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12살에 진(秦) 나라 재상이 된 감라(甘羅)
소년등과(少年登科) 부득호사(不得好死)
중국 전국시대 말기에 진(秦) 나라에 크게 이름을 떨친 종횡가(縱橫家) 중의 한 사람인 감라(甘羅)의 이야기다. 종횡가(縱橫家)는 중국 전국 시대에 제자백가(諸子百家) 가운데 제후(諸侯)들 사이를 오가며 여러 국가를 종횡(縱橫)으로 합쳐야 한다는 합종책(合縱策)과 연횡책(連衡策)을 논한 변설가(辯舌家)로 소진(蘇秦)과 장의(張儀) 등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감라는 진나라 좌승상이었던 감무(甘茂)의 손자로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불과 12살도 되기 전에 벌써 승상(丞相)인 문신후(文信侯) 여불위(呂不韋)의 막료(幕僚)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감라는 승상 여불위가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 집에 돌아오자 이유를 물었다.
“승상께선 왜 표정이 어두우십니까?”
여불위가 말했다.
“연(燕) 나라 왕이 화친의 명목으로 태자 단(丹)을 우리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우리는 장군 장당(張唐)을 연나라로 보내어 재상(宰相)을 하도록 했어. 그런데, 장당이 손사래를 치면 가지 않겠다고 하니 난감하구나.”
진나라와 연나라는 연합해서 중간에 있는 조(趙) 나라를 치는 계획을 세웠고, 양국은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연나라에 인질로 보내지기로 한 진나라 장군 장당(張唐)이 이를 거부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장당은 일찍이 조나라와의 전쟁에 참가하여 조나라의 현상금이 걸려 있었다. 연나라에 부임하려면 조나라를 거쳐야 해서 가는 도중에 습격을 받아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감라가 말했다.
“이렇게 간단한 일은 제게 맡기십시오.”
여불위가 승상인 자기 말도 듣지 않는데, 어린아이가 나선다고 될까라고 하자, 감라가 말했다.
“항탁(項橐)은 일곱 살 때 공자(孔子)의 스승이 되었습니다. 저를 시험해 보시면 될 일을 왜 미리 꾸짖으시는지요?”
감라를 기특하게 여긴 여불위는 순순히 일을 맡겼다. 감라는 을 장당(張唐) 만나러 가서 다음과 같은 문답으로 그를 설득했다.
“장군과 옛날의 명장이었던 무안군(武安君) 백기(白起) 둘 중에 누가 공로가 큽니까?”
“내가 백기와 비교한다면 상대가 안 되지.”
“그럼 지금의 여불위 승상과 옛날 당시의 승상인 범휴(范睢) 둘 중에 누가 더 무섭습니까?”
“그야 여승상이 더 많이 무섭지.”
“그런데 옛날 백기가 범휴의 말을 무시하다가 비명에 죽었습니다. 공은 대체 뭘 믿고 여불위 승상을 무시합니까?”
장당이 감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큰 실수를 저지른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당장이라도 연나라로 가겠다고 했다. 감라가 이 사실을 여불위에게 보고하자 여불위는 크게 기뻐하며 감라를 진왕(秦王, 후에 진시황)에게 추천했다. 감라는 자신을 조(趙) 나라에 사신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진나라에서 연나라로 가려면 조나라를 지나야 했기 때문에, 장당이 연나라로 가는 길에 조나라가 장당을 잡아 죽일 것 같아서, 애초에 이 일을 제대로 처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진왕의 사신이 되어 조나라로 간 감라는 조나라 도양왕(悼襄王)을 만나 또 한바탕 변설가로서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되는데, 그의 전략을 들어보자.
“대왕께서는 진나라와 연나라가 연합하고 그 징표로 서로 인질을 교환하기로 한 것을 알고 계십니까?”
“들어서 알고 있다.”
“두 나라가 손잡으면 가운데 낀 조나라의 형편은 어떻겠습니까?”
“협공을 당하면 아주 위태롭겠지.”
“진나라는 연나라의 뭐가 좋다고 손을 잡겠습니까? 내심은 다 땅을 차지하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니 조나라가 5개의 성을 진나라에 주시면 우리 진나라가 연나라와 동맹을 안 할 수도 있습니다. 그다음 우리가 팔짱 끼고 있을 때, 대왕께서 연나라를 공격해서 더 많은 땅을 차지하면 더 큰 이익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조나라 왕은 하간일대(河间一带)의 5개 성을 진나라에게 바쳤다. 감라는 군대를 동원하지 않고도 조나라 왕으로부터 5개 성을 받았다. 그러자 진나라는 태자 단을 돌려보내고 연나라와의 동맹도 파기했다. 이렇게 되자, 조나라는 진나라를 등에 업고 두려움 없이 연나라를 공격해서 30개 성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중에 11개 성을 진나라에 바쳤다.
감라가 진나라에 돌아오자 진시황이 크게 칭찬했다.
“네 지혜는 나이를 초월하는구나!”
진시황은 감라를 상경(上卿)에 봉하고 원래 감라의 조부 감무(甘茂)에게 주었던 논밭과 집을 그에게 하사했다. 연합이 파기됨으로 인질 교환이 필요 없어서 연나라에 가지 않게 된 장당은 감라에게 감사했다. 이렇게 세치 혀의 외교만으로 총 16개의 성을 취한 큰 공을 세운 감라는 진왕에게 큰 공로자이다 보니 12세라는 어린 나이지만 상경이라는 고위직에 오르고 동시에 수많은 식읍도 수여받았던 것이다. 감라는 이후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한 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고 하늘이 그의 재능을 시기해서 일찍 데려가버렸는지, 아니면 너무 어린 나이에 상경이라는 높은 직위에 오르게 되어 다른 벼슬아치들의 질투로 인해 암살을 당했는지 정확한 기록이 없어 알 수가 없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서 “감라는 나이가 매우 어리지만 기묘한 계책을 생각해 내어 후세에 이름이 일컬어지게 되었다. 그가 행한 계책은 성실한 군자(君子)의 행동이 아니지만 전형적인 그 시대에 맞는 책사였다.”라고 평했다. 감라의 묘는 안후이(安徽省) 영상현(潁上縣) 동쪽 25km, 현재 양호구(楊湖區) 감라향(甘羅鄕)의 영강(潁江)의 북안(北岸)에 있다. 이곳은 영상팔경의 하나로 불린다. 명나라 만력(萬曆, 1572~1620) 연간에 영상현(潁上縣)의 현감인 하태(何豸)가 그 묘의 비를 세웠다. 이후 강물의 범람으로 묘가 무너지고, 강둑도 무너져 유적지가 사라졌다. 광서(光瑞) 15년(1889년), 안후이 순무(巡撫) 진이(陳彛)는 무덤이 있던 뒤 북쪽으로 약 70미터 지점에 흙을 쌓아 무덤을 만들고, 그 앞에 비를 세워 "진상경 감라비(秦上卿 甘羅碑)"라고 썼다. 민국(民國) 11년(1922년), 영상현 지사 황패란(黄佩蘭)과 민국 22년(1933년)에 영상현장인 장정가(张鼎家)가 잇따라 그를 위해 비를 세웠다.(금삿갓 芸史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