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일부다처제로 돌팔매 맞을 뻔한 박유(朴褕)

Fuck you ! 라고 욕 먹을 뻔한 박유

by 금삿갓

고려 충렬왕(忠烈王, 1236~1308, 재위 1274~1308) 때 대부경(大府卿)을 역임한 박유(朴褕)라는 용감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가 학교에서 남녀상열지사라고 배운 <서경별곡(西京別曲)> <쌍화점(雙花店)> <이상곡(履霜曲)>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 등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려시대는 성풍속이 비교적 자유분방했던 것 같다. 송(宋) 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1123년 고려에 와서 보고 들은 사실을 적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웠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목욕을 한 후 집을 나서며, 여름에는 하루에 두 번씩 목욕을 한다. 흐르는 시냇물에 많이 모여 남녀 구별 없이 모두 의관을 언덕에 놓고 물굽이 따라 속옷을 드러내는 것을 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의 혹평(酷評)인지 몰라도 “여색(女色)을 좋아하여 분별없이 사랑하고 재물을 중히 여기며,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하여 전례(典禮)를 본받지 않으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이다.”라고 기록했다. 경합이리(輕合易離) 즉 ‘가볍게 만나고 쉽게 헤어진다.’는 기록이다. 고려시대는 불교 국가이고 성리학이 통치이념으로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부장제(家父長制)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여성은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장가를 들었기 때문에 여자의 입김이 셀 수밖에 없었다. 재산상속은 기혼과 미혼, 장남과 차남, 아들과 딸을 가리지 않는 이른바 균분상속(均分相續)이었다. 이와 함께 부부별산제(夫婦別産制)로 아내의 재산은 아내의 것이다. 만일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에는 그 재산이 남편의 집에 귀속되지 않고 친정으로 돌아갔다. 장자(長子)의 호주 상속과 봉제사(奉祭祀) 책임은 조선 성리학 이후이며 고려 때는 아들 딸 가리지 않았다. 남편이 사망하면 여자도 호주가 될 수 있었다. 남녀의 자유로운 성문화로 여자들은 마음에 드는 남자와 교제한 뒤에 혼인할 수 있었고, 이혼과 재혼도 대체로 자유로와 남편과 사별하거나 이혼한 여성의 재혼은 문제 삼지 않았다.

<아랍인들의 일부다처제>

고려 시대에도 여성의 관직이나 정치 참여는 허용되지 않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조선시대만큼 제약이 없었다. 그러니 고려 후기의 학자 이곡(李穀)이 공녀(貢女) 문제를 논하면서 "차라리 아들을 내보낼지언정 딸과 함께 살기를 바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어쩌면 당시 부모들은 딸을 더 소중히 여겼을 수도 있다. 시집가면 출가외인이 되는 조선사회와는 달리 사위가 처가에 들어와서 사니까 아들과 딸을 차별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사회 상황에서 조정의 종 3품 벼슬인 대부경(大府卿) 박유가 임금에게 축첩제(畜妾制)에 관한 상소(上疏)를 올렸다. 그가 일찍이 말하기를, “동방(東方)은 목(木)에 속하는데 목의 생수(生數)는 3이고, 그 성수(成數)는 8입니다. 그런데 홀수는 양(陽)이고 짝수는 음(陰)이니,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은 그런 이치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나라는 본래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도 지금 신분의 고하를 물론하고 처를 하나만 두고 있으며 자식이 없는 자들도 감히 첩을 두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처를 두는데 제한이 없으니, 인물이 모조리 그들이 있는 북쪽으로 흘러가게 될까 염려됩니다. 청컨대 대소(大小) 신료들에게 서처(庶妻)를 두게 하되 품계에 따라 그 수를 줄여서 서인(庶人)은 1처 1첩을 둘 수 있도록 하십시오. 서처가 낳은 아들도 또한 본처가 낳은 아들처럼 벼슬살이를 할 수 있게 하십시오. 이렇게 한다면 홀아비와 홀어미가 줄어들고 호구(戶口)도 증가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녀자들 가운데 이 소식을 듣고 박유를 원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때마침 정월 보름의 연등회(燃燈會) 저녁에 박유가 어가(御駕)를 호위하고 따라갔는데, 어떤 노파가 박유를 손가락질하면서 말하기를. “서처를 두자고 청한 자가 바로 저 빌어먹을 늙은이다.”라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여자들이 연이어 손가락질하니 길거리에 붉은 손가락이 두름을 엮어 놓은 것 같았다. 당시 재상들 가운데에는 그 제도가 속으로는 좋았으나 자신들의 처를 무서워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그 논의는 잠잠해져 시행되지 못했다. <고려사 열전>의 박유(朴褕) 편(編)에 나오는 내용이다.

<일부다처 생활을 하는 일본 남자>

박유는 당시의 몽고와의 전쟁 등으로 남자 인구 감소를 명분으로 관품(官品)에 따라 여러 명의 첩을 두고, 평민들은 1처 1첩(一妻一妾)을 두게 하자는 상소를 올린 것이다. 그러자 개성(開城)의 부녀자들이 길에서 그를 비난하며 손가락질하였고, 아마 돌팔매라도 던질 태세였던 모양이었다. 재상들 중 부인을 두려워하는 자가 있어 그 논의가 중지되고 실행되지 못했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고려 전기에는 일부일처제가 유지되었지만, 고려 말 몽골의 영향으로 일부 계층에서 일부다처의 경향이 나타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당시 원(元)과의 오랜 전쟁으로 성비(性比)의 불균형이 일어나 실제 남자 수가 여자 수에 비해 적어 늙어서까지 혼인하지 못하는 여성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여기에 다처제인 몽골 풍습이 영향을 끼쳐 일부 관료들 사이에서 일부다처의 경향이 나타나가 시작하였다. 박유는 일부일처에서 일부다처로의 경향이 나타나는 사회 변동기의 상황을 반영해 이를 법제화하고자 한 것이다. 앞에서 도 말했듯이 고려는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 즉 사위가 부인의 집에 들어가는 남귀여가혼(男歸女家婚)의 혼인 풍습이었다. 고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李奎報, 1168~1241)는 장인의 제문(祭文)에 “사위가 되어 밥 한 끼와 물 한 모금을 모두 장인에게 의지하였다.”라고 쓴 것으로 보아 처가살이를 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때까지는 감히 첩을 둘 엄두가 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예서(預壻)라는 제도는 나이 어린 사내를 데려다가 여자 집안에서 길러 성인이 되면 사위를 삼는 풍속도 있었다. 관원들에게 외조부모와 처부모의 상(喪) 때에는 모두 30일의 휴가를 부여하였다. 조선 태종 때에 와서야 이 휴가가 20일로 줄어들었다. 예조(禮曹)의 제도도 이 정도로 처가 쪽을 우대하고 있었다. 여성의 재혼 사례를 보면 여성의 지위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승장(李勝章)의 아버지는 이동민(李棟民)으로, 권지감찰어사(權知監察御史)를 역임하였다. 이승장의 아버지가 죽자 어머니는 재혼을 하게 되는데, 재혼한 남편이 전남편 유복자 아들인 이승장에게 학업 대신 자신의 일을 돕도록 하자, 자신이 생계 때문에 수절을 못하고 재혼했는데 자신의 아들이 학업을 하지 못하면 죽어서 전남편을 볼 면목이 없다며 당당히 맞섰다. 결국 그녀는 이승장을 당시 최고의 사학인 최충(崔沖, 984~1068)의 솔성재(率性齋)에 입학시켜 관직자로 만들었다. 이렇듯 재혼한 여성이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여성도 재산을 균등히 상속받고 호주가 될 수 있었던 당대 사회 분위기와 관련 있다. 『여주 이씨 세보』에 실린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 최씨의 사조(四祖) 호구(戶口)는 호주인 낙랑군부인, 호주의 아버지 최선(崔墠)·할아버지 최인지(仁祉)·증조할아버지 최백유(崔白楡)·외할아버지 오극정(吳克正)이 순서대로 기재되어 있고, 다음은 죽은 남편 이겸(李謙)과 그의 아버지 이수해(李秀海)·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외할아버지의 순서로 기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는 아들 4형제를 기록하였다. 고려의 호적법이 노무현 정권 때 개정된 호적법과 비슷한 정도로 여성 우대였다.

<서양의 어느 일부다처 남자>

하지만 박유 말고 충렬왕이 직접 일부다처제를 도입하려고 시도한 내용이 <고려사 열전> 김경손 편에 나온다. “처음에 왕이 나라의 호구(戶口)가 날마다 감소되자, 선비와 백성들이 모두 서처(庶妻)를 두게 하려 하였다. 그 자손에게는 벼슬할 수 있도록 하되, 만약 부부간의 신의를 전혀 지키지 않고 본처를 버리고 새사람을 따르는 자는 곧 죄로 다스리게 하였다. 이리하여 해당 관청에서 시행하기로 논의하고 있었는데, 여몽전쟁 때 대활약한 고려의 명장이자 만고의 호국 영웅인 정주분도장군(靜州分道將軍) 겸 대장군(大將軍) 김경손(金慶孫)의 아들 김혼(金渾)이 친구의 부인과 간통하다가 걸려서 예법을 위반한 것으로 인하여 여론이 좋지 않자 이 제도의 시행을 중지하였다.”


아재 개그를 하나 덧붙여 볼까 한다. 박유라는 분을 폄훼하자고 하는 것은 아니고 말 장난이니까 후손들께서는 양해하시라. 박유를 영어로 쓰면 'Parkyou' 일텐데...이를 읽어서 언듯 발음을 잘못 들으면 퍽큐로 들릴 수 있다. 이는 'Fuck you'로 치환되어 심한 욕이 될 수있다. 당시 고려 개성의 여인들이 영어를 알았다면 이렇게 소리쳤을 것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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