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8년 우리 조선은 힘없는 명종(明宗)이 왕대비(王大妃)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섭정에서 풀려났지만, 윤원형(尹元衡)·정난정(鄭蘭貞)의 권세에 휘둘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 여파로 다음 해에 임꺽정(林巨正)의 난(亂)이 일어났다. 반면 서양에서는 오스만제국이 스페인의 마요르카섬 쪽을 공격하고,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가 25세의 나이로 여왕에 즉위한다. 그녀는 여왕이 되지 못할 상황이었다. 큰 키의 날씬한 몸매에 위엄에 가득 찬 엘리자베스 1세는 헨리(Henry) 8세와 두 번째 왕비인 앤 불린(Anne Boleyn) 사이에서 태어났다. 앤은 첫 번째 왕비인 캐서린(Catherine)의 시녀였는데, 왕비가 되고자 헨리 8세에게 요염하게 들이대서 유혹했다. 그녀는 얼굴도 예쁘고 머리도 좋아 프랑스 유학도 갔다 왔으며, 5개 국어를 좔좔했다. 헨리 8세는 앤에게 자신의 정부(情婦)가 되어 달라고 했으나 앤은 당대의 여느 귀족 여인들과 달리 당돌하게 왕을 거부하고, 몸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교묘하게 그의 애정과 욕망을 부채질해 가며 애만 태운다. 프랑스에는 우리의 후궁(後宮) 같은 공식 정부인 '메트레상 티트르(Maîtresse-en-titre)'라는 지위가 있다. 헨리 8세는 영국 궁정에는 전례가 없지만 그러한 지위까지 앤에게 약속했으나 앤은 코웃음 치며 오로지 정식 결혼해야 몸을 주겠다고 버틴다. 법적으로 헨리 8세는 연상의 형수와 결혼했기에 로마교황청과 몇 년간의 이혼 소송을 하다가 안 되니까 아예 교황청에서 탈퇴하고 이혼한다. 그리고 드디어 앤과 골인한다. 앤은 엘리자베스가 3살 때인 1536년 5월 19일 참수당했다. 5명의 남자와 불륜(不倫)을 저지르고, 국왕 시해를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헨리 8세가 참수를 지시했다. 이어,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로 취급받았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에게 교육을 잘 시켰고, 그녀는 영특하였다. 그녀는 라틴어·프랑스어·그리스어·에스파냐어·이탈리아어·웨일스어를 자유롭게 쓰고 읽고 대화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철학과 역사에 관심이 많아서 매일 역사책을 읽었다.
마누라를 갈아치우기 위해 국교를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변경하면서 까지 여자를 밝힌 헨리 8세는 결국 왕비를 6명이나 갈았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에게는 왕권이 돌아올 기회가 없는 듯 보였다. 헨리 8세의 뒤를 이을 배다른 남동생 에드워드(Edward)가 있었기 때문이다. 앤의 시녀였다가 그녀가 처형된 지 11일 만에 왕의 세 번째 부인이 된 제인 시모어(Jane Seymour)가 낳은 아들이다. 그런데 병약한 에드워드가 취임 6년 만에 열여섯 살이 되기도 전에 죽어버린다. 이번에는 배다른 언니 메리(Mary)가 여왕이 된다. 메리는 첫 왕비 캐서린의 딸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불행과 아버지의 영국식 종교개혁에 대한 반감이 있었는지 신교도를 마구 탄압해 '블러디 메리(Bloody Mary, 피의 메리)'라 불렸다. 더욱이 메리는 엘리자베스가 신교를 믿는 게 아닌지 의심해서 석 달간 런던탑에 가둬버린 적도 있었다. 당시 어린 엘리자베스는 토머스 시모어 경(Sir Thomas Seymour )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토마스 시모어가 몰락했을 때, 그와 엘리자베스의 측근들이 심문을 받았는데, 그중 한 명이 엘리자베스의 가정교사 캣 애슐리(Kat Ashley)였다. 애슐리는 토머스가 엘리자베스에게 부적절한 방식으로 추파를 던졌다고 진술했습니다. 토머스가 엘리자베스를 껴안고 간지럽히는 등 진한 손놀림을 하기도 하고, 두 사람이 포옹하는 모습을 목격하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서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풀려나는데, 정쟁에 휘말려들지 않으려 시골에 콕 박혀 지낸다. 메리 1세는 1554년에 스페인 국왕 펠리페(Felipe) 2세와 결혼했으나 후세가 없이 재위 5년 만에 사망하자 엘리자베스에게 대권의 기회가 굴러 들어온 것이다. 인내심으로 기다린 보람이 있듯이 그녀는 오른손 넷째 손가락에는 백성들과의 결합을 상징하는 반지를 꼈고, 머리에는 셰익스피어가 말한 것처럼 왕관의 무게를 견딜 자만이 쓸 수 있는 2.23Kg짜리 온갖 보석이 장식된 최고의 모자를 썼을 것이다. 어렵사리 왕좌에 앉은 엘리자베스 1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이에 그녀가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아간 이유를 알아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업적과 삶은 당시 시대 상황에서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여기서는 그걸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 아니니까 간단하게 정리하고 생략한다. 그녀는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하여 대서양의 지배권을 확보했고, 아버지가 추진한 개신교인 성공회를 확립하여 영국의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정치적 업적 이외에 무엇보다도 결혼하지 않은 파격적인 결정으로 "처녀 여왕(The Virgin Queen)"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결혼하지 않은 유일한 영국 여왕이다. 당시 여왕은 결혼을 통해 동맹을 맺고 후계자인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관습에 비추어 볼 때,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매우 혁신적인 결정이었다. 더욱이, 그녀의 이러한 결정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으며, 여왕으로서 생존을 위한 치밀한 전략이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1558년 25세의 한창 무르익은 꽃다운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녀가 물려받은 당시 영국은 종교적 갈등으로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고, 정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아버지 헨리 8세와 이복형제들의 격동적인 통치로 갈등이 깊은 나라였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할 때, 결혼이 어쩌면 엘리자베스에게 우군이나 동지를 만들어 우타리가 되어 주는 버팀목이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누구의 손도 잡지 않고 홀로 통치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나는 이곳에 단 한 명의 정부(情夫, Mistress)만 둘 것이고, 주인(Master)은 두지 않겠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인생을 즐기는 상대는 두더라도 권리를 주장하는 남편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이 되자, 그녀의 고문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녀에게 적합한 남편감을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의 과거 연애사는 그녀가 남편을 선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엘리자베스 여왕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며 깊이 사랑했던 단 한 사람,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가 있었다. 더들리 가문은 궁정에서 총애를 받는 가문이었지만, 언니 메리 1세의 즉위 이전에 제인 그레이(Lady Jane Grey)의 권력 장악에 관여하면서 궁정의 눈 밖에 나게 되었다. 1550년, 로버트 더들리는 엘리자베스가 자신과 결혼하지 않을 것을 깨닫고 에이미 롭사트(Amy Robsart)와 먼저 결혼했다. 그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영국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결혼이라는 결단을 내릴 수 없어서 엘리자베스는 무척 화가 났다. 엘리자베스와 로버트 사이에는 언제나 묘한 끌림이 있었다. 로버트는 엘리자베스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그녀가 전적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를 곁에 두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그 시작은 그를 자신의 마구간지기(Master of Horse)로 임명하면서부터였다. 이 직책은 그를 엘리자베스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두게 해 주었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그를 추밀원 의원, 왕실 시종장(Lord Stewart of the Royal Household), 그리고 마침내 레스터 백작(Earl of Leicester)으로 임명하며 그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오랫동안 로버트 더들리에게 자신이 그녀의 구혼자로 유력하며, 결혼은 그의 지위를 크게 높여줄 것이라는 희망을 심어주었다. 엘리자베스가 로버트를 레스터 백작으로 임명한 것은 그를 사촌인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Mary)와 결혼시키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이는 엘리자베스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인 로버트를 통해 사촌을 만족시키고, 조종하려는 수단이었다. 로버트는 엘리자베스를 향한 사랑 때문에 결혼을 반대했다. 그토록 깊은 사랑을 가진 자신을 엘리자베스가 어떻게 그렇게 정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단 말인가? 엘리자베스는 결혼이 동맹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결혼하려면 영국에 이익이 되어야 했다. 로버트 더들리와 결혼하는 것은 영국에 이익이 되지 않고 그에게만 이익이 될 뿐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로버트와 결혼하면 나라가 분열될 뿐이었고, 게다가 그는 이미 기혼자였다. 당시에는 로버트가 아내 에이미가 죽으면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것이라는 추측이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1560년 9월 8일, 에이미 롭사트는 저택의 계단 아래에서 목이 부러진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로버트 더들리가 즉시 용의자로 지목되었지만, 당시 윈저 성에서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있었던 것으로 밝혀져 무죄로 판명되었다. 사인(死因)은 사고사로 밝혀졌지만, 로버트와 엘리자베스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았다. 너무나도 절묘한 우연이었다. 엘리자베스가 로버트와 결혼하려면 에이미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존재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가 로버트 더들리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여왕의 청혼을 영원히 기다려주지는 않았다. 로버트는 에이미가 사망한 후 18년 동안 미혼으로 지내다가 마침내 1578년, 그는 엘리자베스의 사촌인 레티스 놀리스(Lettice Knollys)와 재혼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 그것도 아름다운 사촌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는 사실에 크게 상심했다.
로버트는 1588년 9월 4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엘리자베스는 사랑하던 절친한 친구의 죽음에 깊은 슬픔에 잠겨 며칠 동안 자신의 방에 틀어박혔는데, 결국 버글리 경(Lord Burghley)이 문을 부수고 들어왔을 때 밖으로 나왔다. 엘리자베스는 로버트 더들리가 죽기 전에 쓴 마지막 편지를 침대 옆 보물 상자에 보관했는데, 10여 년 후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도 그 편지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바람기 많은 아버지 헨리 8세, 형부였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어릴 적 남자 토머스 시모어, 사랑했던 로버트 더들리 등의 남성들과 맺었던 모든 관계가 그녀의 결혼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어릴 적 삶에서 결혼이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목격했고, 자신에게는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각한 고민 끝에 그녀는 1559년 첫 의회 연설에서 독신으로 남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녀는 로버트 더들리에게 진심으로 관심이 있었지만, 그의 아내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비롯한 정치적 장애물 때문에 결혼은 불가능했다. 그녀는 정치적인 이유로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앙주(Anjou) 공작 프랑수아(Francis) 같은 구혼자들을 이용했지만, 결국 협상을 중단했다.
그녀가 결혼을 포기한 첫 번째의 이유는 정치적, 전략적 힘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16세기 여성에게 결혼은 거의 예외 없이 권위와 권한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다. 당시 여성의 재산과 신분은 결혼과 동시에 법적으로 남편에게 넘어갔다. 남편, 특히 외국 왕자라면 왕위에 대한 영향력을 이용해 당시 영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외교 정책에 영국을 끌어들이려 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버지의 첫 부인 캐더린의 지참금 문제, 캐더린이 낳은 이복언니 메리가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했을 때 이러한 일을 직접 목격했다. 당시 그 두 번의 결혼은 국민들에게 큰 반감을 샀다. 심지어 1111년 스페인에서는 부부사이인 레온·카스티야 여왕 Dona Urraca 1세와 아라곤·나바라 왕 Alifonso 1세가 왕위와 영토를 걸고 치열하게 전쟁을 벌인 일도 있었다. 그녀는 또한 파벌 싸움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외국인과 결혼하는 것은 개신교 신민들에게 인기가 없을뿐더러 영국을 다른 강대국의 위성 국가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었다. 반면 영국인과 결혼하는 것은 다른 유력 귀족 가문들 사이의 질투와 내전을 초래할 수도 있었다. 그녀는 남편과 권력을 공유하면 남편이 자신의 통치를 지배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독신으로 남음으로써 절대적인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한 미혼이라는 그녀의 지위는 다른 나라들이 결혼을 통한 동맹을 기대하게 만들었고, 이는 협상에서 그녀에게 막대한 협상력을 부여했다. 그녀는 여러 외국 왕자들과의 결혼 가능성을 제시하며 동맹을 구축하고 경쟁국들이 영국에 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녀의 독신 유지 결정은 번영하고 비교적 안정된 "엘리자베스 시대" 또는 "황금시대"를 여는 길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이유는 개인적, 심리적인 트라우마(Trauma)에 기인될 것이다. 그녀의 어린 시절 경험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 헨리 8세는 엄청난 바람둥이로 잦은 결혼과 아내들에 대한 잔혹한 처우로 악명이 높았다. 첫 부인과 이혼하기 위해 국교(國敎)까지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바꾸었다. 그는 6명의 왕비 중 2명을 참수형으로 처형하고, 2명은 이혼으로 버리고, 1명은 출산하다가 죽고, 마지만 부인도 그가 사망한 다음 해에 36살로 죽었다. 어머니 앤 불린은 엘리자베스가 겨우 두 살 때 간통과 반역죄의 명목으로 처형당했다. 엘리자베스의 어린 눈에는 결혼이 결코 신뢰·친밀감·안전을 보장해 주는 제도가 아님을 몸소 겪었다. 또한 16세기에는 여성의 임신과 출산이 극도로 위험하여 공포로 여겨질 수 있으며, 여왕을 잃는 것은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었다. 그래서 차라리 결혼을 포기하고, 자신의 좋은 이미지를 만드는데 미혼이라는 타이틀을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처녀 여왕'이라는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오로지 백성만을 위해 헌신하는 이타적인 통치자라는 이미지를 구축했고, 이는 그녀의 인기를 크게 높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결혼을 거부함으로써 개인적인 행복을 희생하고 국가의 안정을 택했으며, 나라에 헌신적인 군주로서 "영국과 결혼한" 듯한 이미지를 굳혔다. 그녀는 "나는 처녀로 살다가 처녀로 죽었다."라고 새겨진 대리석 비석을 남기고 싶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마치 성모 마리아의 동정녀(童貞女) 이미지를 차용하듯이 말이다. 미국의 버지니아 주가 처녀여왕의 명칭을 따서 지은 것이다.
엘리자베스 1세는 미혼으로 자녀 없이 사망함으로 인해 할아버지 헨리 7세가 창건한 튜더(Tudor) 왕조가 끝나고, 스튜어트 왕조로 넘어가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누대에 걸쳐 빈한한 귀족으로 내려오던 집안을 30년간의 장미전쟁으로 일으켜 요크 왕조 제4대 국왕 리처드 3세를 죽이고 자신의 왕조를 건설했지만 118년 동안 존속하고 끝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치세를 의미하는 엘리자베스 시대(Elizabethan era)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이 이끈 잉글랜드 희곡의 번영기였다. 해적이었던 프랜시스 드레이크를 기용하여 스페인 제국의 무적함대를 완전히 격파하는 위용을 떨치던 시대였다. 그밖에 동인도회사 설립 등 여러 치적을 남겨 훗날 잉글랜드가 대영제국으로 발돋움하는 기반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근대 초기 영국의 대국화 초석을 만든 큰 인물이라는 사실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170cm가 넘는 큰 키로 남성 귀족들을 압도하고, 아버지를 닮은 불같은 성질로 여왕으로서 위엄도 높았단다. 말년에 폴란드 대사가 방문하여 엘리자베스의 어전에서 무례하게도 의전을 무시하고 라틴어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라틴어를 모를 줄 알고, 감히 여왕에게 있을 수 없는 표정과 태도에 마구 짓거리자 여왕은 즉시 옥좌를 박차고 일어나 유창한 라틴어로 대사의 무례함을 꾸짖었다고 한다. BBC가 선정한 역사상 위대한 영국인 중 7위에 올랐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