀듯 들끓어 어느덧 여불위의 세력과 견줄만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이로써 진나라에는 여불위와 노애라는 두 세력이 존재하여, 요즘 여당과 야당처럼 일은 안 하고 맨날 권력 다툼만 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노애가 조정의 대신들과 술 먹다가 사소한 일로 대판 싸운다. 이때 성질 더럽고 무식한 노애가 술김에 염장을 지르는 말을 해댄다. “어이, 대신 양반 너무 잘난 체하지 마라. 내가 누군지 아는가? 진시황제의 의붓아버지나 다름없다 이 말씀이야. 그뿐인 줄 아나? 태후와 내가 낳은 아들이 두 명이야. 얘들이 이다음에 진시황을 제치고 황제 못되란 법 있어?” 어안이 벙벙해진 그 신하는 노애에게 허벌나게 깨진 뒤 곧바로 시황제를 찾아가서 엄청난 사실을 고해바친다.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은 시황제는 노애를 제거하기로 작전을 세우는데 이 작전을 노애도 간파하고 조희에게 SOS를 친다. “이판사판 공사판 아니요? 황제가 눈치챘으니 우린 앉아 죽으나, 덤비다 죽으나 매 한 가지 아닌가? 까짓 거 황제 죽이고 우리 아이들을 황제로 시켜 보자고요. 이 작전이 성공하면 당신과 나는 말이야 남들 눈치 안 보고 밤낮으로 뒹굴 수도 있으니 얼마나 좋아?” 조희가 듣고 보니 그럴듯했으나 때를 노려보자고 말렸다. 그러는 동안 조희의 아들 진나라 왕 영정은 성인으로 자라서 친정(親政)을 하면서 여불위(呂不韋)의 보필을 받아 전국을 돌아다니며 통일전쟁을 벌인다. 전국(戰國) 칠웅(七雄)들을 모두 물리치고 드디어 통일제국 진나라의 진시황제(秦始皇帝)의 자리에 오른다. 그리고 통일된 중국의 지방 순시를 시작한다. 그러던 중 태원 지방에 들러 모친인 조비(趙妃)(趙太后)도 알현하고, 제사도 지낼 겸 모친이 있는 기년궁(蘄年宮)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한다. 이 소식을 들은 노애와 조희는 거사가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그날 저녁 노애(嫪毐)는 시황제를 살해할 목적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시황제가 죽으면 노애의 아들도 마찬가지로 황제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참으로 간악한 음모가 아닐 수 없다. 결국 이 사건은 실패로 끝난다. 노애와 두 아들은 극형을 당한다. 그리고 모친인 조희(趙姬))에 대해서는 영원히 기년궁을 떠나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리고, 부모자식 간의 관계도 영원히 끊고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선언을 한다. 진시황은 머리가 비상하고 눈치가 빠삭하다. 과거 어머니와 여불위의 불륜관계도 눈치채고, 자기의 실제 아버지가 여불위라는 것도 알아차린다. 그렇다고 승상 여불위를 단칼에 어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궁궐 내에 여불위의 세력이 그리 만만치 않을 뿐 아니라 어쨌건 자기의 친아버지인 것이다. 노애는 거열형(車裂刑)인 오마분시(五馬分屍 : 다섯 마리 말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형)로 처형시켰다. 여기서 사람의 팔다리가 사지(四肢)이니 말이 네 마리면 될 텐데, 다섯 마리의 말로 처형을 했다니. 나머지 한 마리의 용도는 어디에 쓴 것일까? 일반적으로 머리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소수의 야사가(野史家)들은 노애의 거시기가 일반인들보다 유난히 대물이고, 그것으로 인하여 생긴 사단(事端)이기 때문에 거시기를 밧줄로 묶어 말이 끌어당겨 찢어 놓은 게 아닐까 추론하기도 한다. 찢어낸 노애의 대물 여의봉을 도성의 성문에 걸어 놓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구경하도록 했다는데, 아쉬워하는 여인들이 많았다나 뭐라나. 믿거나 말거나 이다. 실제 아버지인 여불위에게는 태후에게 제비족 노애를 소개한 뚜쟁이 알선죄로 엄중 처단하여야 마땅하나 국가에 공이 매우 크므로 목숨만은 살려둔다. 대신 일체의 관직을 박탈하고 촉(蜀) 땅으로 유배를 보내기로 결정한다. 그 소식을 들은 여불위는 음독으로 자살을 하고 만다. 어머니인 조희는 반란을 기획하여 아들인 나를 죽이려 했으니 태후자리에서 폐위하고 살던 기년궁에서 여생을 보내게 했다.

여불위는 기발한 장사꾼으로 장사만 잘한 게 아니라 국가도 부강시키고, 나라의 문화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공로가 있다. 말하자면 중국 통일의 초석을 깔았다고 해도 무방하다. 당시 전국시대 말기 천하통일을 눈앞에 둔 진(秦) 나라는 정치·군사적으로는 어느 나라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나 사상 면에서는 위(魏)나라·초(楚)나라·조(趙)나라·제(齊)나라를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천하에 이름깨나 알린 사람이나 학자들은 모두 전국시대의 4 공자(四公子) 문하의 식객이 되어 각기 그들 나라의 문화와 사상 수준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4 공자는 위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이다. 여불위는 진나라가 문화·사상 면에서 그들만 못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무식한 놈이 힘만 앞 세운다’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여불위는 천하의 선비와 학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시행하여, 진나라에 학식과 문재로 넘치는 인물들을 불러들였다. 『사기』 「여불위 열전」에는, 이때 그의 문하에 모인 식객이 3천 명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통일제국의 설계자 이사(李斯)가 진시황에게 등용된 것이 여불위의 추천에 의해서라고 한 것을 보면, 이사 또한 이때 여불위를 찾아온 것으로 추정된다.

여불위는 자신의 문하에 모인 식객들을 총동원하여 야심 찬 문화 사업을 펼쳤는데, 그것이 바로 『여씨춘추(呂氏春秋)』의 편찬이다. 여불위는 이 책에 당시 천하의 모든 학문과 사상·이론을 총망라하여 담았다. 여불위는 식객들이 저술한 방대한 기록과 문헌을 모아 '12기(十二紀)·8람(八覽)·6론(六論)'으로 나누어 정리한 후 “글자 수가 20여만 자에 이르고, 천지와 만물, 고금의 일들을 모두 완벽하게 서술했다.”라고 하여 책의 이름을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이름 지었다. 그리고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의 저잣거리에 이 책을 펼쳐놓고, “한 글자라도 더하거나 뺄 수 있는 자에게 천금을 주겠다.”라고 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자천금(一字千金)이란 고사성어가 생겼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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