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없어졌지만 필자 금삿갓이 어릴 때에 보통 사람들은 새해 정초에는 토정비결(土亭秘訣)을 봐서 한 해의 신수(身數)를 보곤 했다. 그래도 아직도 사주(四柱)를 가지고 명리학(命理學) 사무실을 찾는 풍습은 남아있다. 정말 사주가 맞는 것인지, 미래를 예측 가능한 것인지 의문이 많다. 중국에는 <홍범(洪範)>이나 <초씨역림(焦氏易林)>·<연해자평(淵海子平)> 등 주역이나 오행에 관한 서적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명리학 서적은 조선시대 세조(世祖) 때, 서거정(徐居正)이 왕명을 받아서 <오행총괄(五行總括)>를 지은 것이 최초이다. 세조는 서거정보다 3살 위이지만 어릴 때 같이 자라면서 깊은 교분을 나눴다. 큰 피바람을 일으킨 것에 대한 반성인지 명리(明理)에 관심을 내비친 것이다.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도 유자(儒者)가 궁리(窮理)하는 일이니, 경이 가령(假令)을 지어서 올리라.”하니, 이때에 <오행총괄(五行總括)>을 지었다. 무신년(1488) 12월 24일(계축)의 일로 성종실록에 서거정의 졸기(卒記)로 실려 있는 내용이다. 세조가 아버지인 세종(世宗)의 묘를 옮기려고 고민할 때 서거정은 이렇게 말한다. “산수설(山水說) 즉 풍수(風水)는 후한(後漢) 때 비롯하였는데, 신은 믿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또 세상에서 천장(遷葬)하는 것은 복을 얻기를 희망하는 것인데, 이미 왕자(王者)로서 다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큰 일이므로 성상(聖上) 마음의 영단(英斷)에 있을 뿐이며, 신이 감히 억측으로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즉 풍수를 믿을 바가 못 된다고 아뢴 것이다. <필원잡기(筆苑雜記)>의 기록에 따르면, 또 한 번은 세조가 그에게 사주팔자 즉 녹명(祿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는 60 갑자(甲子)를 12 시진(時辰)에 대입하면 720수(數)가 되고, 이를 상호 제곱하면 518,400가지의 운세가 나온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인간 세상의 인구수가 수천만 명을 넘어 수억 명에 달하니 사주가 같은 사람이 도처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사는 곳도 다르고, 신분도 다르고, 빈부도 다르니 어찌 같은 사주라고 운명이 같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사주 명리서 즉 녹명지서(祿命之書)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했다.
한편 세조의 손자 성종도 사주팔자에 관심이 많았나 보다. 어느 날 그는 일관(日官) 또는 추길관(諏吉官)이라 부르는 관상감(觀象監)의 관리를 불러서 자기와 사주가 똑같은 사람을 전국에서 찾아서 궁궐에 데려오라고 밀명(密命)을 내렸다. 어명을 받은 신하가 온 나라를 샅샅이 뒤져본 결과, 성종과 사주가 똑같은 한 중년의 과부 여인을 데리고 왔다. 그 여인의 뛰어난 미모와 시냇물이 흐르는듯한 막힘이 없는 언변을 가져서 보통 여인과는 사뭇 달랐다. 그래서 살아온 내력을 소상히 아뢰도록 했다. “소인은 조상 대대로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머리가 총명하고 지혜가 많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버님께서는 소인을 유별나게 사랑해 주었사옵니다. 나이가 들자 아버님의 권유에 따라 인품이 고결한 선비와 결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남편이 급사하는 바람에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고 마는 지경에 이르렀사옵니다. 남정네의 정을 모르는 채 밤이면 남모르는 슬픔과 번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독수공방을 하다가도 낮이 되면 양반체면을 도외시하지 못하는 지라 주로 역사책을 탐독하며 세월을 보내고 있사옵니다.”라는 것이다. 성종은 자기와 사주가 같은데, 운명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하고 뭔가 속인다고 생각하여 이실직고(以實直告)하기를 엄명했다. 그러자 그녀가 실토했다. 부자는 거짓이고, 남의 집 종살이를 하다가 면천(免賤)이 되었고, 곧 남자를 만나 혼인을 했다. 워낙 음기가 세어 하룻밤에 한 번 잠자리로서는 결코 만족하지 못해 남편이 급사하여 과부가 되었단다. 그리고 지금도 남자 없이는 밤을 지새울 수 없어서 중국의 어느 황후가 남첩(男妾)을 수십 명 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도 몰래 열두세 명의 남첩을 두고 교대로 성생활을 한다고 고했다. 성종 임금도 이야기를 듣고 보니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성종의 사주는 음력 1457년 7월 30일이다. 생년은 정축(丁丑)·생월은 무신(戊申)·생일은 신묘(辛卯)·생시는 무술(戊戌)이다. 그녀가 말하는 종에서 면천이 되던 해인 1469년에 자신이 보위에 올랐고, 그녀가 과부가 되던 해인 1474년에 성종 자신도 원비(元妃)인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韓氏)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자신도 계비(繼妃) 제헌왕후(齊獻王后) 즉 폐비(廢妃) 윤씨(尹氏) 이후에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를 계비(繼妃)로 맞이하고, 많은 후궁들을 두어 총 12명의 부인에 16남 12녀를 두었다. 그 과부도 또한 비슷한 숫자의 남첩을 상대로 생활을 하고 있으니 관습과 제도상 드러나지는 못하지만 밤의 여왕으로서 손색이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다 들은 성종 임금도 크게 한바탕 웃고는 말했다. “그랬었구나. 남녀 간에 교접해서 정감을 나누며 재미를 보는 일에는 남자 중에 과인이 있고, 여자 중에는 네가 있었구나. 진정 보기 드문 희한한 일이로다!” 임금은 과부에게 많은 선물을 주어 보냈다. 믿거나 말거나 야사(野史)이다.
세조는 친구인 학자 서거정의 진언으로 사주팔자에 의지 하지 못하고, 나중에 불교에 의지한다. 국가의 시책(施策)인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을 도외시하고 현재 탑골공원에 원각사와 10층 석탑을 지었으나 등창(등瘡)이 나는 등 병으로 고생하다가 52세로 사망했다. 서거정은 유학자로서 명리학을 미신으로 여기며 배격한 것 같다. 한명회(韓明澮)는 칠삭둥이로 태어나서 조실부모하고 과거(科擧)로 출사도 못했다. 경덕궁 지기 출신으로 자기 손금 즉 수상(手相)이 나쁘다고 칼로 손금을 더 그어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여 수양대군을 세조로 등극시키고, 본인은 영의정 2회에 두 딸을 예종과 성종의 왕후로 보냈다. 물론 결국은 부관참시를 당했지만 손금을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문이다. 성종은 이런 야사로 미루어 보아 명리학을 신봉했을 수도 있다. 일설(一說)에 따르면 제21대 임금인 영조(英祖)의 사주는 ‘4 갑술(甲戌)’이라고 한다. 생년월일시가 모두 갑(甲戌)이라는 특이한 경우다. 그도 역시 전국에 령을 내려 자기와 사주가 똑같은 사람을 찾았더니, 강원도에 사는 여덟 아들을 둔 벌꿀을 치는 양봉농부였다고 한다. 술사들이 이 노인의 8 자식은 팔도이고 벌통의 벌은 수백만 백성이라고 둘러댔단다. 한 때 삼성그룹의 총수인 이병철 회장도 관상을 신봉하여 면접시험 때 관상가를 배석시켰다는 전설이 있다. 또 정치인들 또한 선거철이 되면 용한 점집이나 철학관 또는 신통력 있다는 절의 승려를 찾는다. 요즘 시내에 길을 가다 보면 과거와는 다르게 점집이나 철학관 같은 곳은 줄어든 대신 인터넷·유튜브 등으로 진화하여 더 번창하는 것 간다. 길거리에는 타로(Tarot) 점 등 서양 점성술을 하는 곳도 많이 번창하다. 국내의 점과 운세 앱의 시장 규모가 5년 새 3배나 성장했다는 통계도 있다. 미래가 불안한 시대에는 이들에 의존하는 경향이 심해지는 것이 인간이니 어쩔 수가 없지만 너무 과도한 신뢰나 의존은 자칫 구렁텅이에 바질 수도 있다. 정권차원에서 가짜 뉴스를 잡겠다고 난리를 치지만 인터넷이나 유튜브에 넘쳐나는 엉터리 점사나 운세 예측에 대한 단속이나 관리는 손 놓고 있는 것 같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조차 학교 앞 가게나 유튜브로 자신의 미래를 점치려고 하는 세상이 되면 정말 미래가 걱정된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