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乾隆) 말년 즉 1,775년 말에 광저우(廣州)에 석씨(石氏) 성을 가진 여자 아이가 태어났다. 이름을 석양(石陽)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별명은 향고(香姑)로 불리기도 했다는데 확실한 본명은 밝혀지지 않았다. 천민인 단족(疍族)의 일원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불행히도 홍등가로 팔려가게 되었다. 이 지역 대부분의 천민인 단족(疍族)들은 광저우·해남도(海南島) 등을 근거로 육지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수상생활을 하는 민족이다. 이들은 배에서 생활하며, 어업·수송·무역 등을 수행하며 살았는데, 중국이 해금(海禁) 정책으로 무역을 봉쇄하자 생활이 많이 힘들어졌다. 단족(疍族)은 남녀를 불문하고 출신이 천하기 때문에 대부분 여자는 창녀로, 남자는 선원이나 해적으로 진출하는 운명이었다. 육지에 정착할 수도 없고, 학문은 물론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으며, 육지 사람들과 결혼하기도 어려웠다. 육지에 오르지 못하니 토지를 소유할 수 없고, 농사를 지어 생계를 꾸릴 길이 막혀있었다. 그녀도 대부분 집안의 딸들처럼 육체적인 삶에서 나날이 고생이었다. 그러다가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여인으로 전락한 그녀의 운명은 아무도 몰랐다. 배에다 몸을 싣고 운하 사이를 떠돌면서 외국 상선의 선원들이나 일꾼, 어부 등을 상대로 웃음과 몸을 파는 그녀는 그 당시 얼굴과 몸매가 남들보다 뛰어나서 모든 화류계 여성보다 돋보였다. 또한 천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는 능력도 뛰어나고 다양한 화술과 들은 풍월로 남자들을 쥐고 흔들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그러다가 해적들 사이에 그녀의 이름이 제법 알려지게 되었다. 해적들도 마찬가지로 배를 집으로 삼고 평소에는 어업·진주 채취·운송으로 생계를 이어오면서 북쪽으로는 저장성, 남쪽으로는 베트남 유역에 까지 활동했다.
단족(疍族)은 베트남과 얽히고설킨 관계가 있으며, 단(疍) 자(字)는 고대 베트남어에서 진화한 말로소 "정(艇, 배)" 또는 "소주(小舟, 작은 배)"를 의미한다. <수서(隋書)·남만전(南蠻傳)>은 이들을 단(蜒)·양(禳)·리(俚)·료(獠)·이(狏) 종족 등으로 분류했는데, 그 중 단(蜒) 족은 단(疍)을 가리킨다. 북송의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단족(疍族)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청 시대에 단(疍) 족은 한족, 신장 남부 소수 민족, 심지어 탄족(掸族), 말레이족과 같은 일부 남양 원주민들이 융합하여 큰 집단이 되었다. 1790년 대 쯤에 이 지역의 해상권은 이름이 정일(鄭一) 또는 정의(鄭義)라고도 알려진 해적과 그의 사촌 동생 정칠(鄭七) 두 사람이 주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베트남에서 저장성 까지 오가며 해상의 모든 권한을 장악한 것이다. 정일의 선조는 대만의 건국자 정성공(鄭成功)의 부하였다고 한다. 정성공은 명나라 말에 복건성 일대의 해상을 장악하던 인물로, 청나라 군대가 밀려오자 대만을 정벌해 대항한 인물이다. 정성공이 죽은 후 부하 정건이 남지나해의 정크선들을 모아 해적단을 꾸렸고, 그 후손이 몇 대를 내려와 정일로 이어졌다고 한다. 사실 베트남은 남중국해 해적 발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 천대받던 단족(疍) 백성이 군중을 모아 해적이 된 일부터 시작되었다, 명나라 중엽 이래로 단(疍) 백성이 바다로 나가 약탈한 일은 자주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만력(萬曆(1563~1572) 연간에 왕림형(王臨亨)의 <월검편(粤劍編)>과 명말 청초 굴대균(屈大均)의 <광동신어(廣東新語)>에서 언급했듯이, 해양 약탈은 여러 차례 단(疍) 족들이 약탈했기 때문에 해남 해적은 모두 단(疍) 족으로 불렸다. 이들 해적의 활동 범위는 주로 저장(浙江)성, 푸젠(福建)성, 광둥(廣東)성 동해 지역, 특히 광둥성 서부 해안, 주장구(珠江口) 서안에서 북부 만까지의 긴 해안선, 섬과 항구 들이었다. 이곳은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대한 남중국해의 해상 교통 관문이었다. 해적들은 나가면 끝없이 펼쳐진 남중국해를 장악하고, 들어가면 섬이나 내륙의 밀림 속에 숨어 살았다. 육지에서 약탈할 때마다 각지의 관청은 종종 방어를 하지 못했다. 청나라 건가(乾嘉, 건륭제와 가경제 1735~1820) 시기에 이르러, 베트남 농민 봉기 출신인 서산조(西山朝) 떠이썬 왕조의 완광평(阮光平) 정권은 수군 병력과 물자가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에, 이들 해적에게 관직을 봉하고 계급을 주는 수단을 통해 남중국해 해적을 육성하여 자신의 용도로 사용했다.
해적 정일(鄭一)과 그의 족제(族弟) 정칠(鄭七)은 모두 서산조 정권의 관직을 역임했다. 이렇게 해적이 중국에서는 대접을 못 받아도 베트남에서는 쿠데타 정권의 원병으로서 직위를 받는 등 그 힘과 역할이 대단할 때였다. 그런 해적의 두목인 정일(鄭一)이 고향으로 왔다가 몸을 파는 꽃다운 여인 즉 석양(石陽)을 만나게 된 것이다. 둘은 한 눈에 서로 반해서 1801년에 선상에서 바로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되었다. 그녀는 결혼을 하면서 이름을 청석(靑石) 또는 청시(清施)로 바꾸고, 부하들은 그녀를 부를 때 정일형수(鄭一兄嫂) 또는 정일수(鄭一嫂)라고 불렀다. 즉 정일 형님의 형수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정일형수와 정일수로 혼용한다. 정일은 고향에서 결혼해서 신혼이 단꿈을 보내고 있을 때, 동생 정칠은 계속 베트남 인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1802년에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가 되는 응우엔(阮家) 왕조의 응우엔아인(阮暎)이 서산조(西山朝)의 완광평(阮光平) 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이러 와중에 해적의 부두목 격인 정칠이 새로운 왕조에 포로로 잡혀 죽었다. 전 왕조에 대한 보복의 차원이었다. 해적들이 동요되어 서로 갈등이 생겼을 때 정일과 그녀가 힘을 합쳐 잘 해결하고 모든 함대는 정일의 통제 하에 놓였다. 정일은 1798년에 육지에서 건장하고 똘똘한 15살 난 사내아이를 한명 유괴해 와서 양아들로 키우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장보(張保) 또는 장보자(張保仔)였다. 그는 그 때부터 양아버지를 도와 해적 일을 했다. 그들은 해적을 연합하여 홍(紅)·황(黃)·청(靑)·람(藍)·흑(黑)·백(白)의 6함대를 창설하고, 서로 깃발 색으로 식별하도록 했다. 정일은 그중 가장 큰 함대인 홍기방(紅旗幇)을 지휘하였다.
1807년 그녀의 남편 정일도 베트남 해역에서 폭풍우 속에서 물에 빠져 사망했다. 그가 죽자 부인과 두 명의 친아들 정영석(鄭英石)과 정웅석(鄭雄石), 그리고 한 명의 양자 장보(張保) 또는 장보자(張保仔)가 남았다. 영석과 웅석은 당시 매우 어렸고, 정일형수는 어쩔 수 없이 최선을 다해 양아들 장보와 손잡고 원래 남편의 우두머리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다. 장보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길 외모가 매우 잘 생겨서 해적질을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할 정도다. 청나라 사람 원영륜(袁永綸)은 그의 저서 <정해분기(靖海氛記)>에서 "장보는 광동성 신회구(新會區)의 강문(江門)의 어부 아들인데, 15세에 아버지를 따라 배에서 물고기를 잡다가 정일의 해적선을 만나 약탈을 당했다. 장보가 포로로 잡혔고, 정일은 그를 잡아서 매우 기뻐하여 일을 시키게 되었다. 총명하고 언변이 좋으며 젊고 잘 생겨서 정일희(鄭一嬖, 정일의 처)의 총애를 받았으나 두령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라고 썼다. 그는 정일의 양자일 뿐만 아니라 양어머니의 성생활 반려 역할도 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기록했다. 그들은 아마 정일이 죽기 전에도 정일이 출항을 하면 몰래 사랑을 나누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는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 모든 함대를 인수하고, 함대 내부의 다양한 파벌을 균형 있게 조정했다. 장보와 함께 정일의 함대를 안전하게 인수한 후 그녀는 모두의 지도자가 되었다. 장보는 정일이 사망한 후에도 정일의 아내 석씨(石氏)에게 여전히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 장보의 협조로 정일형수는 곧 홍기방(紅旗帮)의 대권을 장악했다.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더라도 여자의 몸으로 험한 바다에서 해적의 두목을 하기가 쉬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뭔가 남다른 관리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해적 내부를 규율하는 강력한 규칙을 만들어서 제도적으로 통제하는 방법이다. 그녀는 다음과 같은 규칙을 만들었다.
1. 누구든지 독단적으로 권력을 휘두르거나 상급자의 명령을 어기는 자는 즉시 참수한다.
2. 공공재물을 훔치거나 향민(鄕民)에게서 훔친 자는 죽음으로 처벌한다.
3. 누구든지 검사를 받지 않은 전리품을 몰래 숨겨서는 안 되며, 위반자는 참수한다.
4. 탈영하거나 허가 없이 무단결석한 자는 귀를 베는 형벌을 받게 되며, 그 후로는 자기 형제들 앞에서 대중에게 공개 처벌된다.
5. 여자를 강간한 자는 죽음으로 처형될 것이며, 남녀 간 간통하면 남자는 참수하고 여자는 다리에 무거운 물건을 묶어 바다에 가라앉힌다.
정말 무시무시한 처벌 규정이다. 해적단에 포로가 됐던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장교인 리처드 글래스풀(Richard Glasspoole)은 “이 엄격한 규칙이 그들의 전투에서 용맹함으로 나타났고, 열세에 처해도 굴복하지 않는 힘의 원천이 되었다”고 전했다. 이 외에도 정일형수(鄭一兄嫂)는 첨단 무기와 장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청나라 정부가 아직 북양대군(北洋大軍)을 건설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홍콩에 기지와 병영, 조선소를 두고 현지 주민들에게 세금 까지 부과했다. 세력 범위는 주강(珠江) 입구에서 경주(琼州) 해협까지 직행하며, 장비는 모두 최신식 양창(洋槍)과 양포(洋砲)였다. 이 해적들은 모두 목숨을 걸고 싸워 얻은 것으로, 전투력이 매우 강력했다. 이런 일련의 조작을 통해 해적 일당은 인치(人治)에서 제도화된 관리로 나아가게 되었고, 최첨단 무기 장비도 사용하게 되었다. 아내가 남편의 해적 조직을 이어받아 더욱 크고 단단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은 전력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아보자. 정일수(鄭一嫂)가 이끄는 홍기방(紅旗帮)을 포함해서 해적함대는 600 척의 배 에 10만 명의 해적 대원들이 있었다고 한다. 자료 마다 현황이 들쑥날쑥하여 정확한 수치는 미지수(未知數)이지만 대략 일국(一國)의 해군 전력을 능가하는 규모로 보인다. 이 당사 그들이 해상 전투에서 거둔 전적을 가지고 그들의 전력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겠다. 절강성 해역에서 절강 수군제독 서연웅(徐延雄)을 격살했다. 청나라 가경 13년(1809) 7월에 출항하여 해적을 토벌하려던 광동의 호문(虎門) 총병 임국량(林国良)과의 마저우양(孖洲洋) 전투에서 그를 사살했다. 다음해인 가경 14년에는 또 다른 총병 허정계(許廷桂)가 웨이자(桅夾) 전투에서 홍기방의 해적에게 패배하여 자살하였다. 광동 수군 제독 손전모(孫全謀)는 완산(萬山) 및 광저우만(廣州灣) 전투에서 생포되었다. 홍기방의 해적들은 관군도 우습게보지만 서양 해군들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청나라 조정에서는 남해의 해군 총독들의 무능을 탓하며, 마카오의 포르투갈 식민자들과 협정을 맺어 해적을 공동으로 소탕하기로 했다. 홍기방은 한때 란타우섬 대서산(大嶼山) 적력각(赤瀝角, 지금의 홍콩국제공항이 있는 곳)에 포위되었으나, 정일수(鄭一嫂)는 장보(張保)와 잘 협력하여 포르투갈 전함 6척, 청군 60척의 범선, 화포 1200문, 그리고 1만 8천 명의 장병들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포위를 돌파했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 군함 20여 척과 화포 300여 문을 격침시켰다. 이 일은 청나라 사람 원영륜이 저서 <정해분기(靖海氛記)>에 썼을 뿐만 아니라, 영국 동인도회사 소속 장교인 리처드 글래스풀(Richard Glasspoole)이 포로로 잡혔다. 그는 홍기방의 인질로서 적력각 전투에 강제로 참여하게 되었고, 정일수, 장보 등 해적들과 80일 동안 함께 있다가 몸값을 지불한 후에야 석방되었다. 글래스풀의 기록 덕분에 서양 역사학자들은 정일수의 해적 경력을 깊이 있게 연구했고, 그를 모델로 한 소설, 영화, 게임 등을 통해 마담칭(Madam Ching)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해적 중 한 명이 되었다.
청나라 조정은 줄곧 정일형수 일당을 어쩔 수 없어서 봉건 왕조가 산적(山賊)을 상대하는 일반적인 방법을 생각해냈다. 바로 그들과 타협을 하여 처벌을 면제하고 정규군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이었다. 홍기방이 귀순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잦은 토벌전으로 해적 세력이 비교적 약해져서 이미 자수한 숫자가 많아졌고, 본업인 해적질을 하지도 못하고 매일 전투만 하기에 전력이나 보급량이 국가의 해군 전력에 비해 부족했다. 두 번째 중요한 이유는 정일형수와 장보의 은밀한 관계였다. 명목상 양모자(養母子) 관계이지만 이들은 오래 전부터 정을 통해온 실제적인 부부 관계나 진배없었다. 이런 상황이라서 항상 장보와 불화를 겪던 흑기방(黑旗幇)의 두목 곽파(郭婆)가 양광(两廣) 총독 백령(百龄)에게 항복하고, 총직(總職)을 수여받는 등 해적 내부의 분열이 생겼다. 해적 내부의 분열로 인해 해적 거점과 내륙과의 암거래 경로 등의 정보가 점차 당국의 시야에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쪽에서 협상의 제의가 온 것이다. 정일형수와 장보는 앞일을 심각하게 논의한 경과 조정에 협력하기로 결정한다. 가경 15년에 먼저 사람을 보내 설득하고 떠본 후, 정일형수(鄭一兄嫂)는 직접 광저우로 가서 백령(百龄)과 협상하여 자발적으로 인질로 삼아 장보의 귀환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백령이 나서서 조정에 두 사람의 모자 관계를 해제하고 그들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관청은 만 오륙천 명의 해적과 270~280척의 해적선, 무수한 대포와 병기를 수집하여 항복시켰다. 장보는 배 20~30척을 그대로 두고 바다에 나가 여도(餘盜)를 잡는 데 협조하기로 했다.
두 사람은 조정의 결혼 허락을 받고, 장보는 양모인 정일형수(鄭一兄嫂)를 정식 아내로 맞아 마침내 명실상부한 부부가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아들 장옥린(張玉麟)을 두었다. 장보는 천총(千總)에 봉해지고, 해적에서 청나라 수군장교가 되었으며, 관군을 도와 주강 삼각주 해적을 소탕한 공로로 종3품인 푸젠(福建) 동안협(同安協) 부장으로 승진했다. 정일수(鄭一嫂)는 고명부인(誥命夫人)에 봉해졌다. 나중에 임칙서(林則徐)의 반대로 인해 장바오는 총병으로 승진하지는 못했다. 정일형수와 광저우 총독은 일련의 논의 끝에 함대 중 하나를 유지하기로 결정하고, 평소에는 해상 패권자의 일을 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부하들을 이끌고 소금을 판매하며 사업을 시작했다. 자신이 나이가 들어서 더 이상 해상 활동을 못하게 되자 아들과 옛 부하를 데리고 마카오로 가서 도박장을 열었고, 장사가 번창하여 마카오 도박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69세 살 때, 정일형수는 그녀의 빛나는 일생을 마치고 마카오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초기 몸을 파는 창기(娼妓)의 신분으로 단순히 여성성을 무기로 내세워 남성을 유혹하거나 조종하는 팜므파탈의 이미지가 아니다. 거친 해적 사회에서 절대적 권위와 엄격한 명령 체계를 구축한 지도자로 등극한다. 그녀는 해적들 사이에서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었고, 그 위상은 결코 다른 해적단의 지도자에 뒤지지 않았다. 흑기방 두목 곽파는 평소 어린 장보를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정일형수에 대해서는 ‘두려워(畏)’ 감히 겉으로 반발하거나 대립하는 태도를 보이지 못했다. 그녀는 과거 남편의 동료였던 곽파조차 두려워한 인물이었고, 해적 사회에서 신적인 존재로 숭배되던 양아들 장보 역시 그녀를 공손히 섬긴 것으로 묘사된다.
서양에 중국 해적 정일형수란 존재를 처음 알린 것은 원영륜의 <정해분기>를 영역한 독일 출신의 오리엔탈리스트인 칼 프레드리히 노이만(Karl Friedrich Neumann)의 번역서 <History of the Pirates who Infested the China Sea from 1807 to 1810>였다. 19세기 초 광둥 바다는 중국 해적으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었는데, 동인도회사를 포함해 서양의 항각 상인의 피해가 극심했다. 그들에게 있어 중국의 해적은 미개하고 잔인한 존재로 알려졌을 뿐, 중국 해적의 조직 구성 체계나 활동 범위, 약탈 방식, 생활 습속 등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노이만의 번역서는 처음으로 서양의 대중들에게 중국 해적과 정일형수에 대해 소개한 책으로, 서양의 중국 해적사 연구에서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번역자 노이만은 서술의 초점을 장보에게 맞춘 원영륜의 편파적인 시각을 비판했고, 서술의 변방으로 밀려난 정일형수에게 깊은 관심을 내보였다. 노이만의 번역서는 글래스풀의 글을 부록에 실어 서양의 독자들이 정일형수에게 관심을 갖도록 환기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 거기에 정일형수에 관한 짧은 일화가 있다. 글래스풀은 두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한 번은 적의 공격을 받아 3~4피트 앞에서 포탄이 터졌을 때였고, 또 한 번은 전투 중 놋쇠 파편이 튀었을 때였다. 그는 이러한 구사일생의 경험을 설명하며, 평소 정일형수가 부적처럼 총탄을 막아주는 ‘마늘 물(Garlic water)’을 자주 뿌려 주었다고 기록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