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2차 대전의 영웅 ‘하얀 쥐’ – 낸시 웨이크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60116)

by 금삿갓

낸시 그레이스 오거스타 웨이크(Nancy Grace Augusta Wake)는 마담 피오카(Madame Fiocca) 또는 낸시 피오카(Nancy Fiocca)로도 알려진 뉴질랜드 태생의 간호사이자 언론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했고, 이후 영국 특수작전국(SOE)과 영국 공군성 정보 장교로 근무했다. SOE의 공식 역사가인 마이클 풋(Michael Foot)은 "그녀의 억누를 수 없고 전염성 높은 기운은 그녀와 함께 일했던 모든 사람에게 기쁨을 주었다."라고 기록했다. 그녀의 제2차 세계대전 활동에 관한 많은 이야기는 그녀의 자서전인 <The White Mouse(하얀 쥐)>에서 나온 것이다. 1912년 8월 30일 뉴질랜드 웰링턴 로즈니스에서 태어난 웨이크는 6남매 중 막내였다. 그녀는 증조모인 포레와(Pourewa)를 통해 마오리(Maori)족 혈통을 이어받았는데, 포레와는 응가티 마항가(Ngati Mahanga) 부족 출신으로 추정되며, 유럽인과 결혼한 최초의 마오리 여성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그녀의 가족은 호주로 이주하여 북 시드니에 정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아버지 Charles Augustus Wake는 뉴질랜드로 돌아갔고, 어머니 Ella Wake가 아이들을 키웠다. 시드니에서 그녀는 North Sydney Household Arts학교에 다녔다. 16세에 그녀는 집을 나와 간호사로 일했다. 이모에게서 상속받은 200파운드(1928년 화폐)로 뉴욕으로 갔다가 다시 런던으로 가서 언론인으로서 훈련을 받았다. 1930년대에 그녀는 파리에서 일했고 나중에는 미국 신문사 허스트(Hearst)의 유럽 특파원으로 일했다. 그녀는 1933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를 인터뷰하기도 했고, 나치운동의 부상을 목격했다. 그런데 비엔나의 거리에서 나치 갱단이 유대인 남녀를 무작위로 구타하는 것을 보았고, 이때부터 반나치 활동을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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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낸시의 독립적인 정신과 아름다운 외모는 1937년에 마르세유 출신의 부유한 사업가 앙리 피오카(Henri Edmond Fiocca)의 눈길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금삿갓처럼 술을 즐겼던 그녀는 피오카와 함께 마르세유와 파리의 고급 호텔을 드나들며 호화로운 생활을 만끽했다. 그리고 1939년 11월 30일에 그와 결혼했다. 그녀는 독일이 침공했을 때 마르세유에 살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전쟁 중 웨이크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1940년 프랑스가 함락된 후, 그녀는 마르세유의 루브르 호텔에서 영국 장교 Ian Garrow 대위를 우연히 만나 레지스탕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녀는 추락한 조종사나 연합군 병사들이 독일군 포로가 되지 않도록 피레네 산맥을 통해 탈출시키는 네트워크에 합류했는데, 이 네트워크는 팻 오리어리(Pat O'Leary) 라인이었다. 게슈타포(Gestapo)는 탈출 연락책이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요원인 그녀의 뛰어난 능력 때문에 그녀에게 '하얀 쥐(The White Mouse)'라는 별명을 붙이고 500만 프랑의 현상금을 걸었다. 낸시가 탈출을 도운 사람 중 한 명은 유럽자동차 경주 ELMS의 초대 후원자이며, 영국 공군참모총장을 지낸 Lewis Hodges경도 있다. 1940년 12월경, 마르세유에 있는 그녀와 남편의 아파트는 연합군 탈출자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집이 부족하자 레지스탕스를 위해 아파트를 추가 구입했다. 레지스탕스는 또한 그곳을 무기, 탄약, 물자 보관소로도 사용했다. 낸시는 자신의 아파트를 거점으로 삼아 프랑스 남부 전역을 누비며 니스, 님, 툴롱, 칸, 마르세유에서 페르피냥과 피레네 산맥 국경 지역까지 탈주자들을 위한 소포를 배달하는 핵심 연락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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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는 또한 사복, 서류, 돈도 배달했다. 남편 앙리는 이 조직에 비밀리에 자금을 제공했다. 나중에 영국 장교 이언 개로우가 체포되었을 때 그의 탈옥을 도운 것도 낸시였다. 매우 위험한 생활을 하던 그녀는 필연적으로 체포되어 나흘 동안 심문 과정에서 심하게 구타당했지만,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아무도 배신하지 않았다. 이후 팻 오리어리(Pat O’Leary)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그는 프랑스 정부(政府) 고위 간부의 위조 신분증을 이용해 매우 위험하게 감옥으로 가서 최고 책임자의 면담을 요구했다. 그는 낸시가 자신의 정부(情婦)이며, 자신은 그녀의 애인이라고 설명했다. 낸시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남편에게 불륜을 숨기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덧붙였다. 그들은 그의 말을 완전히 수긍하고 피오카 부인 낸시를 석방했다. 낸시는 여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검문소나 기타 곤란한 상황을 능숙하게 헤쳐나갔다. 그녀는 대개 능글맞은 말솜씨로 위기를 모면하곤 했다. 한 번은 레지스탕스에 필요한 물자가 든 가방을 들고 가던 중, 게슈타포 장교가 자신을 멈춰 세우기 전에 먼저 윙크를 하고 '수색하고 싶으세요?'라고 말을 걸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여성스러움은 효과적이었고, 게슈타포 호위병과 나란히 이동하며 검문소를 무사히 통과했다. 낸시는 또한 냉혹하고 강인한 면도 있었으며, 프랑스어로 아주 거친 욕설을 구사할 수 있다는 평판을 얻었다.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충성심이 매우 강했던 그녀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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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와 마르세유에서 게슈타포가 자신을 추적하고 있다는 경고를 받자, 낸시는 서둘러 남편 앙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툴루즈에 있는 프랑수아즈 디사르(Francoise Dissart)의 은신처로 향했다. 피레네 산맥을 다섯 번이나 넘으려다 실패한 후, 그녀는 피레네 산맥을 넘으려던 연합군 탈출자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페르피냥으로 가던 중이었다. 그때 한 철도 직원이 뛰어들어와 독일군이 열차를 검문할 것이라고 알렸다. 낸시는 망설임 없이 기차 창문에서 뛰어내렸고, 탈출자들이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녀가 막 포도밭에 도착했을 때, 기차 안에서 총격이 시작되었다. 다시 연락망이 끊긴 것이다. 낸시는 보석과 신분증, 그리고 등산화를 핸드백에 넣어둔 채 기차에 두고 내렸다. 다행히 돈은 남아 있었고, 안내자들도 자취를 감췄으며, 오리어리(O’Leary)가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조종사 두 명을 데리고 니스의 생송(Sainson) 부인 은신처로 가는 기차에 올랐다. 생송 부인의 집은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녀의 집에는 항상 공군과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고, 한 번에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한 번은 집이 급습당했을 때, 그녀의 12살 딸은 침착하게 집에서 무선 송신기를 꺼내 쓰레기 상자에 넣어 게슈타포 요원들을 지나쳐 쓰레기 매립장으로 가져갔다. 낸시는 결국 탈출에 성공했고, 47시간에 걸친 고된 등반 끝에 피레네 산맥을 넘어 1943년 런던으로 돌아왔다. 앙리도 그녀를 뒤따라갈 예정이었지만 게슈타포에 붙잡혔다. 낸시가 안전한 곳으로 향하던 당시, 앙리는 마르세유에서 게슈타포에게 혹독한 심문을 받고 있었다. 낸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앙리는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아무것도 발설하지 않았고, 결국 현장에서 세상을 떠났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알지 못했고, 이후 그 일에 대해 자신을 탓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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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낸시는 특수작전국(SOE)의 초청을 받아 프랑스 작전 복귀를 위한 다양한 훈련을 받았다. 그녀는 그 훈련에 참여하면서 그것이 자기에게 맞지 않아 불평을 늘어놓았다. 은밀한 살해, 폭발물 사용, 낙하산 강하, 수류탄 투척, 안전장치 폭파, 이른 아침 달리기, 장거리 행군, 지도 읽기 등은 낸시에게는 버거운 훈련이었다. 그녀는 교관들과 여러 차례 언쟁을 벌이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아침 달리기 훈련에 많이 불참했음에도 불구하고 훈련 과정을 수료했다. 프랑스로 파견되는 요원들을 감독했던 SOE의 최고 여성 책임자였던 베라 앳킨스 (Vera Atkins)는 그녀를 "진정한 호주의 섹시녀(Bombshell)"라고 회상하며 "엄청난 활력과 번뜩이는 눈빛을 지녔다. 그녀는 하는 모든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라고 말했다. 한 번은 음주로 적발되어 훈련에서 퇴출당하고 제복을 반납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러나 이언 가로우의 도움과 그녀가 마르세유 아파트에 숨겨주었던 과거 탈영병 출신으로 현재 SOE 대령인 한 남자의 도움으로 그녀는 훈련에 복귀할 수 있었다. 훈련 보고서에는 그녀가 "매우 훌륭하고 빠른 사격수"였으며 뛰어난 야전 기술을 지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녀는 "쾌활한 정신과 강한 성격으로 남자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라고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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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4월 29일, 대위 계급을 달게 된 낸시는 무선 통신병인 Denis Rake와 함께 존 힌드 파머(John Hind Farmer, 코드명 "휴버트")가 이끄는 3인조 "프리랜서" 팀의 일원으로 프랑스 오베르뉴(Auvergne) 지방 몽뤼숑(Montlucon) 근처에 낙하산으로 투하되었다. 그녀는 지상에 착지(着地) 하지 못하고 나뭇가지에 걸려있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 앙리 타르디바(Henri Tardivat)는 나무에 얽혀 있는 웨이크를 발견하고 "올해 프랑스의 모든 나무에 이렇게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길 바랍니다."라고 말했단다. 그날 밤 그녀에게 주어진 장비 중에는 프랑스제 잠옷 두 벌과 화장품이 있었다. 그녀는 현장 생활을 하는 동안 매일 밤 잠옷으로 갈아입으려고 애썼다. 나중에 레지스탕스 마키(Maquis)와 함께 활동할 당시에는 자신에게 투하된 무기와 탄약 중에 실크 스타킹과 엘리자베스 아덴 페이스 크림이 들어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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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임무는 물자와 돈이 낙하산으로 투하되는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를 수집하고, 개별 병사에게 급여를 지급하는 것을 포함하여 물자를 분배하는 것이었다. 낸시는 연합군의 프랑스 침공(6월 6일) 전에 레지스탕스들이 파괴해야 할 목표 목록을 가지고 다녔다. 프랑스 전역의 통신선과 기타 시설을 파괴하면 독일군의 침공 대응을 방해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협력하고 그들을 지휘하며, 노르망디 상륙작전(D-Day)을 앞두고 최대한 많은 문제를 일으켜 독일군을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프랑스군이 그녀와 협력하려 하지 않았고, 그녀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는 돈만 요구했다. 여러 차례의 회의와 술자리 끝에, 낸시는 그들보다 술을 훨씬 잘 마신다는 것을 증명했고, 결국 자신이 낙하산 부대 지휘관이며, 대원들이 임무 수행 능력을 증명하고, 규율을 갖추고, 전략과 계획을 세울 때에만 무기와 급여를 지급하겠다고 통보했다. 그녀는 돈이 가득 든 핸드백과 권총 한 자루만 들고 도착했고, 한 달 후 오베르뉴 레지스탕스의 지도자가 되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오베르뉴 레지스탕스만큼 독일군에게 골칫거리를 안겨준 곳은 없었다. 낸시는 최전선에서 매복, 사보타주, 습격 작전에 직접 참여하며 지휘했다. 한 번은 그녀의 진지가 독일군의 공격을 받았는데, 공격 목적은 쇼드에그(Chaudes-Aigues) 위의 고원에 있는 레지스탕스 기지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22,000명이 넘는 독일군이 포병, 야포, 전투기, 기관총과 박격포를 포함한 중화기의 지원을 받으며 그 지역에 집결해 있었다. 레지스탕스는 포위되었고, 모든 그룹 지도자들이 급히 회의를 소집했다. 레지스탕스는 죽을 때까지 싸우고 싶어 했지만, 낸시의 설득으로 훗날을 위해 철수 작전을 펼쳐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500명에 불과한 병력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무장도 미약했기에, 중화기, 장갑차, 항공기의 지원을 받는 노련한 독일군과 정면 승부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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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전투 동안 낸시는 각 전선과 레지스탕스를 방문하여 탄약을 보급하고 그들을 격려했다. 그녀의 무전병인 데니스 레이크는 런던과 통신을 연결하여 낸시에게 모든 병력이 어둠을 틈타 전투 철수를 해야 한다고 알렸다. 런던에 있는 자유 프랑스군 소속의 쾨니히(Konig) 장군으로부터 명령이 내려왔다. 그녀는 즉시 모든 전선과 진지를 방문하여 명령을 전달했다. 메시지를 전달하는 동안 여러 차례 적기의 공격을 받았다. 한 번은 적기 두 대가 저공비행을 하자 차에서 내려 도랑에 몸을 숨겼다. 차에는 총탄 자국이 가득했다. 프랑스군은 도망치려 했지만 난시가 그들을 붙잡았다. 그녀는 차로 달려가 문을 벌컥 열고 소포 하나를 움켜쥐었다. 바로 그때 적기가 다시 공격해 왔다. 그녀가 프랑스군에게 돌아오자 차는 불길에 휩싸였다. "이게 필요했어요." 그녀는 말하며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얼굴 크림, 붉은색 새틴 쿠션, 차, 그리고 다른 개인 물품들이 들어 있었다. 프랑스군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 없었고, 그녀를 완전히 미쳤다고 생각했다. 전쟁의 치열한 와중에도 여자의 아름다음을 지키려는 본성은 변함이 없었다. 레지스탕스는 힘겨운 철수 작전을 벌였고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전사자 107명과 부상자 숫자도 그 정도로 발생했다. 레지스탕스가 철수할 수 있었던 것은 낸시의 치밀한 계획과 적과의 모든 교전 지점에 탈출로를 확보해야 한다는 그녀의 확고한 신념 덕분이었다. 반면에 독일군은 14,000명의 전사자를 냈다. 모든 전선에서 적군은 포위망에 갇힌 채 섬멸되었고, 레지스탕스는 각 전투 후 즉시 철수했다. 고원(高原)에서 필사적으로 철수하는 동안 무전병 데니스 레이크는 무전 암호를 파괴하고 무전기를 땅에 묻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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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더 이상 런던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 지역에서 무전병을 찾을 수 없었던 낸시는 레이크의 연락책 중 한 명을 찾기 위해 샤토루(Chateauroux)까지 자전거를 타고 가기로 했다. 그녀는 72시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500km가 넘는 거리를 달려 무전병을 찾아 런던에 보고했다. 비록 노숙 생활을 했지만, 낸시는 매일 옷을 단정하고 깨끗하게 입어 혹시라도 검문을 당했을 때 짧은 거리를 자전거로 이동한 것처럼 보이도록 했다. 그녀는 화장품도 가지고 있었고, 자전거 핸들에는 끈으로 된 쇼핑백을 메고 있었다. 마라톤과 같은 장거리 자전거 라이딩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걸을 수도, 자전거에서 내릴 수도 없을 지경이었단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레지스탕스는 독일군 시설, 철도 교차로, 전화 통신망 등 여러 목표물을 대상으로 수많은 습격과 사보타주 공격을 감행했다. 폭발물 사용에 능숙한 스페인 대원들이 합류하면서 주요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도 폭파했다. 스페인 측은 낸시에게 운전사와 경호원을 제공했다. 그들이 선택한 목표물 중 하나는 레지스탕스와 지역 주민들에게 특히 골칫거리였던 몽뤼숑의 게슈타포 본부였다. 낸시는 습격 시각을 12시 25분으로 정했다. 독일군의 정확한 시간 엄수 덕분에 게슈타포는 12시 30분에 식사를 위해 모일 예정이었다. 12시 25분, 낸시는 프랑스, 스페인 대원들과 함께 차량 네 대에서 뛰어내려 건물 안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위층과 아래층 모두에서 수류탄과 기관총 사격으로 각 방을 샅샅이 뒤졌고, 30초 만에 다시 차량에 올라타고 빠져나왔단다. 38명의 게슈타포가 사살되었다. 그 단시에 게슈타포 대원들이 세 명의 소녀를 매춘부로 부려 학대하는 것을 발견했단다. 그녀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을 압박하여 소녀들을 풀어주게 했고, 그들에게 씻겨주고 새 옷을 입혀주었다. 낸시는 두 명의 소녀를 풀어주었지만, 세 번째 소녀가 독일 스파이일 거라고 의심했다. 그녀를 심문하고 정체를 밝힌 후, 그녀는 레지스탕스 대원들에게 스파이를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차마 그녀를 냉혈 하게 죽일 수 없었지만, 그녀가 직접 처형하겠다고 고집하자 결국 굴복했다. 낸시는 스파이 소녀가 총살형 집행을 앞두고 자신 앞에서 침을 뱉고 옷을 벗었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또한 습격 중에 경보를 울리지 못하도록 맨손으로 SS 경비병을 죽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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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9월 말, 낸시와 그녀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에게 전쟁은 사실상 끝났다. '하얀 쥐'라는 별명을 가진 낸시는 자신이 지휘했던 8,240명의 대원들(18개 그룹)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다. 많은 대원들이 연합군에 합류하여 전투에 참여할 기회를 제안받았고, 그렇지 않은 대원들은 자유롭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낸시는 남편 앙리의 유산을 정리하기 위해 마르세유로 돌아갔다. 유산의 대부분은 게슈타포에 의해 약탈당했는데, 값비싼 가구들도 모두 도난당했다. 그 아파트는 마르세유 게슈타포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사용하던 곳이었다. 500만 프랑이 넘는 배상금을 약속받았지만, 낸시는 70파운드 말고는 거의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유럽 전승일 직후, 낸시는 팻 오리어리(O’Leary)가 다하우(Dachau) 수용소에서 파리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감옥과 강제 수용소에서 심한 고문과 학대를 당했다. 낸시는 파리에서 그를 만나 거의 한 달 동안 간호하여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다. 그리고 마르세유로 돌아갔다. 낸시는 1940년에 저항 운동에 참여했고 1944년에도 여전히 그곳에 있었기에, 그곳 사람들을 잘 알고 그들의 생각과 슬픔을 함께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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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로 돌아온 낸시는 오리어리와 함께 포상국(褒賞局)에서 일하며, 레지스탕스를 배신했던 인물과 오리어리 자신이 낸시가 속한 레지스탕스 조직에 의해 밀고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후 외무부에서 일하면서 낸시는 옛 레지스탕스 동료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다. 어느 날 파리의 한 호텔 바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 바텐더가 갑자기 바를 나와 낸시에게 달려와 키스를 했다. 매니저가 바텐더에게 왜 낸시의 이름을 잘못 부르고, 왜 손님에게 키스를 하냐고 질책하자, 바텐더는 흥분해서 "이분은 앙드레 부인입니다. 저와 함께 레지스탕스 활동을 하셨고, 비시(Vichy) 정권을 해방시키셨습니다."라고 설명했다. 낸시 웨이크 1949년 외무부를 떠나 호주행 배에서 간호사로 일하며 여비를 마련했다. 호주에 도착해서는 정계 진출을 시도했다. 그녀는 1949년과 1951년 호주 연방 선거에서 시드니 바턴 지역구의 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벤 치플리 노동당 후보에게 두 번 다 패배했다. 그래서 그해에 런던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후 영국 정보부에서 근무하다가 1957년 전직 전투기 조종사 존 포워드(John Forward)와 결혼하고 다시 호주로 이주했다. 1966년 다시 선거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전시에는 능했으나 평시에는 좌절했다. 1997년 8월에 포워드가 사망하자 낸시는 2001년 다시 런던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당시 프랑스 남부 출신의 레지스탕스 동료였던 루이 부르데가(Louis Burdet) 소유한 스태퍼드 호텔에서 자주 볼 수 있었다. 바 끝자락에 있는 가죽 의자에 앉아 진토닉을 마시곤 했다. 낸시 웨이크는 평화로운 세상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말년에는 스타 앤 가터(Star & Garter)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겼다. 영국 연금을 받을 자격이 없었던 그녀는 평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갔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훈장을 팔았다고 하는데, 훈장을 팔면서 "내가 죽으면 지옥에 갈 텐데, 어차피 훈장들은 녹아 없어질 거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전쟁 직후 그녀는 George Medal(조지 6세 왕 때 제정된 메달), 미국 자유 메달, 레지스탕스 메달, 그리고 3번이나 전쟁십자훈장을 받는 등 2차 대전에서 여성으로서 최고, 최다의 훈포장을 받았다. 1985년에 웨이크는 자서전 <하얀 쥐(The White Mouse)>를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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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전쟁 중 영국군과 미군의 클럽이었던 Piccadilly의 세인트 제임스 플레이스(St James Place)에 았던 Stafford호텔에 거주하였다. 그녀는 당시 총지배인이었던 루이 부르데(Louis Burdet)를 통해 그곳에서 처음으로 "정말 맛있는 술"을 접하게 되었단다. 그 역시 마르세유에서 같이 레지스탕스 활동을 했다. 그녀는 아침이면 보통 호텔 바에서 하루 첫 진토닉을 마시며 전쟁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녀는 호텔에서 환영받았고, 그곳에서 90번째 생일을 축하했다. 호텔 주인은 그녀의 숙박비용 대부분을 부담했다. 2003년, 그녀는 런던 리치먼드에 있는 장애 전역 군인을 위한 왕립 스타 앤 가터 홈으로 이사하기로 결정했고, 그곳에서 사망할 때까지 머물렀다. 그녀는 2011년 8월 7일, 98세의 나이로 흉부 감염으로 입원한 킹스턴 병원에서 사망했다. “내가 죽으면 내 유골을 내가 용감한 동료들과 싸웠던 몽뤼숑 언덕에 뿌려주길 바란다.”라고 유언했다. 그녀는 1970년에 레지옹 도뇌르 기사 작위를 받았고, 1988년에 레지옹 도뇌르 장교로 승진했다. 2004년 2월, 그녀는 호주 훈장 동반자(Companion of the Order of Australia)로 임명되었다. 2006년 4월에는 뉴질랜드 왕립 귀환 및 복무 협회(Royal New Zealand Returned and Services' Association)의 최고 영예인 금색 RSA 배지를 수여받는 등 다수의 훈포장을 받았다. 소행성 17038 웨이크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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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유해는 소수의 가까운 친구들만 참석한 가운데 비공개로 화장되었다. 관 위에는 친구들이 정성 들여 흰 설탕으로 만든 쥐 세 마리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장례식은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악인 'Le Chant Des Partisans(파르티잔의 찬가)'와 에뛰드 삐아프(Edith Piaf)의 'Non, je ne regrette rien(아뇨, 난 후회하지 않아요)'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후 많은 친구들과 동료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기리고 그녀의 삶을 추모하는 기념식이 열렸다. 낸시와 함께 훈련받고 SOE 작전에 참여해 프랑스에 잠입했던 오랜 친구 소냐 다르투아(Sonya d’Artois)는 낸시를 "매우 여성스럽지만 어떤 남자 못지않게 강인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또 다른 레지스탕스 동료는 그녀를 "전투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내가 아는 가장 여성스러운 여성이지만, 전투가 시작되면 다섯 명의 남자처럼 변한다."라고 평했다. 또 다른 레지스탕스 참전 용사는 "낸시가 독일군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나를 두렵게 했다!"라고 말했다. 그녀의 자서전에서 자유가 소중하고 꼭 지켜야 할 가치라고 설파했다. "저는 전체주의 국가가 가져올 수 있는 공포를 이미 알고 있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선포되기 훨씬 전부터 자유세계는 어떠한 형태의 침략에도 맞서 스스로를 방어해야만 자유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정말 대단한 여성이었다. 오늘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도 역시 자유는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자유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지켜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 우리 자신의 자유 일부를 희생해야 할지라도 말이다. 자유는 언제나 위험에 처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승리는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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