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이 얼음으로 덮인 스페인의 4배에 달하는 면적의 그린란드(Greenland)가 2026년 초 트럼프 대통령의 속셈을 드러내는 한 마디로 갑자기 뜨거운 땅덩이로 변해서 빙산(氷山)이 다 녹을 지경이다. 그린란드는 단순히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라는 지리적 특징을 넘어, 북극권에서 지정학적·경제적·군사적 중요성이 점점 더 부각되고 있다. 기후 변화로 인해 빙하가 빠르게 녹으면서, 북극항로가 점차 개방되고 있으며, 이는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새로운 지름길 무역로(貿易路)로 주목받는다. 이 경로는 전통적인 수에즈 운하 항로에 비해 훨씬 짧은 시간에 연결이 가능해 경제적으로 큰 이점을 제공한다. 그린란드는 천연가스, 석유, 희토류(稀土類) 등 북극 지역의 자원 개발에서 중요한 기지로 간주된다. 북극해 해저에는 미개발된 천연가스와 석유 매장량이 전 세계 매장량의 약 13%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린란드 지질조사국 등에 따르면 2023년 기준 희토류는 3,610만 톤, 티타늄 1,210만 톤 등 다량의 자원이 부존(賦存)하고 있다. 쓸모없다고 버려진 땅으로 치부(致簿)하던 것이 일약 황금의 땅으로 부상하여 열강들의 야욕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금삿갓은 국제사회든 개인 간의 사회든 질서는 허울뿐이고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논리가 횡행(橫行)하는 세태를 고쳐보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불가능하기 때문에 넋두리나 해보자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매번 이 땅의 주인이며 수천 년 전 조상부터 터전 삼아 살아온 원주민 툴레인(Thule People)과 이누이트(Inuit) 족에게는 일언반구의 물음이나 의견을 듣지도 않는다. 이런 현실이 힘없는 그들에게는 슬픈 상황이다. 지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슬픈 역사를 알아보자.
기원전 2500년 무렵부터 원주민들이 거주해 왔었는데, 서기 986년 노르드족(Nordman) 바이킹이었던 에리크 라우디(Eric Raudi)가 이 땅을 발견하여 유럽지역에 그린란드 존재를 알렸다. 그는 이곳에 바이킹족을 많이 이주시키고 싶은 마음에 얼음동산이 아닌 푸른 초원인 것처럼 그린란드(Greenland)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처음부터 유럽인들의 야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는 원래 살인죄로 아이슬란드에서 추방을 당했기 때문에 자기가 정착할 땅을 찾던 중 이곳을 발견하여 자기 영토로 선포했다. 그는 이주민을 많이 포섭하여 25척의 배에 태워 출발했으나 겨우 14척만 무사히 도착하여 그린란드 남서부 해안에 정착했다. 그들이 원주민들과 어떤 형태로 접촉을 했는지는 기록이나 자료가 없다. 그들은 결국 노르웨이의 소속으로 노르웨이·스웨덴과 각종 무역으로 생활을 했으나, 500년 정도 삶을 이어가다가 어느 순간 멸종하고 만다. 멸종의 원인에 대한 학자들 간의 다양한 학설이 있으나 패스한다. 아무튼 이 당시까지는 노르웨이령이었다. 그 후는 국제법상 무주지(Terra Nullius)로 원주민들만 있었는데, 1721년에 덴마크의 선교사이자 탐험가인 한스 에게데(Has Egede) 일행이 그린란드를 탐험하고 요새를 건설함으로써 덴마크령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과의 무력 갈등이 심했다. 당시는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하나의 나라로 덴마크-노르웨이왕국이었다. 1803년에 일어나서 전 유럽의 질서를 재편한 나폴레옹 전쟁에서 덴마크가 프랑스제국의 편이 되어 영국과 스웨덴에 싸웠지만 결국은 패하여 전쟁 배상을 하게 된다. 1814년에 맺은 키일조약(Kiel Treaty)에서 덴마크는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넘긴다는 서명을 하면서 단서 조항으로 아이슬란드·그린란드를 제외했다. 그런데 스웨덴이나 노르웨이 측이 이를 묵과하였다. 아마 그 당시는 얼음덩어리 땅으로 가치를 몰랐을 수도 있지만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당시 노르웨이도 그린란드 동부 해안을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총칼 없이 종이에 펜으로 살짝 몇 자 쓴 것이 오늘날 엄청난 땅덩어리를 차지한 것이다. 조약 체결 후에도 덴마크는 남부 해안, 노르웨이는 동부 해안을 주로 사용해 오던 중이었다. 그런데 1931년 덴마크가 섬 전체가 자기네 것이라는 영유권 주장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기해서 노르웨이에 완전 승소를 하였다. 이로서 영유권 분쟁은 덴마크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되자 덴마크는 그린란드의 지배를 사실상 공고히 하기 위하여 1953년 헌법을 개정하여 식민지에서 본국 영토로 편입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일본이 조선에 행하던 내선이체(內鮮一體) 정책 비슷한 정책을 마구 휘두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로부터 원주민 이누이트족에 대한 차별과 핍박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들은 덴마크왕국의 시민이지만 영원히 2등 시민이고 늘 경멸의 대상이었다. 우리의 창씨개명(創氏改名) 같은 것이나 원주민 언어인 칼라히수트(Kalaallisut)를 말살하고, 심지어 민족의 멸종과 강제 동화 정책을 최근까지 시행하고 있었다. 덴마크인들은 지금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적인 정책이 너무나 강력하다. 덴마크에 합법적으로 이민 와서 국적을 가졌지만 마치 유대인 강제 이주 정책 같은 게토(Ghetto) 정책이라는 게 있다. 인구 1,000명 이상 지역에서 주민 절반 이상이 비서구권 출신이고, 실업·학력·소득·범죄 등 4가지 지표 중 2개 이상이 취약하면 ‘게토’로 지정된다. 그러면 해당 지역의 공공주택을 철거하거나 매각하며, 게토 지역 주민은 1세 이상 자녀를 보육기관에 의무적으로 보내 덴마크어와 문화를 배우게 하며, 범죄 시 처벌도 가중처벌 된다. 본토에도 이럴 진데, 먼 섬나라의 원주민들이야 말해 무얼 할까? 두 가지의 사례만 살펴보자.
1950년대와 1960년대에 걸쳐 G50, G60 정책 등을 통해 이누이트족들의 동화정책을 펼친다고 했지만 당사자들의 사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했다. 수천 년간 낚시와 사냥을 기본으로 살아온 그들에게 새로운 삶을 살도록 닭장 같은 아파트로 강제 이주를 시킨다. 아파트로 이주한 후 그린란드 인들은 점차 이에 적응하지 못하게 되었고, 대부분의 알코올 중독에 빠져버리거나 자살률이 급증하여 최상위 수준이 되었다. 1950년대에 그린란드의 여러 마을에서 5~9세 사이의 이누이트 어린이들을 선발하여 가족과 떨어져 코펜하겐으로 보냈다. 그 목적은 단순히 아이들에게 덴마크어를 모국어로 배우는 것뿐만 아니라, 장래 이 섬을 통치하고 근대화로 이끌어갈 수 있는 소수의 엘리트로 양성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장 총명하고 장래가 유망한 아이들이 선발되었다. 아이들이 덴마크에서 2년을 보내고 돌아왔을 때 많은 아이들이 원래 모국어를 잊어버려 부모와 더 이상 소통할 수 없었다. 얼마나 세뇌교육(洗腦敎育)을 받았으면 2년 만에 자신의 말을 잊었을까.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부모 품으로 돌아가는 대신, 몇 년 더 재교육을 받기 위한 일종의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아이들 중 상당수는 방황하게 되었고, 술에 빠지거나 누크(Nuuk)의 얼어붙은 거리에서 구걸하며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2022년 9월, 당시 아이들 중 생존해 있던 여섯 명의 노인들에게 메테 프레데릭센(Mette Frederiksen) 덴마크 총리는 공개적으로 사과해야 했다.
<최초 폭로자 : 나야 리베르트(Naja Lyberth)>덴마크 당국은 이누이트족의 인구 증가를 억제하기 위해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사이, 약 4천500명의 이누이트 여성과 소녀들에게 자궁 내 피임기구(IUD)를 삽입했다. 당시 그린란드 여성 인구는 약 9천 명에 불과해 전체 여성의 절반가량이 되지만 가임(可姙) 여성으로 따지면 아마 70~80%에 해당하는 피해를 본 셈이다. 그 이후에도 수십 년 동안 동의 없이 더 많은 시술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초경(初經)을 경험하지도 못한 어린 여자아이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그 기구가 무슨 기능을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의사들은 그들이나 부모들에게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고, 기구의 목적과 부작용에 대해서도 알려주지 않았다. 어린 여학생들은 학교 또는 기숙사에서 덴마크인 양호교사의 인솔로 지역병원에 넘겨졌다. 12세 미만 여자아이도 있었다. 이 사건은 나선형 피임기구의 모양 때문에 "나선형 사건"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일부 피해자들은 이 기구로 인해 상당한 고통을 겪었다고 증언했다. 많은 여성들이 그 목적을 모른 채 수년간 IUD를 삽입한 채로 지냈고, 왜 아이를 가질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런 피해로 인한 트라우마에 오랜 기간 시달렸다. 그중 일부는 영구 불임이 되었다. 현재 65세인 헤드비그 프레데릭센(Hedvig Frederiksen)이라는 피해자의 증언이다. “14살에 파미우트에 있는 새 학교로 전학 온 지 이틀 만에 지역 병원으로 가서 아무 영문도 모르고 시술을 받았어요. 그때(1974년)에는 덴마크 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그 말이 곧 법이었고, 그 말을 들어야 했어요. 13살밖에 안 된 소녀들을 포함해 열두 명 정도의 소녀들이 병원에 왔어요. 소녀들은 한 명씩 의사의 방으로 들어갔다가 한 명씩 울면서 나왔어요. 나는 두려웠지만 그 자리에 머물러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꼈어요. 의사는 보조 없이 혼자서 여자아이들에게 자궁 내 피임기구를 삽입하고 있었어요.”
덴마크 정부가 강제 피임 시술을 자행했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한 최초의 그린란드 여성은 나야 리베르트(Naja Lyberth)였다. 그녀는 2017년 페이스북에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겼다. 그녀는 십 대 시절 부모의 동의 없이 자궁 내 피임기구(IUD)를 삽입당했다고 밝혔다. 이후 인터뷰에서 그녀는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피임 프로그램의 규모는 2022년 '스파이럴 캠페인(Spiral campaign - 자궁 내 피임기구 캠페인)'이라는 탐사 팟캐스트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어떤 여성은 2022년이 되어서야 자신이 자궁 내 피임기구를 삽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린란드는 1953년에 덴마크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1979년이 되어서야 자체 정부와 의회를 갖게 되었다. 의료 및 생활환경이 개선되었고, 평균 수명이 증가했으며, 그래서 그린란드의 인구도 늘어났다. 바로 이때 덴마크 당국이 과감한 개입을 감행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비자발적 출산 통제 프로그램은 몇 년 안에 출산율을 절반으로 줄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런데, 최소 9명의 여성이 1991년 이후에 동의 없이 자궁 내 피임기구(IUD)를 삽입당했다고 정부에 신고했다. 의료 조사관들은 4건의 시술이 동의 없이 이루어졌고(3건은 문서상 동의가 있었음), 9건 중 8건은 2000년 이후에 발생했으며, 대부분 여성들이 인공 임신중절을 위해 마취된 상태에서 시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자궁에 넣은 피임기구>현재 66세로 덴마크 오르후스(Aarhus)에 사는 통역사 라르센(Larsen)은 말했다. "그들은 저에게 금속 발걸이가 있는 침대에 누우라고 했어요. 옷을 입지 않아서 너무 추웠고 배가 아팠던 기억이 나요. 부모님께 말씀도 못 드리고 아파서 울기만 했어요. 마치 복부에 깨진 유리 조각이 박힌 것 같았어요." 이후 결혼 후 임신을 시도했지만, 그녀는 불임이 되었다. 몇 년 후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을 때, 자궁 내 피임기구(코일)로 인해 심한 출혈이 발생하여 나팔관이 막히고 불임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수많은 그린란드 여성과 소녀들이 폭행을 당하고 그로 인해 임신을 하지 못해 가정을 꾸릴 수 없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끔찍하다. 임신과 출산은 모든 여성의 권리이며, 어떤 국가도 각자 몸에 대한 결정권을 침해할 수 없는 것이다. 2023년 10월, Lyberth와 다른 66명의 여성은 덴마크 정부를 상대로 각각 30만 덴마크 크로네(약 47,695 달러)의 배상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24년 3월에는 143명의 여성이 덴마크 정부를 상대로 총 4,300만 크로네를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덴마크와 그린란드 정부는 이 사건의 전말을 2년간 조사하기로 합의하고, 2023년 5월에 착수하여 2025년 5월에 발표하려고 했으나, 2026년 1월 말까지 조사를 연장했다. 그런데 조사범위가 1991까지 인데, 1991년 이후에도 시술한 사례가 신고되어서 그 파장은 더욱 커질 것 같다.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이 당하는 눈물겨운 이야기인데, 우리에게도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미국의 탐험가 찰스 프랜시스 홀(Charles Francis Hall)>사실 그린란드의 미국 편입에 대한 논의는 트럼프 혼자만의 발상이 아니라 매우 오랜된 사안이다. 덴마크가 키일조약에 그린란드를 넣을 당시에 그들은 섬 전체 중 극소수 일부분의 점유권이었다. 나머지 부분은 아직 미탐험 지역이었다. 미국도 찰스 프랜시스 홀(Charles Francis Hall)이 1860~1870 사이 그린란드의 북서부 지역을 탐험하였기 때문에 연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1867년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매입할 때 수어드 국무장관이 그린란드 매입을 주장했고, 1910년에 필리핀 민다나오를 덴마크의 버진아일랜드와 그린란드을 묶어 교환하자고 제안했었다. 제1차 대전에서 덴마크가 독일 패했다가 나중에 독일이 최종 패전하자 다시 돌려 받았다. 제2차 대전 때에는 또 독일의 수중에 떨어질지 몰라서 미국이 우선 점령하여 지켰다. 그리고 종전 후에도 미군은 계속 주둔하였고, 1951년에 미군 주둔의 협정을 체결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미국이 아니었으면 그린란드는 벌써 독일이나 일본, 러시아의 손으로 넘어갔을 것이다. 덴마크는 그린란드를 지킬 힘이 사실상 없었다. 지금도 미국은 그린란드의 최북단에 비두픽(Pituffik) 우주기지를 운용하고 있다. 이는 원래 툴레(Thule)공군기지 였는데 이름을 바꾼 것이다. 덴마크는 이곳을 방어하지도 않았고, 방어할 힘도 없어서 미국에 의지해온 것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