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금서(禁書)가 된 인기 소설의 저자 - 채수

최초의 국문소설로 필화를 당하다.

by 금삿갓

금서(禁書)는 국가의 통치자나 사회의 지배 세력에 의해 출판이나 유통, 독서 등을 금지한 책 또는 글을 의미한다. 현대사회에서는 학문과 사상,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기에 이런 현상이 드물지만 전제군주 시대에는 금서 또는 분서(焚書) 정책이 잦았다. 왕조 정권에서는 왕조의 기틀을 흔들 염려가 있거나 혹세무민의 선동이 되는 도참서(圖讖書)는 필수적으로 금서였다. 도선비기(道詵祕記)나 정감록(鄭鑑錄) 같은 것은 당연히 금서였지만 민간에서는 음밀하게 정감록을 읽어왔다. 조선 시대에는 한 때 유학 서적인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도 금서로 지정된 적이 있다. <고조선비사(古朝鮮祕史)>, 대변설(大辯說)>, 조대기(朝代記>, <통천록(通天錄)> 등 역사서도 금서였다. 소설 종류로는 중궁의 <삼국지(三國志)>와 수호전(水滸傳)> 등이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고, 이외로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와 정약용(丁若鏞)의 <목민심서(牧民心書)>가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는데, 북한에서는 <목민심서(牧民心書)>가 아직도 금서이다. 소설로는 허균(許筠)의 <홍길동전(洪吉童傳)>이 금서였으나 워낙 널리 퍼져서 현재까지 잘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1511년경에 문신(文臣)인 나재(懶齋) 채수(蔡壽)가 지은 귀신소설 <설공찬전(薛公瓚傳)>은 금서로 묶여서 세간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이 소설은 원래 한문소설로 지어졌고, 한글 번역본도 민간에 매유 인기가 있었다. 나라에서 엄히 금했지만 민간에서 몰래 베껴서 돌려 본 모양이다. 그래서 이문건(李文楗)의 문집인 <묵재일기(默齋日記)>에 이 소설을 몰래 기록해 둔 것이 발견되었다. 그래서 최초의 한글 소설이 <홍길동전>에서 <설공찬전>으로 바뀌게 되었다. 오늘은 이 소설의 저자인 채수라는 사람의 일생을 대략적으로 살펴보자.

중종 6년 신미(1511) 9월 2일(기유)에 사헌부(司憲府)에서 “채수(蔡壽)가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내용이 모두 화복(禍福)이 윤회(輪廻)한다는 논설로, 매우 요망(妖妄) 한 것인데 중외(中外)가 현혹되어 믿고서, 문자(文字)로 옮기거나 언어(諺語)로 번역하여 전파함으로써 민중을 미혹시킵니다. 부(府)에서 마땅히 행이(行移)하여 거두어들이겠으나, 혹 거두어들이지 않거나 뒤에 발견되면, 죄로 다스려야 합니다.” 하니, 답하기를, “<설공찬전>은 내용이 요망하고 허황하니 금지함이 옳다. 그러나 법을 세울 필요는 없다. 나머지는 윤허하지 않는다.”하였다. 그러다가 9월 5일에 그의 책을 소각(燒却)하고, 숨기고 내어 놓지 않는 자는, 요서은장률(妖書隱藏律)로 치죄할 것을 명했다. 또 9월 18일에 사헌부에서 채수를 교수형에 처하라고 간했으나 파면하는 것으로 끝냈다. 대간(臺諫)들이 계속 참수를 주장했으나, <태평광기(太平廣記)>나 <전등신화(剪燈新話)> 같은 것도 있는데 사형은 과하다고 주장하는 신료도 있어서 그에 다른 것이다. 중종 10년 을해(1515) 11월 8일(경인)에 사관(史官)들은 그의 졸기(卒記)를 이렇게 적었다. 채수(蔡壽)는 사람됨이 영리하며 글을 널리 보고 기억을 잘하여 젊어서부터 문예(文藝)로 이름을 드러냈고, 성종조(成宗朝)에서는 폐비(廢妃)의 과실을 극진히 간하여 간쟁(諫諍)하는 신하의 기풍이 있었다. 그러나 성품이 경박하고 조급하며 허망하여하는 일이 거칠고 경솔하였으며, 늘 시주(詩酒)와 음률(音律)을 가지고 스스로 즐겼다. 일찍이 설공찬전(薛公瓚傳)을 지었는데, 떳떳하지 않은 말이 많기 때문에 사림(士林)이 부족하게 여겼다. 반정(反正) 뒤에는 직사(職事)를 맡지 않고, 늙었다 하여 고향에 물러가기를 청해서, 5년 동안 한가하게 휴양하다가 졸하였는데, 뒤에 양정(襄靖)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설공찬전 필사본>

그의 생애에 대한 공식 기록인 비문을 간략히 살펴보자. 그를 벌주라고 주청 했던 대제학(大提學) 남곤(南袞)이 지었다. 공의 휘(諱)는 수(壽)이고 자(字)는 기지(耆之)이다. 남양부사(南陽府使) 증 이조참판(吏曹參判) 소성군(邵城君) 채신보(蔡申保)가 문화(文化) 유승순(柳承順)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보통보다 뛰어나 나이 11세에 비로소 스승에게 글을 배웠으나 몇 년이 되지 않아 재주와 학문이 크게 진취되었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가 공의 저작을 보고 감탄하기를, “후일 문학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릴 자는 틀림없이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무자년(1468)에 공의 나이 20세로 진사 시험을 보았고, 그 이듬해 갑과(甲科, 문과)에 장원하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되었다. 이 과거에 공이 이미 관시(館試, 성균관 초시)에 장원하고 또 회시(會試)·전시(殿試)에 장원하였는데, 이렇게 삼장(三場)에서 연달아 장원한 사람은 우리 조선조에 오직 영원(領院) 이석형(李碩亨)과 공 두 사람뿐이었다. 관직의 승차 경위는 생략하고, 정유년(1477)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가 되고, 이듬해 도승지(都承旨) 임사홍(任士洪)을 탄핵하여 파직시켜서 조정과 재야가 통쾌하게 여겼다. 신축년(1481)에 사건으로 인해 파직되었다가 다음 해에 대사헌으로 복귀한다. 폐비 윤씨를 옹호하는 발언으로 옥사(獄事)를 당했으나 사면되었다. 파면과 복직을 거듭하다가 인천군(仁川君)으로 봉해지고 물러나서 상주에 은거하여 쾌재정(快哉亭)을 지어 즐겼다.

<쾌재정>

비문은 대체로 과장을 하지만 남곤의 그에 대한 평가는 이렇다. 공은 성품이 소탕하여 얽매이지 않았고 사람들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았다. 오직 글 읽기만 좋아하였고 읽었다 하면 몇 번을 안 읽어 외웠고, 비록 병중에 있어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 이로 인해 세상의 글을 모두 다 열람하여 산경(山經), 지지(地誌), 패관(稗官), 소설(小說)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해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 성율(聲律)은 천성적으로 터득한 것이었다. 시문(詩文)을 지을 때 붓을 들면 곧바로 완성하여 생각하지 않은 것 같았으나 말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그에게는 소년 시절 귀신 체험이 있었다. <나재문집 권 4>, <연보(年譜)> 중에 나오는 내용이다. 채수의 나이 17세 때, 아버지를 따라 경산의 부임지로 갔다. 그때 밤에 흐릿한 것이 있어 둥근 것이 마치 수레바퀴와 같았는데, 거기 닿았다 하면 죽음을 당하였다. 선생이 마침 밖에 나갔다가 이것을 보았는데, 그 요사한 것이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자 선생의 막냇동생이 갑자기 놀라서 일어나 아프다고 울부짖다가 죽었다. 그러나 선생은 그 요사한 것과 닿았어도 아무런 해를 입지 않았는데, 이것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 그의 사위 김안로(金安老)가 지은 <용천담적기(龍泉談寂記)>에도 비슷한 내용이다. 양정공(襄靖公, 채수의 시호)이 어릴 적에 아버지 임지를 따라서 경산에 살 때, 두 아우와 관사에서 함께 자다가 밤중에 갑자기 소변이 마려워 옷을 입고 혼자 방 밖으로 나가보니, 화원경(火圓鏡, 확대경)과 같은 흰 기운이 오색처럼 현란하게 공중에서 수레바퀴처럼 돌아 먼 곳에서 차차 가까이 오는 것이다. 속도가 바람과 번개처럼 빠르므로 양정공이 놀라 창황히 방으로 들어왔다. 겨우 문턱을 넘어섰는데 그것이 방 안으로 따라오는가 싶더니 조금 있다가 막냇동생이 가장 방구석에서 자다가 놀라 일어나 뛰며 아프다고 계속해서 부르짖으며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죽었다. 하지만 양정공은 조금도 상한 데가 없었다.

<채수의 신도비>

또 중종반정(中宗反正)에 얽힌 이야기도 있다. 1506년(연산군 12),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 류순정(柳順汀) 등과 같은 신하들이 중심이 되어 폭정의 끝을 달리던 연산군을 몰아내고,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중종을 왕위에 세우는 이른바 중종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이들은 반정의 명분을 위해 명망 있는 선비들이 참여하는 것이 좋았다. 당시 채수는 연산군으로부터 곤장 100대를 맞은 처지였으나, 직접 참여하라고 하면 그의 성격상 절대 찬성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의 큰 사위인 대제학 김감(金勘)이 장인인 채수를 찾아가서 아무 말 없이 술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이용하여 독한 술을 잔뜩 먹여서 곯아떨어지도록 했다. 그러자 김감이 그를 업어다가 반정이 논의되는 현장에 데려다 놓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세상 좋게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반정이 일어나서 세상이 바뀐 것이다. 그는 모든 사태를 알아차린 후 크게 한탄했다고 한다. <설공찬전>에 보이는 반정에 회의적인 요소는 이러한 점이 적용된 듯하다. 채수는 박원종, 성희안 등 반정공신들에게 휘둘리는 중종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으로 봉해졌지만 결국 다시 관직을 버리고 경상북도 상주로 낙향하여 <설공찬전>을 집필한 후 여생을 마쳤다.

<채수 부부의 묘소>

그는 시문에 능하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당대의 문객이자 풍류객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유학자이긴 했으나 엄격한 성리학보다는 풍류가 더 좋았던 모양이다. 또한 신진 사림의 대표 주자였던 김종직과 친분이 있었고 신진 사림들과 교류하긴 했지만, 이들의 성리학 교조주의적 태도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은 듯하다. 신진 사림의 기록이나 실록에서 "채수는 재주는 있는데 사람이 영 경박하고 행동이 거칠다."라는 평이 많음이 이를 반증한다. 즉 유학자였지만 유교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와 선도에도 관심을 가져 유불선에 통달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그러니까 <설공찬전>은 유불선에 조예가 깊었던 채수의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여기서 채수는 불교의 윤회 사상과 괴담 같은 형식뿐만 아니라 반란을 일으켜 후량(後梁)을 건국한 주전충(朱全忠) 같은 자들은 무조건 지옥행이라고 언급하며 아예 중종반정의 정통성까지 부정해 버렸다. 채수는 중종반정에 큰 기대를 걸고 연산군 시대의 악정을 종식하리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연산군의 자리에 박원종, 성희안 등이 들어앉음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지옥의 일을 이야기하는 설공찬의 말이나 주전충을 빌어서 이들을 비판한 것이다. 소설이 귀신의 힘을 빌어 권선징악을 하고, 특히 여성들도 글을 알면 관직을 맡을 수 있다고 하는 부분이 당시 민초들에게 엄청나가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위정자의 입장에서는 사회 체제를 부정해서 뒤엎는 글이었을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략하면 다음과 같다.

<연극 설공찬전>

전라북도 순창군에 살던 설충란(薛忠蘭)이 아들 설공찬(薛公瓚)과 딸 남매를 두고 살았다. 설충란의 할아버지이자 설공찬의 증조부는 설위(薛緯)로 대사성을 지낸 인물이다. 그리고 설충란의 동생은 설충수(薛忠壽)인데, 그에게는 설공침(薛公琛)과 설업동(薛業同)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설충란의 딸은 시집을 간 뒤 얼마 안 되어 갑자기 병으로 죽어버렸고, 아들 설공찬 마저 20살에 장가도 못 가고 병에 걸려 죽어버렸다. 설충란은 슬피 울며 자식들을 저세상으로 보냈지만 어린 나이에 죽게 된 탓인지 두 자식들의 영혼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맴돌았다. 설공찬 누나 설씨의 혼령은 설공찬의 삼촌 설충수의 아들 공침에게 들어가 병들게 만든다. 설충수가 잠시 시골에 내려갔다가 돌아와서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무당 김석산을 불렀고, 김석산은 복숭아나무 가지를 흔들어 설공찬의 누나 귀신을 쫓아냈다. 그러나 설공찬의 누나는 설공침의 몸에서 나가면서 "나는 계집이라 약해서 물러나지만 내 남동생 공찬이를 데려오겠다."는 엄포를 놓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 말대로 설공찬의 누나 귀신이 가고 설공찬의 혼령이 설공침에게 씌고 말았다. 설충수가 백방으로 공찬의 영혼을 내쫓으려고 한다. 그러자 설공찬이 공침을 극도로 괴롭게 한다. 설공찬이 제 사촌아우 설공침의 입을 빌려 "이는 오직 설공침을 다치게 할 뿐이고, 나는 늘 하늘가로 다니기 때문에 다치지 않는다."라고 조롱했다. 그러더니 "나를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거든 왼새끼를 꼬아서 집문 밖에 두르면 된다"라고 했다. 설충수가 이 말을 곧이듣고 그대로 했지만 역시나 거짓부렁이었고, 설공찬 또한 "과연 내 술수에 빠졌다."며 숙부를 희롱하고 조롱했다. 이후 설공찬의 혼령이 빙의된 설공침은 계속해서 야위어갔다. 사태가 심각함을 알게 된 설충수는 다시 김석산을 불러 설공찬의 혼령을 쫓아내려 했고, 김석산은 "주사(朱砂) 1냥을 사서 기다리고 있으시오. 내가 가면 영혼이 제 무덤 밖으로 나다니지도 못할 것이오."라고 비법을 알려주었다. 심부름 간 사람이 설충수에게 김석산이 한 말을 전하자 설공찬의 혼령이 크게 화를 내며 "이렇듯이 나를 괴롭히시면 숙부님의 형용을 변화시키겠습니다!!" 라며 설공침을 마구 괴롭히는데, 팔다리를 비틀며 눈을 뒤집고, 혀를 파서 베어내 코 위로 올라가 귀 뒤를 오르락내리락하게 하는 식이다. 옆에서 병간호하던 늙은 종도 반쯤 죽었다 겨우 다시 깨어날 정도로 시달렸다. 이러다가 아들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겁을 먹은 설충수가 "김석산을 부르지 않겠다."라고 약속하고 나서야 원래대로 되돌렸다.

<쾌재정>

그리고 이후 설공찬은 설공침의 입을 빌려 저승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저승이란 곳은 바닷가에 있다. 이름은 단월국(檀越國)이라 하며, 그 왕의 이름은 비사문천왕이라고 한다고 한다. 저승에서는 죽은 자를 심판할 때 책을 살펴서 하는데, 공찬은 저승에 먼저 와 있던 증조부 설위의 덕으로 풀려났다고 했다. 이승에서 선하게 산 사람은 저승에서도 잘 지내나, 악한 사람은 고생을 하거나 지옥으로 떨어진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승에서 어진 재상이면 죽어서도 재상으로 다니고, 이승에서는 비록 여자의 몸이었어도 약간이라도 글을 잘하면 저승에서 아무 소임이나 맡으면 잘 지낸다. 이승에서 비록 비명에 죽었어도 임금께 충성하여 간하다가 죽은 사람이면 저승에 가서도 좋은 벼슬을 하고, 비록 여기에서 임금을 하였더라도 주전충 같은 반역자는 다 지옥에 들어가 있었다." 하루는 명나라 황제 성화제(成化帝)가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의 수명을 1년 정도 연장시켜 달라고 애박이란 사람을 보내 염라대왕에게 요청했는데, 염라대왕이 "아무리 천자라 해도 사람 살리고 죽이고 하는 건 내 권한인데, 어디서 고유권한을 침해하려고 하느냐?"며 애박을 잡아오라고 한다. 성화제는 놀라서 본인이 몸소 염라대왕에게 찾아가자, 염라대왕이 "수명 좀 늘려 달라고 부탁한 그 신하를 잡아다 손을 삶으라."라고 명령하는 부분에서 소설이 끝난다.

<연극 설공찬전 포스터>

쿠데타를 일으켜 왕이 되어도 지옥에 가고, 글을 아는 여성도 관직을 할 수 있다는 내용이 당시 중종반정으로 권력을 잡은 왕과 조정 대신들에게는 엄청 심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최초의 국문소설이고, 두 번째의 한문소설이 <설공찬전>은 조정의 논의를 거쳐 금서가 되고 소각되었다. 저자인 채수는 교살형에 주청 되었으나 파면으로 끝났다. 당시 경향각지의 독자에게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인기를 끌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소설로는 유일하게 『조선왕조실록』에도 올랐으니, 소설의 대중화를 이룬 첫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채수는 설공찬전 논란 이후 4년 뒤인 중종 10년(1515년)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훗날 숙종 시대에 와서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여기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그의 인간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시 <장량(張良)>을 남겼다.

奇謀不遂浪沙中(기모불수낭사중) / 기이한 꾀로도 박랑사(博浪沙)에서 뜻 못 이루고

杖劒歸來相沛公(장검귀래상패공) / 긴 칼 짚고 돌아와 패공 유방을 도왔네.

借箸便能成漢業(차저편능성한업) / 젓가락으로 능히 한(漢) 나라 대업을 이루었고,

分符獨自讓齊封(분부독자양제봉) / 혼자 스스로 제(齊)에 녹봉 되길 사양했네.

平生智略傳黃石(평생지략전황석) / 평생의 지략은 황석공에게서 전해받고,

老去功名付赤松(노거공명부적송) / 늙어서는 공명을 마다하고 적송자를 따라갔네.

堪笑世人長役役(감소세인장역역) / 세상 사람들 오래도록 발버둥 치는 게 우습나니,

功成勇退是英雄(공성용퇴시영웅) / 공을 이루면 용퇴함이 이 곧 영웅이라.(금삿갓 芸史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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