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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스스로 태운 권력의 불나방 - 강청(江靑)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51127)

by 금삿갓

1. 지기 싫어하는 어린이

강청(江靑)의 어릴 적 행적은 이렇다. 그녀의 고향은 산동성 제성시(諸城市)로 청도시(靑島市)와 일조시(日照市) 중간에 있다. 강청의 할아버지 이순해(李純海)는 원래 이곳에서 2만여 평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였다. 말하자면 제법 잘 나가는 부르주아였다. 그런데, 그 많던 재산도 아버지 이덕문(李德文) 대에 이르러 거의 파산하였다. 강청이 평소 "매우 가난한 수공업 집안에서 태어났다"라고 하는 것은 나름 이유가 된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는 목공소 주인이었다. 파산한 이덕문은 처음에 목공소 견습공으로 들어가 뒤에는 목공소 주인이 되었으며, 그 뒤 다시 부를 일구어 제성의 성문 부근에 여관을 차렸다. 이덕문은 돈이 생기자 원래 지주 집안의 딸이었으나 늙고 못생겼다는 이유로 본처를 걷어찼다. 그리고 늦은 나이인 50세에 다시 20여 세의 젊고 예쁜 난씨(欒氏)를 첩으로 삼았다. 1914년 3월 난씨는 딸을 낳았다. 이덕문과 난씨는 아이를 임신했을 때 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까지 '이진남(李進男)'으로 지어놓았던 터이라 실망이 컸다. 딸이니까 그들은 할 수 없이 이름을 남(男) 대신 해(孩)로 바꿔 그녀의 이름을 '이진해(李進孩)'로 고쳐지었다. 아명으로 이니(二妮)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녀가 바로 40년 후 중국대륙을 떠들썩하게 흔들게 되는 최고의 권력자 강청이다. 강청이 태어났을 때 아버지 이덕문은 이미 60세였으며, 위로 이복 오빠 이건훈(李建勳)과 이복 언니 이운로(李雲露)가 있었다. 이건훈은 이한경(李翰卿)으로도 불린다. 어린 이진해는 6세 되던 해에 중국의 풍습에 따라 전족(纏足)을 해야만 했다. 당시 산동 지역에도 여전히 전족이라는 악습이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이진해는 전족한 발이 너무도 아파서 밖에서 놀 때는 몰래 전족을 풀어 버리고 집에 올 때 다시 전족을 하곤 했다.

여자 어린애로서 이러한 일은 당시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담한 행동이었다. 이처럼 이진해는 어릴 때부터 담이 크고, 남에게 죽고 못 사는 맹랑한 성격의 소녀였다. 그녀의 이러한 성격을 잘 대변해 주는 어린 시절의 한 에피소드가 있다. 그녀의 동네에 단운전(單雲田)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함께 싸우며 놀다가 이진해를 보고, "넌 첩의 자식이야! 누가 모를 줄 아냐, 네 집에는 전부 나쁜 사람들뿐이야!"라고 놀렸다. 단운전과 싸워도 힘이 부치자 원한을 품은 이진해는 경찰이던 이복 오빠 이건훈에게 단운전을 혼내 달라고 졸랐다. 온갖 거드름을 피우던 오빠 이건훈은 동료 경찰 몇 명과 같이 그 집으로 가서 단운전의 아빠와 삼촌을 자식 교육 잘못 시켰다며 흠씬 패버렸다. 그 일로 삼촌은 결국 어린 딸과 부인을 두고 죽고 말았다. 부인은 생활고로 남의 집 유모로 들어가고 어린 딸은 영양실조로 죽게 되었다. 이렇게 집안을 풍비박산(風飛雹散) 내버리니 동네 애들은 모두 무서워 이진해를 피해 다닐 정도로 맹랑한 아이였다. 아마 오빠나 이진해의 이런 성격이 그의 아버지 성격이나 습관을 보고 형성된 것인지도 모른다. 이덕문은 성미가 급하고 거칠어 걸핏하면 자기 아내를 비롯하여 집안 식구들에게 손찌검을 하곤 했다. 어느 정월 대보름에 이진해의 어머니 난씨가 실수로 넘어져 그릇을 깨뜨렸다. 이에 화가 난 이덕문이 삽으로 마구 때리는 바람에 그녀는 손가락이 부러졌다. 놀라서 울던 이진해도 아비를 말린다고 팔을 물다가 도리어 따귀를 얻어맞아 이가 부러졌다. 더 이상 고통과 멸시를 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난씨는 딸을 데리고 그 집을 나왔다. 매 맞다가 도망 나온 여자라 가진 것도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장씨(張氏)네 집 들어가서 하인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1921년 이진해가 소학교에 입학할 때, 학교의 교장 설환등(薛煥登)이 그녀의 다리가 가늘고 길다고 해서 '운학(雲學)'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이운학을 본명으로 쓰게 된 것이다.

2. 첫사랑 : 사랑과 연기를 배우다.

1926년 12세의 이운학은 소학교 5년 과정을 졸업하고, 어머니와 함께 천진(天津)의 언니 집으로 가서 살았다.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한 그녀는 언니 집에서 별 하는 일 없이 지냈다. 1929년 봄 그녀의 형부 왕극명(王克銘: 당시 봉계군벌의 군관)이 제남(濟南)으로 전근되어 그녀도 언니 식구를 따라 제남으로 갔다. 장칭은 그곳에서 산동실험극원(山東實驗劇院)에 들어가 연극과 고전음악 등을 배웠다. 이운학은 극단 원장이자 칭다오(靑島 청도) 대학 교무처장인 사회적 유력인사인 조태모(趙太侔)의 도움으로 칭다오대학 도서관 직원으로 일하면서 중문과 청강생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 그 계기로 유명한 현대문학가 문일다(聞一多)와 심종문(沈從文)을 알게 됨으로써 어느 정도 문학적 소양을 쌓을 수 있었다. 이운학은 이때 물리학과에 다니던 19살의 유계위(兪啓威)를 만났다. 그는 조태모의 처남이고, 그의 누나 유산(兪珊)은 당시 중국 연극계의 유명한 배우였다. 유계위(兪啓威)는 훗날 이름을 황경(黄敬)으로 바꾸고 천진시 장 겸 당서기를 역임한다. 이운학은 유계위의 소개로 누나인 유산(兪珊)을 따라서 전한(田漢)이 창설한 극단 남국사(南國社)에 들어갔다. 당시 유산은 중국 연극계의 인기배우로 남국사의 일원이었다. 이운학은 유산을 선망했고, 그녀를 찾아가 연극수업을 받았다. 유계위도 청도대학의 연극서클을 운영하고 있어서 유계위와 눈이 맞아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때 이운학은 학력이 낮고 가난하여 동료들로부터 갖은 멸시를 받았지만, 개성과 승부욕이 아주 강했기 때문에 뭐든 뒤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노력했다고 한다. 실험극원 입학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는 첫 번째 전환점이 되었다. 연극배우 이운학이 없었다면 훗날 영화배우 남평, 남빈(藍苹, 藍蘋)이 없고, 따라서 강청도 없기 때문이다. 1931년 '9.18 만주사변'이후 장개석(蔣介石)의 일본침략에 대한 소극적 대응에 반발해 전국 각지에서 '일본침략 분쇄', '장개석의 부저항주의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유계위는 이때 공산당에 가입하고, 칭다오대학 학생들을 이끌며 동맹휴학을 일으키는 등 학생운동의 리더였다. 그의 영향을 받은 이운학은 좌익 연극원동맹 청도대학 극단인 '해구극사(海鷗劇社)'에 가입했다. 이 시기에 둘은 열애에 빠져 동거생활을 시작한다. 이것이 이운학의 파란만장한 남성편력(男性遍曆)의 시작이다. 이때 그녀는 경극단에도 들어가 제남, 청도, 연태(煙臺) 등지에서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의 사정도 이운학이 적응하기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운 점이 많았다. 연기 경력이 짧은 데다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하였고 공연도 정기적으로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933년 당시 유계위는 중국공산당 청도대학 지하지부 서기를 거쳐 중국공산당 청도시위원회 선전부장을 맡고 있었다. 그런데 이해 7월 배반자의 밀고로 유계위가 국민당에 체포되는 사태가 발생하여 그녀는 황급히 상해로 도망갔다. 그녀는 유산의 부탁으로 상하이 좌익 작가연맹, 희곡 작가연맹의 창시자이자 영도자로 위명을 떨치고 있는 전한(田漢)의 문하에 들어갔다. 상해에서 그녀는 전한(田漢)과 그의 동생 전원(田沅)의 도움으로 서명청(徐明淸)이 책임자로 있던 '신경공학단(晨更工學團)'의 교사로 일할 수 있었다. 이곳은 비정규학교로 월급은 없고 숙식만 제공받았다. 이때 그녀는 주로 전한이 편극한 ‘너의 채찍을 놓아라’ 등의 연극을 인근 농촌에 돌아다니며 공연하면서 구국항일운동을 선전하는 일을 맡았다. 이운학은 단발머리에 쪽빛 치파오(旗袍)를 즐겨 입었으며 화장을 하지 않았다. 활발한 성격으로 노래, 연기를 했고 극단원들과 잘 어울렸다고 한다. 1933년 겨울 체포되었던 연인 유계위가 아버지의 도움으로 석방되어 상해로 돌아왔다. 그러나 집안 부모님의 반대로 그들은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지만 다시 달콤한 동거를 시작하였다. 1934년 1월 28일 상해에서 항일운동 시위가 일어났다. 신경공학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이 시위에 참가하였으며 이 일로 이운학은 체포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운학은 유계위와 함께 북경으로 도망갔다. 북경에서도 그들은 동거를 계속하였으나 유계위의 부모가 그들의 동거를 반대하여 생계비를 보내주지 않아 생계를 잇기가 곤란한 지경이었다. 결국 이운학은 1934년 5~6월경 그의 곁을 떠나 상해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름을 이학(李鶴) 또는 이운고(李雲古)로 바꾼 후 기독교 상해청년회 노동부의 소개로 여공 야학교에서 가창과 연기 등을 가르쳤다. 그 후 다시 서명청이 있던 포동(浦東)의 야학교로 옮겨 장숙정(張淑貞)이란 이름으로 교사생활을 계속하였다. 1934년 10월 말 이운학은 상해 조풍공원(兆豊公園: 지금의 중산공원)에서 청도 시절 친구 아락(阿樂 : 본명은 락우홍樂于泓)을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때 아락은 상해 우체국 직원이면서 공청단(共靑團) 중앙연락원으로 국민당 특무원들의 추적을 받고 있던 상태였다. 그들이 만날 무렵 아락은 이상한 낌새를 채고 급히 영국 조계지로 도망쳤으며 아락을 놓친 특무원들은 대신 이운학을 체포해 갔다. 그녀는 상해시 공안국에 약 2개월간 수감되었다가 기독교 상해 여청년회와 서명청의 도움으로 보석으로 풀려났다. 일설에 의하면 그녀는 감옥에서 형량을 낮춰주는 대가로 간수들에게 성상납(性上納)을 했고 사상전향서를 쓰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온갖 황색신문의 루머 전파로 출소 후 우울증에 시달리고, 자살 시도도 했었다. 그때 서명청은 모친의 병세가 위독하여 고향으로 가려던 참이었는데, 이운학에게 동행하자고 했다. 특별한 일이 없던 이운학은 그녀와 함께 절강성(浙江省) 해현(海縣)의 시골로 돌아갔다. 현에서 몇 십리 떨어진 곳으로 몇십 가구가 살고 있는 동네였다. 산자수명한 강남의 조그만 산촌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서(徐)씨로 집성촌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정확한 표준어 발음을 하는 북방의 처녀에 호기심이 많았다. 서명청의 아버지는 한의사(中醫)였다. 몇 마지기 땅뙈기에 몇 칸짜리 질박한 집에 살았다. 이운학은 북방에서 자랐기 때문에 빼어난 산수의 강남 산촌의 풍경에 매료됐다. 게다가 자연환경이 그윽해 번다하지 않아 좋았다. 그녀의 마음도 점점 안정되면서 차분해졌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저혈압인 데다 두 볼에 붉은 기운이 돌고 기침을 계속해 오랫동안 월경도 하지 않았다. 서명청의 아버지가 진찰해 보니 폐결핵이었다. 서명청의 아버지가 약재를 달여 먹인 뒤부터 건강이 조금씩 좋아졌다. 그때 서명청의 당질(堂侄)이 결혼하기 위해 이 마을에 와 있었다. 그 당질이 북경 의학원 서양의학과 학생이었다. 그가 진료를 한 결과도 역시 폐결핵이었다. 한약과 양약을 잘 복용하면서 건강을 완전히 되찾았다. 이때 그녀에게 북경에 있던 유계위가 오라고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즉각 보따리를 싸서 북경으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러나 결국 사정이 안 좋아 다시 혼자 상해로 돌아왔다.

3. 발판이 필요해

1935년 봄 그녀는 상해 업여극인협회(業餘劇人協會)에 들어가 유명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 ≫의 여자 주인공 노라 역에 캐스팅 되었다. 이것은 그녀의 인생을 또다시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강청은 훗날 그녀의 자술서에서 "1935년 봄, 난 영원히 그날을 잊을 수 없다. 그날은 내 마음처럼 음산한 날이었다. 나는 한없이 따뜻한 고향을 떠나,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 것을 버리고, 상해로 가서 <노라(인형의 집)> 공연을 하였다."라고 적었다. 여기에서 그녀가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 것을 버리고"라고 술회한 것은 바로 그녀와 유계위 사이의 아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당시에 강청은 그의 아이를 임신을 하고 있던 중이었는데, 무대에 서기 위해 낙태수술을 했던 것이다. 이 공연에서 그녀는 그간의 불행을 말끔히 씻고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 있기를 열망했다. 이때부터 그녀는 예명을 남평(藍苹) 또는 남빈(藍蘋)이라 하였다. <인형의 집>은 당시에 공연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으로 1935년 6월 27일 상해의 금성대희원(金城大戱院)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인형의 집>은 첫 공연부터 연일 매진을 기록하면서 대단한 호응을 받았으며, 상해의 각 언론에는 노라역을 맡았던 남평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인형의 집>의 대히트로 그녀는 불과 21세의 어린 나이로 다소 유명세를 타기는 했으나 대스타가 되기에는 아직도 험난한 길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관객이 적은 연극무대에서는 대스타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객이 훨씬 더 많은 영화계로 시선을 돌렸다. 1935년 초 전통영업공사(電通影業公司)가 상해에서 영화 <풍운아녀(風雲兒女)>를 촬영하고 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가 의용군진행곡(義勇軍進行曲)이 바로 현재 중국의 국가이다. <풍운아녀>의 제작이 끝날 무렵 강청은 전통영업공사에 들어갔다. 그 후 남평은 전통영업공사의 세 번째 작품 <자유신(自由神)>의 여군 여월영(余月英) 역을 맡았다. 그러나 극 중 여월영은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은 배역이어서 자못 실망이 컸었다. 이때 그녀는 당시 상해 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있던 기자 겸 영화평론가이자 배우였던 당납(唐納)과 열애에 빠졌다. 그의 본명은 마계량(馬季良)인데, 마계종(馬繼宗) 또는 마기종(馬驥宗)으로도 불리던 공산지하당원이었다. 당시 언론에서는 남평이 당납의 이름을 빌어 유명세를 타려 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1936년 4월 21일 남평은 당납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으나 혼인 신고를 하지는 않았다. 그 후 그녀는 영화 <도시풍광(都市風光)>과 연극 <흠차대신(欽差大臣)> 등에 출연하였으나 그다지 비중 있는 배역을 맡지 못하고 있었다. 연화영편공사(聯華影片公司)의 <낭산첩혈기(狼山喋血記)>에서 주인공 유삼(劉三)의 아내역을 맡았으나 그 역도 허명뿐이었다. 1937년 5월 남평은 당납과 헤어지고 상해 연극계에서 매우 명망이 높던 연출가 장민(章泯)과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당납의 명성을 이용하여 영화계에서 스타가 되어 보려고 하였으나 영화계의 높은 벽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연극계로 돌아와 장민의 명성을 이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계획은 또다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하여 유부남이었던 장민은 아내와 이혼하게 되고 실연당한 당납 또한 자살 소동을 벌이게 되어 여론이 그녀를 부도덕한 여인으로 몰아갔다. 상하이 황색신문들에 의해 대서특필되면서 연예계뿐 아니라 사회의 여론이 좋지 않아 지탄대상이 되기도 했다. 1937년 7월 상해에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강청은 스타의 꿈을 접고 도망치듯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녀는 유계위가 연안(延安)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안(延安)으로 갈 결심을 했다. 유계위는 이름을 황경(黃敬)으로 바꾼 뒤였다. 그 시기 연안은 중국 공산당의 성지로 떠오르고 있었고, 그도 북경 대표자로 회의 참석차 그곳에 있었다. 1937년 초부터 외국기자들이 장정을 끝낸 모택동(毛澤東)과 홍군, 공산당의 실체를 취재하기 위해 모여드는 통에 연안 러시현상이 나타났다. 뿐만 아니라 많은 좌익 문화계 인사들과 진보적인 청년 학생들이 너도나도 국민당 군의 봉쇄선을 뚫고 천리, 만리의 먼 길을 어렵다 생각 않고 연안으로 달려갔다. 황경은 이 회의에 참석했을 때 <중국의 붉은 별>을 쓴 미국의 저명한 기자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의 부인이며 <아리랑>의 저자인 님 웨일스(Nym Wales)를 동반했다. 님 웨일스는 이때 연안에서 중국공산혁명을 통한 조국의 독립운동을 벌였던 김산(金山: 본명은 張志樂 장지락)을 만나 나라를 빼앗긴 조선 청년이 중국 전역을 누비며 공산혁명에 투신해 조국광복을 염원한 내용을 담은 <아리랑의 노래(Song of Ariran)>도 1941년에 출간했다. 그녀는 김산에 대한 항일투쟁 취재기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변절자의 밀고로 체포돼 3개월의 수형생활을 마친 뒤 서안(西安)으로 가있던 서명청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서명청은 엽검영(葉劍英)의 부인 위공(危拱)과 친분이 두터웠던지라 그녀의 소개로 팔로군 사무소로 가서 주은래(周恩來)의 부인 등영초(鄧潁超)를 만날 수 있었다. 그 당시 남평이 가진 것이라고는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연극의 목록을 적은 <영화연극집> 뿐이었다. 등영초는 남평이 상해의 좌익극단에서 활동하던 배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녀를 연안(延安)으로 갈 수 있도록 주선해 주었다. 당시 연안에서는 진보적인 문화계 인사들을 적극 환영하고 있었던 터였다. 1937년 8월 말 그녀는 연안(延安)에 도착하여 제3초대소(第三招待所) 즉 서북여사(西北旅社)라고도 불리는 곳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그녀는 숙박부에 이름을 적으면서 이름을 '남평(藍苹)' 대신 '강청(江靑)'이라고 했다. '강청'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 것으로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첫째, "청색(靑)은 쪽(藍)에서 나오지만 쪽 보다 더 푸르다.(청출어람이승어람靑出於藍而勝於藍)"라는 사자성어 청출어람(靑出於藍)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쪽", 즉 "남(藍)"은 바로 남평(藍萍)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강청(靑)은 비록 남평(藍)에서 나왔지만 남평 때 보다 더욱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겠다."라는 의미이다. 둘째, 강청(江靑)이란 말은 당대(唐代) 시인 전기(錢起)의 시 <성시상령고슬(省試湘靈鼓瑟)>에 "曲終人不見(곡종인불견) / 노래가 끝나도 사람은 보이지 않고, 江上數峰靑(강상수봉청) / 강가의 산봉우리만 푸르구나."에서 따왔다고도 한다.

4. 권력의 심장을 노려라.

강청은 2개월간의 심의를 거친 후 황경의 도움으로 다시 당적을 회복하고, 1937년 11월 중국공산당 중앙당교(中央黨校)에 입학하여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장칭은 1938년 4월 노신(魯迅) 예술학원이 설립되면서 이 학원의 연극 교사가 되었다. 1938년 '7.7 항전' 1주년 기념행사가 연안에서 열렸다. 이날 오전에는 모택동(毛澤東)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에는 문화행사가 있었다. 이 문화행사에서 강청은 경극 <타어살가(打漁殺家)>의 주연을 맡아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모택동은 배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분장실로 들어가서 강청과 악수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이로써 강청과 모택동의 세기의 역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 것이다. 강청이 연안에 들어갔을 때 모택동의 두 번째 부인 하자진(賀子珍)은 신병 치료차 고향인 서안에 있었다. 강청은 그런대로 연기뿐만 아니라 노래도 잘하였으며, 모택동은 그녀가 공연한 <타어살가>를 좋아했다. 그녀는 글씨와 문장에도 뛰어났고 특히 해서를 잘 썼다. 말타기와 포커를 좋아하고 뜨개질과 화장을 잘하였으나 사격은 좋아하지 않았다. 1938년 8월 비로소 강청은 군위원회 사무실 비서로 발령받아 측근에서 모택동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모택동과의 관계가 예사롭지 않은 사이로 발전하였다.

당시 모택동의 부인 하자진은 신병 치료도 있었지만 둘 사이의 간극이 벌어진 상태였다. 사태는 연안의 춤바람 사건이다. <대지의 딸>을 쓴 미국인 여기자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가 그 당시 연안에 체류 중이었다. 그녀는 자유분방하여 주덕(朱德)을 처음 만나서 서양식 볼 키스 인사로 연안시내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리고 사교춤을 공산당 간부들에게 가르치고 공개적으로 즐겼다. 이런 일로 여성 공산당원으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 모택동이 스메들리와 대화를 즐겨서 그녀의 집에서 자주 밤늦도록 대화를 나눴다. 대화는 오광위(吳光偉)라는 여성 통역이었다. 그러니 자연 통역과 가까이 앉아서 대화할 수밖에 없다. 낌새가 이상하자 부인 하자진이 밤에 그곳을 급습하여 대판 싸웠고, 하자진이 통역의 얼굴에 손을 대자 폭행 사건으로 번져 폭행고소와 간통 고소전으로 확대되었다. 연안시가 들썩였다. 이일로 둘은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넜다. 모택동과 강청의 연애설이 퍼져 나가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당 총서기 장문천(張文天)과 조직부장 진운(陳雲)이었다. 그는 하자진이 우수한 공산당원으로 빛나는 투쟁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험난한 장정(長征)을 겪으면서 여러 차례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당연히 그녀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모두 모택동의 화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모택동의 결혼이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문제이므로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결혼 문제를 토론에 붙여 모택동의 뜻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영화 건국대모 : 강청과 모택동역 배우>

모택동이 결혼 의사를 꺾지 않자 강청에 대해서는, '약법삼장(約法三章)'을 지켜야 한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추인했다. 그러나 이 약법삼장의 원문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첫째, 모택동과 하자진의 부부 관계가 공식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한 강청은 모택동의 부인으로 행세할 수 없다.

둘째, 강청은 모택동의 일상생활과 건강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며, 차후 그 누구도 당중앙에 이와 유사한 요구를 제기할 권리가 없다.

셋째, 강청은 모택동의 사적인 업무와 생활에만 간여해야 하며, 20년 동안 당내의 어떠한 직무도 맡는 것을 금한다. 당내의 인사 문제와 정치 활동에도 절대 참여할 수 없다.

개인의 결혼 생활과 사생활을 조직이나 당에서 규율하다니 정말 아이러니하다. 암튼 그녀는 이 규정에 묶여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어떠한 정치활동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38년 11월 강청은 24세의 나이로 자기보다 21살이나 많은 모택동(당시 45세)과 꿈에도 이루고 싶었던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에도 강청은 명분상으로는 여전히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비서였지만, 실제로는 집에서 모택동의 생활을 돌보는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이때 강청은 행동을 극히 조심하면서 항상 미소를 잃지 않되 말을 삼갔다. 그리고 모택동을 위해서 스웨터를 짜고 맛있는 요리를 만들며 노래도 불러주었다. 집에 사람들이 찾아오면 모택동이 부를 때를 제외하곤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모택동의 집을 방문하였던 어떤 외국 기자는 그러한 강청의 인상에 대하여, "그녀는 솔직하면서도 겸손하고 사리에 밝은 현모양처 같았다."라고 기술하기도 하였다. 뛰어난 배우 출신답게 자기의 속마음을 철저히 숨긴 채 얼마나 완벽하게 현모양처역을 잘 연기해 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강청은 모택동과 결혼하기 전에 이미 여러 번의 결혼 및 동거 경험이 있었으며, 황경과 동거할 때는 임신도 하였으나 상해에서 수술로 낙태시켰다. 그때 그녀는 배우로서의 성공을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원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모택동과 결혼한 후에 그녀는 빨리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아이가 있으면 무료한 시간을 달랠 수도 있고, 더욱이 '모택동의 정실' 자격을 확실히 다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40년 8월 그녀는 마침내 딸 이눌(李訥)을 낳아 모택동의 사랑을 받으면서 '정실'의 지위에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재차 임신을 하였으나 더 이상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낙태수술을 한 후 다시 임신중절 수술을 하였다. 1949년에 모택동은 국가 주석으로 중공의 최고지도자가 되자 강청은 모택동을 따라다닐 수 있게 되었으며 요양차 소련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실로 결혼 11년 만에 퍼스트레이디가 된 강청에게 규제가 많이 완화되었음을 의미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 그녀는 일을 하고 싶다면서 공식적인 직책을 요구했다. 모택동의 끊임없는 여성편력으로 둘 사이는 별거 상태였기에 모택동으로서도 강청의 입막음이 필요했다. 당에서는 신중한 상의를 거쳐 그녀에게 중국공산당 중앙 선전부 문예처 부처장이라는 직함을 주었다. 이 직책은 매일 출근할 필요도 없을 정도의 한직이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때부터 당내의 공식적인 직함을 가지게 되었으며, 영화처 처장·중앙판공청 비서위원 등 거치면서 정치에 대한 야망을 키워갈 수 있었다.

5. 문화혁명 : 스스로 권력을 만들자.

그 후 그녀는 또 전국 영화 지도위원회 위원을 겸임하면서 영화 <청궁비시(淸宮祕史)>, <무훈전(武訓傳)>과 유평백(兪平伯)의 <홍로몽간론(紅樓夢簡論)>등 사상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되는 문예들에 대한 비판운동에 앞장섰다. 1956년 강청은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에서 모택동의 생활비서로 임명받았다. 말이 생활비서이지 그것은 실제로 부부장급의 간부직이었기 때문에 당내에서 그녀의 위상은 한층 높아졌다. 1963년 12월 12일과 1964년 6월 27일, 두 차례에 걸쳐 문예문제에 관한 모택동의 지시가 나왔다. 모택동은 이 지시에서 건국 이후 문예계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성과가 보잘것없으며 문련(文聯) 산하의 각 단체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수정주의의 변두리로 굴러 떨어졌다고 단언하였다. 이 지시는 정치적 운신의 폭을 넓히려고 계획하고 있던 강청에게 절호의 기회로 다가왔다. 1964년 6월 5일 ~ 7월 31일 경극현대희관마연출대회(京劇現代戱觀摩演出大會)가 북경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기간에 강청은 전면에서 나서서 경극혁명의 기수로 행세하면서, "경극혁명을 논한다(談京劇革命)"라는 제목으로 공개 연설을 하였다. 현대 경극의 창작을 장려하여 혁명모범극 <양판희(樣板戱)>의 탄생을 지원하기도 했다. 1938년 8월 하순에 연안으로 간 이후 26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서 가진 그녀의 연설은 이후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위한 신호탄이 되었다.

이때부터 강청은 경극혁명(京劇革命)이란 이름하에 문예계의 정풍운동을 주도하면서 극좌적 사조를 선동하였다. 중간인물론, 사실주의 심화론, 시대정신 회합론 등을 비판하고, 연구적 가치가 있는 문예론들까지도 "자산계급적 문학 주장", "반혁명 수정주의적 문학 주장"으로 몰아 무자비한 비판을 가하였다. 그녀는 또 전국을 다니면서 노동자·농민·군인 등에 대해 묘사한 연극 작품을 골라내어 현대 경극으로 개편하도록 지시하고, <홍등기(紅燈記)>, <사가홍(沙家洪)>, <지취위호산(智取威虎山)>, <기습백호단(奇襲白虎團)>, <해항(海港)>,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 <백모녀(白毛女)>, <두견산(杜鹃山)> 등 8편을 우수한 경극 현대화의 모델로 선정하였다. 마침내 그녀는 '프롤레타리아 문예혁명의 기수'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경극의 현대화에 앞장서서 많은 성과를 올린 결과 그녀의 이름은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산동성 대표 명단에 올라갔다. 1964년 12월 20일 ~ 1965년 1월 4일 제3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가 북경에서 거행되었을 때, 그녀는 인민대표 자격으로 인민대회당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그녀는 정식으로 중국의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경극혁명을 논한다"는 연설 발표 이후 전인대 대표에 당선될 때까지 그녀는 정치적으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공개적으로 진행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녀는 북경과 상해를 빈번하게 왕래하여 장춘교(張春橋), 요문원(姚文元) 등과 접촉하면서 극히 비밀스러운 정치활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이 기획한 지명비판 글 《평신편력(評新編歷) 사극(史劇) <해서 파관(海瑞罷官)을 상하이 <문회보(文匯報>에 발표했는데, 이것이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들은 왕홍문(王洪文)을 포함하여 그야말로 문화혁명을 주도한 그 유명한 사인방(四人幇)이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강청은 중앙문혁소조 부조장(副組長) 및 해방군 문화혁명 영도소조 고문으로서 정치의 표면에 등장하게 된다. 홍위병에게 마오쩌둥의 메시지를 전하는 역할을 연출하여 ‘기수(旗手)’라고 불렀다. 1967년, 강청은 "중앙문화혁명" 소조장을 대리하여 "문공무위(文攻武衛)"를 제안하고, "군 내 소수 집단을 장악하는 것"을 지지하여 전국적인 많은 두 파벌이 내전을 조직하게 되었다. 1967년 1월부터 '문화대혁명'은 '전면 권력 탈취' 단계에 들어섰고, 곧 '모든 것을 타도하자'에서 '전면 내전(全面 內戰)'으로 이어지는 심각한 국면으로 발전했다. 2월 전후로 담진림(談震林), 진의(陳毅), 엽검영(葉劍英), 이부춘(李富春), 이선념(李先念), 서향전(徐向前), 섭영진(攝榮臻) 등 구세대 혁명가들이 다양한 회의에서 '문화대혁명'의 잘못된 방식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지만, '2월의 역류'로 몰려 억압과 타격을 받았다. 1968년 9월까지 전국 각지에서 혁명위원회가 잇따라 설립되어 어느 정도 '문화대혁명' 초기의 무정부 상태를 종식시켰다. 1969년에는 제9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하여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되어 명실 공히 손안에 권력을 쥐었다. 문혁을 이끈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 등 “4인방”은 원로간부들 중 가장 먼저 주은래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격하기 시작한 ‘비림비공(批林批孔)’운동이나 당의 여황제 무측천을 재평가하려는 캠페인 등 모두를 직접 조종했다.

4인방은 당의 잘못을 이용하고, "문화대혁명"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당내 파벌 조직을 이용하여 당과 국가의 최고 권력을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집단이 되어갔다. 그들은 소위 권위 있는 이론으로 대중을 속이고, 당원을 포섭하고, 사리사욕을 도모하며, 조직을 구성하고, 옛 동지들을 박해하며, 불법 무장을 하고, 전국적인 패거리 체계를 형성하여, 주은래(周恩來), 엽검영(葉劍英), 등소평(鄧小平) 등 당내 많은 옛 동지들에게 문제를 일으켜 당과 국가의 앞날과 운명을 심각하게 위협했다. 이런 4인방의 횡포와 극단 활동에 대해 모택동은 생존 당시 여러 차례 엄격한 비판을 제기했다. 1974년 7월 17일, 중앙정치국 회의에서 그들에게 경고를 발하며 그들이 파벌 활동을 한다고 비판했다. 강청(江靑) 등을 가리키며 현장에 있던 중앙정치국 위원들에게 "상하이방(上海帮)이다." "너희들 조심해. 4인 소종파로 만들지 말고!"라고 강하게 질책했다. 4인방 문제가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러나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내각구성의 음모를 획책했다. 모택동(毛澤東)은 강청(江靑) 등의 내각 구성 음모에 맞서 장사(長沙) 모택동(毛澤東)의 처소를 고발한 왕홍문(王洪文)에게 "강청(江靑)은 야심이 있다."라며, "4인방을 해체하라"라고 재차 경고했다. 모택동(毛澤東)이 4인방'이라는 용어를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모택동은 베이징에 있는 중앙정치국 위원들을 직접 소집하여 대화를 나누고 강청 등을 비판하며 그들에게 "4인방을 만들지 말라."라고 말했다.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등소평은 5월 27일과 6월 3일 두 차례에 걸쳐 중앙정치국 회의를 주재하며 '4인방'을 비판했다. 1976년, 모택동, 주은래, 주덕이 세상을 떠났고, 등소평은 실수로 쓰러졌다. 그러자 4인방이 당과 정권의 탈취에 박차를 가하다.

6. 권력의 덫에 걸리다.

1976년 10월 화국봉(華國鋒)이 당 주석 겸 중앙군사위 주석에 취임하여 4인방의 체포 결행을 은밀히 추진했다. 양측이 첨예하게 감시와 대립을 하는 와중이었기 때문에 군사작적 이상의 긴밀한 작전으로 했다. 이들은 작적 목표가 일파일립제사해(一破一立除四害) 즉 해로운 사인방을 한 번에 격파해서 제거하여 정국을 안정시키는 것이다. 실행 방법은 선발제일(先發制人) 이쾌타만(以快打慢) 즉 상대방이 모를 때 미리 일어나 신속히 잡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는 전혀 낌새를 안 주고 비밀 5개 조직을 구성하여, 1조는 왕홍원, 2조는 장춘교, 3조는 강청, 4조는 요문원, 5조는 모원신(毛遠新)을 맡았다. 모택동이 사망한 지 1개월 후, 하늘을 찌를 듯한 권력자로 자처하던 강청· 요문원(姚文元) 등 ‘4인방’은 결국 체포당해 반혁명집단으로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1981년에는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83년 무기징역형으로 감형되었다. 1991년 3월 15일, 강청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바꾼다. 이때 강청은 이미 보석으로 외부병원에 나와 있었다. 그녀는 입원환자 이름에서 이윤청(李潤靑)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것은 그녀가 모택동과의 혼인을 그리워하는 것을 다시 한번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윤(潤)'은 모택동의 초기에 사용했던 자 윤지(潤之)에서 따온 것이고, '이'는 강청의 원래 성이며, '청'은 강청의 청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페어뱅크연구센터 교수인 R. Trier는 <강청전서>에서 이렇게 서술했다. 1991년 5월 14일 새벽 3시 30분, 간호사 한 명은 강청이 이미 화장실 욕조 위에 목을 매어 죽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일찍이 연기자, 정치가, 문예여왕 및 모택동의 부인이라는 신분을 한 몸에 가지고 있던 강청은 77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강청은 난관을 극복할 줄 아는 강한 의지의 소유자였으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내던지는 야심 찬 여성이었다.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서, 또 정권의 정상을 향해서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모택동의 최측근으로서 정권을 휘두르지는 못했다. 그녀 스스로 “나는 모택동의 개였다. 그가 물라고 하면 나는 물었다.”라고 했듯이 철저히 그의 뜻에 따랐고, 문화혁명도 어쩌면 둘 부부 사이의 감정의 결과물이었을 수 있다. 그녀의 악랄한 혁명 수법은 어쩌면 그의 생부의 성격과 모택동의 여자 문제로 인한 배신과 버림받을 위험 등에 대한 반감의 작용일 것이다. 모택동은 부인 강청에게 권력을 순순히 물려주지 않았다. 모택동은 강청이 그의 사상을 계승하였고, 그의 과업을 함께 하였으나 국가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고 통치의 법칙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택동은 강청의 한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불을 붙이는 재주는 있지만 큰 불을 취급하거나 꺼버릴 줄은 모른다고 보았던 것이다. 문화대혁명기에 강청은 운동을 빌미로 사사로운 원한을 사악하게 풀기도 하여 민중의 원한을 샀다. 모택동과 결혼에 반대했던 당료들, 배우 생활하면서 자기보다 잘난 여배우, 모택동에게 아양 떨던 여배우, 자신의 상해 국민당 감옥에 관련된 사람들 등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여 고문하거나 투옥하여 사망에 이르게 했다. 피해망상증에 시달려서 주치의, 집에서 시중드는 하인들 까지 하옥시키기도 했다. 어쨌든 아직도 중국 정부에 있어서 강청에 대한 평가는 부정과 베일에 싸여 있는 비밀스러운 공간이다. 모택동과 강청의 평전을 쓴 호주의 역사학자 로스 테릴(Ross Terrill)은 자료 수집을 위해 중국을 방문했는데, 공산당 고위 간부들이 하나같이 짜증을 내며 "그런 나쁜 년에 대해서 왜 씁니까? 중국에는 다른 좋은 여성들이 많으니 그 사람들에 대해 쓰세요!"라고 했다고 한다. 이러한 평가들의 죗값이 온전히 모두 강청의 몫일까? 아니면 그의 배우자 모택동의 것일 수도 있다고 본다. 철저히 그 만을 바라보고 그 만을 위해 그의 말을 듣던 그의 여자가 아니던가. 스스로 모택동의 주구(走狗)라고 표현하면서 재판 당시에도 거침없이 모택동을 들먹였던 그녀가 아니던가. 그녀는 이름을 이진해-이운학-이학- 이운고-장숙정-강청-이윤청 등 7~8회 바꾸었고, 남편도 공식적으로 유계위-당납-장민-모택동으로 바구었다. 연예인 및 공산당원으로서 국민당 경찰에 쫓겼기 때문이라지만 변신의 천재로 보인다. 결코 측천무후나 서태후에 비해 뒤지지 않을 인물임에 틀림없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강청과 모택동, 아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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