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멕시코의 페미니스트 - 수녀(修女) 후아나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60110)

by 금삿갓

그녀의 본명은 후아나 이네스 데 아스바헤 이 라미레스 데 산티야나(Juana Inés de Asbaje y Ramírez de Santillana)로 스페인들처럼 매우 길다. 좀 더 짧으면서 더 많이 알려진 이름이 후아나 이네스 데 라 크루스(Juana Inés de la Cruz)이다. 1648년 11월 12일에 태어나서 47년을 살다가 1695년 4월 17일에 사망했다. 히에로니무스(Hieronymite)회 수녀이자 바로크 시대의 신 스페인 작가, 철학자, 작곡가, 시인으로 동시대 비평가들에게 "열 번째 뮤즈", "멕시코의 불사조", "아메리카의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녀는 또한 과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그녀는 스페인 황금시대의 스페인어 문학과 멕시코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작가 중 한 명으로 추앙된다. 당시 사회적 가치관에 도전하는 글을 통해 여성 인권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특히 여성의 교육권을 옹호하는 저서 <소르 필로테아에게 보내는 답장(Respuesta a Sor Filotea)>으로 유명하며, 신대륙 최초의 페미니스트 저서로 인정받고 있다. 수녀 Juana는 시대를 초월하여 멕시코의 여러 공동체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인물로, 가톨릭 성인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고, 멕시코 민족주의의 상징이자 표현의 자유, 여성 인권, 성적 다양성의 모범으로 여겨진다. Juana는 멕시코 시티 근처의 Nepantla(아즈텍어로 중앙의 땅이란 뜻이며, 현재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따서 Nepantla de Sor Juana Inés de la Cruz라고 한다.)에서 식민지 대서양 횡단 운송 및 무역에 관여한 카나리아 제도 출신의 스페인 해군 대장 Don Pedro Manuel de Asuaje y Vargas-Machuca(1602-1680)와 Doña Isabel Ramírez de Santillana y Rendón(1626-1690)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멕시코시티 근처의 Hacienda de Panoayan 땅을 임대한 저명한 크리올라(Criolla) 즉 순수 스페인 혈통이었다.

그녀에게는 세례 기록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1648년에 "Juana"라는 이름으로, 다른 하나는 1651년에 "Inés"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이에 대한 학계의 연구와 논쟁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부모의 혼외로 낳은 세 자녀 중 한 명이라는 점에는 의견이 일치된다. 후아나의 아버지는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의 곁을 떠났고, 그녀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외할아버지가 임대한 아메카메카의 파나오얀 농장에서 어머니 가족과 함께 유년기를 보냈으며, 그곳은 대가족인 라미레스 데 산티야나 가문의 집이었다. 그녀의 친척 중에는 그녀의 할머니 Inés de Brenes, 외숙모 Inés Ramírez de Santillana, 그리고 최초로 출판된 미국 태생 시인 Antonio de Saavedra Guzmán의 손자와 결혼한 그녀의 사촌 Inés de Brenes y Mendoza를 포함하여 "Inés"라는 이름을 가진 여러 여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름답고 조숙한 신동으로 알려진 Juana는 Hacienda de Papaya에서 가정교육을 받았으며, 라틴어와 나우아틀(Nahuatl, 멕시코 원주민 언어)어를 배웠고, 철학과 수학도 배웠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개인 서재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고, 그 방대한 자료는 그녀의 독학에 큰 도움이 되었다. 어린 시절 그녀는 종종 농장 예배당에 숨어 할아버지의 서재에서 가져온 책을 읽곤 했는데, 이는 여자아이들에게는 금지된 일이었다. 세 살 때 이미 라틴어를 읽고 쓰는 법을 배웠고, 다섯 살 때는 회계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덟 살 때는 성찬식에 관한 시를 지었다. 청소년기에 이르러 그녀는 그리스 논리학을 통달했고, 열세 살에는 어린아이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다. 오랫동안 그녀가 아즈텍어인 나우아틀어도 배웠고, 어린 시절에 그 언어로 짧은 시를 썼다. 그녀는 몇 가지 독특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치즈를 먹으면 멍청해진다는 말을 들어서 먹지 않았어요."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배움에 대한 욕구가 먹고 싶은 욕구보다 훨씬 강했거든요." 어떤 과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자신의 둔함을 벌주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버리곤 했다. 지식이 부족한 머리에는 예쁜 곱슬머리도 없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1664년, 16세의 그녀는 멕시코시티로 보내졌다. 그녀는 어머니의 허락을 받아 남학생으로 변장하여 그곳의 대학에 입학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정식 교육을 받을 수 없었던 그녀는 개인적으로 학업을 계속했다. 그녀의 가족은 영향력 있는 지위를 가지고 있었기에 식민지 총독의 궁정에서 시녀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유명한 가문 출신이자 스페인 신대륙 총독이며 Mancera후작인 Donna Eleonora del Carretto의 부인에게 지도를 받았다. 17세 소녀의 학식과 지능을 시험해 보고자 총독은 여러 신학자, 법률가, 철학자, 시인 등 40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여기서 그녀는 준비되지 않은 많은 질문에 답하고, 다양한 과학 및 문학 주제에 대한 여러 어려운 점을 설명해야 했다. 그녀가 보여준 모습은 참석한 모든 사람을 놀라게 했고, 그녀의 명성을 크게 높였다. 그녀의 문학적 업적은 스페인 신대륙 전역에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총독 궁정에서 많은 존경을 받았으며, 여러 차례 청혼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총독 관저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무도회, 연애, 오락은 그녀의 공부에는 방해물일 뿐이었다.

1667년 그녀는 청혼도 피하고 공부에 집중하기 위해 수녀원에 들어간 후, 사랑, 여성의 권리, 종교와 같은 주제를 다룬 시와 산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녀원 방을 살롱으로 바꾸어 스페인 신대륙의 여성 지식인 엘리트들이 방문하도록 했다. 여기에는 만세라 후작부인 Doña Eleonora del Carreto와 나바 백작부인 Doña Maria Luisa Gonzaga 등이 포함되었다. 그녀는 약 4,000권의 책이 있는 거대한 개인 서재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수녀원은 사회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650년 멕시코시티에는 16개의 수녀원이 있었고, 그곳에는 상류층 여성들이 거주했다. 수녀들은 남성 성직자의 권위 아래 있었지만, 수도원은 영적인 삶과 고귀한 소명을 결합한 자급자족적인 여성 공동체였다. 그녀의 여성 혐오와 남성의 위선에 대한 비판은 푸에블라(Puebla) 주교의 비난을 불러일으켰고, 1694년에는 소장하고 있던 책들은 팔아 그 수익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자선 활동에 전념해야 했다. 그녀는 이듬해 동료 수녀들을 치료하다가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그녀는 생전에 그녀의 저술 '전집' 3권 중 2권을 출간했고, 후기 판본 중 일부는 직접 편집하기도 했다. 마지막 권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지 5년 후에 출간되었으며, 다른 책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차례 재판되었다. 각 권은 궁중 총애를 받는 여인에서 수녀, 그리고 성녀의 모범이 되기까지 소르 후아나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내며, 그녀의 작품들은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1667년, 그녀는 맨발 카르멜회 수녀 공동체인 성 요셉 수도원에 지원자로 입회하여 몇 달 동안만 머물렀다. 이후 1669년, 그녀는 규칙이 더 완화된 Hieronymite 수녀회에 들어가 이름을 Sor Juana Inés de la Cruz로 바꾸었다. 이는 아마도 스페인 수녀이자 지적 성취로 여성이 복음을 전파할 수 있도록 몇 안 되는 특별 허가를 받은 Sor Juana de la Cruz Vázquez Gutiérrez의 이름을 참고한 것일 수 있다. 또 다른 가능성 있는 이름은 스페인 바로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작가 중 한 명인 Saint Juan de la Cruz이다. 그녀는 "공부의 자유에 제한이 되는 고정된 직업을 갖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원하는 대로 공부할 수 있는 수녀가 되기로 선택한 것이다. 소르 후아나는 수녀원의 면회실에서 그녀를 방문했던 멕시코의 다빈치로 불리는 석학 Carlos de Sigüenza y Góngora와 친밀한 친구가 되었다. 그녀는 1669년부터 1695년 사망할 때까지 멕시코시티에 있는 히에로니무스 성모 마리아의 산타 파울라 수녀원에 은둔하여 공부하고 글을 쓰고 방대한 서적을 수집했다. 그녀는 종교극과 세속극, 무용곡, 성가, 연애시, 희극, 철학, 신학 에세이, 심지어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옹호하는 자전적 글까지 폭넓게 집필했다. 스페인 신대륙의 총독 부부는 그녀의 후원자가 되어 그녀를 지원하고, 그녀의 저서를 스페인에서 출판했다.

1690년 11월, Puebla의 주교 Manuel Fernández de Santa Cruz는 소르 필로테아라는 가명으로, 포르투갈 예수회 설교자 António Vieira 신부의 40년 된 설교에 대한 그녀의 비판을 그녀의 동의 없이 출판했다. <Carta Atenagórica)라고 불리는 이 작품에 대한 그녀의 의도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많은 학자들은 이 작품을 가톨릭 교회의 위계 구조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했다. 또 주교는 그녀가 세속적인 공부 대신 종교적인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신의 편지도 출판했다. 그는 사제에 대한 자신의 비판을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해 그녀의 비판에 동의하면서도 여성으로서 그녀는 기도에 전념하고 글쓰기를 포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판자들에게 응답하여 그녀는 <Respuesta a Sor Filotea de la Cruz>라는 답장을 써서 여성의 정식 교육을 받을 권리를 옹호했다. 또한 그녀는 글쓰기 행위뿐 아니라 자신의 글을 출판하는 것을 통해서도 여성이 지적 권위자로서 역할을 수행할 권리를 옹호했다. 그녀는 여성, 특히 나이 든 여성을 권위 있는 위치에 놓으면 여성이 다른 여성을 교육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이러한 관행이 남성 교사가 어린 여학생과 친밀한 환경에서 만나는 잠재적으로 위험한 상황을 피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691년, 그녀는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에 대해 쓴 사적인 편지가 공개된 후 질책을 받고 글쓰기를 중단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녀의 급진적인 입장은 그녀를 점점 더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로 만들었다. 그녀는 여성의 지적 교육을 대변하는 명언인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철학을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라는 최고의 명언을 남겼다. 이에 대해 멕시코 대주교 Francisco de Aguiar y Seijas는 다른 고위 관리들과 함께 그녀를 비난했다. 가톨릭 교회의 가부장적 구조에 도전한 것 외에도, 그녀는 자신의 글쓰기가 공동체 활동과 동일한 자선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다는 이유로 반복적으로 비판을 받았다. 1693년경, 그녀는 공식적인 비난을 피하기 위해 글쓰기를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녀가 글쓰기를 포기했다는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녀가 참회에 동의했다는 문서가 있다. 그녀의 이름이 1694년에 그러한 문서에 적혀 있지만, 자필로 쓰인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참회서의 어조는 평소 그녀의 서정적인 스타일과는 대조적으로 수사적이고 독단적이다. 그중 하나에는 "Yo, la Peor de Todas / 나, 세상에서 가장 나쁜 여자"라고 서명되어 있다. 그래서 그녀는 소장하던 모든 책, 당시 4,000권이 넘는 방대한 서재와 악기 및 과학 기구를 모두 팔았다고 한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그녀가 교회에 반항한 결과 모든 책과 기구가 압수되었지만, 주교 자신은 그녀의 편지 내용에 동의했다고 한다. 100개가 넘는 미발표 작품 중에서 몇 점만 남아 있는데, 이를 ‘전집’이라고 한다. 노벨상 수상자인 Octavio Paz에 따르면 그녀의 글은 총독 부인에 의해 보존되었단다.

그녀는 고국 멕시코에서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인물이다. 그녀가 살았던 수도원은 현재 그녀의 이름을 딴 대학교가 되었고, 그녀를 소재로 한 영화와 수많은 희곡, 소설이 제작되었으며, 심지어 200페소 지폐에도 그녀의 모습이 담겨 있다. 영국에서는 비교적 덜 알려진 작가이지만, 소르 후아나의 삶을 바탕으로 한 연극 <사랑의 이단(The Heresy of Love)>이 런던 글로브 극장에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Helen Edmundson이 2012년에 쓴 이 작품은 기존의 신화를 더욱 확장하여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새로운 이야기 속에서 소르 후아나의 아름다움과 성적 매력은 그녀를 박해하는 핵심 요소가 된 것이다. 1680년대에 쓴 그녀의 시 중 하나인 <Hombres necios que acusáis(어리석은 남자들아)>는 스페인 신대륙 사회에서 남녀 관계의 위선에 대한 그녀의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다. 첫 번째 연에서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가 가르쳐준 결점을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전가하는 현실을 부당하다고 비난한다.

Hombres necios que acusáis

a la mujer sin razón,

sin ver que sois la ocasión

de lo mismo que culpáis:

(여자에게 죄를 전가하는 어리석은 남자들이여,

당신들이야말로 당신들이 비난하는 바로 그 일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군요.)

5연은 날카로운 신화적 은유를 통해 이 점을 분명히 강조합니다.

Queréis, con presunción necia,

hallar a la quebuscáis,

parapretida, Thais,

y en laposesión, Lucrecia.

(어리석은 오만함으로 당신은 그녀에게서

타이스를 찾으려 하지만,

그녀를 소유하고 나면 루크레티아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위의 시에서 타이스(Thais)는 Alexander 대왕의 여러 원정에 동행했던 성매매 여성이었고, 루크레티아(Lucrecia, 상세한 것은 금산삿의 다른 글 https://brunch.co.kr/@0306a641d711434/1092 참조)는 가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강간당한 후 자살한 로마 귀족 여성이었다. 본질적으로 그녀는 스페인 신대륙의 남성들이 여성에 대하여 갖고 있던 "길거리에서는 숙녀, 침대에서는 변태"라는 의식의 이중 잣대를 비난했다. 그녀의 비판은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급진적이었으며, 특히 영적인 문제에만 전념해야 했던 수녀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후아나는 급진적인 사상 때문에 교회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솔직함과 여성 권익 옹호에 대한 헌신으로 칭찬받기도 했다. 그녀의 삶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통찰 중 하나는 María Luisa Bemberg 감독, Assumpta Serna 주연의 1990년 영화 <나, 최악(Yo, la peor de todas)>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영화는 노벨상 수상자 옥타비오 파스가 마침내 발굴하여, 1988년 하버드 대학교 출판부에서 출간한 <소르 후아나 : 혹은 신앙의 함정(Sor Juana : Las Trampas de la Fe. 영화 내용은 https://youtu.be/Hya-GbDw7jU 참조)에서 발표한 광범위하고 획기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파스의 연구를 통해 소르 후아나의 삶, 특히 그녀의 지적·영적 갈등에 대한 오랫동안 감춰져 있던 세부 사항들이 드러났다. 제63회 아카데미 시상식 최우수 외국어 영화 부문 아르헨티나 출품작으로 선정된 이 영화는 당시 멕시코를 지배했던 반종교개혁과 종교재판의 비참하고 갈등적인 분위기를 능숙하게 표현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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