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탈모(Hair loss)가 생존의 문제인가?

by 금삿갓

인류는 수천 년 이래 탈모의 치료법을 찾아 헤매왔지만 아직도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보니 일전에 이재명 대통령이 탈모가 ‘생존의 문제’라고 하면서 치료제의 건강보험 적용 지시를 하기도 했다. 필자 금삿갓 시대의 ‘아재 개그’에 탈모에 관한 것이 있었다. “머리 좋은 사람이 머리를 많이 쓰면 백(白) 머리가 되고, 머리 나쁜 사람이 머리를 많이 쓰면 대머리가 된다.”라는 농담이다. 탈모와의 싸움을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기원전 3000년경에도 가발과 헤어피스(Hairpiece)는 이집트, 아시리아, 수메르, 크레타, 카르타고, 페르시아, 그리스의 상류층 사이에서 매우 인기를 얻었다. 탈모와 치료법에 대한 의학적 지식, 신화, 소문들이 치료사들 사이에서 퍼져나가 후대에 전해지기도 했지만 대부분 실패였다. 기원전 1500년경의 이집트 룩소르에서 발견된 에버스 파피루스(Ebers Papyrus)는 지금까지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의학 문헌으로, 탈모 치료법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당시 가장 널리 사용되던 치료법은 악어털, 고슴도치 털, 고양이털, 산화철, 적색 납, 양파, 설화석고, 꿀, 그리고 뱀, 악어, 하마, 사자, 등 다양한 동물의 지방을 혼합한 것이었단다. 이 혼합물을 태양신에게 기도한 후 삼키도록 되어 있었다. 기원전 420년경 고대 그리스에서는 많은 의사들이 탈모 치료법을 연구했는데, 최고의 의학자였던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역시 탈모로 대머리였다. 그는 자신의 탈모를 치료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제로 그는 탈모에 대한 수술적 치료법을 최초로 기술하고 이론화한 의사였다. 오랜 실험 끝에 히포크라테스는 아편, 고추냉이, 비둘기 배설물, 사탕무, 그리고 여러 가지 향신료를 섞은 혼합물을 연고로 만들어 바르도록 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방법은 효과가 없었고, 오늘날까지도 극심한 탈모를 "히포크라테스형 탈모"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히포크라테스의 잠언(Aphorisms of Hippocrates)>에 탈모에 대한 최초의 수술적 치료법을 기록했다. 그는 페르시아 군대의 환관(宦官)들이 탈모를 겪지 않는다는 사실을 관찰하고, 테스토스테론 수치 및 성욕과 탈모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고 추론했다. 그는 ‘정열적인’ 남성들이 탈모를 겪으면서, 그 대가가 감수할 만하다면 거세(去勢)가 탈모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탈모와 남성 호르몬(안드로겐)의 관계를 밝혀내는 중요한 의학적 단초가 되지만, 대머리와 남성성을 맞바꾸는 끔찍한 수술이다.

<월계관을 쓴 율리우스 카이사르>

고대 로마제국에서 머리카락은 권력과 남성다움의 상징이었다. 그런데, 로마의 지도자 율리우스 카이사르(Caesar)는 심한 탈모로 고민이 많았다. 치료법을 찾기 위해 여러 의사를 고용했고, 그들은 쥐고기, 말 이빨, 곰 기름, 사슴고기 등을 갈아 만든 약초와 로션을 사용해 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는 탈모를 감추기 위해 머리를 앞쪽으로 빗어 넘기는 '콤보 오버(Combover)'를 시도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결국 원로원으로부터 항상 월계관을 착용할 수 있는 특권을 얻어 탈모를 가렸다. 아이러니하게도, 라틴어 ‘카이사레(Caesaries)’는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의미한다. 클레오파트라(Cleopatra)는 남편 카이사르를 위해 탈모약을 개발하기도 했다. 탈모 부위에 비소의 붉은 유황 가루를 참나무 수액에 최대한 많이 섞어 비누를 만들고, 이를 다시 질산염 거품으로 섞어 사용했단다. 금삿갓의 눈에는 거의 극독물에 가까운 처방처럼 보인다. 로마의 11번째 황제인 도미티아누스(Domitian)가 탈모에 관한 논문을 썼을 정도이니 그 당시에도 탈모가 매우 심각한 남성의 문제였음에 틀림없다. 탈모도 아닌 이대통령이 업무보고 자리에서 거론할만한 주제였을 수도 있다.

<가발을 쓴 루이 13세>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질병에 의한 탈모로 고생한 사례가 많다. 영국의 엘리자베스(Elizabeth) 1세 여왕은 장티푸스를 앓은 후 머리카락이 많이 빠졌다. 그녀는 이를 가리기 위해 화려한 붉은색 가발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당시 귀족층 사이에서 대유행하게 되었다. 이후 가발은 단순한 탈모 은폐용을 넘어 권위와 지위를 상징하는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프랑스 국왕 루이(Louis) 13세는 머리숱이 적어지고, 머릿니를 예방하기 위해 가발을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프랑스에서도 가발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 후 가발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법정에서 판사나 변호사가 가발을 쓰는 관습도 이때 시작되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루이 13세는 40명의 가발 제작자를 두고 있었으며, 이발사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가발을 벗은 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고 한다. 가발을 쓰지 않은 모습은 '품위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가발은 제작과 관리(매일 향수와 흰 가루를 발라야 함)에 드는 비용이 매우 비싸지자, 마차 지붕을 뚫고 승객들의 가발을 훔쳐 달아나는 가발 도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유모가 넘쳤던 윈스턴 처칠>

탈모와 대머리가 엄청 스트레스임에 틀림없지만, 정말 위대한 정치인이었던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특유의 유머로 잘 넘긴 것처럼 보인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탈모가 진행되었는데, 어느 날 한 여성이 그에게 "당신은 머리가 너무 벗어졌네요."라고 무례하게 말했다. 처칠은 "내 머리는 벗어진 것이 아니라, 뇌가 계속 팽창해서 머리카락이 밀려난 것뿐입니다."라고 재치 있게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다. 외국의 사례는 그렇지만 우리나라 조선의 경우가 더 힘들었을 것 같다. 왜냐하면 신체와 머리털은 부모로부터 받은 거라서 온전히 갖추는 것이 효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옛 선비들은 상투를 틀어야 하는데, 대머리가 되면 상투 트기가 더 어려웠을 것이다.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자신의 탈모를 한탄했다. 그는 『동국이상국집』 제18권 <頭童自嘲(두동자조) / 대머리를 자조함>’이라는 오언배율(五言排律)을 지어서 대머리를 자조(自嘲) 했다.

髮落頭盡童(발락두진동) / 머리털 빠져 머리가 다 벗어지니

譬之禿山是(비지독산시) / 꼭 민둥산에 비유되네.

脫帽得不慙(탈모득불참) / 모자 벗어도 부끄럽지 않고

容梳已無意(용소이무의) / 빗질조차 이미 무의미해졌네.

若無鬢與鬚(약무빈여수) / 만약 귀밑털과 수염만 없다면

眞與老髡似(진여로곤사) / 참으로 늙은 승려 닮았네.

<방건 사이로 대머리가 보이는 윤증의 인물화>

17세기에 소론(小論)의 영수(領袖)였던 명재(明齋) 윤증(尹拯, 1629~1714)도 그의 초상화를 자세히 보면 대머리였다. 방건(方巾)의 미세한 구멍으로 탈모가 보이는데, 뒷머리에 남은 머리카락을 모아 상투를 튼 것으로 보인다. 이로서 당시 대머리들이 상투를 틀 때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영조(英祖, 1694~1776)도 탈모였나 보다. 73세에 다시 머리가 나자, 뛸 듯이 기뻐했다고 조선왕조실록이 전한다. 필자 금삿갓도 모친께서 95세쯤부터 흰머리가 빠지고 검을 머리가 다시 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을 목격했다. 선조들이 곰의 기름을 탈모약으로 쓴 건 <동의보감(東醫寶鑑)>에도 나온다. ‘머리털이 노랗게 시들어갈 때는 곰의 기름을 발라주고, 빠질 때는 곰의 골수로 기름을 내어 발라준다’고 적혀 있다. 곰의 기름은 동서양이 모두 탈모약으로 사용한 셈이다. 정말 약효가 있다면 웅담(熊膽) 보다 더 비싸서 곰이 멸종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생존 즉 생명과 직결되지 않은 미용상의 문제에 건보 재정을 마구 투입하면 그 부족분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잘 검토하고 결정할 일이다. 선거용 인기 영합성 정책은 좀 근절하기를 촉구한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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