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최고령 73세 노총각 홍유손(洪裕孫)

70 넘은 노총각도 장가갈 수 있다.

by 금삿갓

홍유손(洪裕孫)은 생졸연대가 1452년(문종 2)∼1529년(중종 24)으로 파악된다. 오류인 것 같은데, 출생이 1431년이라는 다른 자료도 존재한다. 그는 조선 초기 성종~중종 시대에 기인(奇人)의 삶을 산 시인이다. 홍유손이 어렸을 적에 원각사(元覺寺)에서 기거하며 불경을 읽고 있었다. 어느 날 김수온(金守溫)과 서거정(徐居正) 등이 조정에서 퇴근하는 길에 절 구경을 왔다가, 홍유손이 시를 잘 짓는다는 말을 듣고, 시험 삼아 불러서 운(韻)을 부르니, 어린 홍유손이 메아리처럼 즉시 응수하였다. 그 시의 연구(聯句)에 “청산녹수는 우리 집의 땅인데, 그 누가 명월청풍을 주장하나.[靑山綠水吾家境(청산녹수오가경) 明月淸風孰主張(명월청풍숙주장)]”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를 듣고 서거정뿐만 아니라 같이 동행하였던 김시습도 눈물을 글썽이며 감탄하였단다. 이때부터 홍유손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서, 그 시대의 명공거경(名公巨卿)들은 모두 홍유손과 사귀기를 원하였고, 후진 선비들은 시를 지어 반드시 그의 품제(品題)를 받으려고 하였다. 12세 때에 세조(世祖)가 별전(別殿)에 불러서 보고 시를 짓게 하니, 글을 짓는데 초(草)하는 일이 없었고, 또한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자는 여경(餘慶), 호는 소총(篠叢)·광진자(狂眞子)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 등과 절친한 사이였고,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의 문하(門下)에 출입하였다. 김종직이 시를 증여하여 촉망(囑望)이 깊었고, 두류산(頭流山)에 보내어 글을 읽게 하니 비로소 불교의 그른 것을 깨달았다. 세조와 연산군에 저항한 조선 초기 <죽림 7현(竹林七賢)>의 중심인물이었다. 아버지는 관아의 벼슬아치인 아리(衙吏) 홍순치(洪順致)이고, 늦장가를 가서 아들 홍지성(洪至誠)을 두었다. 홍유손(洪裕孫)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바르고 총명했는데, 5세 때 학문에 뜻을 두어 수업을 시작했고, 10세 때에 경전을 통독해 선생들이 이인(異人)으로 대우하였다. 남양부사 채수(蔡壽)가 그의 문장이 능함을 보고 모든 이역(吏役)을 면제하여 주었다. 그러자 영남으로 가서 김종직(金宗直)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아 학자로서 문장이 뛰어나 명성을 떨쳤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인 추강(秋江) 남효온과는 동문생으로 의기투합하여 가장 가깝게 지냈다. 세조의 왕위 찬위(簒位) 사건 이후 벼슬을 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며 세속적인 영화를 버리고 뜻을 같이 하는 청담사림(淸談士林)인 남효온(南孝溫), 이총(李摠), 이정은(李貞恩), 조자지(趙自知), 우선언(禹善言), 한경기(韓景琦) 등과 같이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 하고 머리에 소요건(逍遙巾)을 쓰고, 시(詩)·주(酒)로 세월을 보내며 고담준론(高談峻論)으로 사악을 응징하며 사회 정의를 추구하며 지냈다. 이들 학자들은 성리학뿐만 아니라 노장학(老莊學)에도 정통하여 학문을 토론하며 세월을 보내니, 이들과 뜻을 같이 하는 청담파 선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홍유손은 유(儒)·노(老)·장(莊) 외에 불(佛)·선(仙)에 대한 문록(文錄)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당시 유교가 국교(國敎)로 되어 있어 노·불은 비판적으로 여기던 시대임에도 노·불 편에 서서 신선도(神仙道)를 즐기며 동료들이 영달을 위하여 관계(官界)로 진출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틈이 있는 대로 명산대천(名山大川)을 찾아 벗과 더불어 시를 지으며 노래 부르고 춤추며 지냈다. 그는 김시습을 문학의 스승으로 모시고 다녔는데, 서로 부자처럼 사이가 좋았다.

<일러스트레이터 이규성의 그림>

남효온이 금강산을 유람한다는 말을 듣고 한 발 앞서 가서 높은 나무를 타고 올라가 절벽에 시를 지어 이렇게 썼다.

生先檀帝戊辰歲(생선단제무진세) / 단군이 즉위한 무진년(戊辰年) 보다 앞서 태어나서

眼及箕王號馬韓(안급기왕호마한) / 기자가 국호를 마한이라 한 걸 보았고

留與永郞遊水府(류여영랑유수부) / 영랑(永郞)과 함께 머무르며 수부(水府)를 유람하다가,

又牽春酒滯人間(우견춘주체인간) / 또 봄 술이 이끌어 인간 세상에 머물도다.

여기서 영랑은 신라 화랑의 이름이다. 그는 시를 다 쓰고 내려와서, 타고 올라갔던 나무를 베고 뿌리를 뽑아버렸다. 나중에 남효온이 그곳에 이르러, 올라갈 수 없는 절벽에 시가 쓰인 것을 보고,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날아다니는 신선(飛仙)이 지은 시”라고 생각하였다. 이유원(李裕元)이 지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실려 있다. 남효온은 홍유손을 고상하게 살면서 영리(榮利)를 추구하지 않는 ‘은군자(隱君子)’라고 칭찬하였으며, 그의 문학에 대해 평하기를, “문(文)은 칠원(漆園)과 같고, 시(詩)는 산곡(山谷)을 섭렵하였고, 재주는 공명(孔明, 제갈량諸葛亮)에 비기고 행실은 만천(曼倩, 동방삭東方朔)과 같았다.[爲人文如漆園(위인문여칠원) 詩涉山谷(시섭산곡) 才挾孔明(재협공명) 行如曼倩(행여만천)”라고 하였다. 여기서 칠원은 옻나무 숲 속에 살았던 고대의 장자(莊子)를 말하고, 산곡은 송(宋) 나라 시인 황정견(黃庭堅)의 호(號)이다. 때로는 촌로(村老)들과 어울려 숙식을 같이 하기도 하고 강론(講論)을 벌이기도 하였다. 서울 장안에 들어와서는 귀족은 찾지 않고 서민들과 어울려 지냈는데, 홍유손이 서울에 들어왔다 하면 의외로 귀족 학자들이 찾아와 따랐다. 홍유손이 강론을 펴면 사람들이 무수히 모여들었기에 집권층에서 볼 때는 불온 세력으로 제재의 대상이었다. 하루는 친하게 지내는 이름난 재상을 방문했는데, 재상이 매우 정성스럽게 대접하고 비단이불과 수놓은 요를 주며 묵게 하였다. 아침이 되어 홍유손이 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비단 이불 가운데에는 똥이 남겨져 있었단다.


<일러스트레이터 이규성>

시대적으로 볼 때, 영남학파의 조종(祖宗)인 김종직 문하에서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위(趙偉)·남효온 등 석학 거유(碩學巨儒)들이 무수히 배출되고, 이들 신진 사류(新進士類)들이 조정에 진출하자 훈구파(勳舊派)들이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이다. 1498년(연산군 4) 훈구파의 유자광(柳子光), 이극돈(李克墩) 무리가 김종직 제자 일파를 제거하고자 연산군에게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 일당이 실록에 기록하였다고 고해바쳐 연산군이 대로하여 신진 사류를 대거 숙청하는 무오사화(戊午士禍)를 일으켰다. 이 사화로 김종직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하고, 그 제자 및 그를 따르는 신진 사류 수십 명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갔다. 이때 홍유손은 벼슬을 하지 않고 있어서 처벌에서 제외되었다. 어느 날 유자광(柳子光)이 홍유손을 만나길 원했으나 홍유손이 거절하자 앙심을 품고, 죽림칠현이 백성들을 혹세무민 한다고 임금에게 고하여 홍유손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곳에서 11년간 종살이를 하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풀려나와 포천 지역에서 살았다. 중종(中宗)이 홍유손의 문장이 특출하다는 말을 듣고 별전(別殿)에서 시와 부를 짓게 하였는데, 그 문장이 절묘하여 탄상(歎賞)을 금치 못하였다 한다. 집이 가난하여 해어진 옷을 입고 걸어 다녔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장사에 몸소 흙을 운반하고 남을 시키지 않았다. 1510년(중종 5) 친지들의 권유로 진사시에 응하여 2등 16위로 합격하였다. 대과(大科)를 보라고 권하였으나 나이가 60이 넘었고 또한 벼슬에 뜻이 없어 응하지 않았다. 자유주의자인 그는 끝까지 자유로운 생활을 하며 찾아오는 벗들과 즐겁게 지냈다. 그는 신숙주(申叔舟)의 손자 신용개(申用漑)와도 오래도록 문묵(文墨)으로써 교제하였다.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 때 함경도관찰사였던 신용개의 아버지 신면(申㴐)이 아전의 밀고로 죽게 되자, 신용개는 그 아전에게 원수를 갚고자 하였는데, 홍유손은 신용개가 원수를 갚는 것을 돕기로 약속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는 신용개가 원수를 갚을 때 홍유손이 도왔다고 하였으나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북도(北道)로 가는 인편을 구하지 못하여 돌아왔다고 하였다.

<일러스트레이터 이규성>

홍유손은 독신으로 생활하다 73세 때인 1524년(중종 19) 조씨(趙氏) 여인을 부인으로 맞이하여 불정산 아래 오인포(五仁浦)에서 신혼 생활을 했다. 결혼 4년째 되던 해인 1528년(중종 23) 77세가 되던 해 아들을 낳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여 아들 이름을 홍지성이라 하였다. 중종(中宗) 24년 기축(1529)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으며, 문인인 참의(參議) 김헌윤(金憲胤)·도정(都正) 윤진(尹珍)·참판 김홍윤(金弘胤)·의정(議政) 이장길(李長吉) 등이 재정을 모아 양주(楊州) 불암산(佛巖山)에 장사 지냈다. 그의 <유사(遺事)>에서는 그가 나이 76세에 비로소 아내를 얻어 아들 하나를 낳았다고 하고, 또 다른 글에서는 99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늙어서 아들을 둘을 두었는데, 맏아들 홍지선(洪至善)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고, 둘째 아들 홍지성(洪至誠)이 아버지 학문을 계승하여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으므로, 홍지성만이 알려졌다. 홍지성은 훗날 ‘불정산인(佛頂山人)’이라 불리는 대학자가 되어, 그의 문하에서 수업한 자가 80여 명에 달하였다. 그는 선조(宣祖) 30년(1597)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왜적들이 다시 쳐들어오자, 나이 80여 세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수십여 명을 이끌고 금오평(金烏坪)에 이르러 적병을 무수히 죽이고 마침내 왜적에게 살해되었는데, 문인들이 시체를 거두니 얼굴빛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였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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