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 시축(詩軸)을 수의(壽衣)로 입은 – 이옥봉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51216)

by 금삿갓

뭔가 서열 매기기와 그룹 지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하는 방법인데, 허난설헌(許蘭雪軒)·황진이(黃眞伊)·이옥봉(李玉峰)·매창(梅窓)을 조선시대 4대 여류 시인이라는 제목으로 책도 내고 글을 쓰기도 한다. 이런 3대니 4대니 하는 기준을 무엇이고, 선정을 누가 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공감하는지 금삿갓은 모르겠다. 문학이란 것이 느끼는 사람마다 다를진데 일률적으로 정하기는 애매하다. 아무튼 오늘 이야기할 이옥봉(李玉峰)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그녀의 애틋한 시 한수를 음미해 보자. 제목이 <自述(자술)>인데, 일반적으로 <夢魂(몽혼)>으로 잘 알려진 시이다. 이 시에 대하여 원작자에 대한 논란이 있는데, 확실한 검증이 된 것도 아니라서 이는 후술하기로 한다.

近來安否問如何(근래안부문여하) / 요사이 안부는 어떠신가요?

月到紗窓妾恨多(월도사창첩한다) / 사창에 달 비치니 첩의 한이 깊어요.

若使夢魂行有迹(약사몽혼행유적) / 꿈길의 넋에게 자취를 남기게 한다면

門前石逕已成沙(문전석경이성사) / 문 앞의 돌길은 벌써 모래가 되었을 걸요.

이 시는 남편과 헤어지고 혼자 살면서 밤마다 그리운 정을 여인의 섬세한 감성으로 아주 쉬운 글자만 사용해서 지은 수작(秀作)이다. 일부 자료에는 결구(結句) 5번 자인 이미 已(이) 자가 반 半(반) 자로 되어 있다. 돌 자갈이 반은 모래로 변했을 거란다. 그럼 이제부터 이옥봉이라는 여류시인의 삶과 사랑, 문학을 살펴보자. 이 글은 강원대 강명혜 교수의 논문과 세종국제고의 공민식님의 논문을 참조하여 엮은 것이다.

허난설헌을 제외한 조선조 여류 시인 대부분이 그렇듯이 이옥봉도 서얼(庶孼) 출생이다. 다만 왕족의 후손인 아버지와 첩인 어머니를 두었는데, 아버지의 사랑이 지극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아버지인 이봉(李逢, 1526~1604)은 양녕대군의 고손자로 자(字)는 자운(子雲)이다. 막내아들 이준남(李俊男)이 쓴 아버지 이봉의 시고발문(詩稿跋文)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구속 받기를 싫어하고 폭넓은 독서로 읽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인데,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명산을 유람하기를 즐겼다. 주로 교류하는 인사는 우탁(禹鐸)·정송강(鄭松江)·이율곡(李栗谷)·심일송(沈一松)·이오성(李鰲城)·이한음(李漢陰)·유서경(柳西坰)·이오리(李梧里) 등이었다. 임진란 때에 영남을 유람하다가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등이 규합한 유림 의병의 장수를 맡아 공을 세워서 1593년에 옥천군수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괴산군수를 역임했다. 나중에 당상관까지 올라갔다. 그가 평소에 지은 시가 수천 수에 달했으나 기록해 두지 않고 흩어버려서 만년에 지은 것만 거두어 시고를 낼지 망설이는데 문장사백(文章詞伯)인 서경·오성·송강이 모두 후세에 전할 만 하다고 하여 판각한다고 밝혔다. 향년은 78세고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이렇듯 호탕하고 시를 즐겼을 정도이니 첩실에게 낳은 딸이지만 그는 옥봉에게 열심히 글과 시를 가르쳤음에 틀림없다. 조선시대 여인은 서당에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가학(家學)이 아니면 문재를 키울 수가 없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과 가르침 속에서 옥봉은 마음껏 글을 익힐 수 있었고 재기도 뛰어나서 시문을 잘 짓는 긍지를 지닌 여성으로 성장한 것이다.

이옥봉의 출생과 타계는 정확하게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기존 논의를 종합해 보면 대략 1555년 전후에 태어나서 임진왜란(1592년) 전후 무렵까지 생존했다고 볼 수있다. 이 견해는 그 당시에 살았던 허균(許筠, 1569-1618)이 1563년에 태어나서 1589년에 세상을 떠난 누나 허난설헌과 이옥봉이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는 기록을 <성수시화(惺叟詩話)>에 남긴 것이 있다. 또 동시대 명나라 인물인 제갈원성(諸葛元聲)이 이옥봉과 허난설헌이 시문을 주고받으면서 아주 친하게 지냈다는 기록을 남겼다. 옥봉의 실명(實名)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가림세고(嘉林世稿)> 부록에 보면 ‘淑媛(숙원)’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허균의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는 ‘媛(원)’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이름인지 여성의 성(姓) 뒤에 붙여서 존칭으로 부르는 용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2017년에 임천조씨 군자감정공파(軍資監正公派) 종중에서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종중 묘역 제일 아래에 이옥봉의 제단을 설치하고 비석을 세웠다. 비문에 이옥봉의 본명을 이숙원으로 기록해 놓았다. 옥봉은 스스로 붙인 호이다. 호를 옥봉주인(玉峯主人)이라고 한 문헌도 있지만 호는 옥봉이 정확하다. 옥봉의 어린 시절은 기록된 바가 없지만 여러 문집을 통해 보았을 때 부친이 그녀를 매우 사랑해서 책도 구해다 주었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고 하는 등 애지중지 키웠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이런 배경 속에서 옥봉은 당당하고 자긍심이 강한 여성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옥봉의 당당함은 그녀의 시 내용이나 생애 중에 일어나는 일화 등을 통해서도 짐작이 가능하다. 조원의 고손자 조정만(趙正萬)의 저서 <오재집(寤齋集)>의 기록에 따르면 옥봉의 성장기는 대략 이렇다. “태어나면서 총명함이 남과 달라 그의 아버지가 기특하게 여겨 그를 아껴 문자를 가르치니 묘하게 깨달아 남보다 뛰어나 공부를 좋아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가 매년 책을 사서 계속 읽도록 주니, 시문의 미사여구와 생각이 날로 발전하였는데, 특히 시에 뛰어났다. 천기를 얻어 답습을 일삼지 않아 뜻이 지극히 한적하고 고아했으며 음조는 맑고 고와 온화했으니, 개원(開元, 당현종의 연호) 천보(天寶, 당현종의 연호) 정시연간(正始年間)의 음(音)이 있어 진실로 규수 중의 첫째가 되었다.”

조선 시대의 양가집 규수와는 확연히 다르게 옥봉은 자신의 혼사 배필도 자신이 결정한다. 비록 서얼이지만 스스로 왕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자신한테 걸맞는 배필을 스스로 고른다. 이 역시 그 당대 시대상으로 볼 때 평범하지 않은 일이다. 이옥봉이 정한 배필은 바로 자는 백옥(伯玉) 호는 운강(雲江)인 조원(趙瑗)이었다. 조원은 장인인 이준민의 외삼촌이 되는 남명(南溟) 조식(曺植)의 문하로 1564년(명종 19)에 20세에 진사시에 장원급제하고, 1572년(선조 5) 28살에 문과 별시에 급제한 유능한 선비였다. 당시 조원은 진사과 장원이고 생원과 장원은 율곡 이이가 차지했다. 사간원 정언(正言)과 이조좌랑(吏曹佐郎) 등 요직을 지내고 있었다. 그의 장인은 당시 병조판서 이준민(李俊民)이었다. 이옥봉과 조원의 혼사에 얽힌 이야기를 조원의 고손자 조정만(趙正萬)이 지은 <오재집(寤齋集)>에 기록된 행장(行狀)인 이옥봉행적(李玉峯行蹟)을 통하여 알아보자.

“나의 고조부 운강공(雲江公)에게는 소실(小室) 이씨가 있었는데, 왕실의 먼 후손이었다... 이씨는 그 재주를 자부(自負)하여 가볍게 남에게 허락하지 않고, 빛나는 재주와 문학적 명망이 한 세상에서 높이 뛰어난 남자를 구하여 시집을 가고자 했다. 그 아버지가 딸의 이러한 마음을 알고 그러한 인물을 구하려고 애를 썼으나 찾지 못했다. 운강공이 본디부터 성대한 명성이 있음을 듣고, 그 아버지가 명함을 품에 품고 만나기를 청하여 사실대로 이야기 했으나 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옥봉의 아버지는 드디어 신암(新蓭) 이공(李公)의 집으로 옮겨가서 다시 사정을 이야기했는데, 신암은 곧 공의 장인 이상서(李尙書, 이판서)였다. 신암이 웃으면서 허락하고, 운강공에게 말했다. ‘자네는 어찌하여 아무개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았느냐?’ 운강공이 ‘나이가 적고 명망 있는 관리가 어찌 번거롭게 첩을 두겠습니까.’하고 대답을 했다. 신암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런 일에 거절을 하는 것은 대장부다운 행동이 아닐세’하고, 드디어 날을 잡아 데려오게 했는데, 그 모습이 재주처럼 빼어났으므로 신암도 기이하게 여겼다. 운강공이 이부랑(李部郞, 이조 좌랑)으로부터 나가서 괴산군수가 되고 후에 삼척과 성주의 원(元)으로 제수되었을 때도 이씨가 모두 따라다녔다.”

이 기록에서 이옥봉의 혼인 행적을 비교적 소상하게 알 수 있다. 당시 운강 조원이 풍채가 좋고 문장이 뛰어나서 이미 관직에 올라 있으니, 옥봉이 그의 문채와 풍채를 흠모하여 스스로 그 첩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처음에 옥봉의 부친으로부터 소실을 들이라는 혼담을 단호히 거절했지만 재차 그의 장인으로부터 첩을 들이라는 분부를 받았다. 그는 체면상 한번 거절을 표했지만 장인의 권유를 따랐다. 이 대목에서 재미있는 것이, 장인이 자기 딸의 입장을 두둔해도 부족할 판인데, 도리어 사위에게 딸의 심사를 아프게 할 첩을 들이라고 강권을 하는 처사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소실을 바라보는 공통적인 관점인지는 몰라도 현대인의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이다. 시중에 흘러 다니는 자료들에는 조원 또한 이옥봉의 시재를 들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소실로 들이는 전제 조건으로 시집와서는 절대 시를 짓지 않고 첩으로서 내조만을 법도로 하는 것을 약속 받았다고 한다. 이옥봉의 시재가 조원의 그것보다 뛰어나서 아녀자가 나대는 꼴을 보는 게 싫었을 거라는 그럴듯한 구실도 붙였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가설이다. 진사과 장원에 문과 급제한 사람의 시재가 어찌 규방에서 그럭저럭 공부한 아녀자의 시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시를 짓지 말라는 약속 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행적을 기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결연을 맺은 후 조원은 이옥봉을 본처보다 더 아꼈다고 한다. 조원의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리나, 멀리 출타를 하거나 벼슬을 위해서 지방을 갈 때도 늘 옥봉과 함께 했다. 이조좌랑에서 밀려 괴산군수로 부임해가는 조원에게 옥봉은 “낙양의 재자 가의(賈誼)는 벼슬 싫다고 거짓으로 미친 척 했다는데, 한번 임금 곁을 떠났다 하지만 장사의 태부가 될 줄을 누가 알았으랴.”라고 읊어서 남편을 응원한 것도 있다. 이처럼 옥봉은 결혼 후에도 다른 집안의 소실이나 허난설헌 등 글을 알고 시를 짓는 벗들과 서신으로 문학적 교류를 나누었다. 조원의 친구인 윤국형(尹國馨)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조원이 옥봉에게 시를 짓게 했다는 기록도 있다. 윤국형(尹國馨) 또한 지사의 기개가 엿보이는 그녀의 시에 감탄하였다고 전해질 정도다. “기축년(1589)에 내가 새로 상주에 부임했을 때 백옥(伯玉, 조원의 자)은 성주목사로 황급히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라 관사에서 자고 가게 되었다. 이때 나는 백옥과 함께 그 첩(妾, 이옥봉)이 묵고 있는 곳에 술자리를 베풀었더니, 백옥은 그 첩에게 시 한 귀를 지어 주라고 권하매, 이(李, 옥봉)는 즉석에서 입으로 불러 백옥더러 대신 쓰게 하였다... 그는 시를 읊고 생각하는 동안에 손으로 백첩선(白疊扇)을 부치면서 때로는 입술을 가리기도 하는데 그 목소리는 맑고 처연해서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았다.” 윤국형이 지은 <문소만록(聞韶漫錄)>에 나오는 내용이다. 윤국형은 경북 의성에서 태어났고, 의성의 옛 지명이 문소(聞韶)이고, 만록(漫錄)은 수필 같은 스타일의 글이다.

이렇듯이 옥봉의 결혼 생활은 초창기에는 순탄했고, 그녀는 시재를 인정받으며, 행복한 방향으로 잘 흘러갔다. 시작(詩作)을 금지했다는 일설(一說)은 사실이 아닌 듯하다. 조원의 본처와의 관계는 어떤지 자료가 없어서 알 수 없지만, 그의 자손들을 보면 대강 짐작이 가능하다. 조원은 희정(希正)·희철(希哲)·희일(希逸)·희진(希進) 등 사형제를 두었음을 볼 때 본처와의 관계도 좋았으리라 본다. 물론 본처도 자기 아버지가 남편에게 소실을 들이라고 강권한 것이니 남편에게 투기(妬忌)를 할 입장이 못 되었다. 조선시대 가정생활을 보면 본처와 첩이 한 공간에 생활한 경우도 있지만 별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남편이 관직 수행차 집을 떠나 있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남편을 따라가서 수발을 드는 것은 첩의 소임이고, 본처는 집에 머물러서 자식 교육과 집안을 건사하는 것이 소임이었다. 지방 출신이 서울에서 관직을 하는 경우 서울에 첩을 두어서 공식적으로 경처(京妻)라고 부르기도 했다. 조원과 본처의 자식 교육은 단엄(端嚴)하였다고 한다. 사형제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 집안은 3대가 연속으로 진사과 장원을 한 문재를 자랑한다. 임진왜란 당시에 아쉽게도 맏아들 희정과 둘째 아들 희철이 일본군으로부터 모친을 지키려다가 일군(日軍)에게 목숨을 일었다. 이런 전차(詮次)로 조정에서 쌍효자정려홍문(雙孝子旌閭紅門)을 내려서 효자동 이름의 유래가 되었다고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 )>에 전한다. 조운의 저서로는 <독서강의(讀書講疑)>가 있으며, 유고로는 고손자가 편찬한 <가림세고(嘉林世稿)>가 있다.

옥봉은 결혼생활이 장밋빛으로만 이어졌다면 오늘날 전해지는 이야기가 약간 밋밋했을 지도 모른다. 평범한 인간의 삶에서도 고비가 있기 마련이고, 어느 때고 시련은 닥칠 수 있고, 비극은 잉태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항상 장애물과 아포리아(Aporia)를 이정표 삼아 걸어가는 과정이다. 옥봉의 삶도 마찬가지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아니면 식자운환(識字憂患)이라고 해야 하나. 허미자가 엮은 <조선조여류시문전집>의 <옥봉집(玉峯集)>에 수록된 <이옥봉행적>과 이수광(李睟光)의 <지봉유설(芝峯類說)>등에 수록된 옥봉의 일화 내용을 살펴보다.

“어느 날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이웃 여자(외거 노비 중의 하나인 산지기 아내라고도 하고 백정의 아내라고도 함)가 찾아와서, ‘자기 남편이 칠석날 밤늦게 귀가하다가 소도둑으로 몰려 관아에 끌려갔다’고 말하며 운강(雲江)에게 부탁해서 ‘형조에 편지를 보내어 그 죄를 면하게 해 달라.’고 애걸하였다. 이씨가 그를 매우 불쌍히 여겨 그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내가 감히 공(남편)에게 써 달라고 청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대를 위해서 장사(狀辭 : 소장으로 쓰는 사연이나 호소문)를 써 죽겠다.’하고는 곧 <위인송원(爲人訟寃)> 절구 한 편을 지어 주었다.”

洗面盆爲鏡(세면분위경) / 세숫대야로 거울을 삼고

梳頭水作油(소두수작유) / 물을 기름 삼아 머리를 빗어도.

妾身非織女(첩신비직녀) / 첩의 몸이 직녀가 아닐진대

郞豈是牽牛(낭기시견우) / 어찌 제 낭군이 견우가 되오리까?

“그 여인이 이 글을 관아에 제출하니, 형조의 당상관(堂上官)들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놀라, ‘이 장사(狀辭)는 누가 써 준 것이냐?’하자. 그 여인은 황급히 사실을 말했다. 그러자 여러 당상관들이 그의 죄가 억울함을 알고 곧 석방시켰다. 그리고 시를 소매에 넣고 운강의 집으로 방문을 했다. 그러면서 ‘공이 이처럼 기이한 재주가 있는 데도 우리가 늦게 알게 된 것이 한스럽도다.’라고 말했다. 운강이 손님을 보내고 난 뒤에 이씨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그대가 나를 따라서 여러 해 살았지만 실수를 한 적이 없었는데, 지금 어찌하여 소백정의 아내를 위하여 시를 지어 주어서 관리들이 옥에 가두었던 죄수를 놓아주게 하고 사람들의 귀와 눈을 번거롭게 하느냐? 이것은 아주 큰 잘못을 지은 것이니 그대를 즉시 당신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 옥봉이 눈물을 흘리며 사죄했으나 운강은 끝내 이씨의 호소를 들어주지 않았다.”

평소 옥봉을 아끼고, 옥봉의 자질이 뛰어난 것을 잘 알고 있는 조원이지만 이런 사단이 벌어지자 옥봉을 내치게 된다. 결혼 전에 시를 짓지 않겠다는 약속을 옥봉이 어겨서 조원이 내친 것이라고 하는 설(說)이 있지만 필자 금삿갓이 보기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고손자가 쓴 옥봉의 행적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옥봉은 결혼 후에도 다른 여성 문인들과 교류했고, 남편의 친구 앞에서 시를 지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후세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일 수 있다. 조원은 당시 장인이 형조 판서를 역임하고, 본인도 이조좌랑이라는 요직을 한 만큼 나름 중앙 관서에서 엘리트 관료로서 누구에게나 부당한 부탁이나 사사로운 청탁을 하지 않을 성격이다. 그런데 일개 천민의 옥사(獄事) 문제에 청탁을 넣는 행위가 일어났으니 당연히 엄청난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글의 수준으로 보아 대단한 문재(文才)가 있는 사람의 작품인데, 조원의 소실 작품이라고 하니까 일견 본인 얼굴을 나타내기 저어해서 소실의 이름을 판 것으로 오해될 수 있었다. 더구나 형조의 관리들이 찾아와서 자기가 쓴 글인 줄로 오해하고 재주를 칭찬 겸 비아냥거렸으니 더욱 그렇다. 그로 인하여 죄인까지 풀어주었으니 생각하기엔 엄청난 청탁을 한 것이다. 당시의 당쟁 상황에서 의도치 않은 빌미를 줄 수도 있었다. 그래서 옥봉의 처사에 대해 화가 정말 많이 났을 것이다. 옥봉이 조원 몰래 공적인 일에 개입했다는 것은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아녀자로서 지켜야 할 사회 윤리 규범에 매우 저촉되는 행위였다.

<이옥봉행적(李玉峰行蹟)>에는 옥봉과 조원이 부부의 연을 맺은 후의 일화들이 시와 함께 소개되고 있는데, 이는 실제 조원은 옥봉을 본처만큼 아꼈음을 나타낸다. 관리가 되어 지방을 갈 때나 친구들과 함께하는 자리에 늘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 한번은 면식이 있는 지방의 어느 선비가 조원에게 책력을 부탁하는 봉서가 왔다. 책력이 부족하던 조원이 난감하여 옥봉으로 하여금 대신 답서를 쓰게 했는데, 옥봉은 “何不借梳于南山之僧耶(하불차소우남산지승야) / 어찌 머리빗을 남산의 스님에게 빌리지 않는가!”라고 글을 써 재치 있게 대응했단다. 또한 조원이 삼척부사로 제수되었을 때, 옥봉이 함께 따라가다가 영월 지방을 지나며, 그곳에 묻혀있는 단종(端宗)을 상기하고 스스로 왕족임을 표방하는 내용의 시 <영월도중(寧越道中)>를 썼다.

五日長干三日越(오일장간삼일월) / 닷새는 배를 타고 사흘은 산을 넘으니

哀詞吟斷魯陵雲(애사음단로를운) / 슬픈 노래는 단종릉의 구름에 목이 메네.

妾身亦是王孫女(첩신역시왕손녀) / 이 몸 또한 왕손의 여식인데

此地鵑聲不忍聞(차지견성부인문) / 이곳의 두견 소리 차마 듣지 못할세.

기구(起句)에 ‘장간(長干)’이 ‘장관(長關)’으로 된 자료도 있는데, 필자 금삿갓이 과문(寡聞)해서 그런지 몰라도 시의 해석상으로 ‘장관’ 보다 ‘장간’이 더 부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시 서울에서 영월이나 영남 북부지방(안동·영주 등)으로 가는 교통수단을 보면 한양의 용산·송파·삼전도 등의 나루에서 배를 타고 광진을 거쳐 남한강 줄기를 따라 양근(楊根) 사포(蛇浦)·여강(驪江)·충주 금천(金遷) 등으로 이어진다. ‘장간(長干)’이란 말은 이백(李白)과 최호(崔顥)의 악부시(樂府詩) <장간행(長干行)>이 있는데, 장강 하류 지방의 선상생활의 애환을 노래한 것이다. 그러니 배로 5일 가서 충주에서 박달재 등 고개를 3일간 넘어서 단종릉에 도착한 것으로 보인다. 남편 조원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시는 매우 건방져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시를 문제 삼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시작(詩作) 금지의 약조는 없었을 곳으로 보인다. 또한 동 시대의 문인인 허균(許筠)에 의해 ‘비분강개(悲憤慷慨)’라는 평을 들었으며, 권응인(權應仁)에 의해 ‘絶唱(절창)’이라는 평을 듣는 등 예로부터 많은 칭송을 들은 시이다.

아무튼 도와준 이웃 백성은 백정으로서 가장 하층이었다. 즉 가장 힘없는 계층인데 억울함에 처했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은 상황에 그를 도운 것이다. 그 일로 인해 엄청난 시련이 닥쳐오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하고, 이러한 계층을 위해서 옥봉은 자신의 행복하고도 평안한 삶을 던진 셈이다. 옥봉의 소탈하고 자신감 넘치는 심성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봉은 남편 조원으로부터 매몰차게 쫓겨나고 만다. 그렇다고 옥봉이 돌아갈 친정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일설에는 옥봉이 조원과 혼인하기 전 17세 무렵에 괜찮은 집안의 정실(正室)로 출가(出嫁)를 했었는데, 일찍 남편을 여의고 청상과부가 되자 그 애통한 삶을 바꾸어 주기 위해 아버지 이봉이 친정으로 데리고 왔단다. 그리고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여 조원에게 재가를 시켰으니, 옥봉의 입장에서 다시 친정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원의 집에서 떠나기 전 마지막 밤에 읊었을 것 같은 <별한(別恨)> 시를 보면 소박맞은 옥봉의 처연한 심사를 절절히 느낄 수 있다.

明宵雖短短(명소수단단) / 내일 밤이야 비록 짧디짧아도

今夜願長長(금야원장장) / 오늘 밤은 길고 길기 바라네.

鷄聲聽欲曉(계성청욕효) / 닭소리 들리고 날이 밝아 오니

雙臉淚千行(쌍검루천행) / 두 뺨에 눈물이 천 줄기라네.

소박을 당한 이옥봉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는지, 아는 지인들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는지 명확한 거주지를 알지 못한다. 다만 풍문에 도성 밖으로 나가서 뚝섬 한강나루 근처 초막에 정착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이다. ‘광릉진 근처는 하얀 마름꽃만 가득하다’는 시가 그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기록에는 조원도 다시는 옥봉을 찾지 않은 것으로 되어 있다. 소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칠 정도면 다시는 상면을 하지 않을 심사였을 것이다. 그래도 옥봉은 이제나 저제나 일구월심(日久月深)으로 낭군을 기다린 것이 그녀의 시에 오롯이 나타난다. 서두(書頭)에서 쓴 <自述(자술)> 또는 <몽혼(夢魂)> 시가 바로 그것이다. 이 시는 표면적으로는 조원에 대한 옥봉의 변함없는 애정과 그리움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사대부가 중시하는 지조와 절의의 가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시 말고도 조원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을 표현한 <만흥증낭(漫興贈郞)>과 <규정(閨情)>을 차례로 보자.

柳外江頭五馬嘶(류외강두오마시) / 버들 숲 밖 강 머리에 말 울음 소리에

半醒愁醉下樓時(반성반취하루시) / 반쯤 깨도 시름겨워 누각을 내려갈 때

春紅欲瘦臨粧鏡(춘홍욕수림장경) / 봄꽃처럼 시들세라 거울에 다가가서

試畵梅窓却月眉(시화매창각월미) / 매화 핀 창가에서 초승달눈썹 그려 보네.<만흥증낭(漫興贈郞)>

有約郞何晩(유약낭하만) / 약속하신 낭군님 어찌 늦으시나?

庭梅欲謝時(정매욕사시) / 뜰의 매화는 시들려고 하는데

忽聞枝上鵲(홀문지상작) / 가지 위 까치소리 홀연히 들려서

虛畵鏡中眉(허화경중미) / 부질없이 거울 보며 눈썹 그려요.<규정(閨情) 1>

平生離恨成身病(평생리한성신병) / 이별의 한이 평생 몸의 병 되어

酒不能療藥不治(주불능료약불치) / 술로도 약으로도 고칠 수가 없네.

衾裏泣如氷下水(금리읍여빙하수) / 이불 속 눈물이 얼음 밑의 물처럼

日夜長流人不知(일야장류인부지) / 밤낮 길이 흘러도 사람들은 모르리.<규정(閨情) 2>

필자 금삿갓이 글에서 이옥봉의 시론을 쓰려는 게 아니니까 시는 이 정도로 보고, 조원의 고손자 조정만(趙正萬)이 기록한 그녀에 대한 평가를 살펴보자. “…뒤에 임진왜란을 만나서 이씨는 마침내 절개를 지키면서 죽었으니, 중국 사람들도 또한 그 시를 기이하게 여기었고 그 절개를 소중하게 여겼다. 그가 지은 시를 채집하여 열조(列朝)의 시집 가운데에 수록하고 <규수옥봉이씨(閨秀玉峰李氏)>라 칭하였고, 그 아래에 또 쓰기를 ‘한림승지인 조원의 첩이니, 임진왜란을 만나 죽었다.’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말해서 옥봉(玉峰)은 바로 평일에 쓰는 자호(自號)이다. 아아! 빙옥(氷玉)과 같은 지조, 뱃속에 비단으로 수놓은 것을 입 열어 읊으면 찬연히 무늬를 이룬다. 재주 때문에 당한 어려움을 만난 뒤 규방 속에서도 문명 얻었으니 진실로 기이하도다. (중략)… 받들어 생각하건대 우리 선조의 너그러운 성품으로는 꼭 이렇게 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이나, 그의 재주가 지나친 것을 경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그렇더라도 전쟁 때에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스스로 그 몸을 단정히 해서 정절을 보존하여 이름이 우리나라에만 퍼지지 않고 마침내 천하 사람들의 흠모함을 받을 수 있었으니, 비록 그 살아 있을 때에는 재액을 당했으나, 그가 죽은 뒤에는 썩지 않고 위대해졌으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당세와 후세의 평가야 어떠하든 옥봉은 사랑하는 낭군 조원으로부터 내쳐졌기에 그녀의 남은 생은 기구(崎嶇)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즈음에 임진왜란이 일어났으니 여인으로서의 생활이란 말 할 바가 못 된다. 남편과 자식이 있었던 조원의 부인마저 일군(日軍)에게 당할 뻔 했는데, 내쳐진 처지야 누가 돌보겠는가. 그래서 난리통에 옥봉이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것이라고 짐작하지만 정확한 생사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런데 옥봉에 대한 기이한 후일담이 전해지는데, 이는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 기록된 내용과 고손자 조정만이 기록한 이옥봉 행적의 내용이 약간 침소봉대(針小棒大)되어 소설적으로 각색되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전해 오고 있는 이야기는 이렇다. 그녀가 죽은 지 40년쯤 뒤 조원의 아들 조희일이 중국 명나라 사신의 접반사(接伴使)로 의주에 갔다가 그곳에서 명나라 사신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 는 사신의 질문에 부친이라고 대답하니, 책 한권을 보여주었는데 <이옥봉 시집>이라 씌어 있었다. 부친의 첩으로 생사를 모른 지 벌써 40여 년이 된 옥봉의 시집이 어찌하여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는지 조희일로선 짐작조차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사신이 들려준 이야기는 너무도 기이하고 놀라웠다. 약 3~40년 전, 중국 동해안에 괴이한 시체가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얼굴이라 아무도 건지러하지 않아서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돌아다녔다고 했다. 사람을 시켜 건져 보니 온몸을 기름종이로 수십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한 겹 두 겹 벗겨내니, 바깥쪽 종이에는 아무것도 씌어 있지 않았으나 안쪽 종이에는 빽빽하게 시가 적혀 있었다. 말하자면 시을 쓴 두루마리인 시축(詩軸)을 수의(壽衣)로 입은 시체였다. “해동(海東) 조선국(朝鮮國) 승지(承旨) 조원(趙遠)의 첩(妾) 이옥봉(李玉峯)”이라는 이름도 보였다. 시(詩)를 읽어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이라, 중국에서 이를 엮었다고 했다. 기담(奇談)을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이야기일 수 있다.

아무튼 그녀의 시는 <명시종(明詩綜)>, <열조시집(列朝詩集)>, <명원시귀(名媛詩歸)> 등 중국 시집에 작품이 전해지고, 시집 한권이 있었다 하나 시 32편이 수록된 옥봉집이 <가림세고>의 부록에 전할 뿐이다. <역대여류한시문선>에 전편이 번역되어 실려 있다. 초기의 작품은 서정적인 내용과 남편을 위로하는 여인으로서 내조의 아름다운 시들이 많고 후반의 작품들은 조원과 헤어져 살게 되면서 이별, 한 등의 작품이 주를 이룬다. 전술(前述)하다시피 이옥봉은 그다지 많은 작품을 남기지는 못했으나 <자술自述(혼몽夢魂)>, <규정(閨情)> 등의 걸출한 수작(秀作)들을 남김으로써 조선시대부터 허난설헌(許蘭雪軒)과 나란히 평가되어온 최고의 여성 한시 작가다. 그 당연한 결과로서 그의 작품들은 고금을 통하여 널리 읽혀져 왔으며, 그 가운데서 <자술自述(혼몽夢魂)>과 <규정(閨情)> 등은 오래 전부터 한문교과서에도 두루 수록되어 왔다. 더구나 <자술自述(혼몽夢魂)>은 우리나라 현대 시인들이 좋아하는 한시로 꼽히며, 한시를 소개하는 수많은 대중서적들에서도 이옥봉의 한시들이 단골 작품이 됨으로써 그의 몇몇 시들은 이제 고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기도 하다. 더구나 이옥봉의 시와 불행했던 개인사를 소재로 한 소설들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여러 편의 현대시가 지어지기도 했다. 그런데 2011년 발표된 계명대 이종문 교수의 연구 논문에 따르면 그녀의 시로 알려진 것 중에서 17편이 본인의 작품이 아닐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물론 추가 연구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큰 충격임에 틀림없다. 본고(本稿)는 문학론이 아니라서 많은 시와 그 진위를 다루지는 않았으니 더 많은 시는 위에 든 서적이나 논문들을 참조하기 바란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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