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발가벗겨 죽은 위대한 여성 수학자 - 히파티아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51213)

by 금삿갓

서기 415년 어느 날, 이집트 북부의 지중해 연안의 국제적인 도시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거리에서 끔찍한 사건이 일어났다. 교회의 베드로(Peter) 낭독자가 이끄는 기독교 열성 신도 무리가 미모와 지성을 겸비해 모든 남성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한 여인의 마차를 습격한 것이다. 그리고 그녀를 끌어내 그들 교회인 Kaisarion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그녀의 옷을 홀랑 벗기고 지붕의 기와 조각이나 조개껍데기로 나신을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그리고 죽은 시체를 도시의 경계 지역으로 끌고 가서 불태웠다. 이 여인은 누구였으며, 그녀의 죄는 무엇이었을까? 히파티아(Hypatia)는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마지막 위대한 여성 사상가 중 한 명이자 수학, 천문학, 철학을 연구하고 가르친 인기 절정의 학자였다. 그녀는 이런 비극적인 죽음으로 더 많이 기억되지만,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은 종교적, 종파적 갈등이 만연했던 시대에 여성학자들이 처한 곤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이 자기 이름을 붙여 건설한 알렉산드리아는 프톨레마이우스(Ptolemy) 왕조의 수도였고, 고대의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로 빠르게 성장했다. 세계 7대 불가사의인 100m가 넘는 파로스(Pharos)의 등대와 도시 중심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대학이자 박물관이기도 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50만 점이 넘는 파피루스 두루마리가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는 세계적인 학문의 중심지였고 서로의 학문을 나누기 위해서 여러 문명국으로부터 학자들이 모여드는 역내 학문의 중심부였다. 아무튼 이런 거대한 유적들은 모두 없어지고, 필자 금삿갓이 30년 전에 갔을 때 등대의 잔해를 발굴하여 복원한다는 말들은 있었는데, 아직 미동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다만 도서관은 그 후에 재건립되었다고 한다.

<Charles William Mitchell - Hypatia>
<알렉산드리아 거리에서의 히파티아의 죽음>

알렉산드리아는 기원전 48년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가 정복했을 때 로마 병사들의 방화로 도서관 일부를 불태우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이 분열되어 알렉산드리아가 동로마 제국에 편입되었을 무렵, 도시는 기독교인, 유대인, 이교도 간의 갈등으로 시달렸다. 이후에 내전으로 도서관 소장품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마지막 남은 유물들은 박물관과 함께 391년 대주교 테오필루스(Theophilus)가 로마 황제의 명령을 받고 모든 이교도 사원을 파괴했을 때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테오필루스는 마지막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세라피스(Serapis) 신전을 허물고 그 자리에 교회를 세웠다. 마지막까지 박물관 겸 학교였던 Mouseion의 수장으로 알려진 인물은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테온(Theon), 즉 히파티아의 아버지였다. 테온의 학교는 배타적이지만 매우 명망 높았으며 교리적으로 보수적이었다. 테온의 저술 중 일부는 현재까지 남아 있다. 그의 <유클리드(Euclid)>의 원론에 대한 주석서>는 19세기까지 기하학의 핵심 저서였다. 그러나 히파티아의 출생과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히파티아의 출생 연도조차 논란의 여지가 있는데, 학자들은 오랫동안 그녀가 370년에 태어났다고 주장했지만 현대 역사가들은 350년이 더 유력하다고 본다. 히파티아에게는 에피파니우스(Epiphanius)라는 남동생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그는 단지 테온이 가장 아끼는 제자였을지도 모른다. 테온은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Ptolemy’s Almagest) 제4권>에 대한 주석을 에피파니우스에게 헌정하면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

테온은 딸에게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쳤고, 딸은 아버지의 주석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프톨레마이오스의 알마게스트(Ptolemy’s Almagest) 제3권>은 사실 히파티아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책의 가설은 코페르니쿠스(Copernicus)와 갈릴레오(Galileo) 시대에 이르러서야 뒤집히게 될 지구 중심설을 정립한 논문이다. 그녀는 뛰어난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으며, 직접 주석서를 저술하고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녀의 제자 중 한 명인 시네시우스(Synesius)의 편지에 따르면, 이 수업에서 그녀는 19세기까지 사용되었던 휴대용 천문 계산기인 아스트롤라베(Astrolabes)와 비중계(Hydrometers)를 직접 만들어 활용했단다. 시네시우스는 그녀를 가리켜 ‘플라톤의 머리와 아프로디테의 몸’을 지녔다고 묘사했다. 콘스탄티노플의 기독교 역사가 소크라테스(Socrates)는 그의 <교회 역사(Ecclesiastical History)>에서 그녀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철학자 테온의 딸인 히파티아라는 여인이 있었는데, 그녀는 문학과 과학에서 당대의 모든 철학자들을 훨씬 능가하는 뛰어난 업적을 이루었다. 플라톤과 플로티누스(Plotinus)의 학파를 이어받은 그녀는 청중들에게 철학의 원리를 설명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다. 그녀는 지적인 수양으로 얻은 침착함과 여유로운 태도 덕분에 관리들 앞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남자들의 모임에 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은 그녀의 비범한 품위와 덕성 때문에 그녀를 더욱 존경했다.” 그녀를 소개하는 문구들을 보면 인류 최초의 여성 수학자 외에도 천재 천문학자, 뮤즈의 여신 등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녀는 아버지의 전문 분야를 넘어, 오늘날 신플라톤주의 학파로 알려진 철학 분야에서 독자적인 입지를 다졌다. 신플라톤주의는 모든 것이 하나에서 비롯된다는 신념 체계이다. 그녀의 제자 시네시우스는 훗날 기독교 교회의 주교가 되어 신플라톤주의 원리를 삼위일체 교리에 접목시켰다. 그녀의 공개 강연은 큰 인기를 끌었고 이웃 나라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끌어 모았다. 철학자 다마스키우스(Damascius)는 그녀가 죽은 후 "학자의 가운을 입은 그녀는 도시 중심가를 돌아다니며 기꺼이 듣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플라톤(Plato)이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에 대해 강연했다"라고 기록했다. 히파티아는 결혼하지 않고 독신 생활을 했는데, 이는 플라톤이 주장한 가족 제도 폐지 사상과 일맥상통했을지도 모른다. 10세기 지중해 세계의 백과사전인 수다(Suda) 사전은 그녀를 "매우 아름답고 고운 용모를 지녔으며, 언변은 명료하고 논리적이었고, 행동은 신중하고 공공의 이익에 부합했으며,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극진히 환영하고 특별한 존경을 표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다마스키우스는 히파티아가 "매우 아름답고 몸매가 좋았다."라고 썼지만, 그녀의 외모에 대해서는 그 외에는 기록된 것이 없다. 다마스키우스는 그녀의 강의를 들으러 온 남자 중 한 명이 그녀에게 집요하게 구애하려 하자 그녀는 리라를 연주하여 그의 욕망을 달래려 했다고 전한다. 그가 구애를 포기하지 않자 그녀는 그를 단호히 거부하며, 피 묻은 월경용(月經用) 천 즉 요즘으로 말하면 생리대를 드러내 보이며 "젊은이! 당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지만, 당신은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선언했다. 다마스키우스는 그 젊은이가 너무 큰 충격을 받아 그녀에 대한 욕망을 즉시 버렸다고 전한다.

그녀의 팬 중에는 알렉산드리아의 총독 오레스테스(Orestes)도 있었다. 그녀와 그의 관계로 결국 그녀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신플라톤주의를 강력히 반대하며,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인 세라페움의 마지막 부분을 파괴한 테오필루스 대주교가 412년 갑자기 죽는다. 그는 히파티아의 학파를 용인했고, 히파티아를 자신의 동맹으로 여긴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테오필루스는 히파티아의 제자인 시네시우스의 주교직을 지지했다. 또 그는 히파티아가 로마 총독 및 기타 저명한 정치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도록 허용했다. 테오필루스의 관용 덕분에 히파티아는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에게 매우 인기가 많았고, 심오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테오필루스가 후계자 지정 없이 죽은 관계로 첨예한 권력 다툼 끝에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인 키릴(Cyril)이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권력 다툼에서 반대 진영에 섰던 모든 사람과 종파를 포함해 다른 종파에게 삼촌보다 더 훨씬 적대감을 드러냈다. 그의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노바티아(Novatian) 기독교 종파에 속한 교회들을 폐쇄하고 약탈하는 것이었다. 키릴이 도시의 주된 종교 기관의 수장이고, 오레스테스가 시민 정부를 책임지면서 알렉산드리아의 통제권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되었다. 오레스테스는 기독교인이었지만 교회에 권력을 넘겨주기를 원하지 않았다. 권력 투쟁은 유대 극단주의자들이 기독교인들을 학살한 사건 이후 절정에 달했다. 키릴은 군중을 이끌고 도시에서 모든 유대인을 추방하고 그들의 집과 사원을 약탈했다. 오레스테스는 콘스탄티노플의 로마 정부에 키릴의 만행을 항의했다. 오레스테스가 키릴의 화해 시도를 거부하자, 키릴의 수도사들은 그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에 대한 처벌로 오레스테스는 폭동을 일으킨 수도사 암모니우스(Ammonius)를 공개적으로 고문하여 죽였다. 키릴은 암모니우스를 순교자로 선포하려 했으나, 그는 신앙 때문이 아니라 폭동을 선동하고 총독을 살해하려 한 죄로 처형당했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기독교인들은 이에 반발했다. 이런 일로 둘 사이의 불화는 더욱 증폭되었다.

오레스테스는 히파티아의 제자는 아니지만 팬으로서 그녀에게 자주 조언을 구했다. 히파티아는 이교도와 기독교인 모두에게 인기가 많았고, 분쟁 단계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현명한 조언자로서 흠잡을 데 없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관계로 키릴과 그의 동맹들은 그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그녀의 평판을 훼손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총독보다 히파티아는 더 쉬운 표적이었다. 그녀는 기독교 이교도였고, 공개적으로 신플라톤주의라는 비기독교 철학에 대하여 강의하고 주장했기에, 민중들을 선동하여 표적으로 삼기에 쉬웠다. 또한 행정권을 쥐고 있던 오레스테스보다 경호를 받지 않기 때문에 물리적인 공격도 쉬웠다. 그런 와중에 그녀가 오레스테스와 키릴의 화해를 방해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더구나 히파티아가 사탄 숭배 행위를 했고, 의도적으로 오레스테스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을 방해했다고 주장하는 풍문도 널리 퍼졌다. 7세기 이집트 콥트교 주교 니키우의 요한(John of Nikiû)은 그의 저서 <연대기(Chronicle)>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 무렵 알렉산드리아에 히파티아라는 이교도 여성 철학자가 나타났는데, 그녀는 항상 마법과 천문관측기구와 악기에 몰두하여 사탄적인 계략으로 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다. 도시의 총독은 그녀의 마법에 매료되어 그녀를 매우 존경했다. 그는 이전처럼 교회에 나가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는 이것뿐 아니라 많은 신자들을 그녀에게로 이끌었고, 자신은 불신자들을 자기 집으로 맞아들였다.” 이에 따라 낭독자 페드로와 그의 무리가 행동에 나섰고, 히파티아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무리들은 그녀를 알렉산드리아의 카이사레움 교회롤 끌고 갔다. 이곳은 원래 이집트 고대 신전이다. 이 신전은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파라오인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클레오파트라(Cleopatra) 7세가 자신의 연인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Mark Antony)를 기리기 위해 구상했다. 이 건물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이집트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물리친 후 완공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안토니우스의 흔적을 모두 없애고 신전을 자신의 숭배에 봉헌한 것으로 보인다. 4세기 후반에 기독교 교회로 개종한 카이사레움은 412년부터 444년까지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였던 키릴로스의 본부였다. 당시 유명한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히파티아는 415년에 이곳에서 기독교 폭도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했다. 그들은 그녀의 옷을 발가벗기고 도자기 조각이나 조개껍데기로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눈알도 도려내고 시신을 찢어서 사지를 마을을 가로질러 키나리온(Cinarion)이라는 곳으로 가져가서 불태웠다. 당시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이 도시를 상징적으로 정화하는 방법으로 "가장 흉악한 범죄자"의 시신을 도시 경계 밖으로 옮겨 화장하는 전통적인 방식에 따른 것이다.

키릴이 히파티아의 죽음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키릴이 직접 살해를 지시하지 않았더라도, 히파티아에 대한 그의 비방 캠페인이 살해를 부추겼다. 알렉산드리아 공의회는 키릴의 행동에 경악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사절단을 보냈다.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2세의 고문들은 키릴이 살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밝히기 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조사 결과, 호노리우스(Honorius) 황제와 테오도시우스 2세는 416년 가을에 칙령을 발표하여 파라발라니(Parabalani)들을 키릴의 권력에서 제거하고, 오레스테스의 권위 아래 두려고 시도했다. 파라발라니(Parabalani)란 죽음의 위험을 무릎 쓰고 형제애를 발휘하는 집단을 말한다. 이 칙령은 파라발라니들이 어떤 공개 행사에도 참석하거나 시의회 회의 장소나 법정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했다. 또한 파라발라니의 총수를 500명 이하로 하여 모집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다마스키우스에 따르면, 키릴은 테오도시우스의 관리 중 한 명에게 뇌물을 주어 더 심각한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2년 후, 키릴은 파라발라니를 오레스테스의 통제하에 두는 법을 뒤집었고 , 420년대 초에 이르러 키릴은 알렉산드리아 의회를 장악하게 되었다.

마이클 디킨(Michael Deakin)은 2007년 저서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에서 “키릴의 소속 때문에 그를 숭배하는 사람들은 그를 무죄로 여기지만, 반성직주의자들과 그와 비슷한 부류의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는 데 열광했다.”라고 썼다. 한편, 히파티아는 페미니스트들의 상징이자 이교도와 무신론자들에게는 순교자, 그리고 소설 속 등장인물이 되었다. 볼테르는 그녀를 통해 교회와 종교를 비판했고, 영국의 성직자 찰스 킹슬리(Charles Kingsley)는 빅토리아 시대 중반에 그녀를 소재로 한 로맨스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은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여러 유럽 언어로 번역되었고, 세기말까지 계속해서 출판되었다. 이 소설은 히파티아를 "마지막 헬레네인"으로 묘사하는 낭만적인 비전을 제시했고, 다양한 연극 작품으로 빠르게 각색되었다. 그중 첫 번째는 엘리자베스 바워스(Elizabeth Bowers)가 쓴 희곡으로, 1859년 필라델피아에서 공연되었으며, 작가 자신이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 1893년 1월 2일에는 G. 스튜어트 오길비(Stuart Ogilvie)가 쓰고 허버트 비어봄 트리(Herbert Beerbohm Tree)가 제작한 훨씬 더 유명한 연극 각색판 《히파티아》가 런던 헤이마켓 극장에서 개막했다. 주인공 역할은 처음에는 줄리아 닐슨(Julia Neilson)이 맡았다. 히파티아는 1884년에 발견된 <소행성 238 히파티아>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면서 천문학자로서 영예를 얻었다. 달 분화구 히파티아도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으며, 그녀의 아버지 테온의 이름을 딴 분화구도 있다. 그리고 킹슬리의 소설은 2009년에 스페인에서 영화 <아고라(Agora)>로 제작되는데, 히파티아 여주인공으로, 레이첼 와이즈(Rachel Weisz)가 맡았다. 이 영화는 기독교 광신도들로부터 도서관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히파티아의 허구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녀의 죽음은 오랫동안 이성의 시대, 즉 철학 자체가 정치, 종교, 그리고 공포에 의해 산산조각 난 고전 시대의 상징적인 종말로 기억되어 왔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는 알렉산드리아의 피로 물든 신전에서 끝나지 않았다. 수 세기 후, 그녀의 그림자는 각종 예술을 통해 역사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온다. 알렉산드리아에서도 이교 신앙과 학문이 히파티아와 함께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분명 큰 타격을 입었다. 디킨(Deakin)은 "거의 홀로, 사실상 마지막 남은 학문적 인물로서, 그녀는 지적 가치, 엄격한 수학, 금욕적인 신플라톤주의, 정신의 중요한 역할, 그리고 시민 생활에서 절제와 중용의 목소리를 옹호했다."라고 썼다. 그녀는 종교적 광신주의의 희생양이었을지 모르지만, 히파티아는 현대에도 여전히 영감을 주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녀의 죽음이 안타깝지만 그녀의 성품에 대한 의견은 거의 다음과 같이 집약된다. 윤리적 용기와 공정함, 정직함, 지적 용기를 가진 여인. 히파티아가 했던 유명한 대사로 “나는 진리와 결혼했다”가 있다. 모든 남자들이 그녀에게 구혼할 때마다 그녀가 거절할 때 사용했던 말이다. 더욱 아쉬운 것은 그렇게 유망하던 그녀의 업적 즉 그녀의 저술이나 독창적인 학설 같은 것이 현재까지 전해지지 않는 것이다. 그녀는 독신을 고집하며 죽는 날까지 학문 연구와 강의에 몰두했다. “아주 조금이라도 정답에 근접한다면 기꺼이 죽어도 좋아”라는 영화 속 대사가 그녀의 삶을 한 번에 정리해 주는 듯하다. 알렉산드리아 거리에서 그녀의 빛은 꺼졌을지 모르지만, 지식이 침묵에 맞서 지켜지는 곳이라면 어디든 그녀의 불꽃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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