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조선의 여행가–창해일사(滄海逸士) 정란(鄭瀾)
삼천리 트레킹 거사
우리 민족의 역사에 등장하는 장거리 여행자들은 현재 사회에 들어와서도 매우 특이한 인물로 눈에 띈다. 신라인으로서 수마트라·스리랑카·인도·이란·중앙아시아 등 40여 개 나라를 8년간 여행한 승려 혜초(慧超)가 단연 최고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후예로서 중앙아시아와 서역을 정복한 고선지(高仙芝) 장군이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는 문관(文官)으로서 이제현(李齊賢)이 중국 대륙을 종횡으로 여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지도 제작자 김정호(金正浩)가 단연 많은 지역을 여행했으리라. 하지만 이들은 모두 구도(求道)·정벌(征伐)·왕명(王命)·지도(地圖) 등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한 것이지 여행이 좋아서,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 다닌 것은 아니다. 그런데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에 창해일사(滄海逸士)란 호를 사용한 정란(鄭瀾, 1725∼1795)이 사람이 바로 순수하게 여행이 좋아서 여행을 한 그런 인물이었다. 정란은 그저 여행이 좋아서 풍류(風流)를 즐기느라 조선 천지를 발로 누볐다. 종(縱)으로는 백두산에서 한라산까지, 횡(橫)으로는 대동강(大同江)에서 금강산(金剛山)까지 자신의 발자국을 남겼다. 산은 묘향산·지리산·덕유산·속리산·태백산·소백산 등 전국의 명산을 두루 등반했고, 금강산은 심지어 네 번이나 갔다. 그는 세상을 주유하며 틈틈이 시와 글을 지어 소지한 해낭(奚囊)에 보관하고, 산의 풍치를 묘사하거나 그림을 그려 산맥과 수맥을 표시한 ‘유산기(遊山記)’도 기록했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담는 일에도 주목하여 각지에서 기록한 산수유기(山水遊記)를 썼고, 이를 화가와 문장가들에게 보여주고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다. 그래서 만든 서첩이 <불후첩(不朽帖)>과 <와유첩(臥遊帖)>이다. 썩어 없어지지 말라고 이름 붙였다. 그렇지만 정작 <불후첩>은 전하지 않는다. 그에게 글과 그림을 준 인사들로는 채제공(蔡濟恭)·이용휴(李用休)·강세황(姜世晃)·최북(崔北)·김홍도(金弘道) 등이다. 이들 덕에 정란의 존재는 후대에까지 기억되고 있다. 김홍도가 자택인지 별서(別墅)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그곳에서 강희언(姜熙彦)과 세 사람의 회합 모습을 몇 년 후에 안동의 안기역(安奇驛) 찰방(察訪) 시절에 그린 <단원도(檀園圖)>가 있다. 여기에 정란의 시 2편이 남아 있는데, 여행 내용과는 별로 관련이 없고 본인의 소회(所懷)를 읊은 것이다. 그가 백두산에 올라지었다는 시(詩)가 가재(可齋) 권명우(權明佑, 1722~1795)의 <가재문집(可齋文集)>의 <만록(謾錄)>에 실려 있다. 그는 무신(戊申, 1786)년 여름과 경술(庚戌, 1789)년 겨울에 권명우를 두 번 방문하여 교류한 내용이다. 즉 전자는 풍악산(楓嶽山)을 갔다 오겠다며 방문하여 동침하며 나눈 대화의 내용이 저자의 일기록에 실렸다고 밝혔고, 후자는 관동지방을 다녀오면서 방문하여 정란이 <동국산수보(東國山水譜)>를 작성하려고 한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권명우에게 <풍수도(豊水圖)>를 작성을 요구하였는데 못해 주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정란이 백두산에 올라 읊은 시와 여행 도중에 읊은 시 각 1 수를 소개하였다. 그가 백두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고 느낌 감회를 쓴 것인데, 여행가로서의 장대한 회포가 느껴지는 글을 잠깐 살펴보자.
撑天長白鎭東溟(탱천장백진동명) / 하늘을 찌르는 백두산이 동쪽의 어둠을 누르고
一嘯凌虛頫八紘(일소능허부팔굉) / 허공 위에서 휘파람 부니 천하가 조아리네.
地自崑崙山起勢(지자곤륜산기세) / 땅은 절로 곤륜산에서 형세가 일어났고
水應星宿海通靈(수응성수해통령) / 물은 응당 성수해에서 정신이 통했으리.
彈丸域外三韓國(탄환역외삼한국) / 길쭉한 땅 밖이 삼한의 나라이고
橫帶雲間萬里城(횡대운간만리성) / 가로 두른 구름사이가 만리장성이구나.
擬拓幽荒窮極北(의척유황궁극북) / 아득한 황무지를 북극까지 개척하려면
百年容我老書生(백년용아노서생) / 백 년도 못 살 나 같은 늙은 서생에게 용납할까.
<가재 권명우의 가재문집에 기록된 정란의 백두산시> 정란은 경상도 군위 사람으로 동래 정씨다.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지낸 정광보(鄭光輔, 1457∼1524)의 10대손으로, 정씨 가문은 현종(顯宗) 때 대사간과 예조참판을 지낸 정지호(鄭之虎, 1605∼78) 때까지 명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그런 영남의 사대부가 과거로 출사(出仕)를 하지 않고 전국토를 샅샅이 뒤지는 여행가가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도 처음에는 다른 유생(儒生)들처럼 경서와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스승은 당시 경상도가 배출한 최고의 문사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었다. 계집종의 몸에서 난 서얼(庶孼)에다가 남인(南人) 출신인 신유한은 진사과와 증광문과(增廣文科)에 장원급제해 세상을 놀라게 한 수재 중의 수재였다. 영해(寧海)에는 그의 출생에 대한 전설이 있다. 친아버지 신태래(申泰來)가 낮잠을 자는데 동해 바다의 태양이 떠올라 자기의 입으로 들어오자 놀라서 깨보니 태몽(胎夢)이었다. 급히 안방으로 가서 부인과 합방을 하려는데, 부인이 베틀에 올라 베를 짜고 있으면서 대낮에 무슨 해괴한 일이냐고 거절했다. 마음이 급한 신태래가 부엌에서 일을 하는 여종을 이끌어 거사(巨事)를 치르니 곧 잉태하여 신유한을 낳았단다. 그는 신태시(申泰始)에게 입양되었다. 조선 후기에 서얼에게 잠깐 과거 응시의 기회가 주어졌고 그가 문과에 장원급제한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신유한은 실력은 있지만 신분의 제약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지방의 미관말직(微官末職)이나 제술관(製述官)으로 봉직했다. 1719년에 일본 통신사의 제술관으로 다녀오면서 지은 <해유록(海遊錄)>이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비견되는 저작이다. 아마 정란이 이런 스승 밑에서 수학을 하면서 벼슬길의 불공정함을 느끼고, 여행길의 즐거움을 간접 경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정란은 20대 시기에 스스로 말을 빌려 타고 집에서 200리나 되는 길을 달려 가야산 밑에 머물고 있는 신유한을 찾아갔다. 신유한이 정란에게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묻자 정란의 대답은 이랬다. “제가 세간에서 이롭다고 하는 것과 하고 싶은 온갖 것을 살펴보았지만 한 가지도 좋아할 것이 없고 좋아하는 것은 오로지 옛사람의 문장입니다. 다만 어릴 때부터 공부했으나 장성해서도 알 수 없으니 부끄러울 뿐입니다. 문수보살에게 내 병통을 묻고, 유마힐 거사에게 설법을 듣고 싶습니다.” 신유한은 정란에게 다른 데 가서 배우는 것이 낫겠다고 정중히 거절했다. 정란이 끈질기게 학문의 길로 인도해 달라고 졸랐다. 그제야 신유한은 이 당돌한 젊은이에게 서두르지 말고 차근차근 공부하라는 뜻을 담아 ‘정란에게 주는 글(贈鄭幼觀瀾序)’을 써준다. 이 글은 신유한의 문집 <청천집(靑泉集)>에 실려 있다. 한동안 정란은 신유한의 문인(門人)으로 창작에 몰두했다.
<금강산의 단풍 모습>정란이 28세 때 스승 신유한이 세상을 떠나고, 서른에 접어든 정란은 공부를 접고 여행길에 나섰다. 경전을 공부하고 문장을 익히는 사대부의 길 대신 여행이란 험난한 길을 선택한 것이다. 당시 선비들에게 유행하던 현실도피적인 경향과는 달리 전문 여행가이자 산악인으로 나선 것이었다. 조선시대 선비로서 본연의 길을 두고, 여행에 몰두한 선비들은 대부분 현실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이탈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정란은 현실 도피적이었다기보다는 여행 그 자체가 주는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을 좋아했다. 그는 낯선 세계에 대한 모험의 욕망으로 끓어 넘쳤다. 우선 정란의 성격이 그랬다. 정란은 성품이 오만하여 남들 앞에서 다리를 쭉 뻗고 앉기를 잘했다. 세상이 정한 예법에 얽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그에게 온갖 제한으로 사람을 옭아매는 조선의 현실이 성에 찰 리 없다. 자연스럽게 그는 출세를 위한 과거시험에 연연하지 않았다. 망년지우(忘年之友)였고 경주에 우거(寓居)했던 치암(癡庵) 남경희(南景羲, 1748∼1812)는 <치암집(痴庵集)>의 ‘정창해전(鄭滄海傳)’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간략하게 보자. “선생은 생김새가 깡마르고 기이하여 보통 사람과 달랐다. 성품은 뻣뻣하고 오만하였으며[先生狀貌(선생상모) 枯奇異衆(고기이중) 性亢傲(성항오)], 예법에 구애되지 않았다[不規規於禮法(불규규어례법)]. 탄식하며 ‘대장부가 해동에서 태어나 설령 사마천처럼 하지는 못할지라도, 해동의 명산대천을 두루 본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며 노새 한 마리를 장만하여 홀연히 혼자 길을 떠났다.[嘆曰(탄왈) ‘大丈夫生於海東(대장부생어해동) 縱不能如司馬子長之爲(종불능여사마자장지위) 觀盡海東名山大川(관진해동명산대천) 足矣(족의)].’ 於是[(어시) 備一匹驢(비일필려) 蕭然獨行(숙연독행)]” 정란은 세속적 성공에 관심이 없었고 주어진 틀에 안착하여 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지금도 그런 결정을 하는 게 쉽지 않은데 교통수단도 발달하지 않는 18세기에 여행가의 삶을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는 게 일반인들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그는 서른의 나이에 과감히 여행길에 올랐다.
<백두산 천지>정란을 가장 잘 이해한 문인인 혜환(惠寰) 이용휴(李用休)는 실학파인 이가환(李家煥)의 아버지이다. 그가 백두산으로 떠나는 그를 위해 지은 <대부 정란이 백두산을 찾고 인하여 두루 우리나라의 여러 명산에 유람하는 것을 보내며[送鄭大夫瀾尋白頭山因遍遊域內諸名山(송정대부란심백두산인편유역내제명산)]라는 제목으로 시를 7수를 지었다. 그중 첫 수와 마지막 수를 보자.
久聞白山好(구문백산호) / 백두산이 좋다는 걸 들은 지 오래
胸中結白痞(흉중결백부) / 마음속에 백두산 병 맺혔으니
行望天際白(행망천제백) / 가다가 하늘가에 백두산이 보이거든
擧杯先志喜(거배선지희) / 술잔 들어 먼저 기쁨 기록하시게.
登山如進學(등산여진학) / 등산은 학문(學問)으로 나아가는 것과 같아
大苦必大樂(대고필대락) / 큰 고생에는 반드시 큰 낙(樂)이 있나니
惟天不可昇(유천불가승) / 오직 하늘만은 오를 수 없을 것이나
餘皆得着脚(여개득착각) / 나머지는 모두 발을 붙일 수 있다네.
산을 좋아해서 젊었을 때 혼자 설악산을 한 달에 4~5회씩 종주하고, 지리산은 6개월에 한 번씩 종주했던 방랑벽(放浪癖) 금삿갓도 아직 백두산 등정은 기회를 못 잡아서 아쉬운데, 위의 첫 시를 읽으면 마음이 뛴다. 등산을 전혀 하지 않았을 문사인 이용휴가 백두산과 등산에 대한 절묘한 글을 남긴 것이 필자 금삿갓에게는 매우 감동이다. 특히 시법(詩法)을 어기면서까지 백두산을 나타내는 백(白) 자(字)를 세 구절에 체차적(遞次的)으로 배치한 것이 절묘하다. 본인이나 부모 조상, 후대의 부귀와 공명을 위해 과거(科擧)와 학문에 매진하는 게 조선조 선비의 길이었지만 정란의 인생목표는 달랐다. 그런 그의 과단성과 결단성을 나타내는 시 하나를 더 보자.
人如顧巢鳥(인여고소조) / 사람은 둥지를 돌아보는 새와 같아
欲去復遲回(욕거부지회) / 가려다가 다시 머뭇거리며 돌고 도는데
君有絶世勇(군유절세용) / 그대는 절세의 용기가 있어서
一刀塵網開(일도진망개) / 단칼로 세속의 그물을 끊어 열었네.
<청노새 타고 백두산으로>정란에게 있어 여행은 인생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채제공(蔡濟恭)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직 여행에 몰두한 그를 두고 “천하 만물 어떠한 것도 그의 즐거움과 바꿀 수 없다.”라고 부러워했다. 정란의 벗 소은(素隱) 강식준(姜式儁)은 <소은선생문집(素隱先生文集)> 권 2 증창해정유관란서(贈滄海鄭幼觀瀾序)에서 정란의 삶을 이렇게 요약했다. “사람은 숭상하는 것이 같지 않고 제각각 자기 취미를 추구할 뿐이다. 세상 사람들은 창해(滄海)를 이해하지 못하지만 창해 역시 세상 사람이 이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창해에 대해 나 혼자만이 아는 사실이 있으니, 창해는 세상일을 버리고 산수를 즐기는 고질병이 깊다. 대자연의 원기를 호흡하며 세상 밖을 자유로이 노니는 것이야말로 천하의 즐거움이라 여겨 그 무엇과도 바꾸려 하지 않았고, 늙어서도 지치지 않았다. 명예나 재물을 추구하여 영화로움과 쇠잔함, 얻음과 잃음에 마음을 쓰는 세인(世人)들과는 몇 만 배나 다르다. 육체조차 누가 된다고 여기는 창해이니 그 밖의 것이야 또 말해 무엇하랴.” 강준식 이야말로 정란의 성격과 즐거움을 추구하는 자세를 적절히 표현한 것 같다. 그는 정상적인 삶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의미를 추구하는 본인을 위한 진정한 삶을 살고자 한 것이다. 정란이 이러한 삶은 그가 수학하던 시기의 독서 생활에서 확연히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정란이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범인(凡人)과 다름을 눈치챈 그의 친구 태을암(太乙庵) 신국빈(申國賓, 1724∼99)이 이런 의견을 편지로 보냈다. “그대가 송대(宋代) 이하의 책은 보기를 즐겨하지 않고, 그저 양한(兩漢) 시대의 문장만 읽고, 사마천이 천하를 장쾌하게 노닌 일을 사모하여 ‘천지의 큼과 조화의 무궁함은 그저 책을 읽어서 얻을 수 없다’고 하며 산천을 노닐어 온갖 변화와 괴상한 구경거리를 마음껏 보고 심장과 눈을 웅장하게 하려고 하였소. 그대는 참으로 주자(朱子)가 바다처럼 넓고, 하늘처럼 높으며 끝을 알 수 없이 유구한 공적을 이 방문 안에서 이루었음을 모르오. 그대의 의지는 참으로 웅장하다고 하겠으나 그 학문은 잘못되었소. 대저 학문이란 그 근본을 고요함에 두고 천지에 참여하여 교화를 촉진시켜 만물을 기르는 것이니, 이 고요함을 버리고서 무엇에 근본을 두겠소?” 이 글은 그의 태을암문집(太乙庵文集) 권 4 ‘여정창해유관란(與鄭滄海幼觀瀾)’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조선 선비의 대부분이 신국빈의 생각과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특히 영남 남인의 유학(幼學)으로서 주자학이 학문의 근본이지, 한결 같이 세상을 떠돌며 여행하면서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말은 못마땅한 것이다.
<조선시대 선비의 여행 모습>정란이 집을 나설 때 동반한 것은 청노새 한 마리, 어린 종 한 명,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였다. 그 시대에도 명산에 대한 유산(遊山) 열풍이 불어 금강산에 오르지 않은 것은 풍류 좀 한다 하는 선비들의 수치였을 것이다. 당시 사대부들이 산행 준비를 할 때 참고하던 여행지침서가 <수친서(壽親書)>나 <양로서(養老書)>로 되어 있다. 정란이 이 서적의 내용을 참고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대부들의 유산은 대개 그 규모가 크고, 호사롭고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동반하는 친구를 불러 모으고, 때로는 기생과 악공까지 대동하며 말을 타거나 오르기가 힘들면 중(僧)이나 노비·평민들을 동원하여 뚜껑 없는 가마인 남녀(籃輿)나 농기구의 하나인 담여(擔輿)를 타고 올랐다. 필자 금삿갓이 과거 사람들의 등산기는 어떨까 하고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유청량록(遊淸凉山錄)>를 읽었더니, 이건 등산이 아니라 거의 행락 수준이고 가는 여정에 엄청 민폐를 끼치는 행사였다. 요즘 같으면 인터넷에 올라 여론에 난자(亂刺)될 상황이었다. 금강산이야 명산이고 찾는 사람과 사찰이 많아 도중에 주막(酒幕)이나 민가가 더러 있겠으나, 백두산이야 상황이 다를 것이다. 갑산부사(甲山府使)였던 이의철(李宜哲)의 <백두산기(白頭山記)>를 보면, 군관과 장교·백성·토병·포수·노비 등 40여 명의 중대급 인원을 대동했다. 그러나 정란은 단출한 여장으로 자연과 대면했다. 이렇게 해서 금강산 비로봉(毗盧峯)을 네 번이나 올랐다.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백두산을 등반하기 전에 두 번, 백두산을 등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한 번, 마지막으로 1788년 강세황·김홍도·김응환을 비롯한 사람들과 함께 오른 일이 확인된다. 강세황이 장안사(長安寺)에 묵고 있을 때 약속도 없던 정란이 표연히 나타난 일이 있었다. 정란은 타고 다니던 청노새가 금강산과 관동팔경 구경 후에 삼척 땅에서 병들어 죽자 길가에 묻고 제문(祭文)을 지어 애도하였다고 한다. 그 청노새가 김홍도가 그린 <단원도(檀園圖)>에 등장한다.
<와유첩의 북간정>정란은 금강산을 비롯하여 명승(名勝)을 여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문필가나 화가들에게 들려주거나, 본인이 그리고 지은 것을 보여주고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해서 ‘산행도(山行圖)’를 만들었다. 남경희(南景羲)는 <정창해전(鄭滄海傳)>에서 “그는 특히 금강산을 좋아하여 발길이 네 번이나 비로봉 정상에 이르렀는데[尤好楓嶽(우호풍악) 屨四及於毘盧之上(구사급어비로지상)], 그림을 그려 감상 자료로 삼았다[作畫以資翫賞(작화이자완상)]. 그림은 칠칠(七七) 최북(崔北)이 그렸고, 찬(贊)은 혜환(惠寰) 이용휴가 지었으며, 글씨는 표암(豹菴) 강세황이 썼으니 이 셋을 삼절(三絶)이라 일렀다[崔七七所寫也(최칠칠소사야) 惠寰之贊(혜환지찬) 豹庵之筆(표암지필) 並稱三絶(병칭삼절)].”라고 했다. 다음은 남경희가 말하는 이용휴의 찬(贊)으로 추측되는 대목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이 이 산에 다녀갔다 해도 오히려 공산(空山)이었지. 오늘 금강산이 그대를 만나자 모든 바위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하는구나! 그대를 두고 산문(山門)을 처음 연 분이라 해도 좋겠구나!”라고 했다. 정란이 그려 달라고 한 화첩에는 앉았거나 서거나 길을 걷는 모습, 노새를 타고 홀로 가는 모습, 외로운 배에 홀로 기대는 모습, 지팡이로 먼 데를 가리키는 모습, 갓을 벗고 쭈그리고 앉은 모습 등등 갖가지 자세가 곡진(曲盡)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정란은 금강산의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한 최초의 사람이다.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사람이 금강산을 다녀갔지만 그저 다녀만 갔을 뿐 산의 비경을 발견해내지 못했고, 금강산과 감정을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정란이 금강산에 오르자 모든 바위와 골짜기가 반가운 얼굴을 한다고 했다. 말하자면 그의 탐방이 금강산의 바위나, 골짜기 곳곳에 생기를 불어넣었으니, 금강산의 첫 문을 연 사람은 바로 정란이라는 것이다.
<남경희의 치암집 : 정란의 전기와 청노새의 노래가 실려있다.>정란은 집을 나온 이래 청노새를 타고 다닌 모양이다. 이 충직한 청노새는 주인을 태우고 금강산을 오르고 관동팔경(關東八景)을 두루 구경하며 내려오다 그만 삼척 땅에서 병들어 죽었다. 정란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길 왼쪽에 묻고 제문을 지어 애도했다. 그 제문은 처절하여 읽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람들은 청노새가 죽어 묻힌 곳을 청려동(靑驢洞)이라 불렀다. 정란은 동물에게까지도 무정하지 않게 대한 것이다. 그의 힘들고 지루하며 고생스러운 여행길을 함께 한 것은 동료 양반이나 시인묵객이 아니라 청노새와 종 한 명이었다. 건장한 말이 아닌 작은 청노새를 타고 다녔다는 사실에서 그의 여행의 멋을 짐작할 수 있다. 최북(崔北)의 그림에 기려도(騎驢圖)가 제법 있는데, 그가 정란의 모습을 모티브로 그렸는가 보다. 정란이 말 달려서 급히 다음 장소로 이동하지 않고, 타박타박 먼 길을 걷는 세 동반자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남경희는 46구절에 달하는 장편의 <정창해의 청노새 노래(鄭滄海瀾靑驢歌)>를 지어 분신(分身)과 같은 청노새를 잃고 시름에 잠긴 정란을 달랬다.
滄海先生好奇者(창해선생호기자) / 창해 선생은 기이함을 좋아하는 분
騎用靑驢不用馬(기용청려불용마) / 청노새를 타고 말은 아니라네.
靑驢自有烟霞姿(청려자유연하자) / 청노새는 연하(煙霞)의 자태 있어서
不似桃花五花赭(불사도화오화자) / 도화마(桃花馬)는 아니고 오화마처럼
肯受珠勒與玉鞍(긍수주륵여옥안) / 구슬 재갈과 옥안장을 기꺼이 하여
日日馳逐塵埃間(일일치축진애간) / 날마다 티끌 속을 쫓아 달리며
只容浩然圖南輩(지용호연도남배) / 오직 맹호연이나 진도남(陳圖南) 같은 사람들이
傲骨高坐肩如山(오골고좌견여산) / 뽐내며 높이 앉아 어깨를 으슥하게 허락하네.
先生得之遊山水(선생득지유산수) / 선생이 이를 얻어 산수를 노닐어
踏遍靑丘數千里(답편청구수천리) / 우리나라 수 천리를 두루 밟고 다니네.
不蹄不嚙甚順適(부제불교심순적) / 편자와 재갈 없이도 몹시 순해서
東西南北惟其使(동서남북유기사) / 동서남북 생각대로 시키네.
朝從白頭山下歸(조종백두산하귀) / 아침에 백두산 내려와 돌아오는 길 모시고
暮憇漢挐之翠微(모게한라지취미) / 저녁에 한라산 중턱에서 쉬는구나.
春風翫水遲遲去(춘풍완수지지거) / 봄바람은 물을 희롱하며 천천히 불고
落日尋山速似飛(낙일심산속사비) / 지는 해는 산을 찾아 나는 듯이 빠르네.
最向金剛慣登歷(최향금강관등력) / 금강산을 가장 많이 버릇처럼 올랐더니
萬二千峯皆是跡(민이천봉개시적) / 일만 이천 봉이 모두 발자국이네.
風霜險阻長相隨(풍상험조장상수) / 풍상이 험악해도 긴 얼굴로 따르고
似解主人山水癖(사해주인산수벽) / 주인의 산수벽을 이해하는 듯이
鏡浦西橋犯風雪(경포서교범풍설) / 경포호의 서쪽 다리에 풍설이 범해도
藥山東臺共除夕(약산동대공제석) / 약산의 동대에서 같이 밤을 새우네.
(…중략…)
騎驢覔驢無乃是(기려멱려무내시) / 노새 타고 노새 찾지 아니할까
如此妄想宜消除(여차망상의소제) / 이런 망상 의당히 씻어버려야
先生且須學果老(선생차수학과로) / 선생은 당연히 더 배울 게 없는 노인이니
紙驢行尋故山道(지려행심고산도) / 종이 노새로도 옛 산의 길을 찾을 게요.
<김홍도가 그린 단발령 와유첩 : 17억에 낙찰>정란은 전국을 떠돈 여행가지만 본래 문사로서 시와 문장에 능했다. 세상을 주유(周遊)하며 시와 글을 지어 소지한 해낭(奚囊)에 넣었다. 산의 풍치를 묘사하거나 그림을 그려 산맥과 수맥을 표시한 <유산기(遊山記)>도 그 해낭에 들어 있었다. 그는 여행의 의미를 예술적으로 담는 일에도 주목하여 각지에서 산수유기를 썼고, 위에 예를 든 화가와 문장가들로부터 자신의 산행을 묘사한 그림과 글씨를 받았다. 이 서첩이 영원히 썩지 말라는 <불후첩(不朽帖)>이다. 그는 이 화첩을 당대의 명사인 채제공(蔡濟恭)과 성대중(成大中) 등에게 보이고 글을 받았다. 채제공은 정란에게 “당신이란 사람 자체가 썩어서 사라지지 않을 존재”라고 하며 그림이나 찬사가 따로 필요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화가 김홍도와 맺은 인연은 특별하다.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대표작인 <단원도>는 사실 정란을 위해 그린 것이다. 이 그림 상단에는 정란이 쓴 2편의 시와 김홍도가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을 적은 제사(題辭)가 실려 있다. 정란은 1780년 묘향산을 거쳐 의주로 해서 백두산 정상에 오르고, 금강산을 거쳐 돌아온 뒤 서울 김홍도의 집을 방문했다. 그때가 신축년(1781)이었다. 아마 백두산을 유람한 행적을 김홍도에게 전해주고 그림을 부탁하기 위해서 찾아간 듯하다. 그 자리에 화가 담졸(澹拙) 강희언(姜熙彦)도 함께 했다. 여기서 정란은 필시 자기의 백두산 여행담을 재미있게 늘어놓았을 것이다. 나이가 가장 많은 정란이 좌장의 위치에서 꼿꼿하게 앉았고, 김홍도는 거문고를 연주하고, 강희언은 부채를 들고 비스듬히 앉아 술을 권했다. 마당 연못에는 연잎이 활짝 펼쳐 있고, 수양버들이 늘어진 대문 밖에는 정란이 타고 왔을 법한 청노새가 빈 안장을 얹은 채 기다리고 있다. 벙거지를 쓴 채 쪼그리고 앉아 졸고 있는 아이가 정란의 시중드는 종이다. 한 시대 명사 3명이 둘러앉아 즐겁고 진솔한 시간을 보내고 이를 진솔회(眞率會)라 불렀다. 그로부터 3년이 더 지난 1784년 12월, 경상도 안동의 안기역의 찰방(察訪)으로 재직하던 김홍도를 정란이 또 찾았다. 김홍도가 보기에 환갑이 다 된 정란은 아직도 얼굴과 용모에는 여전히 산수의 구름 기상이 서려 있고, 그 정력은 늙었는데도 불구하고 쇠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다음 해 봄 한라산을 등반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우는 모습에 감탄했을 것이다. 그래서 둘은 “닷새 동안 낮밤으로 취하면서 회포를 푼 후에 몇 년 전 진솔회 모임을 추억하기 위해 바로 이 <단원도>를 그려주었다. 정란이 쓴 화제시(畫題詩)를 살펴보자.
錦城東畔歇蹇驢(금성동반헐건려) / 금성 동편에 절뚝이는 노새를 쉬게 하고
三尺玄琴識面初(삼척현금식면초) / 석자 거문고로 처음 만남 노래하네.
白雪陽春彈一曲(백설양춘탄일곡) / 잔설 남은 따사로운 봄날 한곡 뜯으니
碧天寥廓海天虛(벽천료곽해천허) / 푸른 하늘 고요해 하늘과 바다 텅 빈 듯하네.
檀園居士好風儀(단원거사호풍의) / 단원거사는 풍채가 좋고 자세가 바르며
澹拙其人偉且奇(담졸기인위차기) / 담졸 강희언 그 사람은 장대하고 기이했네.
誰敎白首山南客(수교백수산남객) / 누가 백발의 늙은이 산 남쪽으로 이끌어
拍酒衝琴作許癡(박주충금작허치) / 술잔 부딪히고 거문고 타 미치게 만들었나.
그런데 이 그림에는 정란의 화제시와 함께 김홍도가 그림을 그린 연유를 기록한 발문(跋文)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창해(滄海) 정란 선생께서 북으로 백두산에 올라 변경까지 다다랐다가 동편 금강산으로부터 누추한 단원(檀園, 김홍도의 집)으로 나를 찾아주셨으니, 때는 신축년(1781) 청화절(淸和節, 4월 1일)이었다. 들의 나무엔 햇볕이 따스하고 바야흐로 만물이 화창한 봄날에 나는 거문고를 타고, 담졸 강희언은 술잔을 권하고, 선생께서는 모임의 어른이 되시니, 이렇게 해서 참되고 질박한 술자리를 가졌도다. 어언(於焉) 간에 해가 다섯 차례나 바뀌어 강희언은 지금 세상에 없는 옛사람이 되었고, 가을 측백 떨기에는 이미 열매가 열렸다. 나는 궁색하여 집안을 돌보지 못하고 산남(山南)에 머물러 역마(驛馬)를 맡은 관청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해가 장차 한 차례 돌아오게 되었다. 이곳에서 홀연히 선생을 만나게 되니, 수염·눈썹·머리칼 사이에는 구름 같은 흰 기운이 모였으되 그 정력은 늙어서도 쇠하지 않으셨다.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올봄에는 장차 제주도의 한라산을 향하리라 하니, 참으로 장하신 일이다. 다섯 밤낮으로 실컷 술을 마시고 원 없이 이야기하기를 단원에서 예전에 놀던 것처럼 하였더니, 슬픈 느낌이 그 뒤를 따르는 지라, 끝으로 <단원도> 한 폭을 그려 선생에게 드린다. 그림은 그 당시의 광경이고, 윗면의 시 두 절구는 당일 선생께서 읊으신 것이다. 갑진년(1784) 12월 입춘 2일 후에 단원 주인 사능(士能) 김홍도가 그렸다.” 발문의 내용에는 서울 단원에서의 모임 후에 해가 다섯 차례나 바뀌었다고 했는데, 모임이 신축년(1781)에 있었고, 정란이 갑진년(1784) 12월에 안동으로 찾아왔으니 기간에 약간의 착오가 있는 듯하다. 인명 자료에 강희언의 졸년(卒年)이 1784년으로 되어 있으니 담졸이 먼저 죽은 것은 맞다.
<김홍도가 근무했던 안기역의 현재 : 안동시 안기동 일대>정란이 금강산을 네 번 다녀왔지만 백두산과 한라산은 오랫동안 미답의 세계로 남아 있었다. 쉰다섯 되던 해에 정란은 백두산과 한라산 등반계획을 세웠다. 1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백두산에 대한 등산 정보는 거의 없었다. 18세기 이후로 이의철(李宜哲)은 1751년에 선발대 100명과 본대 40명을 동원하여 올랐다. 홍계희(洪啟禧)·박종(朴琮)·신상권(申尙權) 등이 1764년에 동반하여 올랐고,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의 현손인 김진상(金鎭商)은 벼슬길이 안 풀릴 때마다 4번이나 올랐고, 서명응(徐命膺)·조엄(趙曮)민원(閔源)·조한기(趙漢紀) 등은 함께 1776년에 올라서 천지 주변을 관찰하여 그림으로 그리거나 봉우리 이름을 자세히 기록했다. 신광하(申光河)는 1784년에 올라서 천지를 보고 자신의 호(號)를 대택(大澤)으로 바꾸었다. 정란의 등산 계획이전에는 이 정도의 사람들이 백두산을 등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그 지역 관료로 부임했거나 귀양을 간 김에 백두산에 올랐고, 신광하처럼 친지가 그 지역의 벼슬아치가 된 기회를 이용해 지방관의 협조를 받아서 대규모의 부대를 이끌고 등반하기도 했다. 이들이 유산기를 지었지만 당시 교통이나 통신 수단으로 보아 정란이 이들의 유산기를 통해서 정보를 수집했을 것 같지는 않다. 다른 사람의 유산기에서 보듯이 당시 백두산은 오지 중의 오지로 등산이 아니라 탐험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정도였다. 개인의 의욕만으로는 무턱대고 오를 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쉰다섯 살의 정란은 자신의 여행 계획과 의욕을 다음과 같이 드러내는 글이 있다. “이 늙은이가 서른이 되어 청노새 한 마리, 아이종 하나, 보따리 하나, 이불 한 채를 가지고 남으로는 낙동강을 노닐고, 덕유산을 오르고 속리산을 더듬고 월출산에 오르고 지리산을 엿보았다. 서(西)로는 대동강을 굽어보고 동(東)으로는 태백산과 소백산을 구경하고 단발령을 넘어 두 번 금강산에 들어가서 바닷가를 따라 돌아왔지. 오직 북쪽의 백두산과 남쪽의 한라산에는 아직도 나의 발자국이 없단 말씀이야. 하지만 나는 아직 힘이 있어.”
<한라산 설경>정란은 18세기 순창 출신 학자로 지리서인 <산수경(山水經)>을 지은 신숙주(申叔舟)의 방계 후손인 신경준(申景濬)을 찾아가 “나는 곧 관서 땅으로 가서 왕검성(王儉城)에 이르러 토산(兎山)의 성인이 만든 묘소와 정전제(井田制)를 구경하고, 태백산(지금의 구월산)에 들어가 단군단(檀君壇)을 방문하고 개마고원을 넘어서 불함산(不咸山, 백두산의 이칭)에 오를 것이오. 그리하여 이국(二國) 산천을 내려다본 다음에 남쪽으로 내려와 기달산(怾怛山, 금강산의 이칭)과 설악산을 노닐고서 돌아올 것이오.”라고 말한다. 그 말을 한 지 2년 후인 1780년 전후한 시기에 정란은 백두산 등반을 감행했다. 그의 백두산 유람은 거의 1년 정도 걸린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백두산에서 돌아와 김홍도 등 많은 사람들에게 신기한 견문을 전달했다. 화가 최북에게는 자신이 본 것을 그려달라고 부탁하고, 이를 친구 신국빈에게 보여주었다. 정란은 친구에게 “백두산 정상에 올랐더니 천하만사를 까마득히 저절로 잊었소. 세상의 이른바 부귀빈천, 사생(死生)과 애환이 하나도 내 가슴으로 들어오지 않았고, 제왕과 영웅호걸의 업적이란 것도 그저 미미한 것에 불과하더이다.”라고 그 충격을 전해주었다. 그래서 신국빈이 여행 그만하고 주자학으로 돌아오라고 앞에 소개한 편지를 보낸 것이다. 한편 정란은 만나는 지인들에게 이제 한라산만 남았다고 말했다. 그러자 이용휴가 이렇게 만류하는 글을 써주었다. “정일사(鄭逸士)가 역내(域內)의 많은 승경지를 두루 노닐고서도 오히려 역외(域外)의 명산을 보지 못했다고 한스럽게 여겼다. 나는 일사(逸士)에게 일렀다. ‘비유하자면, 절세미인을 사모하는 자가 한번 미인을 보게 되면 마음이 바로 심드렁해지는 것과 같네. 차라리 오랜 세월 마음에 놓아두고 혹여라도 한번 만나기를 기다리는 게 낫지 않겠소.’” 그의 만류가 주효(奏效) 하지는 않았지만, 백두산을 하산하고 4년 이상의 기간이 지난 후인 1785년 봄에 한라산 등반에 성공한 듯하다. 한라산은 육지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조선시대 일반인이 여행 목적으로 등정한 경우는 드물 것이다. 유산기를 남긴 육지인들의 대부분은 목민관이나 유배를 온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제주 토착민들이다. 정란이 등산하기 이전에 먼저 올랐던 사람들을 그들이 남긴 유산기를 토대로 시대적으로 살펴보자. 1600년 이전에는 임제(林悌)의 <남명소승(南溟小乘, 1578)>이 최초이고, 17세기에는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南槎錄, 1601)>·김치(金緻)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1609)>·이증(李增)의 <남사일록(南槎日錄, 1680)>·김성구(金聲久)의 <남천록(南遷錄, 1680)>·이익태(李益泰)의 <지영록(知瀛錄, 1694)> 등이 있다. 18세기에는 이형상(李衡祥)의 <남환박물(南宦博物, 1702)>·이해조(李海朝)의 <등한라산(登漢拏山, 1707)>·조관빈(趙觀彬)의 <유한라산기(遊漢拏山記, 1732)> 등이다. 이들 기록의 성격상으로 보아, 단순한 개인 유산기로 있지만 목민관으로서 행정 기록의 성격도 있었다. 정란 이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와서 기록을 남겨 놓았으니 그가 일부를 입수하여 일었을 수도 있겠다. 특히 임제의 유산 기록은 그의 문집 <임백호집(林白湖集)>이 1617년에 초간 된 관계로 조선 사대부들에게 많이 유포가 되었으리라 본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등산 모습>정란은 만년에 서울에 들러 성대중(成大中)을 찾아가 <불후첩(不朽帖)>을 내어놓고 글을 받으려 했다. 성대중은 한 가지 삽화를 들어 정란이 불후(不朽)의 이름을 남길 것을 예언했다. “창해옹이 일찍이 내 집을 찾았는데, 손님 가운데 옛일에 해박한 사람이 있어 그를 보고 내게 얼굴을 돌리며 말했다. ‘자네는 이마두(利馬竇, 마테오 리치)를 본 적이 있는가? 저 노인이 그와 흡사하네그려!’ 그 손님은 한 번도 창해옹을 본 적이 없었지만 창해를 이마두에 비교했다. 창해옹은 그 말을 흔쾌히 여기고 좋아했다. 이마두라면 천하를 두루 구경했고, 창해옹은 동국(東國)을 두루 구경했다. 크고 작음에서 비록 차이가 있으나 두루 구경한 점은 같다. 그들의 모습이 비슷한 것이 마땅했다.” 김홍도의 그림 <단원도>에서 정란이 마테오 리치와 닮은 모습을 찾아낼 수는 없다. 다만 정란의 풍모나 산수를 즐기는 성격에서 그와 같은 위대한 여행가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다. 서른 이후 정란이 본격적인 여행에 빠지면서 모든 세속적 일상은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가정까지도 거의 버린 듯하다. 채제공은 화첩을 들고 찾아온 정란을 평하여 “처자식을 버리고 명산대천 여행을 좋아한다.”라고 평했다. 가정에 무책임한 아버지 정란을 대신한 사람은 외아들 정기동(鄭箕東, 1758∼75)이었다. 아들의 자는 동야(東野), 호는 만취(晩翠)이나 갓 결혼한 18세에 요절했다. 그리 젊어서 죽었으니 기록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이용휴가 쓴 묘지명에 “슬프다! 산길에 사람의 발길 끊어지고 숲에 걸린 해가 저물어갈 때면 문에 기대어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들의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라고 씌어 있다. 정란은 아들이 죽은 후 1778년 서울로 가서 이용휴와 신경준에게 아들 묘지명과 묘갈명을 부탁했다. 이용휴는 ‘포의정군묘지명(布衣鄭君墓誌銘)’을, 신경준은 ‘정동야묘갈명(鄭東野墓碣銘)’을 각각 지어주었다. 묘지명은 돌에 새겨 무덤에 같이 묻는 것이고, 묘갈명을 비석에 새겨 세우는 것이다. 이용휴의 글을 읽어보자. “남다른 덕을 지녔음에도 오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까닭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남다른 덕을 행하는 사람은 보통의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아야 할 대상이기에 하늘이 그를 세상에 내려 보내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끔 한다. (…중략…) 정군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을 갖추었다. 성품이 효성스러워 부모님이 원하기도 전에 실천했고, 말씀을 하면 메아리처럼 바로 반응했다. 이 일 저 일 모두 봉양하여 부모가 계신 줄만 알 뿐 자기 자신도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밖의 일은 좋아하는 것이 없었으나 오직 책을 좋아하여 남들이 식욕과 색욕에 대해서 탐하듯 하였다. 죽기 전에 효도를 다하지 못한 일과 책을 다 읽지 못한 일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임종을 앞두고서 그 아내인 조씨(趙氏)에게 시부모를 잘 모실 것과 책을 무덤에 함께 묻어줄 것을 당부하였다. 아내가 흔쾌히 허락하고 그대로 실천하였다. 명(銘)을 짓는다. 눈을 한번 감고 나면 온갖 욕망이 사라져 만사가 끝이다(目一瞑而百念息矣 萬事已矣). 그대는 부인으로 자식을 삼고(君欲以婦爲子) 서책으로 수의 입혀(以書爲襚) 그 뜻을 이었구나(續成其志)! 지극한 정성은 쉼이 없다고 경전에 일렀고(傳曰至誠無息), 군자의 마음은 죽어도 그치지 않는다고 선유(先儒)가 말하더니(先儒言君子之心死而不已者) 바로 그대를 두고 한 말이다(君是也). 슬프다(噫)! 산길에 인적 끊어지고 숲에 해가 저물 때면(山徑人絶 林日欲昏) 오직 문에 기대어 아버지를 기다리는 건 그대일 거야(猶疑君之候父於門也), 달빛 처연하고 바람이 시산하며(月苦風酸), 나무가 흔들리고 새가 울 때면(木鳴鳥呼) 밤에 그대의 책 읽는 소리 들리겠지(或者君之夜讀咿唔邪).” 신경준도 정기동의 묘갈명을 길게 쓰면서 “부모가 있고 처가 있으며(有父有母有妻), 행실과 뜻은 있었으나(有行有志), 수명과 성취가 없고(而無年無成), 형제와 자식이 없었으니(無兄弟無子), 아! 탄식할 뿐이로다(其嗟也已)”라고 마무리 지었다. 한편, 기동이 학문을 배우던 한양의 장인인 조운도(趙運道)는 사위가 그토록 좋아하던 공부를 마치지 못하고 일찍 죽은 것을 상심하여 그에게 가르치려던 경사자집(經史子集)의 이름을 차례로 써서 ‘칠등귀독편(漆燈歸讀編)’을 만들어 무덤에 넣어주었다고 한다. ‘칠흑같이 깜깜한 등불 밑으로 돌아가 읽어야 할 책’이란 이름이니, 무덤에서나마 공부하라는 의미였다. 공부도 마치지 못하고 죽은 사위에 대해 애통해하는 마음이 뭉클하게 느껴진다.
<가마꾼들의 고생스러운 모습>정란은 조선시대의 기성사회의 관례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렇기에 그의 행위는 종종 비웃음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이용휴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에 대해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기다려보자고 했다. 정란은 산수에 관한 열정 하나로 자기가 좋아하는 여행에 인생을 바친 기이한 선비다. 그러한 독특한 삶 때문에 당시 어린아이들과 종들조차 그를 ‘창해 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현대적 개념으로 보자면 트레킹맨 혹은 산악인쯤 될 갓이다. 18세기 조선 땅에서 ‘산수벽(山水癖)만큼은 정란을 따를 자가 없었다. 위에서 말했지만 정란은 산을 다녀와 체험한 내용을 남기기 위해 교유했던 화가와 문장가의 작품을 받아 첩(帖)으로 엮었다. 그것이 두 개의 그림첩 <불후첩(不朽帖)>과 <와유첩(臥遊帖)>이다. <불후첩>은 어느 누가 소장하고 있는지 멸실되었는지 불분명하다. 정란 자신이 남긴 기록, 지도 등은 전해지지 않으나 정란과 교유한 많은 이들이 그의 행적을 칭송한 기록이 있고, 정란처럼 자신의 꿈을 실천하려는 의지를 밝히며 다닌 이가 별로 없으므로 창해 정란의 여행 기록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04년에는 서울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에서는 정란의 그림첩인 <와유첩>을 전시한 바 있다. 자취를 감추었던 기록이 200여 년 만에 허필, 강세황, 최북의 그림과 글을 통해 정란의 발자국이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셈이다. 아쉽게도 필자 금삿갓은 그 전시회를 참관하지 못했다. 다만 풍문으로 들었다. 다만 정란의 생몰 연도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 필요해 보인다. 마지막으로 정란이 여행 중에 남긴 시 한수를 음미하면서 끝마친다.
凍柳悠悠葉脫柯(동류유유엽탈가) / 언 버들 잎 떨어진 가지가 아득하고
乾坤日暮此經過(건곤일모차경과) / 하늘과 땅에 날 저물고 여기를 지나네.
行人是日餱糧盡(행인시일후량진) / 나그네의 오늘은 마른 양식 다해가고
羸馬前程雨雪多(리마전정우설다) / 지친 말의 앞길은 눈비가 잦구나.
隔溪殘燈疑舊店(격계잔등의구점) / 개울 건너 등불은 옛 주막이런가?
吠門孤犬是誰家(폐문고견시수가) / 문에서 홀로 개 짖는 곳은 누구네 집인지.
末句不記慷慨悲(말구불기강개비) / 마지막 구절을 못 적은 게 한탄스우나
凉意溢言外蓋是(량의일언외개미) / 과장된 말의 시원한 느낌은 겉치레일 뿐인데.(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