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한국판 마타하리, 요화 – 배정자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51228)

by 금삿갓

때는 ‘조용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가 막을 내리고, 흥선대원군이 아들 고종을 보위에 올려 나라를 틀어쥐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열강들 중 미국은 그 당시, 남북전쟁을 끝내고 대륙 횡단철도를 놓았다. 영국은 런던 지하철을 건설했으며, 일본은 메이지 유신으로 막부체제를 일소하고 서양식 문물로 욱일승천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은 자신의 운명이 풍전등화인 줄도 모르고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이런 1870년에 경남 김해에서 밀양부(密陽府) 아전(衙前) 배지홍(裵祉洪)이 딸을 하나 낳았는데, 그녀가 바로 배분남(裵粉男)이었다. 아버지가 민씨 정권에 반대를 표했다가 대구 감영에 투옥된 후 사망하고, 그 충격에 어머니는 실명했다. 연좌죄(緣坐罪)로 모두 노비의 신세로 전락하여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배분남은 밀양의 관기(官妓)로 전락했다. 그때 그녀의 기명(妓名)은 계향(桂香)이었다. 기생집에서 탈출하여 통도사에서 우담(藕潭)이라는 법명(法名)으로 여승 생활을 했다. 통도사 조실 구하스님의 회고에 의하면 그녀는 야무지고 예뻤으며, 하는 짓은 절 생활을 못할 성질이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밀고가 되자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밀양부사 정병하(鄭秉夏)의 도움으로 1885년에 간첩이며 무역상 또는 탁발승을 가장한 마츠오(松尾)를 따라 일본으로 밀항했다. 거기서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로 망명 와서 있던 안경수(安駉壽)를 우여곡절 끝에 만났다. 그의 도움으로 상강(尙綱) 여학교에 입학하고, 이때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었던 김옥균(金玉均)을 아마 안경수의 주선으로 만났을 것이다. 그녀는 김옥균의 집에서 하인 비슷하게 생활하면서 학교를 다녔다. 어느 날 일본 내각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김옥균의 집으로 방문했는데, 어린 하녀를 보고 한눈에 뿅 가면서부터 일이 터진다. 조국에서 도망 와서 망명생활을 하던 김옥균은 이토(伊藤)의 눈빛을 잽싸게 알아차리고 통박을 굴렸다. 달린 혹 하나 떼버리고 이토(伊藤)에게는 호감을 사는 방법이다. 그래서 이토(伊藤)에게 그 여인을 수양딸 삼을 것을 권하게 된다. 호색가(好色家)로 소문난 이토(伊藤)가 이를 마다할 리 없다. 아마 수양딸 겸 은밀한 정부(情婦)로 활용된 것이다. 이토(伊藤)는 그녀의 이름을 다야마 사다코(田山 貞子)로 개명시켜서 철저하게 교육을 시킨다. 이렇게 해서 배분남이 배정자(裵貞子)로 탈바꿈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배정자는 미색(美色)뿐만 아니라 머리도 영특(英特)했나 보다. 이토는 일본인 교관을 붙여서 그녀에게 수영, 승마, 사격, 변장술, 매복술, 사교술 등을 가르치며 훗날 일본 밀정, 첩자으로서의 능력을 쌓도록 한다.

드디어 배정자는 도일(渡日)한 지 9년 만인 1894년에 부관연락선에 올라 조선으로 입국한다. 조선에 들어온 배정자는 주로 일본 공사관에서 생활했다. 이토의 밀명으로 하야시(林權助) 공사의 일본어 통역이라는 직분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당시의 세도가였던 엄비(嚴妃)의 조카사위 김영진(金永鎭)과 이용복(李容馥)을 만나게 되었고, 또 이들을 통해 황실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배정자는 엄비의 주선으로 고종에게 소개되었는데, 고종은 그녀의 미모에 감탄하면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줄 것을 부탁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화려한 미모와 뛰어난 일본어 실력으로 그녀는 고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일본 관계에서 배정자가 끼지 않는 일이란 거의 없었다. 심지어는 조선 황실의 의전(儀典) 문제에서부터 창녀(娼女) 위생검사까지 그녀의 치맛바람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위세가 높았다. 자기의 어릴 적 기구한 운명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그녀는 출세와 권력을 향해 돌진하는 불나방이 된 것이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일어났을 때 배정자는 남장을 하고 전국을 돌며 청나라군의 출병규모와 조선정부의 태도 등을 수집하고 돌아다녔단다. 정세 판단을 한 결과 일본에 빌붙어서 스파이로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면 한없는 끗발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몸으로 안 것이다.

배정자는 러일전쟁 직전인 1903년 말, 밀정으로서 큰 공을 세우게 된다. 당시는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점차 악화되는 상황이었고, 대한제국은 겉으로는 엄정중립이었다. 민영휘(閔泳徽), 이용익(李容翊) 등 친러파 거두들은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일 경우, 러시아가 승리한다고 내다보고 있었다. 이들은 러시아 군대를 끌어들이려고 고종을 평양이나 블라디보스토크로 천거(遷居)할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고종이 총애하던 배정자에게 블라디보스토크에 갈 때 그녀에게 같이 가자고 하는 바람에 비밀이 일본으로 사전에 새나가서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밀정으로서의 진면목을 훌륭하게 발휘한 것이었다. 1905년 이토 히로부미가 친러파를 숙청하고 친일파를 기용하라는 내정 간섭의 밀서를 고종에게 전달한 밀서사건으로 배정자는 3년 유배형을 받아 절영도(부산 영도)로 보내졌다. 일본에 충성을 다했던 밀정 배정자가 유배되자 일본공사관에서는 서기관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 간카와 이치타로(監川一太郞) 등을 파견하여 위문하였다. 또 일본 정부에서도 이토 등이 대리사절을 보내 위로하였다. 배정자의 유배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나자 1905년 11월 14일 부산에 도착한 이토는 비서관을 보내 배정자의 사면을 정부에 종용하였다. 당시 이토는 일본특파대사 자격으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 오는 길이었다. 이에 정부는 할 수 없이 배정자를 석방하였다. 이제 배정자로서는 자신의 양아버지며 정부(情夫)인 이토가 서울로 부임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당시 고종은 풀려난 배정자를 불러 이토의 방문에 공로가 컸다고 치하하면서 이토가 어떤 사람인지를 물었다. 배정자가 이토는 폐하와 한국을 돕기 위해 왔다고 대답했다. 이에 고종은 이토는 일본의 중신(重臣)이니 응당 먼저 자국(自國)을 위하고 그다음에 우리나라를 생각하도록 성의껏 모시라고 말했단다. 그런데, 그녀는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이 일어나 일제가 고종에게 퇴위 압력을 넣을 때도 일본 밀정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1905년에 전 세계를 경악시킨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乙巳勒約)에 따라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통감으로 부임했다. 조선에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그녀의 끗발은 최고조에 달한다. 오빠는 배국태(裵國泰)는 철도원 기사(技師)였는데 일약 판서반열인 한성판윤(서울시장)에 제수되고, 동생 배석태(裵錫泰)는 말단 경찰에서 경무청 경무관(경찰청장)으로 일약 승진한다. 그의 부친, 조부, 증조부도 고위 관직으로 추증(追贈)되었다. 이 정도니까 이토의 양녀가 아닌 애첩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정도다. 막강한 권력자로 행세하니 ‘흑치마’라는 별명도 이때에 생겼다. 당시 배정자가 덕수궁(德壽宮)에 얼마나 뻔질나게 들락거렸는지는 이런 소문으로 잘 나타났다.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다. 원래 대안문이란 현판은 의정부 참정 민병석이 썼다. 이 대안문을 1906년에 수리하고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개명하였다. 원래의 명칭은 <순자(荀子)>에서 따온 것이다. 즉, “得道以持之(득도이지지) 則大安也(즉대안야) / 도를 얻어서 유지하면 곧 크게 편안해진다.”라는 왕패(王霸)의 구절이다. 그런데 갑자기 대한문(大漢門)으로 바뀌자, 한양의 민심이 요화(妖花) 배정자 때문에 ‘안(安)’ 자가 ‘한(漢)’로 바뀌었다고 수근거렸다. ‘안(安)’ 자는 갓머리(宀) 밑에 계집녀(女)를 합한 것으로, 삿을 쓴 계집이 덕수궁을 제비 드나 듯이 한다고 비꼬았다. 그래서 사내‘한(漢)’로 변경했다는 루머이다. 사내 한(漢)도 이미지가 도적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대한문을 드나드는 도적놈들이라는 비아냥은 계속되었단다.

한편 이토는 동양 3국의 상황을 내다보고 배정자에게 중요한 지시를 내렸다. 청나라와 조선과 일본을 크게 묶는 그림을 위해 중국의 교두보가 필요하다.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 원세개)의 부인이 조선인이라 하니 잘 접근하여 일본과 청의 화목을 이루도록 하라. 나의 이상은 동양 3국을 병합하여 동양평화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임무를 수행하기도 전에 그녀의 가장 듬직한 빽줄이었던 이토가 1909년 하얼빈에서 안중근의사에게 사살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녀는 졸도하고 만다. 그도 그럴 것이 이토는 그녀의 수양아버지이자 정부(情夫)였을지도 모른다. 배정자는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생활하다 드디어 병으로 드러누웠다. 1910년 8월 한일합방 소식을 들었을 때도 배정자는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소리 높여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조선 주둔군 헌병사령관 아카시(明石元二郞)는 그녀의 능력을 알아보고 일본군의 헌병대의 조선인 촉탁으로 채용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일본이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으로 군대를 파견하게 되자, 배정자도 일본군을 따라 함께 갔다. 이곳에서 배정자는 마적단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는 등 죽을 고비를 몇 번씩 넘겼다. 그러면서도 일본군의 밀정으로 맹활약했다. 중국 마적단 포 시절에는 두목과 상당 기간 동거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빼내 일본군에 넘겨주기도 하였다. 그야말로 몸과 마음을 다 바치면서 일제의 밀정노릇을 했던 것이다. 그 후 그녀는 일본제국 외무부 공무원 등으로 근무했다. 1918년 10월부터 1919년 10월 29일까지 만주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관 직원으로 활동했다. 1920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만주 지역에 설립한 첩보단체 만주보민회에 가입해서 활동했고,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 때는 봉천(奉天) 일본제국 총영사관(總領事館) 직원으로 만주, 시베리아를 오가며 군사 스파이로 활약했다. 실제로는 남만주 일대 조선인들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감시하여 보고하는 일을 맡았다.

일제 총독부는 최정규(崔晶圭), 이인수(李寅秀) 등을 중심으로 한 옛날의 일진회 잔당들을 끌어 모아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파괴하기 위한 무장 첩보단체로서 보민회를 만들었다. 보민회의 후원자는 조선총독, 조선군 사령관, 총독부 경무국장 등이었다. 보민회의 반민족적 성격은 1920년 4월 11일 초대 보민회 회장 최정규 등이 독립군 장기정을 잡고 무기와 서류를 빼앗은 일에서도 알 수 있다. 최정규는 보민회에서 활동한 공로를 인정받아 뒷날 중추원 참의에 오르기도 했다. 배정자는 제우교(濟愚敎) 성부인(誠夫人)이라는 직함으로 발기인에 참여했으며, 보민회 고문이 되었다. 배정자는 보민회에서 활동하면서 총독부로부터 운영자금을 조달하는 데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만주지역에서의 맹활약으로 독립투사 진영에서 배정자를 처단대상자로 지목하자, 그녀는 1922년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조선으로 돌아왔다. 국내에 들어와 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있으면서 밀정노릇을 계속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丸山鶴吉)의 주선으로 촉탁이 된 배정자는 그의 지령으로 항일독립투사를 잡아들이는 데 누구보다 앞장섰다. 총독부는 이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여 약 600여 평이나 되는 토지를 그녀에게 주기도 했다. 배정자는 1924년 57세로 일선에서 물러났는데, 총독부는 그 뒤에도 촉탁이라는 이름으로 봉급을 계속 주어 넉넉한 생활을 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1940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배정자는 70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남양군도로 달려갔다. 당시 배정자는 전선에서 ‘자신의 조국 일본 장병들이 고생하는 것이 가슴 아프다.’라고 하며, 일본군의 후원으로 조선인 여성 100여 명을 군인위문대라는 이름으로 끌고 갔다. 배정자는 같은 조선 여성들을 성욕에 굶주린 일본군들의 성노예로 바치면서까지 일제의 승리를 위해 충성을 다했던 것이다. 배정자는 뛰어난 미모에 걸맞게 늙은 나이에도 항상 파마머리를 하고 당당하게 걸어 다녔다. 밀정으로 활약하면서 서울과 일본에서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닐 만큼 남성 편력도 화려했다. 다음은 그녀의 남성 편력을 알아보자.

그녀는 어린 나이에 밀양의 관기(官妓)였기에 남자를 일찍 경험했을 것이다. 그녀는 일본에서 김옥균의 보호 아래 있을 때부터 이토 히로부미를 양부(養父) 겸 정부(情夫)로 비밀리에 전전했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이다. 그녀의 인생에 있어 이토 히로부미라는 존재는 가장 친밀하면서도 중요했던 인물이었다. 배정자는 이토의 성욕(性慾)을 해소하기 위해 평소 실오라기 한 올도 걸치지 않은 전라(全裸) 상태에서 시중을 들었단다. 이토가 잠자리에 들 때는 입술과 혀로 이토의 음경(陰莖)을 애무하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전한다. 이토와 불륜한 성(性) 생활을 하면서도 일본유학생인 전재식(田在植)과 짧지만 부부관계를 맺어 전유화(田有和)라는 아이를 두었다. 그녀가 일본에 건너가기 전에 한때 기생일 때에 있었을 때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田道後)의 아들 전재식을 알게 되어 깊은 관계에 빠졌다. 훗날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자 배정자는 그와 다시 만나 결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배정자의 첫 결혼생활은 당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다니던 전재식이 잠깐 귀국했다가 병을 얻어 죽는 바람에 끝장나고 말았다. 두 번째 남편은 그녀가 조선으로 귀국하여 일본 공사관에 의탁하고 있을 때 만났다. 그 남자는 공사관의 조선어 교사였던 현영운(玄英運)이었다. 그들은 1895년에 결혼했다. 그러나 현영운과 몇 년 가량 살다가 곧바로 이혼하였다. 현영운에게서 딸 현송자를 얻었다. 아마 워낙 바람기가 많고 밝힘증이 심하며, 특히 내연 관계인 거물 이토가 있는 연유로 오래 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현영운은 배정자의 노력으로 박영철(朴榮喆), 박두영(朴斗榮) 등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것으로 전해진다. 배정자에 대한 고종의 총애 덕분에 현영운은 그녀와 결혼한 뒤에 초고속 승진을 한다. 1895년 당시 외부(外部) 번역관 겸 주임관 6등이던 현영운은 10년 만에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하여 육군 참령, 육군 참장, 육군 총장, 삼남 순무사, 농공상부 협판을 거쳐 궁내부 대신서리까지 오른 것이다. 현영운의 남다른 출세는 고종이 일제의 밀정이었던 배정자를 얼마나 아끼고 신임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한 예이다.

그녀는 두 번째 남편인 현영운과 짧게 살다가 이혼한 뒤, 일본 육사에 유학시키고 동생으로 부르던 박영철과 다시 결혼했다. 그 내막은 배정자가 후배인 박영철과 눈이 맞자, 현영운이 눈에 가시처럼 여겼다. 그러자 현직 육군의 간부인 자기 남편을 뒷조사를 시켜서 5년 형을 받게 하여 감옥에 보내고 이혼을 한 것이란다. 이때 박영철(朴榮喆)은 결혼 중이었고, 배정자 보다 10살이나 연하였다. 당시 이들의 결혼식 소식을 전한 대한매일신보의 기사를 보자. “전 한성판윤 배국태씨의 매제 배정자와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시종무관 박영철씨가 새문 밖 호텔에서 혼례를 재작일(再昨日)에 거행하였는데, 혼인하는 예절과 잔치하는 음식을 다 서양법으로 하고 내외국 신사 수백 인을 청하여 대접하였다더라.” 개인의 결혼식이 신문에 이렇게 자세히 보도는 것도 특이하다. 이 결혼이 그만큼 유명세를 탄 것은 신랑 박영철이 신부 배정자보다 9살 연하인 데다가 배정자와 결혼하기 위해 이혼까지 했기 때문이다. 또한 한때 미천한 관기였던 배정자가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養女)를 자처하며 황실과 국정을 농간하고 있었고, 3번째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박영철에게 본부인과 이혼하게 한 후 결혼한 것이다. 박영철은 일본육사를 15기로 졸업하고, 함북도지사, 중추원참의 등을 역임했다. 그와의 결혼하여 5년간 동거하다가 또 이혼을 한다. 그녀는 박영철과 혼인 중에 평소 금전 거래가 있던 오바시라는 일본사람과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이혼한 것이다.

박영철과 이혼 후에 그녀는 그때부터 일본인들과 관계를 하면서 정식 결혼도 없이 임시 임시로 동거 생활을 하다가 모았던 돈푼도 그럭저럭 없어졌다. 그러자 그때는 모 은행에 사무원으로 있던 최덕이라는 청년을 데려다 두고 재산 정리를 함 네하고 몇 해 동안을 또 살았더란다. 차츰 궁하게 된 배정자는 옛날의 부귀영화를 다시금 추억하여 경향 간에 재산 많은 이를 물색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젊은 최덕이는 어디로 장가를 보내 주고, 황금정에서 무역상을 하고 있던 조병현이라는 늙은이와 관계를 맺어 제4차의 정식 결혼식을 시내 모 예배당에서 하였단다. 그리하여 그때 서울 장안에서는 “갈라서기도 잘하지만 결혼식도 너무 잦은걸”하는 비평도 한참 동안 높았었다. 동아일보는 1925년 8월 21일 자에 배정자를 변태성욕자라고 하면서 이런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배정자의 남성 편력은 너무 대단하여 범인의 상상을 초월했다. 조병현과 결혼이 끝이 아니라 20세 연하의 대구의 청년부호 정봉진, 25세 연하의 일본 순사 카와지리, 일본인 오하시(大橋), 전라도 갑부 조익헌, 부호 조희경 등과 동거하고 헤어지기를 반복했다. 연하의 젊은 부호 남성이나 일본 순사들은 배정자의 어떤 부분을 보고 홀딱 반하여 결혼을 감행한 것일까? 보도 당시의 그녀 나이가 56세 정도인데 말이다.

당시 조선 말기의 난장판은 비단 배정자 한 여인만이 아니다. 친일 매국노 부인들의 막가파식 음행도 별단 다를 것이 없는 꼴불견이었다. 을사오적인 내무대신 이지용(李址鎔)의 부인 ‘이홍경’ 또는 ‘이옥경’은 일본 서기관들과의 밀통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이홍경은 처음에는 하기하라 슈이치(萩原守一)와 사귀다가, 다음에 구니와케 쇼타로(國分象太郞)과 바람피우다가 그것도 양에 안 차는지 조선주둔 사령관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하고도 붙는다. 이에 하기하라는 분하고 질투가 났지만 드러내지 못했다. 그러다가 하기하라(萩原)가 귀국하는 날, 복수극이 벌어졌다. 이홍경이 그를 전송하면서 입술을 맞추었다. 그때 하기하라가 그녀의 혀를 깨물어 상처를 입혔다. 이 일이 소문나서 한양에 <작설가(嚼舌歌)>가 퍼졌던 것이다. 을사오적 이지용이 나라를 바쳐 친일을 하니, 그 부인이 몸을 바쳐서 친일을 한 것으로 대중음악에 까지 파급 효과를 미쳤던 것이다. 궁내부대신 민영철(閔泳喆)의 재취(再娶) 부인 유씨의 난잡함도 이에 뒤떨어지지 않는다. 요염(妖艶)한 생김새로도 유명한 유씨는 하세가와 사령관과 내통한 것도 모자라 남편 출장 중에 왜관과 북한산 승방(僧房)을 무시로 출입하여 난잡한 음행을 했다고 한다. 부인들만이 아니다. 을사오적 이완용(李完用)은 아들이 유학 간 사이 며느리와 간통을 일삼았는데, 그만 갑자기 돌아온 아들에게 들통 나서 아들이 자살했다. 민긍식(閔肯植)은 자기 첩이 낳은 딸과 사통 해서 아들을 낳았고, 홍종헌(洪鍾軒)의 조카는 과부가 된 사촌누이와 간통하여 첩으로 삼았다. 황현(黃玹)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 나오는 내용이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 배정자는 75세로 지난날의 반민족 행위에 대한 응징이 두려워 집에서 숨어 지냈다. 1948년에는 반민족행위자특별처벌법이 통과되자 구속되어 반민법정에 섰다. 친일행위로 구속된 여성은 모두 6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배정자가 제일 먼저 검거되었다. 배정자는 반민법정에서도 자신은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이며, 고종이 자신을 정비로 삼으려 했다며 허세를 부렸다. 그 당시 어느 기자가 배정자에게 조선이 해방되고 새로 정부가 세워진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이에 배정자는 “기쁜 마음이 가득 차서 무어라 말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또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서는 별 기억도 없고 다 어리석고 나이가 어렸던 까닭에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이라고 변명하였다. 반민특위의 해산으로 감옥에서 나온 배정자는 주위에 돌봐 주는 사람 없이 어렵게 생활하다가 1951년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81세로 사망하였다. 지난날의 화려했던 영화를 간직한 채 쓸쓸한 말로를 맞이한 것이었다. 배정자는 한일 양국의 이중스파이를 자처했는데, 배정자가 구술한 <배정자 실기>를 보면, 1900년대 한일 외교는 배정자가 모두 처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거의 모든 일을 자신이 했다고 황당하게 주장한다. “한국의 정자(貞子)가 아니라 정자의 한국이 되었으며, 이토의 정자가 아니라 정자의 이토가 되었다”라고 기술할 정도이다. 배정자 보다 6년 후인 1876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마타하리(Mata Hari)가 있다. 본명이 마르하레타 헤이르트라위다 젤러(Margaretha Geertruida Zelle)로 무용가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 상황에서 코르티잔과 스파이 활동으로 유명하다. 독일군과 연합군을 오가며 이중간첩을 하다가 총살형에 처해진 마타하리에 비하면 배정자는 외모, 활동, 처벌 면에서 한 수 아래지만 조선의 악명 높은 마타하리 격인 요화(妖花)였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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