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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금운사 Jun 28. 2023

(38)사랑 없인 못 살아 –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

★ 18禁 역사 읽기 ★ (230628)

“남지 않은 생 이곳이 아닌 저 세상 추억거리로, 부디 다시 한번만 만나보고 싶구나” 이것은 일본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와카(和歌) 모음집 『오구라햐쿠닌잇슈(小倉百人一首)』의 56번째 작품이다. 위 와카를 지은 사람은 헤이안(平安) 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가인(歌人)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이다. 이 와카 앞에 기재되어 있는 고토바가키(詞書)에는 “몸이 예전과 같지 않을 때(心地例ならずはべりけるころ) 어떤 이에게 보낸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 병상에 누워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그 순간에도, 화려한 연애 편력을 그리워하며 쓴 것일지도 모른다. 매력적인 글 솜씨를 가진 정열의 여인, 이즈미 시키부는 저 세상으로 가져가기 위한 추억거리로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는 남다른 욕망을 표출한 것이다. 이즈미 시키부(和泉式部 : 976~사망년대 불명)는 에치젠노카미(越前守) 오에노 마사무네(大江雅致)와 엣추노카미(越中守) 다이라노 야스히라(平保衡)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태황태후궁(太皇太后宮)의 집안 사무를 관장하던 직책인 다이신(大進)을 지냈고, 어머니는 쇼시 내친왕(昌子内親王)을 모시던 뇨보(女房)였다.

처음 태어났을 때의 이름은 오모토마루(御許丸)라 불리며, 태황태후궁(太皇太后宮) 쇼시 내친왕(昌子内親王)을 따르는 여동(女童)이 되었다. 996년 20살쯤에 남편 타치바나노 미치사다(橘道貞)와 결혼하고, 남편이 이즈미노카미(和泉守) 직에 임명되어 그와 함께 이즈미노쿠니로 이사 가서 살게 되었다. 두 사람이 결혼한 다음 해에 딸 고시키부 나이시(小式部內侍)가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남편의 부임지와 아버지의 관직명을 합쳐서 이즈미 시키부라고 불리게 된다. 남편 미치사다와는 얼마 못 가서 헤어졌는데, 그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 고시키부 나이시(小式部内侍)는 어머니의 뒤를 잇는 가인(歌人) 재능을 보였다. 교토로 돌아온 뒤에는 미치사다와 별거 상태에 있으면서 레이제이 천황(冷泉天皇)의 제3황자 다메타카 친왕(爲尊親王)과의 열애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신분이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결국 그녀를 부모와 의절하게까지 했다. 그 시절에 그녀는 와카(和歌)를 쓰기 시작하여 그로서 이름을 많이 알렸다. 시도 잘 쓰고 연애도 잘하는 그녀를 두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던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는 그녀를 ‘바람기 있는 여자(浮かれ女)’라고 평가했다.

그런 세평을 받을 만큼 사랑 없이는 살아가지 못했던 다정하고 아름다운 이 여류 가인에게 사랑이란 죽음을 넘어서까지도 유지하고 갈구했던 숙명의 기제였다. 이즈미 시키부는 동시대의 여류 문인으로 <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를 쓴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로부터는 “연문(恋文)이나 와카(和歌)는 훌륭한데 행실이 감동할 만한 것이 없다.”는 비평도 받았다. 그녀가 지은 연가(戀歌)·애상가(哀傷歌)·찬불가 등에서 그녀의 작품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 보이고 있으며, 특히 연가에는 정열적인 분위기의 수작이 많아, 같은 시대의 대가인(大歌人) 후지와라노 긴토(藤原公任)로부터도 극찬을 받았다. 개인 문집으로 《이즈미 시키부 정집(和泉式部正集)》, 《이즈미 시키부 속집(和泉式部続集)》이나, 뛰어난 와카를 엄선한 《신한본 이즈미 시키부집(宸翰本和泉式部集)》이 전하고 있다. 《슈이와카슈(拾遺和歌集)》 이하 칙선(勅撰) 와카집에 246수의 와카가 채록되었으며, 그녀 사후의 첫 칙선 와카집이었던 《고슈이와카슈(後拾遺和歌集)》에 가장 많은 노래가 수록된 가인(歌人)이기도 하다.

그녀의 사랑 이야기는 그녀의 가장 화려했던 사랑 이야기를 담은 일기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이즈미시키부 일기』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 당시 여성의 삶이 ‘사랑’과 ‘죽음’으로 어떻게 이끌려 가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살펴볼 수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두 가지의 본능, 즉 에로스(Eros)와 타나토스(Tanatos)가 존재한다. 에로스는 성적 욕망의 추구를 지향하는 개념이며 이는 곧 삶에 대한 충동과 연결되어 있다. 이에 반해 타나토스는 죽음에 대한 충동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삶에 대한 충동인 성적 본능은 에로스의 원리로써 자기 보존, 종족보존의 본능으로 기능한다. 이에 반해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는 통일을 파괴하고 사물을 파괴시켜 생명이 있는 것을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원리를 이룬다. 파괴 본능의 극단에 죽음의 본능이 있으며 타나토스는 생의 본능에 맞서 그를 위협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따라서 재미 삼아 읽는 이야기에 죽음의 본능은 너무 무거운 주제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달콤하고 흥미진진한 그녀의 사랑(Eros)의 본능에 다가가 보자.

이즈미 시키부가 남편과 헤어져 교토로 돌아온 뒤에는 완전 별거 상태에 있으면서 레이제이 천황(冷泉天皇)의 제3황자 다메타카 친왕(爲尊親王)과 연애를 하게 된다. 결혼 전에 이미 태황태후궁(太皇太后宮) 마사코 내친왕(昌子内親王)의 시녀 노릇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황실과의 교유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스캔들의 결과로 그녀의 남편은 그녀와 이혼했고, 그녀의 가족은 그녀와 의절을 했다. 일본 궁중 생활의 이야기를 엮은 에이가 모노가타리(榮華物語)에는 다메타카가 그녀와 밀회를 위해 ‘지속적인 야행성(夜行性) 탈출’ 때문에 몸이 쇠약해져서 병에 걸려 사망했다고 암시하고 있다. 한 여자를 사랑하여 남의눈을 피해 밤늦게 몰래 궁궐의 담을 넘어 나왔다가 새벽녘까지 진한 사랑을 나누고 찬이슬을 맞으며 다시 궁궐로 돌아가는 생활을 밤마다 했다면 몸이 수척(瘦瘠)해 질만 하다. 그는 수면 부족에 남의 눈에 띌까 신경을 곤두 세워야 했으니 병이 들어 그녀와 사랑을 한 지 1년 뒤에 일찍 세상을 하직하게 된 것이다. 다메타카가 죽은 1년 후, 그녀는 다메타카의 동생인 아쓰미치 친왕(敦道親王, 981년 ~ 1007년)의 구애를 받았다. 이 연애사건에 대한 감상이 그녀의 자전적(自傳的) 일기에 묘사되어 있다.

그녀가 일기를 쓰게 된 동기는 쓸쓸한 마음을 달래고, 둘 사이를 오가는 시를 기록하기 위해 쓴 것 같다. 그 후 이즈미는 아쓰미치의 저택으로 이사를 했고, 두 사람은 1007년 27세의 나이로 아쓰미치가 사망할 때까지 매우 공개적인 연애를 했다. 아쓰미치 친왕을 소치노미야(帥の宮)라고 불렸는데 다자이후(大宰府) 장관인 다자이노소치(大宰帥)였기 때문이다. 둘의 사랑은 4년 반에 걸쳐 이어졌다가 그가 죽자, 이때의 비통한 슬픔은『이즈미시키부속집』에 122수의 노래로 남아있다. 『이즈미시키부 일기』는 ‘온나(女)’와 ‘미야(宮)’로 지칭되는 두 사람이 교환하는 147수에 이르는 주고받은 증답가(贈答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일기 형식의 산문 작품이다. 작품은 조호(長保) 5년(1003) 4월 10일에 첫 번째 증답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시작되어 그 해 12월 18일까지 약 8개월에 걸친 시간을 수록하고 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의 만남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시작되어 미야가 온나에게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와 함께 살기를 권유하는 데에 이른다. 입궁(入宮)의 제안을 받은 온나가 번민(煩悶)을 하다가 결국 미야의 저택으로 들어가게 되는 대목까지의 시기에 두 사람 사이에 가장 많은 와카의 증답이 이루어진다. 마지막으로 온나의 입궁 이후부터는 함께 기거를 하니까 두 사람 사이에 증답가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 따라서 오로지 서술문으로만 기록되어 있는 부분이다. 이와 같은 시기별로 일기의 전개에 따라 온나의 미야에 대한 사랑은 고조, 상승되다가 정체된 후 다시 침체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작품은 ‘일기’라는 표제를 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1인칭이 아닌 3인칭 시점인 ‘온나’로 서술이 이루어져 있다.

일기의 시작은 4월 10일이며 두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는 부분에 대한 기록으로 이루어져 있다. 꿈보다도 더 허망하게 끝나버린 다메타카와의 사랑을 한탄(恨歎)하며 하루하루를 울적하게 보내는데 봄은 어김없이 다시 찾아온다. 지난해에 죽은 연인을 생각하며 토담 위의 파릇파릇한 풀잎을 보노라니 그녀는 너무나 애잔한 느낌이 든다. 그때 정원 가까이서 인기척이 들린다. 살펴보니 죽은 연인의 시동(侍童)이 다가온다. “미야(宮)께서 이것을 가지고 가서 감상이 어떠하신지 여쭈며 전해드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동아이는 타치바나(橘) 꽃을 전해주었다.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예전의 사랑했던 그 사람 옷 내음이 나네.”라고 읊조리니 “그러면 돌아가겠습니다. 황자님께 어떻게 여쭈어야 할까요?”라고 시동이 물었다. 온나는 말로써 전하는 것도 어색하고 그가 아직 바람둥이라는 소문도 나지 않았으니 보잘것없는 와카라도 지어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타치바나(橘) 꽃 향기에 견주기보다 진정 직접 목소리 듣고 싶네. 예전 그 사람과 같을지?”라고 적어서 와카를 전해 드리도록 하였다. 시동이 그녀가 적어준 와카를 들고 궁으로 돌아가니 황자(皇子)는 툇마루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와카를 전해 드리자 그는 금방 답장을 이렇게 적었다. “같은 귤나무 위에서 함께 울던 두견새 마냥 형님과 형제이니 목소리는 똑같다오.” 이를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비밀리에 잘 전하라고 했다.

시동이 황자의 답장을 다시 그녀에게 전하자 그녀는 가슴에 아련한 감동이 자기도 모르게 동심원(同心圓)이 되어 퍼져 나갔다. 하지만 아직 친분도 없는데 매번 답변을 드린다는 것이 어색하여 살짝 밀당을 하게 된다. 이들 두 남녀의 첫 만남은 이즈미 시키부의 옛 연인인 다메타카 친왕(為尊親王)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미야(宮)’로 표현되어 있는 소치노미야(帥宮) 아쓰미치(敦道) 친왕(親王)은 다메타카 친왕의 동생으로서 유명(幽冥)을 달리 한 형의 옛 연인이었던 이즈미 시키부에게 먼저 관심을 표명한 것이다. 이전에 다메타카 친왕을 모셨던 시동은 현재는 그 동생인 아쓰미치 친왕을 모시고 있었다. 시동이 아쓰미치를 대신하여 일기에 ‘온나’로 표현된 이즈미 시키부에게 관심을 가지고 타치바나(橘) 꽃을 가져다 드리고 그 감상을 이야기해 달라고 한 것이다. 죽은 형을 매개로 그 연인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것은 미야(宮)였던 것이다. 아쓰미치 친왕의 은근한 구애 활동에 이즈미 시키부는 뜻밖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인 것이다.

옛 연인과의 사랑을 못 잊어하며 가슴 아파하다가 그 동생의 구애에 기다렸다는 듯이 홀라당 넘어가는 꼴이다. 사랑의 상처는 사랑으로 치료하라는 옛말이 맞는가 보다. 시동을 통해 건네 진 타치바나 꽃에 대한 감상을 와카로서 화답하는 온나의 모습은 이즈미 시키부의 가인(歌人)으로서의 면모를 찾아볼 수 있는 국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와카의 내용은 사랑을 갈구하는 노골적(露骨的)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고대인의 남녀 사이에서 “목소리를 듣고 싶다”는 표현은 만남을 전제로 한다. 보거나 듣는다는 표현은 본격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온나는 적극적인 표현을 통해 구체적인 만남을 희구(希求)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의 마음이 끌리고 있음을 알리면서 상대 남성에 대한 노골적이고도 적극적인 호감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이 시점에 두 사람의 연애는 성립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본 작품의 시작은 이렇듯 사랑을 적극적으로 갈구하는 온나의 에로스적 욕망을 그 서두에서부터 표출하고 있다.

이즈미 시키부가 답가(答歌)를 보내지 않았음에도 황자(皇子)로부터 편지는 끊이지 않고 전해졌으며, 그의 속마음을 아주 화끈하게 고백하는 내용이 많았다. “그대를 향한 사랑하는 이 마음 고백하지 말 것을, 당신 향한 그리움에 견디기 힘든 오늘.”이라면서 마음을 활짝 열어 보였다. 에로스적 욕망을 와카라는 도구를 통해 내보이고 있는 온나에 비해 와카를 받아 든 미야의 태도는 상대적이다. 목소리를 듣고 싶다며 와카를 적어 준 온나의 태도에 비해 시동에게 “절대로 다른 이에게 말하지 말거라”라며 미야는 자신의 평판을 두려워하는 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시동에 대한 철저한 입단속은 온나와 미야의 연애 형태를 시작 전부터 규정짓고 있는 미야의 태도를 대변해 준다. 이는 결국 이후 진행될 두 사람의 연애는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않고 이루어지는, ‘은밀한 사랑(忍の恋)’이 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더욱 금단의 달콤한 욕망의 촉발제로 작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첫 번째 증답가의 교환이 있은 후 미야는 자주 편지를 보는 반면 온나는 수동적으로 가끔 답장을 보낸다. 그냥 울적함도 약간 달래는 듯한 심정으로 답장을 하고 날을 보낸다. 미야는 자주 편지를 보내지만 온나는 가끔 답장을 한다. 먼저 와카를 보낸 것은 온나 자신인데도 불구하고 그녀는 적극적인 남성의 태도에 마지못해 답장을 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자 황자는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낸다. “나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으리니 가치 없다 마시오. 형님 이야기도 좋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해 질 녘에 만날 수 있겠소이까?” “위안이 된다니 당신과 만나 이야기 나누고 싶지만 기구(崎嶇)한 나의 처지 말할 가치도 없네, 나부끼는 갈대처럼....어쩔 도리가 없습니다.”라는 답변이 왔다. 그래서 황자는 결심을 했다. 여자가 예상을 못하는 오늘 밤 불쑥 찾아가려고 마음을 먹었다. 그는 시동을 불러 오늘 밤 행차를 하는데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마차도 평범한 것으로 준비하여 몰래 다녀올 수 있도록 준비를 시킨다. 여자는 황자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피할 수도 없고,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어서 방으로 모셨다. 그는 평판대로 빼어난 용모에 정말로 기품 있고 매력적이었다.

둘은 발을 사이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밤이 으슥해졌다. 황자는 “무례한 행동이라 생각하지만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이 내가 생각해도 무서울 정도라오.”라고 말하면서 살그머니 기척도 없이 여자가 있는 곳으로 발을 들치고 들어갔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교교(皎皎)한 달빛이 비치는 발 뒤에서 뜨거운 사랑놀음이 이어졌다. 그녀는 마음이 혼란스러웠지만 옛사랑은 점차 사라지고 새로운 사랑의 달콤함에 젖어 온몸을 떨고 있었다. 둘은 달이 너머 가고 새벽이슬이 대지를 적시듯이 온몸을 적시며 사랑의 향기에 흠뻑 취했다. 날이 밝아오기 전에 황자는 또 몰래 슬그머니 자기의 처소로 돌아갔다. 그는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편지를 보낸다. “방금 헤어졌지만 그 사이 어찌하고 계시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하리 만큼 당신이 그립소. 사랑한다는 나의 고백을 흔한 사랑이라고 생각 마시오. 그대 향한 그리움 한없네.” 그러자 그녀는 “그렇고 그런 사랑이라 여기지 않네요. 오늘의 혼란스러운 내 심경 견디기 힘겨워라.”라는 답장을 보냈다. 아무튼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된 이후에도 한동안 서로 어설픈 줄 달이기가 조금 반복된다. 그러다가 미야의 적극적인 구애와 이어지는 방문에 그녀는 자신의 울적함이 달래지는 느낌을 받는다. 두 사람의 교접(交接)이 이루어지고 증답가가 연속되는 것에 대한 기쁨, 희열, 충만감의 표현은 적시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그녀 스스로의 울적함이 달래졌다는 표현만이 있을 뿐이다. 너무나 은유적인 표현이다.

두 사람의 한 동안 서로의 마음과 달리 밀당을 하는 상황이 되고 만다. 황자는 마누라가 있는 유부남으로 그녀를 밤에 몰래 만나러 나오려니 이것저것 눈치 볼 것이 많다. 그래서 본인의 욕심처럼 매일 궁을 빠져나올 수 없어서 어쩌다가 몰래 밤늦게 실행한다. 그러나 혼자 몸인 이즈미 시키부는 첫사랑을 잃고 심란한 마음이지만, 어떻게 한번 의지하려고 하는데 그 남자의 본마음을 잘 모르겠다. 호색한으로서 자기 몸만 탐(貪)하고 나몰라라 하는 것 아닐까 근심도 된다. 그러다가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불공을 드리러 절에 가서 며칠 씩 묵기도 한다. 하필이면 그녀가 없는 날 황자가 불쑥 와서 허탕을 치고 가기도 하고, 철야 기도를 한 후에 집에 와서 피곤하여 곤히 쓸어져 자는 통에 황자가 찾아온 것도 모르고 문을 열어주지 않은 적도 있다. 그러자 황자는 그녀의 남성 편력(遍歷)을 의심하기도 하면서 서로를 원망하기도 한다. 두 번을 찾아가 바람을 맞았고, 그 때문에 이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는 황자의 투정에 그녀는 단호히 대답한다. “밤이면 밤마다 수심에 잠긴 사람, 잠 못 이루고, 단 하루도 편안히 잠든 적 없어라. 저로서는 하루 이틀쯤 잠 못 이룬다 해서 별나게 생각되지는 않습니다.”라고 적어서 보냈다. 그녀는 황자가 자주 찾아오지 않는 것이 사랑이 깊지 않다고 늘 투정을 부리기도 했다. 한 번은 황자가 장마로 가모강에 홍수를 보러 나가서 “강물이 넘쳐흐르듯 당신을 향한 나의 사랑은 가모강의 물보다 더 깊다네.”라고 보내자, 그녀는 “사랑한다며 정작 오진 않네요. 넘쳐흐르는 가모강의 수위보다 깊다는 말의 허망함이여!”라고 쏘아붙였다.

어느 날 황자가 저녁에 그녀의 집으로 행차를 하려고, 향을 피워 외출복에 그 향을 배게 하고 있었다. 그때 그의 유모가 와서 황자의 밤 외출을 다른 사람들이 알고 이런저런 얘기가 많으니 더 이상 외출을 자제하는 것이 좋다고 진언(進言)을 했다. 그 여자의 신분이 그리 높지 않으니 황자가 원하면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여 만나는 게 더 안전하다고 말했다. 황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세월이 흘러 여름이 되어서 겨우 그녀 집에 행차를 했다. 그동안 못 온 것에 변명도 하고 다짜고짜 그녀를 끌어서 마차에 태워 비밀의 안가(安家)에서 밀회를 했다. 안가의 밀회도 시간은 같이 흘러 새벽이 가까워 오면 그들은 헤어지기가 너무나 아쉬웠다. 그래서 황자는 “밉살스러운 닭, 목을 비틀어 대도 마음 상하네, 울 때를 알지 못하는 새벽녘 첫닭 소리”라고 읊었다. 그러자 그녀가 화답하기를 “당신을 모르리, 오시지 않는 당신 기다리다가 지샌 다음날 듣는 무심한 첫닭소리”라고 응수했다. 어느 달 밝은 밤에 황자가 달에 대한 감상을 적어 보낸다. “지금 뭘 하고 계십니까? 저 달을 보고 계시오? 나처럼 그대 나 그리며 있는지? 능선 넘는 달! 볼 수 없는 그대처럼 아쉬움만 더하네.” 그녀가 답하기를 “함께 보았던 달이라 생각하니 눈길 가지만, 만날 수 없는 오늘 울적해서 보지 못하네.”라고 했다.

밤마다 비밀리에 마차로 오가며 만나는 것이 무척 힘들고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큰마음을 먹고 합치게 된다. 바로 미야의 온나에 대한 입궁 권유이다. 이는 두 사람의 사랑을 만천하에 여실히 드러나게 하는 하나의 전환점이다. 일기의 마지막 부분 역시 온나가 미야의 저택에 들어간 이후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할애(割愛)되어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미야가 온나에게 입궁을 권유하는 이유 역시 온나의 울적함에 있다는 점이다. 화려하고 남성에게 인기가 많다는 소문으로 알려진 온나와 달리 미야가 직접 경험한 그녀에게는 근본적인 슬픔이 있었다. 이런 마음을 헤아리던 미야는 온나에게 자신의 저택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한다. “이렇듯 울적하게 상념에 잠겨 계시는군요. 결정해 둔 바는 없지만, 그냥 제 처소로 오십시오.” 이는 본인이 그녀의 집에 가서 바람맞을 때도 많았고, 보고 싶을 때 마음껏 보지도 못하고, 어떤 때는 그녀 집에 가보니 다른 마차가 당도해 있어서 다른 남자를 끌어들여서 즐기고 있는지 의심도 되어서 질투로 밤잠을 설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녀를 궁에 불러들이면 그런 걱정이 말끔히 사라질 것이다. 다만 공개적인 연애 사건으로 시끄러워질 걱정만 있는 것이다.

어느 날 결심한 듯 미야는 온나에게 자신의 처소로 들어올 것을 권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어느 시점에서 다시 “만약 예전에 말씀하셨던 대로 울적하시다면, 제 저택으로 오시지 않겠습니까?”라고 거듭 권한다. 미야의 입궁 권유는 온나에게 심각한 고민을 안겨다 주게 된다. 입궁을 하게 된다면 그들의 사랑은 더 이상 ‘은밀한 사랑’이 아닌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온나는 정실부인이 있는 미야의 저택에 들어가게 되면 메시우도(召人)로서 종속적인 위치를 감내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거듭된 번민을 하는 그녀가 입궁을 결심하는 이유 역시 “울적함이 잊히는 듯 하기에”라고 표현하면서, 모든 것을 ‘울적함’ 때문인 것으로 핑계한다. 결국 12월 18일, 미야는 몸소 온나를 데리고 입궁을 감행한다. 그동안 두 사람이 나누던 증답가를 중심으로 두 사람의 사랑을 담던 일기 내용은 입궁 이후에는 증답가 없이 여러 사람의 모습을 묘사하다가 갑작스럽게 결말을 맺는다.

아쓰미치 즉 소치노미야와의 사이에는 아들이 한 명 있는데 이와쿠라(石藏) 절의 승도에게 양육되면서 이와쿠라노미야(石藏の宮)로 불리다 출가 후 에이카쿠(永覺)라 불렀다. 이즈미 시키부는 아쓰미치 친왕 사망 후 1년 반이 지난봄, 이치죠(一條) 천황의 황후인 쇼시(彰子)의 뇨보가 되어 궁중에 출사하였다. 그때 궁중에는 무라사키시키부(紫式部), 아카조메에몬(赤染衛門), 이세다이후(伊勢大輔)등 걸출한 재원들이 출사해 있었다. 쇼시를 위한 재원이 된 것은 쇼시의 아버지 후지와라노 미치나가(藤原道長)의 간청에 의한 것이었다. 미치나가의 권유로 미치나가 가문의 일을 관리하던 후지와라노 야스마사(藤原保昌)와 재혼하였는데, 이즈미 시키부보다 20살 정도 연상인 후지와라노 야스마사와의 결혼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같다. 1016년 4월 16일에 고시키부(小式部)의 아버지이고 이즈미 시키부에게 있어서도 잊지 못할 전 남편 다치바나노 미치사다가 사망했다. 그러나 전 남편의 사망보다 더 심하게 이즈미 시키부에게 충격을 준 것은 1025년 11월 17일 딸 고시키부가 27세의 나이로 출산 후 사망한 것이었다. 이때의 이즈미 시키부의 슬픔은 가집(歌集)에 십 여수의 절실한 노래로 실려 있다. 딸이 사망했을 때 이즈미 시키부는 48세 정도였으며, 그 후 그녀의 생활에 대해 전하는 마지막 기록은 1027년 9월 미치나가의 딸인 황태후 겐코(姸子)의 49재 때 야마토(大和) 임지에 있었던 후지와라노 야스마사를 대신해 옥을 헌사하고 와카를 지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그 이후의 생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즈미 시키부는 50세 이상의 수명을 누렸다고 할 수 있다. 그 기간 동안 2명의 남편과 결혼하고, 2명의 황자와의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다.

헤이안(平安) 시대는 간무(桓武) 천황이 교토(京都)로 수도를 옮긴 794년부터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건립된 1192년까지 약 400년간의 시기를 말한다. 이 시대는 귀족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천황의 정치실권을 빼앗아 200년이 넘도록 섭정 관백시대를 이어가며 화려한 귀족문화를 보낸 시기이다. 그리고 일본 문학사에서는 여류문학이 가장 융성했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여성 특유의 풍부한 감성으로 여류문학의 전성기를 이루었는데, 일본 고전문학의 백미로 꼽히는『겐지모노가타리(源氏物語)』,『마쿠라노소시(枕草子)』, 『가게로 닛키(蜻蛉日記)』등이 그 대표 작품들이다. 후지와라(藤原) 가문이 섭관정치를 하면서 세도를 누리기 위해 자신들의 딸들을 후궁으로 출가시키고, 문학적 재능이 있는 여류문인을 채용하여 딸의 교육에 힘을 썼다. 그래야 자신의 딸이 왕의 총애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주로 중류귀족의 딸들이 뇨보로 입궐하여, 후궁을 모시며 문학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중류귀족의 딸인 뇨보들이 헤이안 시대 여성문학의 중심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세이쇼나곤(淸少納言), 무라사키 시키부, 이즈미 시키부, 아카조메에몬 등이다. 그 당시 연애의 시작은 와카를 주고받는 것으로 시작되어 와카 짓기에 능수능란한 사람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 당시의 사람들에게 와카에 관한 교양이 요구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와카는 31자의 문장 속에 사랑의 감정을 이입해야 하기 때문에 얕은 지식이나 교양으로 좋은 노래를 만드는 것은 어려웠다. 이렇게 와카는 남녀의 연애수단으로 발달했다.

헤이안 시대의 남녀의 만남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이를 살펴보면 헤이안시대의 연애는 자유연애였지만 여자는 가족 이외의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서는 안 되었다. 남녀의 만남은 남자가 관심이 있는 여자에게 구혼(求婚)의 내용을 담은 와카 ‘요바이부미(よばい文)’를 보낸다. 그러면 여자가 그 와카에 대한 답장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구혼의 와카를 받은 여자는 직접 답장을 쓰지 않고 하인이나 다른 사람이 대필해 보내게 하지만 여자가 직접 답장을 써 보내면 결혼 성립으로 이어진다. 답장을 받은 남자가 여자 집을 3일 연속해서 방문하면 결혼이 성립되고, 찾아오던 남자가 3년 동안 여자의 집으로 찾아오지 않으면 이혼이 성립되는데 이것을 요가레(夜離れ)라고 한다. 당시의 결혼제도는 초서혼(招壻婚) 즉 데릴사위제 비슷하지만 완전히 다른 일부다처(一夫多妻)의 결혼관습이 있었다. 초서혼(招壻婚)은 저녁 무렵에 남자가 여자 집에서 함께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새벽에 본인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결혼 후에도 별거 형태로 지내야 했기 때문에 그 관계는 매우 불안정한 것이었다.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해도 막상 저녁이 되면 다른 여자 집으로 갈 수 있어, 언제 관계가 끊어질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이다. 그래서 여류문학의 저변에는 항상 「기다리는 여자(待つ女)」로서의 슬픔,「무료함(つれづれ)」을 달래고, 남녀사이를 「덧없다(はかなし)」고 하는 불행의식이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여인들은 이러한 사랑의 불공평함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사랑에 몸을 맡기고 남자가 방문해 주길 기다리며 사랑을 완성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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