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성(姓)과 씨(氏)의 재미있는 이야기

by 금삿갓

일본의 성씨(姓氏) 종류가 한국이나 심지어(甚至於) 10억 인구의 중국보다 월등히 많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한국에는 인구 비례에 맞지 않게 김(金)·이(李)·박(朴)씨가 그렇게 많을까? 같은 동아시아 문화인데 좀 특이한 현상이다. 그 이유를 알자면 성(姓)과 씨(氏)의 유래를 알아야 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왕족이나 제후들은 성(姓)과 씨(氏)를 구분해서 사용했다. 요순(堯舜)의 시대를 보면 요(堯) 임금은 성(姓)이 이기(伊祁)이고 씨(氏)가 도당(陶唐)이다. 성은 그의 핏줄을 나타내는데 초기에는 모계혈통을 주로 이었다. 씨는 그의 고향이 산동성에 있던 질그릇을 만들던 도(陶)라는 지역을 나타내며 부계혈통을 나타냈다. 차츰 씨는 씨족이 근거지로 삼는 지역이나 직업을 대표하는 용어로 나타났다. 요즘으로 치면 성은 그야말로 성이고, 씨는 그 성의 본관(本貫)과 같은 것이다. 그러던 것이 춘추전국 시대 통일 진(秦) 나라를 지나 한 대(漢代)에 와서 성씨가 통합이 되어 오늘날의 형태로 굳어진 것이다. 진시황(秦始皇)도 성은 영(嬴), 씨는 조(趙)였다.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경우는 성(姓)만 있고 씨(氏)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성씨가 통합되었거나, 그가 출신이 낮아서 처음부터 성씨를 구분해서 가지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성씨는 처음에 구분되어 사용하다가 이렇게 통합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의 경우 글자가 같은 성이라도 본관이 다르면 씨족이 다른 경우가 많은데, 고대 중국의 제도가 면면히 이어져 온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나 일본도 근대시대 이전까지는 사대부와 사무라이 이상의 높은 신분의 사람들만 성이 있었다. 일반 백성이나 천민 노비들은 성을 가질 수가 없었다. 물론 양반이나 귀족으로서 성을 가졌다가 후에 몰락을 해도 성을 그대로 사용하는 것은 가능했다.

인구 10억이 넘는 중국 보다 일본인의 성씨 숫자가 많은 이유를 알아보자. 재미있는 우스개 이야기가 있다.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통일을 하기까지 수세기 동안 전쟁을 하는 전국(戰國) 시대여서 남자들이 많이 죽었다. 남녀성비가 맞지 않자, 왕명(王命)으로 모든 여자들에게 외출할 때 등에 담요 같은 걸 허리에 매고 아랫도리 속옷은 절대 입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가 어디에서건 남자가 원하면 그 자리에서 언제든지 아이를 만들게 했다. 이것이 일본 여인의 전통 의상인 기모노의 유래이며, 최근 까지도 기모노를 입을 땐 팬티를 입지 않는 풍습(風習)이 전해지고 있다. 그 덕분에 운이 좋아 전장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아무 여자하고 하고 싶은 마음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깃발을 꽂는 행운(幸運)을 얻었다. 그 결과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애가 수두룩 태어났는데 이름을 지을 때 할 수 없이 애를 만든 장소(場所)를 성으로 하여 작명하였다. 다나카(田中, 밭에서)·마쓰시다(松下, 솔 밑)·야마모토(山本, 산속)·다케다(竹田, 대나무밭) 등으로 다양한 일본인들의 성(姓)씨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세계에서 성씨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일본이다. 그냥 우스개 이야기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성씨는 <중화성씨대사전(中華姓氏大辞典)>에 따르면 11,969개라고 한다. 이중 한 글자 성이 5,313개, 복성(複姓)인 두 글자가 4,311개, 세 글자 이상이 2,345개다. 그런데 지금 사용되는 성은 6,000여 개라고 한다. 그중 가장 인구가 많은 순으로 왕(王)과 이(李)가 1~2위를 다투고, 다음이 장(張), 유(劉), 진(陳), 양(楊) 순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처럼 대성(大姓)인 김(金)과 이(李)로의 쏠림이 크지 않다. 일본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고대에서 명치유신(明治維新) 때까지는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 사무라이 등의 고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중국과 비슷하게 여러 개의 성씨를 가지기도 했다. 크게 분류하면 부계혈통을 이어가는 우지(氏)가 원래의 성으로 이들만이 조정의 간부로 등용되었고, 천황이 우지를 하사하기도 했는데 이것을 가바네(姓)으로 부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미나모토(源)·다이라(平)·후지와라(藤原) 등이다. 헤이안 시대에 와서 인구가 많아지고 관료도 많아지자 우지와는 별개로 가족 집단을 나타내는 묘우지(苗字)를 만들어서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우지와 가바네는 성의 기능보다 관직의 품계와 그 원류를 나타내는 뜻으로 변화되고 대부분 묘우지를 사용하게 된다. 묘우지를 사용할 때 혈통보다는 자신들의 근거지, 직업 등을 나타내는 말을 주로 차용(借用)했다. 그러다 보니 비슷한 것이 많아지자 더욱 세분화된 다양한 용어들을 활용하게 된 것이다.

일본도 메이지유신이 일어나고,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국가 정책에 반영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그래서 1870년에 <평민묘자허용령(平民苗字許容令)>을 발표하여 평민들이 성과 이름을 가지도록 했으나 실효성이 낮았다. 그래서 아예 1875년에 <묘자필칭령(苗字必稱令)>을 시행하여 성을 가질 것을 강제하였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수천만명의 평민들이 일시적으로 성을 만들어 등록하는 과정에서 엄청 다양한 성씨들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일본지도백과≫라는 책에 따르면 미국 성씨는 150만 개, 일본은 30만 개라고 한다. 그중 사토(佐藤)와 스즈키(鈴木)가 190만 명 정도로 가장 많다. 일억이 넘는 인구에 비해 그리 많은 비중이 아니다. 현재는 많이 통합되어 17만 개 정도를 사용하며, 희귀하거나 특이한 성씨도 매우 많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처음 만나서 통성명(通姓名)을 하거나 명함을 주고받을 때 서양인들처럼 서로 이름을 읽는 발음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특히 눈에 띄는 재미난 성씨를 보면 이누쿠소(犬糞, 개똥)씨, 미미즈카(耳塚, 귀무덤)씨, 미다라이(御手洗, 화장실)씨, 하나게(鼻毛, 코털)씨, 히만(肥, 비만)씨, 제츠(舌, 혓바닥)씨, 이치엔(一円, 일엔)씨, 오니(鬼, 도깨비), 우시쿠소(牛糞, 소똥) 등이 있다. 니노마에(一)라는 성도 있는데, 한 일(一)로 쓰고 이치(1)라고 읽지 않고 2(二, 니) 의(の, 노) 앞(前, 마에)으로 읽는다. 야마나시(月見里)라는 성이 있는데, 한자의 발음이 얼토당토 하지 않다. 추리력이 좋아야 한다. 산(山, 야마)이 없어서(無, 나시) 달이 보이는 마을이다(月見里). 월견리가 아니고 산이 없다는 야마나시로 성을 쓴다. 날짜를 성으로 쓰는 사람들도 있다. 와타누키(四月一日 / 四月朔日)라는 성이다. 4월 1일이 되면 겨울이불에서 ‘솜을 뺀다(와타누키)’라고 하여 와타누키라고 읽는다. 호즈미(八月一日)라는 성도 날짜이다. 8월 1일이 되면 벼가 새로운 이삭(穗, 호)을 쌓는다(積, 츠미)라고 하여 호즈미라고 한다. 다카나시(小鳥遊)라는 성도 있는데, 매를 일본어로 鷹(다카)라고 한다. 매가 없으면 작은 새들이 맘 놓고 날아다닐 수 있다는 뜻으로 たかなし(다카나시)라고 읽는다고 한다. 일본도 원래 여성은 본인의 성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1898년 민법을 개정하여 서양처럼 부부동성제(夫婦同姓制)를 채택했다. 서양처럼 남편의 성을 일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합의로 둘 중에 하나를 택하여 쓸 수 있다. 이 제도는 백년해로하면 큰 문제가 없지만 이혼을 하거나 재혼을 할 경우 복잡한 문제가 생긴다. 헌법 소원을 제기했으나 일본 대법원은 합헌으로 판결했다. 그런데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 여성총리가 집정하자 공식적으로는 부부 동성이지만, 여성의 성을 운전면허증이나 은행거래 시에 병용할 수 있는 제도로 법을 개정하려고 한다. 참고로 다카이치는 본인이 여성 정치인으로 성공해서 그런지 남편이 부인의 성으로 따랐다.

그럼 우리나라의 김씨, 이씨가 그렇게 많은 이유를 알아보자. 우리나라도 주선 말기에 개혁의 바람이 불었고,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면서 많은 제도를 혁신하게 된다. 그 시절 1909년 3월에 법률 제8호로 반포된 민적법(民籍法)에 따라 모든 사람은 성과 본을 갖추어 등록하도록 하였다. 이 법은 호적을 통해 가족 단위의 신분관계를 명확히 하고, 국가가 호구(戶口, 가구)를 파악·관리하기 위한 행정적 제도였다. 조선시대에는 인구수를 조사·파악하고 신분을 공시하는 제도로서는 식년호적제도(式年戶籍制度)와 이를 보완하는 인보정장법(隣保正長法)·호패법(號牌法)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제도는 부역(賦役)과 징세(徵稅)의 행정 편의를 위한 것으로서, 백성의 모든 가족적 신분 변동을 반영하지 못하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일본의 민법과 호적법의 내용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이 법의 공포와 동시에 내무대신의 훈령(訓令)으로 각도 관찰사들에게 이 법의 취지를 알려 시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모든 가구는 호적 등록을 하고, 가족적 신분의 발생·변동·소멸, 즉 출생·사망·호주 변경·혼인·이혼·양자·파양·분가·일가 창립·입가(入家)·폐가·폐절가 재흥(廢絶家再興)·부적(附籍)·이거(移去)·개명(改名)은 호주가 일이 일어난 날로부터 10일 안에 본적지의 관할 면이나 경찰서에 신고 등록하도록 규정하였다. 벌칙도 엄하여, 신고를 게을리 한 자는 50대 이하의 태형(笞刑) 또는 5원(圓) 이하의 벌금에 처하고, 거짓 신고는 6개월 이하의 징역이나 태형 또는 1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했다. 정말 청천 하늘에 날벼락같은 제도가 출현한 것이다. 그런데 성이 없던 양민이나 천민·노비 등은 성과 본관을 만들어야 했다. 당시 글자도 모르고 출신 내력도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호적 등록을 스스로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가내노비·외거노비(外居奴婢)·소작인 등은 대부분 주인집의 성씨와 본관을 따라서 호적을 등록하였고, 일반 천민이나 평민들은 신고를 대행해 주는 사람이나 신고를 받아주던 관료들이 생각나는 데로 성과 본관을 부여해 주다 보니 김이박 성씨 위주로 편중되게 된 것이다. 물론 김이박 성씨가 신라시대부터의 오래된 성씨라서 인구수가 많을 수는 있으나, 삼국시대 때부터 있던 다른 성씨(설, 손, 고, 최, 왕 등)와 비교해도 너무나 많은 것은 바로 일제(一齊) 등록 과정에서 편중 등록된 이유일 수밖에 없다. 이 제도는 일제 강점기에 시행된 <조선호적령>에 대치되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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