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줄리아나(Lady Juliana)를 아시나요? 한 때 퍼스트 레이디의 어두운 과거라고 좌파 유튜버들이 열을 내던 이름과 비슷하지만, 이것은 1789년 영국에서 불모(不毛)의 땅이던 호주로 226명의 여성 죄수를 최초로 이주시키기 위해 출항했던 배의 이름이다. 이번에는 유명한 능력자보다 그야말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무명의 민초들이 세상을 위해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이들의 눈물과 땀과 노력으로 역사가 이루어진 것이니까. 1788년 영국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759 명의 영국 죄수를 비롯해 군인, 관리자 등 1,400명이 승선한 영국 제1함대의 죄수 호송선이 지금의 보타니베이(Botany Bay)를 거쳐 시드니 코브(Sydney Cove)에 상륙한 지 일 년 만이다. 영국은 식민지이던 미국을 독립전쟁으로 막 빼앗긴 때였고, 프랑스는 영국보다 한걸음 늦게 호주에 도착해서 그 땅에 군침을 흘릴 때였다.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영국이 호주에 대한 선점권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영국은 1770년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보타니베이에 도착하고, 주변 지역을 조사한 뒤 자신의 고향인 사우스 웨일스(South Wales)의 이름을 본 따 ‘뉴 사우스 웨일스’(New South Wales)라 불렀지만 이 대륙에 대해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든든한 미국이 식민지로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이 독립하자 영국은 호주를 다시 식민지로 건설할 의도였다. 그래서 초창기 미국과 마찬가지로 식민지 건설을 위한 필요한 인력을 죄수로 채우기로 했다. 당시 조지(Georgian) 왕조시대의 “피의 법전”에 따라 가난한 사람들은 작은 실수에도 감옥행이어서 감옥의 수용 능력을 초과했다. 감옥의 과밀 해소와 식민지 개척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해결하려고 근 80년간 영국은 호주에 죄수들을 밀어 넣었다.
역사적으로 확실한 기록은 없지만 호주 대륙에 가장 일찍 정착한 토착민들은 아프리카 종족이고, 그다음이 해삼 무역을 위해 중국인들이 당도한 것으로 보인다. 서구 열강으로는 네덜란드인들이 제일 먼저 발견했다. 1606년 빌렘 얀스존이 호주 북부에 도착했고, 1616년에 더크 하르트그가 다음에 와서 대륙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서 네덜란드인들이 호주 대륙의 해안선 지도를 그렸다. 아무튼 열강들의 다툼에서 영국이 호주를 완전히 차지한 것이다. 아무튼 수백 명의 남성 죄수들만 신대륙에 왔으니 성별의 불균형은 물론이고, 원주민 여성들에 대한 강간이나 폭력 사건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을 보고 받은 영국 내무부 차관인 에반 네피언(Evan Nepean)은 새로운 식민지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식량과 물자를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더 많은 여성, 어린이, 그리고 가족이 정착하여 안정적인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네피언은 여성 죄수들을 즉시 시드니 코브로 보내 "도착하는 즉시 도덕성을 개선하고 정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혼인을 장려하라."라고 명령했다. 이 명령에 따라 영국 전역의 감옥에서 도둑, 매춘부, 사기등을 져지른 여성 죄수 225명과 갓난아기 5명이 레이디 줄리아나호를 타고 쇠락해 가는 시드니 코브 식민지로 보내졌다. 영국 정부는 이 여성 죄수들을 두 가지 목적으로 이용했다. 하나는 굶주리고 고립된 남성 식민지 주민들이 "심각한 부정행위"에 가담하는 것을 막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문제투성이인 정착촌의 번식력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 배는 1789년 3월 12일부터 템즈강에서 정박하며 각지 감옥에서 온 죄수를 태우고, 6월 4일 런던을 떠나 포츠머스 근처의 스핏헤드로 향했다. 거기서 다시 90명을 추가로 태우고 모든 죄수의 발목의 쇠사슬을 풀어 주었다. 관리인 존 니콜(John Nicol)의 기록에 따르면, 7월 29일이 출항 예정이었다. 출발 전날 밤, 네 명의 여성이 바다에 뛰어내렸다. 배는 그들을 남겨두고 떠났다. 배에는 죄수 포함 최종 246명의 여성이 타고 있었다. 그중 51명은 10세에서 19세 사이의 어린 소녀였고, 116명은 20세에서 29세 사이였으며, 40명은 30세에서 39세 사이였다. 40대는 단 15명이었고, 나머지는 50세 이상이었다. 배안에서 낳은 앤(Ann)이라는 어린 아기는 그야말로 축복이었다. 레이디 줄리아나 호에서는 아기 돌보미 걱정은 없었다. 앤은 200명이 넘는 이모들의 품에서 안겨져 사랑스럽게 보살핌을 받으며 이리저리 옮겨 다녔고, 엄마는 아기를 찾아 배 안을 헤매야 할 때도 있었다. 배 전체를 관리 지휘하는 사람은 토마스 에드거(Thomas Edgar) 중위였고, 외과의는 리처드 앨리(Richard Alley)였다. 항해 중 사망한 죄수는 5명이었는데, 항해 책임자와 의사의 보살핌 덕분으로 사망률이 낮았다. 식량은 적절하게 배급되었고, 선박은 청결하게 유지되고 소독되었으며, 여성들은 갑판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고, 기항지에서는 신선한 식량이 공급되었다. 이러한 대우는 악명 높은 제2함대에서 자행된 처우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여성들은 배의 오수, 인분,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한 선창 바로 위, 오를롭(Orlop) 갑판에서 잠을 잤다. 이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많은 여성들에게는 영국 감옥에 있었던 상황보다 배에서의 생활이 훨씬 나아 보였을지도 모른다. 많은 여성들에게는 시드니 코브로 가는 여정 자체가 삶의 질을 향상시킬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항해 중 선원들의 "아내"가 된 여성들은 더 나은 식량과 잠자리를 제공받을 수 있었다. 절도범 엘리자베스 반슬리(Elizabeth Barnsley)처럼 자신의 재력과 영향력을 이용해 더 나은 숙소를 구하고 배 안에서 사업 기회를 창출하기도 했다. 그녀는 모든 죄수들에게 여왕 같은 존재로 군림했다. 조지 왕조 시대 영국이나 해운업계에서 매춘 행위는 통상적이었으며, 레이디 줄리아나호는 곧 일종의 "떠다니는 매춘굴"이 되었다. 선원들과 배에 실린 여성 승객들 중 일부가 항해 중 또는 기항지에서 성매매로 돈을 벌었고, 이렇게 번 돈은 배 안에서 또는 시드니 코브에 도착했을 때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우리의 주인공 메리 웨이드(Mary Wade)는 1775년 12월 17일에 런던 사우스워크(Southwark)에서 메리 잉글리시(Mary English)와 조지 웨이드(George Wade)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 가난해서인지 구걸을 수단으로 런던 거리를 휩쓸며 시간을 보냈다. 1789년 1월 5일, 메리는 또 다른 아이 제인 화이팅(Jane Whiting, 14세)과 함께 8살 메리 필립스(Mary Phillips)에게서 면 드레스 한 벌, 리넨 티펫 한 벌, 리넨 모자 한 벌을 훔쳤다. 그 후 그들은 그 드레스를 전당포에 팔았다. 메리는 다른 아이가 나중에 메리의 방에서 티펫을 발견한 후 법 집행관에게 신고되었고, 그 아이는 체포되어 브라이드웰(Bridewell) 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녀의 재판은 1789년 1월 14일 올드 베일리(Old Bailey)에서 열렸으며, 유죄 판결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옷가지 몇 개 훔친 죄로 교수형이라니 정말 가혹한 당시의 형벌이었다. 1789년 3월 11일, 조지 3세 영국 국왕이 이름 모를 광기에서 완치되었다고 선포되었다. 그는 퇴행성 정신질환인 포르피리아(Porphyria)를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 달 후, 축하의 일환으로 메리 웨이드를 포함한 여자 사형수 전원이 교수형을 감형하여 호주 유배형에 쳐했다. 웨이드는 뉴게이트 교도소에서 93일을 보낸 후, 여성과 아이들만 태운 최초의 여성 죄수 선박인 레이디 줄리아나호를 타고 호주로 이송되었다.
이 배는 11개월간의 항해 끝에 1790년 6월 6일 포트 잭슨에 도착했다. 포트 잭슨에 도착하는 데 309일이 걸렸는데, 이는 죄수 수송선으로는 가장 느린 항해 중 하나였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테네리페와 산티아고에 기항했고, 리우데자네이루에서 45일, 희망봉에서 19일을 보냈기 때문이다. 레이디 줄리아나는 떠다니는 매춘굴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관리인 니콜은 "우리가 바다 한가운데에 있을 때, 배에 탄 모든 남자는 죄수들 중에서 아내를 맞이했고, 그들은 전혀 꺼리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기항지에서는 다른 배의 선원들이 원하는 여성들에게 자유롭게 접대를 받았고, 장교들은 이러한 방탕한 활동을 억제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항해 동안 죄수들에게 생산적인 일을 시킬 계획은 전혀 세워지지 않았고, 그들은 시끄럽고 제멋대로였으며, 술을 좋아하고 서로 싸우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이 배에 탑승한 여인 중 몇몇의 행적은 이렇다. Mary Pardoe는 여정 중에 Ann(아버지는 Lady Juliana 호의 선원 Edward Scott)을 낳았다. 이 아이는 Lady Juliana 호가 Port Jackson에 도착했을 때 배에 타고 있던 사람 중 가장 어린 사람이었다. Sarah Dorset도 항해 중에 Edward Powell이라는 아들을 낳았다. 아버지 역시 Edward Powell이었는데, 그도 선원이었다. 시드니에 도착하자마자 Sarah는 다시 노퍽 섬으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Robert Watson과 두 자녀를 낳았다. 1801년에 Watson은 Watsons Bay라고 명명된 지역의 South Head에 임대권을 받아서 성공했다. Elizabeth Parry는 해방된 최초의 여성 죄수였다. 그녀는 첫 번째 함대의 죄수이자 농부인 James Ruse와 결혼했다. 그들은 함께 최초의 성공적인 농작물을 재배했다. 배에 탄 226명의 여성 중 약 35명이 선원들과 관계를 맺었다.
10개월 이상의 긴 항해 끝에 레이디 줄리아나호가 절망과 기아에 허덕이던 시드니 코브 식민지에 도착했지만 환영받지는 못했다. 먼저 온 식민지 주민들은 식량과 물자를 기대했지만, 200명이 넘는 여성과 갓난아기 7명을 태운 화물을 예상하지 못했기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레이디 줄리아나호의 여성들에게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그러나 레이디 줄리아나호 도착 3주 후, 보급선 저스티니안호, 서프라이즈호, 넵튠호, 스카버러호가 시드니 코브에 도착하면서 주민들의 분노는 누그러졌다. 한편, 많은 여성 죄수들은 시드니 코브에서 새로운 자유를 만끽했다. 한편 메리 웨이드는 다시 레이디 줄리아나호를 타고 노퍽 섬으로 보내져 1790년 8월 7일 도착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어린 나이 때부터 험난하고 파란만장(波瀾萬丈)한 생애를 보냈다. 웨이드는 노퍽 섬에서 세 자녀를 두었는데, 1793년에 사라(Sarah), 에드워드(Edward, 1795년경 출생 1796년경 사망), 윌리엄(William,1795년생)이다. 거기서 다시 시드니로 돌아온 후, 메리는 티그 해리건(Teague Harrigan과 함께 살았으며, 그와 함께 시드니 탱크 스트림(Tank Stream) 기슭에 있는 텐트에서 같은 이름의 두 자녀 에드워드(Edward, 1800년 출생자는 사망하고, 1803년생)를 두었다. 티그는 1806년에 포경 원정을 떠났고, 1817년에는 태즈메이니아 포트 달림플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는 1825년 론서스턴의 타마르 강 근처에 토지를 부여받았으며, 그녀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1809년부터 웨이드는 호크스버리 강 근처에서 조나단 브루커(Jonathan Brooker)와 함께 살았다. 그곳에서 그녀는 21명의 자녀를 키웠으며, 그중 7명은 자신이 낳았다. 브루커는 1811년 2월 자유 증명서를 받았고, 뉴사우스웨일스 타라와나에 있는 라클란 맥쿼리(Lachlan Macquarie) 총독으로부터 60 에이커(24헥타르)의 토지를 하사 받았다. 메리도 1812년 9월 1일 자유 증명서를 받았다. 1816년 그들 가족은 뉴사우스웨일스 캠벨타운에 위치한 에어즈(Airds)에 정착했다. 웨이드는 1817년 2월 10일 뉴사우스웨일스 리버풀의 세인트 루크스에서 조나단 브루커(Jonathan Brooker)와 결혼했으며, 남편은 1822년에 30 에이커를 소유했으나 1823년 산불로 그 부동산이 불탔다. 이로 인해 브루커의 의자 목공소와 모든 도구가 파괴되면서 끝났다. 가족은 빈곤에 빠졌고 토머스 브리즈번(Thomas Brisbane) 주지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들은 회복하여 1828년까지 일라와라에서 62 에이커(25헥타르)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들은 1833년 3월 14일 브루커가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살았다. 그는 캠벨타운의 세인트 피터 교회 묘지에 묻혔다. 웨이드는 1859년 12월 17일(생일) 뉴사우스웨일스 울런공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녀의 장례식은 뉴사우스웨일스 페어리 메도우에 위치한 세인트 폴 성공회 교회에서 처음으로 거행된 예배였으며, 그녀의 아들이 이 교회가 세워진 땅을 기부했다. 웨이드는 사망 당시 300명 이상의 생존 후손을 두었으며, 호주 초기 영국인 정착 창립자 중의 중요한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녀의 후손들은 현재 수만 명에 달하며, 케빈 러드(Kevin Rudd) 전 호주 총리도 포함되어 있다. 웨이드의 이야기는 <Mary Wade to Us>라는 책에 실려 있으며, 이 책은 가계도로 출간되었다. 이 책과 러드(Rudd)의 다른 죄수 조상들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에서 가죽 제본 두 권으로 묶여 캔버라에 있는 호주 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2017년 뉴사우스웨일스 주 정부는 여성 구금 센터인 메리 웨이드 교정센터를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호주 정부는 나라의 국격(國格) 때문인지, 죄수들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군대와 관리들이 먼저 왔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죄수 건국론을 애써 부정한다. 하지만 민간에서는 죄수노동자의 역사를 추적하면서 그들이 호주 사회에 기여한 긍정적인 면을 찾는다. 더구나 남녀 모두 범죄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참정권을 요구한 여성 차티스트(Chartist) 운동의 가담자들, 노숙자, 죄수들의 엄마들이 자녀와 함께 온 경우도 있었다. 레이디 줄리아나호가 도착한 지 200년이 지난 후, 현대 호주의 세 여성이 그들의 조상들이 어떻게 이 배에 탑승하게 되었는지를 밝혀냈다. 태즈메이니아 교구의 성공회 신부 헬렌 필립스(Helen Phillips)는 매춘부 레이첼 호디(Rachel Hoddy)의 후손이었다. 정부 고위 연구원인 델리아 드레이(Delia Dray)는 밀가루를 조금 훔친 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앤 마쉬(Ann Marsh)의 후손이며, 성공적인 은행 커뮤니케이션 매니저 메이건 벤슨(Meagen Benson)은 다른 아이의 옷을 훔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은 빈민가의 11살 거리 어린이였던 이 글의 주인공 메리 웨이드(Mary Wade)의 먼 친척이다. 메리 웨이드는 호송된 여죄수 중 가장 어린 11살이었다. 이 들 세 여성, 필립스·드레이·벤슨은 그들의 조상들이 ‘범죄자’로 낙인찍혀 추방되었지만 레이디 줄리아나호에 탑승했던 220명의 여성 중 많은 수가 호주의 건국 어머니들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출산을 돕는 조산사가 되어 나머지 형기를 마친 엘리자베스 반슬리(Elizabeth Barnsley)도 큰돈을 벌었고, 드레이의 조상 레이첼 호디는 여성 주점 운영자가 되어 Hobart Town에서 유명한 Pup인 ‘The Horse and Groom’을 운영했다. 앤 마쉬(Ann Marsh)는 파라마타 강 보트 서비스를 창립하여 호주 최초의 위대한 여성 기업가가 되었으며, 이 서비스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 아무튼 어두운 역사도 지워버릴 수 없는 역사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시대의 상황과 잣대를 가지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위에 소개된 여성들의 죄만 보아도 조국에서 수만리 먼 황무지 보내져야 할 정도의 범죄는 아니었다. 매춘, 밀가루 도둑, 옷을 훔친 죄 등 가난에 떠밀린 범죄다. 옷가지 절도로 심지어 11살짜리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영국 왕실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 우리 조상들이 중국에 당한 공녀의 문제나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 문제도 역사의 한 부분으로 재평가하여야 할 것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